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보다 더 유명한 절, 향일庵이 있는 금오山
전남 여수시 돌산읍 금오산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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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 부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 날 으로 가자,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 날 으로 가자.”
소박한 반주에 맞춰 남녀보컬이 조곤조곤 속삭이듯 부르는 유자차란 노래다.
모처럼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데 화창해진 거리를 걸으면서 들으면
한결 기분 좋은 노래다.
정말 날씨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걱정할 정도로 완연한 봄날이 너무 싱그럽다.
봄빛, 따가운 햇살에 얼부푼 황토밭이 수줍은 새색시 얼굴 같고,
푸른 산과 하늘이 둥글게 내려앉은 무논배미 아직은 한가롭다.
비닐하우스속의 야들야들하고 가녀린 연둣빛 미나리 소곤대는 소리 좀 들어보렴,
졸졸졸 시냇가엔 물이끼 잔뜩 낀 검푸른 조약돌이 있고,
춘경(春耕)을 준비하는 논두렁 밭두렁에 활활 타오르는 희고 푸른 연기 자욱하다,
밤새 물안개로 우려낸 순천만의 잿빛새벽을 걸으면서.
물끄러미 세상을 바라보는 갓 난 송아지의 맑고 그윽한 눈빛을 보아라,
산과 들엔 봄빛가득하고 울긋불긋 꽃빛으로 물든 세상이여,
봄은 마치 살찐 볼을 만지는 것 같다.
입안에 쑥 냄새가 돌고 옷은 가볍고 걸음은 경쾌하다.
자연에게만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에서 먼저 그것이 돌아온다.
농촌들길과 도심길거리, 사람 사는 동네에,
그리하여 이 세상에 봄볕 그득할 때까지. 봄은 돌아오고 있는데 오늘은 먼데서 온갖
고난을 이기고 돌아오는 봄을 마중 나가자.
여수 돌산도에 있는 금오산(金鰲山)을 다녀왔다.
금오산은 전남 여수시 돌산읍에 있는 山으로 높이는 323m이다.
여수반도에서 돌산대교로 이어진 전남 남단의 돌산島에는 여수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日出풍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랑하는 향일庵이 있는 곳이다.
이는 해를 향해있다는 뜻으로 금오산에 있는 작은 암자지만 山보다 더 유명하다.
향일庵은 낙산사의 홍연庵, 남해 금산보리庵, 강화도 보문庵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처로 금 바위전설이 얽혀 있다.
풍수지리상 경전을 등에 모시고 바다 속으로 막 잠수해 들어가는 금 거북이의
형상이라는데 대웅전 앞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봉우리가 머리이고,
향일庵이 서 있는 곳이 거북의 몸체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때 거북 “龜(구)”자를 써서 영구庵이라 부른 적이 있었고 현재도 영구庵이란 편액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한데, 이러한 전설을 더욱 그럴 듯하게 꾸며주는 것이 이 일대
바위무늬이고 바위마다 하나같이 거북의 등 모양을 닮은 문양이 나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우리회장님이 뿔났다.
관여할 기회가 있어서 한번 살펴본 산악회살림은 내핍과 절약이 없으면 도저히 운영이
불가능한 열악한 재정이었다.
특히 양동매씨들을 주축으로 하는 여성회원들의 하산酒 지원이 없으면 당장 운영이
불가능한 산악회살림이었다.
이런 산악회를 아무 탈 없이 4년여 이끌어온 회장님과 짠순이소리를 들어가면서 어렵게
뒷바라지를 해준 총무님의 노고를 우리는 알아야하고 고맙게 생각해야한다.
대화와 소통부족에서 오는 작은 오해가 산악회를 운영하느라 노심초사 애쓰고 있는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려 이에 대한 섭섭함과 불쾌감을 토로한 것이다.
다만 작은 액수라도 회비는 공금이니까 형식을 갖춘 출납기록이었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금광도 이제는 현실적으로 변해야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볼 때다.
나를 보호해준 껍질을 깨는 아픔과 고통이 있다 해서 미래의 불안에 주저하다보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어미닭은 다만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작은 도움만 줄 뿐,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 자신이라는 “줄탁동기”라는 말이 있다.
오늘산행은 율림치 버스정류장에서 출발
금오산 -250峰 -향일庵 -황토방가든 -공단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약 3시간코스였다.
시산제관계로 짧은 산행코스를 잡았다는 산행이사 설명이 있었다.
“유세차, 신묘年 2월25일 금광산악회회장은 회원 및 선배들과 함께 아름다운
금오산에서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천지신명과 금오산 산신님께 고하나니---”
율림치주차장에서 금광산악회시산제를 지냈다.
시산제는 글자 그대로 산행을 시작하기위한 일상이나 산행에 안전을 다짐하고
기원하는 제사로 산제는 산행을 하는 모임의 큰 행사이고 축제의 하나다.
그러므로 산제의 장소는 높은 산의 정상보다는 낮은 산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매년 같은 장소에서 대부분 지내며 산행 후 또는 산행 전에 제례를 지낸다.
제례는 보통 유교식이고 제수물품은 돼지머리, 북어, 삼색시루떡, 과일, 초, 향,
탁주가 기본이다.
오늘 시산제의 제물을 조 정임여성회원이 혼자 준비했다는데 입이 열 개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푸짐한 시루떡에 윤기 나는 돼지머리, 막걸리, 하산酒까지 30만원이 넘는 비용을
산악회를 위해 부담해주었다.
아내와 양동시장에 갈 때마다 가게 옆길에서 체소를 다듬던 매씨,
타임머신을 타고 60년의 시간을 되돌아가 열 살짜리 소년이 고향을 찾아간 것
같았던 시골장터 같은 시장에서 소주한잔 사드리면 행복하게 웃던 그런 매씨다.
시산제에 참여한 많은 회원들도 산악회발전을 위해 65만원의 성금을 기탁해주었다.
베푸는 자여! 복 받을지어다.
시산제가 끝나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시간은 열두시가 넘었다.
한잔 술에 취한 회원들은 산행버스를 타고 향일庵으로 향했고 우리는 산행을 했다.
바다는 해무(海霧) 때문에 근거리에 있는 섬들만 겨우 보였다.
마치 섬 최남단 끝머리에다 아름다운 기암(奇巖)덩어리를 솟구쳐놓은 것 같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속으로 파고들어간 돌산도의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山보다는 일출이 유명한 향일庵으로 더 잘 알려진 산이었다.
산세는 그리 험하지 않았고 완연한 봄 날씨 속에서 산행은 가볍게 이루어졌다.
왼쪽으로는 항구가,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보였지만 멀리는 보이지 않았다.
요즘은 어느 산이나 안전계단은 필수시설이고 얼마 가지 않아 널찍한 암반을 이룬
정상에 올랐으며 암자방향으로 비탈길을 내려 가다보면 시야가 확 트이는 바위지대
위에 서게 되는데 촛대바위, 기둥바위 등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짙푸른 바다에
서 있었다.
향일庵에서 백미를 이루는 장관(壯觀)은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 앞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경이었다.
정상에서 관음전 뒷산 내림 길은 30분 거리로 향일庵 일대의 절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암자 뒤쪽에는 어른이 흔들거나, 아이들이 흔들거나 똑같이 흔들리는 바위가 있는데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조금 작은 이 바위는 흡사 경전을 펼친 모습이라 하며 한 번
흔들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이렇게 뛰어난 향일庵 일원의 경관을 보호하기위해 1984년 2월 29일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의 높이와는 별개로 이 산을 명산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향일庵은 2009년 12월 20일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날 화재로 대웅전과 문화재 등이 모두 불에 탔으며 宗務실, 종각 등 사찰건물
8동중 3동이 전소됐으나 지금은 복원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우리의 귀한 문화재인 남대문도 불타고, 낙산사도 불타고, 향일庵도 불타고---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산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있는 향일庵은
왼쪽에는 중생(衆生)이 서원에 감응하였다는 감응도,
앞바다에는 부처가 머물렀다는 세존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화현하였다는 미타도가 있었다.
조선시대 1713년(숙종: 39년)에 당시 돌산주민들이 논과 밭 52두락을 헌납한지 3년
뒤인 1715년에 인묵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향일庵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향일庵이라는 명칭은 금오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울창한 동백이 남해의 일출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오동도에 들렸으며 왕복요금 천원인 관광열차도 탔다.
하산주로 맛있는 전복죽을 먹었다.
(2011년 2월 25일)
첫댓글 항상 후기를 써주시어 추억을 되살려거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