고인돌 문화와 석굴(石窟) 문화의 관련성 시론-24(요하문명)
이제까지 인류 문명이 발생한 지역을 세계 4대 문명이라고 일컬어 왔다. 즉, 나일강 유역에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 유역에 인더스 문명, 그리고 황하 유역에 황하 문명 등 4대 문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상기한 세계 4대 문명은 대략 서기전 4,000~3,000년 경에 인류 문명이 발생한 지역을 의미하는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세계 문명의 발생지
그런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 4대 문명외에 내몽골자치주 적봉시와 요령성 조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요하 유역에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06년부터 1954년에 이르는 시기에 내몽골자치주 적봉시 주변 지역에서 다량의 옥기와 돌로 쌓은 적석총들이 발견되었는데, 적봉시에 있는 홍산의 이름을 따서 '홍산문명'이라고 명명되었으며, 서기전 4,700~2,900년 경의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추정하였다.
70년대에 들어와서 1973년에 요령성 심양시에서 40여채의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석기·도기·옥기·골각기·나무 조각품·정제된 석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어서 1978년에 추가 발굴한 결과, 7,200년 전 나무 조각품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심양 지역에서 발굴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목조 조각품 이라고 한다. 그 지역 기숙사 명칭을 따서 '신락(新樂)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80년대 들어서서 내몽골자치주 적봉시와 요령성 조양시 일대에 대한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1983년에 요령성 능원시 우하량에서 홍산문화 시기에 해당하는 신석기 유적으로서 여신묘, 적석총, 제단 등이 발굴되었으며, 부장품으로 썼던 다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또 이어서 내몽골자치주 적봉시 동쪽 오한기(敖汉旗)에서 홍산문명의 전신으로 추정할 수 있는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대략 서기전 6,200~5,40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흥륭와(興隆窪) 문하'라고 명명되었다.
오한기(敖汉旗)에서 발굴된 유적으로는 집단 주거지로서 약 120채의 주거지가 계획적으로 열을 지어 있었고, 각 주거지 중앙에 부뚜막이 있었다. 분묘 부장품으로서 비취로 만든 구슬,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운 토기 등이 발굴되었는데, 용을 형상화 한 유적으로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 오한기(敖汉旗) 동쪽 인근지역에서 대략 서기전 5,400~4,9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조보구(趙寶溝) 문화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그 남서쪽 요령성 부신시에서 대략 서기전 6,000~5,2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사해(査海) 문화가 계속해서 발굴되었다.
한편, 홍산문화의 이후 문화로서 대략 서기전 1,000~600년 경으로 추정되는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와 대략 서기전 2,200~1,600년 경으로 추정하는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가 현재의 내몽골자치주 적봉시 주변 인근지역에서 발굴되었는데, 청동기시대 문화에 해당한다.
즉, 내몽골자치주 적봉시와 요령성 조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요하 유역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이제까지 알려진 세계 4대 문명과 비교해 볼 때, 시기와 내용, 규모 등에서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홍산문화 등은 단순히 시대별 유적지 차원이 아니라 이 일대를 고대 문명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어 '요하문명'으로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요하문명에서 발굴된 여러가지 유적과 유물 중에서 기존에 알려져 있는 세계 4대 문명과 다른 특징 중에 옥기를 고려하면, 옥기를 캔 광산이 현재의 요령성 안산(鞍山)시 수암(岫岩)현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수암옥(岫岩玉)은 마그네슘 성질의 탄산암(碳酸岩)이 변질한 대리석 중에서 생성되는데, 외관으로 볼 때, 청녹, 황녹, 담백색을 띄고 반투명하다. 연마 후에는 파라핀 표면과 흡사한 광택을 내며, 굳기는 3.5~5정도이다.
신석기 시대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옥은 수암(岫岩)현 세옥구(细玉沟)에서 채집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곳에서 캔 옥돌은 노옥(老玉)이라고 속칭하는 투산석(透閃石) 연옥(軟玉)이다. 은(殷) 대의 묘에서 출토한 옥기 중 다수가 수암와구(岫岩瓦沟) 광에서 채집한 수암옥과 비슷하다고 한다. 수암와구(岫岩瓦沟) 광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수암와구 광산의 위치와 옥기 및 광산 기술의 전래방향
와구광의 수암옥은 채집 역사가 길고 매장량도 풍부하며, 현재까지도 중국의 주요 옥 생산광으로 전국 수암옥 생산량의 6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즉, 홍산문화(서기전 4,700~2,900년 경)와 흥륭와 문화(서기전 6,200~5,400년 경) 등에서 출토된 옥기는 옥광산에서 캔 옥돌로 만들어졌는데, 옥을 캐고 가공하는 문화의 연혁이 서기전 6,0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락 문하(서기전 7,200년 경)에서 발굴된 옥기를 고려하면, 광산을 경영하고 옥기를 가듬는 기술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옥기를 다듬고 패용하는 문화가 현재의 요령성에서부터 남쪽으로 황하와 장강을 건너 홍콩과 베트남 지역까지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옥기 외에도 광산을 경영하고 석굴(石窟을)파는 기술도 남쪽과 서남쪽으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북위가 태무제(423~451년)의 폐불이후, 문성제(文成帝, 452~465년) 시기 460년(평화 원년) 경에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에 있는 운강석굴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위의 도읍지 평성(平城)과 대(代)의 본래 위치가 현재의 산서성 임분(臨汾)시와 심원현 주변지역이었으며, 부여가 현재의 산서성 태원(太原)시 주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북위가 460년경에 부여를 점령하고 있지 않은 이상 북위가 운강석굴을 축조하였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여는 494년에 고구려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즉, 앞서 「고인돌 문화와 석굴(石窟) 문화의 관련성 시론-6」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부여 또는 대동시 지역에 살고 있었던 흑수말갈(여진족)이 운강석굴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광산을 경영하고 석굴(石窟)을 파는 기술의 연혁은 서기전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므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하문명에서 남쪽으로 황하문명으로 기술과 문명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하문명이 서쪽으로 전래되어 현재의 대동시 운강석굴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