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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의도(Cetanā)에 대해 알아보면서 인용한 『쩨따시까 - 우리 마음 지켜보기』 책에는 cetanā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지만 이와 별개로 참고해 볼만한 내용이 많았다.
아래에 그 내용을 구분하여 소개한다.
1. "하루 가운데 유익한 행위를 하는 순간은 아주 적고 해로운 마음이 아주 많이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 해로운 의도와 유익한 의도의 힘은 강합니다. 하지만 그 힘에는 거친 것도 있고 미세한 것도 있습니다. 만약 힘이 아주 미약하다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의 과정, 즉 업의 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면 거기에는 탐욕에 뿌리한 마음과 함께 하는 해로운 의도가 있습니다. 탐욕에 뿌리한 마음이 해로운 행위의 길에 들어가도록 재촉하지는 않는다 하여도 이것은 해로운 것이지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시나 지계 혹은 명상의 마음과 같은 유익한 마음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보시나 지계 혹은 명상을 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해로운 말과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돌이켜 보면 하루 가운데 유익한 행위를 하는 순간은 아주 적고 해로운 마음이 아주 많이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취할 때, 즉 먹고 마시고 이야기 할 때에도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심지어 웃을 때에도 탐욕에 뿌리한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려는 의도가 강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한 해로운 마음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해로운 마음들이 사실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욕을 하는 경우, 해로움의 정도는 거칩니다. 그 순간에 해로운 의도가 말을 통해 해로운 업의 길을 걷도록 자극합니다. 해로운 의도는 함께 하는 다른 담마(현상)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해로운 의도나 업은 누적되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마음들은 일어나서는 사라지지만 다른 마음들에 의하여 이어지는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이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음의 연속이기 때문에 해롭고 유익한 의도나 업들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누적되어 가고 결국에는 과보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행위를 촉발하는 해로운 의도(혹은 해로운 업)는 악처에 태어나게 만드는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감관을 통해 불쾌한 대상을 경험하는 과보의 마음 즉 해로운 과보를 만들어 냅니다.
...큰 동물을 죽이는 것은 작은 동물을 죽일 때보다도 업의 해로움이 더욱 큽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짐승을 죽이는 것보다도 더욱 해롭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 않으면, 그 죄는 완성된 과정이라고 보지 않는다. 불화가 생길 때만이 이것은 완성된다." 해로운 업의 길이 '완결된 행위'(필자 주 - 확정된 업의 길, niyata-kamma-patha)가 되면 불행한 곳에 다시 태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경에 나오는 '아주 적은 과보'는 그 생에서 경험하는 불쾌한 결과들입니다.
수행자들이여, 살생을 추구하고, 반복하고, 살생하는 횟수가 많아지면 지옥에 떨어진다. 동물의 태에 들어간다. 아귀로 태어난다. 살생의 과보 중에서 아주 적은 과보는 자기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도둑질을 하고, 추구하면, ... 지옥에 떨어진다. 아주 사소한 과보는 재산을 잃게 된다.
수행자들이여,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면, ... 지옥에 떨어진다. 아주 사소한 과보는 그 사람에게 적대감과 성내는 마음이 생긴다.
수행자들이여, 거짓말을 하고, 추구하면, ... 지옥에 떨어진다. 아주 사소한 과보는 명예가 훼손되고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게 된다.
수행자들이여, 뒤에서 남을 헐뜯고, 추구하면, ... 지옥에 떨어진다. 아주 사소한 과보는 우정이 깨진다.
수행자들이여, 욕설을 하고, 추구하면, ... 지옥에 떨어진다. 아주 사소한 과보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진다.
수행자들이여, 입에 발린 말, 아첨을 하고, 추구하면, ... 지옥에 떨어진다. 아주 사소한 과보는 그 사람이 한 말은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수행자들이여, 술을 마시고, 추구하고, 반복하며, 횟수가 늘어나면 지옥에 떨어진다. 동물의 태에 든다, 아귀계에 태어난다. 아주 사소한 과보는 정신만 어지러워진다. (정신착란)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 우리 마음 지켜보기』 P.78~83,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우 실라 사야도께서 이전에 설하신 법문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선업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항상 불선업이 생긴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합니다. 선업이 없을 때는 불선업입니다. 진짜 가깝게 있습니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선과 불선은 가깝게 있습니다. 선업이 아니면 불선업입니다.
이 비구의 경험담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이 비구가 고향에 가서 수행 지도를 할 때, 이 비구의 어머니는 이 비구에게 수행 지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 비구의 할머니는 나이가 80세에 가까웠는데 젊었을 때부터 불자로서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특별하게 불선업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계셨기에, 이 비구가 ‘수행을 하세요.’라고 했을 때, 이 비구에게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할머니에게 “항상 선업을 생각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항상은 못합니다.”라고 대답을 해서, 이 비구가 “항상 선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업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는 항상 불선업이 생깁니다.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 우 실라 사야도, 『대념처경』 법문 중
아비담마에 따르면 욕계 중생의 경우 평상시 일으키는 마음은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 둘 뿐이다.
보시나 지계, 명상(=수행)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악처의 과보나 불쾌한 대상의 과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보시, 지계, 명상을 하고 있다면 행복한 곳에 태어나는 과보나 즐거운 대상의 과보를 만들어내고 있다.
2. "유익한 업(kusala)에는 보시와 지계 그리고 명상이 있습니다."
유익한 업의 길에 들어서면 유익한 의도가 유익한 행위를 하게 합니다. 이 의도는 함께 하는 다른 담마들의 과업을 조정합니다. 유익한 의도는 후에 행복한 곳에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생에서도 즐거운 형태의 과보를 받게 만듭니다.
유익한 업(kusala)에는 보시와 지계 그리고 명상이 있습니다. 보시에는 현물 말고도 다른 형태의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이들에 대한 감사도 보시이고(정확히 표현하면 선업의 의도로 다른 이들이 회향하여 나눠준 공덕의 몫을 사두!(좋다)라고 화답하며 기뻐하는 것이 보시이다. 그리고 회향하지는 않더라도 남의 공덕인 선업을 보고 기뻐하는 것도 역시 보시이다(상기띠띠까) - 역자), 자기의 공덕을 남에게 회향하는 것도 보시입니다. 회향이란 자기의 공덕을 남과 공유하는 것으로 자기가 행한 유익한 행위를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남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유익한 마음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도 보시의 경우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수행자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살생을 포기하고 살생을 하지 않는다. 살생을 하지 않음으로 성스러운 제자는 중생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공포로부터의 자유, 적대감으로부터의 자유와 학대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중생들에게 공포, 적대감과 학대로부터의 자유를 줌으로써 그 자신은 헤아릴 수 없는 공포로부터의 자유, 적대감으로부터의 자유와 학대로부터의 자유를 즐긴다.
게다가 수행자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주지 않는 것은 갖지 않으며, 잘못된 성행위를 하지 않으며 ... 잘못된 말을 하지 않으며, 취하게 하는 마실거리와 부주의의 원인이 되는 마약을 포기하고 그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는다. 취하게 하는 마실거리와 마약을 하지 않음으로 성스러운 제자는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에게 공포로부터의 자유, 적대감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학대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에게 공포, 적대감 그리고 학대로부터의 자유를 줌으로써 그 자신도 공포로부터의 자유, 적대감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학대로부터의 자유를 즐긴다.
우리가 악의가 있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계라는 것은 몸이나 말로써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에는 악의를 가진 행위를 자제하는 것 이외의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이러한 유익한 마음들도 자아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일어나기 위한 바른 조건을 만나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유익한 마음의 뒤를 이어 해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선한 의도는 사라져 갑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은 일어나기 위한 바른 조건들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유익하고 해로운 업을 습관처럼 누적하여 왔습니다. 유익한 업을 짓느냐 아니면 해로운 업을 짓느냐는 이러한 조건들에 의존합니다.
사념처를 닦지 않는다면 계를 지키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청정도론 계품에는 감각기관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각기관을 보호하는 것은 계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마음챙김을 통해 형상을 '사물'이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눈의 감성에 부딪친 물질(rūpa)로 안다면 눈의 문은 보호된 것입니다. 이 순간에는 형상에 대한 취착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과 같은 해로움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보이는 것에 몰입하게 되면 그것에 취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각의 문에 마음을 챙기면 보호가 되고 감각들에 대하여 절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마(nāma)와 루빠(rūpa)에 대한 마음챙김은 계에 해당합니다.
유익한 업인 명상에는 담마를 듣고 공부함, 담마를 가르침, 고요함을 닦는 사마타 그리고 실재들에 대한 바른 통찰지를 개발하는 위빳사나가 포함됩니다. 바른 통찰지의 개발은 어리석음을 제거시켜주므로 유익한 업 중에서 가장 수승한 업입니다. 어리석음이 완전히 제거되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조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고 죽어야 하는 윤회의 싸이클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여러 유익한 업과 해로운 업들을 '누적'시켜 왔습니다. 그것들은 일어나기 위한 바른 조건을 만나면 해당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습관은 누적됩니다. 탐욕에 뿌리한 마음도 탐욕이라는 습관 때문에 누적이 됩니다. 이 누적된 습관은 또 다시 탐욕을 일으키는 조건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탐욕을 수없이 누적시켜 왔으므로 취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누적은 해로운 습관만이 아니라 유익한 버릇들도 누적이 됩니다.
지금 나타난 실재들에 대하여 바로 마음챙김을 한다면 이것은 나중에 또 다른 마음챙김을 하게 만드는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마음챙김보다는 탐욕의 마음이 일어나기가 쉽지만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챙겨 나간다면 마음챙김의 어려움은 조금씩 적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습관처럼 누적해 가는 버릇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미래의 생에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위의 자따까에 나온 탐욕스러운 수행승과 화를 잘 내는 수행승도 역시 마음챙김을 하고 지혜를 닦아왔기 때문에 붓다의 말씀 끝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때 붓다께서 설하신 법문은 그들에게는 아나함이 되기 위한 바른 조건이 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하고 있는 행동이 과거의 생으로부터 누적되어온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앞으로는 이러한 행동을 조금씩 덜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실재들은 모두 조건지어진 것들입니다. 보시를 하는 것도, 과거 생에서 보시를 행한 것에 의하여 조건지어진 것으로 이것은 '내가 하는 보시'가 아닙니다. 화를 내는 것도 과거 생부터 화를 내온 것에 의하여 조건지어진 것으로 '내가 내는 화'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유익한 마음을 내라고 강요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익한 마음을 내게 하는 조건들을 갖추어 가면 앞으로는 유익한 마음을 보다 자주 내게 될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 유익한 마음을 일어나게 하려면 담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담마를 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과의 교류가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듣고 사유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순간에 나타나고 있는 실재에 대하여 마음을 챙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익한 업을 짓기를 원한다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익한 과보를 얻는 것이 당신의 목표입니까? 업의 법칙은 자연법칙이기 때문에 유익한 업은 행복이라는 과보를 만듭니다. 하지만 좋은 곳에 태어나는 행복한 과보를 위하여 유익한 업을 짓는다면, 거기에는 취착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마음의 오염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유익한 행위를 하게 되면 마음은 보다 순수해집니다. 오염들을 제거하는 데에서 오는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은 아주 짧기 때문에 보시나 지계 혹은 명상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팔정도를 닦는다면 모든 오염들을 제거하고 청정하게 될 것입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 우리 마음 지켜보기』 P.83~91,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행복한 곳, 즐거운 대상의 과보를 불러오는 보시, 지계, 명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보시
① 금전이나 현물을 베풀거나 봉사함
② 타인의 선업 공덕을 감사하고 함께 기뻐함
③ 자기의 공덕을 남에게 회향함
- 지계
① 몸이나 말로써 악한 행위, 악의를 가진 행위를 하지 않음
② 오계를 지켜 다른 존재들에게 공포, 적대감, 학대로부터 자유를 주고,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줌
③ 오계를 지켜 스스로 공포, 적대감, 학대로부터 자유를 즐기고,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음
④ 사념처, 마음챙김을 통해 감각기관을 보호함. 지금 이순간 나타나고 있는 실재를 개념적으로 보아 취착하지 않고, 나마(nāma)와 루빠(rūpa)로 한정하여 알고 봄
- 명상
① 담마를 듣고 공부함
② 담마를 가르침
③ 고요함을 닦는 사마타
④ 실재들에 대한 바른 통찰지를 개발하는 위빳사나
업의 법칙은 자연법칙이며,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된다.
유익한 업은 행복이라는 과보를 만들고, 해로운 업은 불행의 과보를 만든다.
유익한 행위는 다음 유익한 행위의 바른 조건이자 습관이 되며, 해로운 행위는 다음 해로운 행위의 조건이자 습관이 된다.
베풀고 감사하면 부유함, 행복함, 편안함을 받는다.
악의를 일으키지 않고 오계를 지켜 남을 해치지 않으면 건강하고 안전하며 근심, 걱정, 두려움 없이 평화롭다.
담마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감각기관을 보호하고, 고요함을 닦고, 통찰지를 계발하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아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윤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3. "생은 하나의 마음 순간 동안만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한 번에 하나의 대상만을 경험하는 한 순간의 마음일 뿐입니다."
... 우리가 만약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음 생에 대하여 보다 많은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관념적인 말로 인생이란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시간의 폭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보려면 궁극적인 실재들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생은 셀 수도 없는 많은 마음의 순간들이 연속으로 일어나서는 사라지고, 다음 마음에 의하여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각각의 마음 순간(필자 주 - 심찰나)에는 태어남과 죽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은 하나의 마음 순간 동안만 존재합니다. 보는 것은 단지 마음입니다. 이 마음과 동시에 일어난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의 생이란 단지 보는 것입니다. 눈의 알음알이는 머물지 않고 빠르게 사라집니다. 듣는다는 것도 단지 듣는 마음입니다. 이 때의 생이란 단지 귀의 알음알이에 불과합니다. 이 마음도 역시 사라져 버리고 다른 마음에 의하여 대체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즐거운 대상과 불쾌한 대상을 보거나 듣습니다. 이때 우리는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그리고 무덤덤한 느낌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완전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그리고 때때로 유익한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보시도 하고, 살생도 하지 않고 바른 지혜를 개발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한 번에 하나의 대상만을 경험하는 한 순간의 마음일 뿐입니다. 한 마음순간 이전의 마음은 이미 완전하게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마음이 일어나서는 역시 사라지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마음들은 다음 마음으로 이어지기 위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금생의 마지막 마음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즉 죽음의 마음(cuti citta) 뒤에는 다음 생의 최초의 알음알이인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윤회를 계속하는 한 마음은 다음 마음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은 생의 첫 번째 마음입니다. 이 마음과 함께하는 마음부수들은 업의 과보에 해당합니다. 정신과 물질로 구성된 존재계에서 업은 생의 첫 번째 순간에 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살아가는 동안에 업 때문에 생긴 물질들인 눈의 감성과 귀의 감성 그리고 다른 감성물질들과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감성 물질들은 과보의 마음들이 일어나기 위한 토대의 역할을 합니다. 과보의 마음은 그래서 즐거운 대상이나 불쾌한 대상을 경험합니다. 한편 업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질들은 업이 만들어낸 물질적인 결과물입니다.
우리 몸은 단지 업은 물론 마음과 온도 그리고 음식이라는 영양소에서 만들어진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들의 원인은 네 가지입니다.
... 그 누구도 자신의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 재생연결식은 조건지어진 담마, 상카라 담마입니다. 금생 역시 조건지어진 마음, 조건지어진 마음부수 그리고 조건지어진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음 생도 마찬가지로 조건지어진 마음, 조건지어진 마음부수 그리고 조건지어진 물질로 구성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세계들의 마음에는 유익한 마음(kusala), 해로운 마음(akusala), 과보의 마음(vipāka) 그리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악처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바른 지혜를 다시 닦을 수도 있겠지요.
유익한 업과 해로운 업은 재생연결식을 만들 수 있는 12연기의 연결고리입니다. 12연기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무명(avijjā)으로부터 시작하여 12각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때 무명이 맨 앞에 나옵니다. 이것은 중생들이 궁극적 실재들을 있는 그대로 모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고, 태어나서는 늙고, 병들고 다시 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이 사라지면 윤회와 괴로움은 끝이 납니다.
... 이론적으로 우리는 과보의 마음들은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의 결과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론적인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나는 마음들이 이것은 유익한 마음이고 저것은 해로운 마음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상황은 많은 다른 조건들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순간(심찰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고가 나서 상처를 입게 되면 우리는 몸의 감관을 통해 아주 불쾌한 경험을 합니다. 이것은 과보입니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 지나면 성을 내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성냄이라는 해로운 마음과 과보의 마음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음들은 아주 빠르게 연속해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과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그 과보의 마음순간은 지나가 버렸고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들이 대신 자리를 잡지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 취착하며, 계속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생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의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이란 단지 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 나마(정신)와 루빠(물질)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 취착합니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남들이 좋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성공하기를 원하지만 살아가면서 많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실망합니다. 마음 속에 이러한 오염들이 남아 있는 한 윤회는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눈의 알음알이와 형상, 귀의 알음알이와 소리 혹은 생각과 같은 조건지어진 현상들은 한 순간도 머물러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기 시작한다면 윤회를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위와 같은 실재들에 대해서 잊고 삽니다. 하지만 마음챙김은 바로 지금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어떤 대상에 취착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취착은 슬픔의 원인이라는 것도 압니다. 상응부에서 붓다는 생에서 나타나는 모든 오온은 조건지어진 현상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붓다께서 사왓티에 머물고 계실 때
수행승들이여, 지혜로서 알아야만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겠으니 자세히 들으라.
그렇다면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몸을 알아야 한다.
느낌을 알아야 한다.
인식, 상카라 그리고 알음알이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수행승들이여,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지혜란 무엇인가?
욕망의 파괴, 성냄의 파괴, 어리석음의 파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일러 지혜라 한다.
만약 지금 바로 나타나고 있는 안식과 이식 혹은 다른 실재들에 대하여 바르게 마음을 챙기고 지혜가 있다면 윤회를 끝내게 될 것입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 우리 마음 지켜보기』 P.93~103,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첫댓글 '선업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항상 불선업이 생긴다'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