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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에 대한 일화만큼, 소설로 영화로 그리고 뮤지컬과 음악으로까지 다양한 쟝르로 우리에게 알려진 왕궁의 비극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어느 왕실의 역사를 보더라도 자신의 아들인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어 죽게 한 국왕이 있었을까! 500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의 왕실은 그 명맥을 잇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고, 그 와중에 피비린내 나는 암투와 살육들도 있었다. 조선의 사관들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했고, 야담과 민간구전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사도세자의 마눌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환갑을 지난 늘그막에 참혹했던 그 세월을 한중록(閑中錄)이란 한가한 제목의 문집에 그 사연들을 담기도 했다. 멸문지화를 당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옹호하려 했던 혜경궁 홍씨의 의도가 있었던 글이라 하더라도, 이 글 속에는 그 당시의 참담하고 급박했던 궁안의 사연들이 담겨있어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궁평항을 돌아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융릉>과 <건릉>을 돌아보았다. 사실도 그랬지만, 사람들은 정조대왕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애틋했던 정조의 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융릉말고도 수원화성이며 遲遲臺 이야기에도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사모의 정이 그려져 있다. 수원화성(華城)은 1794년 1월에 착공해 1796년 9월 10일에 완공했으니 수원화성의 근간에는 정조의 효심이 깔려 있다. 아버지 묘소 융릉을 자주 찾게 되면 행궁이 있어야 했고, 더 나아가 한양에 있는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집권 세력을 견제하고 제거하며 자신의 정치적 꿈을 펼칠 새로운 수도 건설도 필요했던 것이다.
원래 사도세자의 능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한 삶을 보낸 아버지를 늘 가슴 아파하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정조 13)에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다는 수원(현재의 화성)의 화산으로 묘를 옮긴 후 현릉원(顯隆園,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했다.
정조는 45만그루의 소나무를 융릉에 심어놓고 애지중지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융릉 참배길에 나섰던 정조는 송충이들이 소나무들을 갉아먹는 걸 발견했다. 정조는 송충이를 잡아 입에 넣고 깨물어 삼켜버렸다. 그러면서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 어찌 미물인 너희들이라 한들 네 마음을 이리도 몰라 준단 말이냐!" 그러자 소나무에 송충이들이 싹 사라졌다는 말이 전해진다. 정조의 효심이 이 정도였다는 뜻으로 퍼뜨린 이야기일 것이다.
정조가 풍수지리적으로 제일 좋은 곳을 골랐다고 했듯이 왠지 융릉으로 다가갈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세가 주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 길은 융릉을 보고 건릉으로 건너 가는 소나무 숲길이다.
정조가 자주 걸었을 이 길...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隆陵>
아버지 무덤 앞에서 정조는 소매가 젖도록 울고, 저기 보이는 재실에 들어가 아버지와 영혼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기에 용주사라 이름한 인근 사찰을 원찰로 하였다. 용주사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홍살문이 있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해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효행박물관에서는 정조가 효심에서 발원,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성부모은중경판》이 있다.
정조는 생전에 선친의 묘 곁에 자신의 묘를 써달라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정조임금의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으로 융릉과 건릉은 모습이 거의 같다. 능 입구에 홍살문이 서있고 신도 어도와 정자각이 있다. 능은 높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능에는 상석과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고 난간석이 없는 대신 건릉에는 난간석이 있으나 병풍석이 없다. 혼유석에는 면마다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梅蘭菊) 무늬를 새겼다. 모두 서향이라 해질 녘의 능 분위기가 그윽하고, 눈이 오면 또 다른 별천지를 보여주니 눈 내린 경치를‘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 하여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꼽는다.
정조의 무덤 <건릉 健陵>
조선 왕조를 살피면 때때로 역사의 물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자주 보게 된다. 위화도 회군, 권력을 찬탈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등을 통해 숨 가쁘게 질주하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보게 된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뀔 때는 언제나 그 전조가 있다. 그리고 그 전조에는 여인들이 많은 역할을 한다. 광해군을 폭군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특별상궁 개시, 연산군을 폭군으로 만든 폐비 윤씨의 비참한 죽음에는 인수대비와 고부간의 갈등이 있다. 뒤주 안에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뒤에도 여인들이 있었다.
독살음모
영조는 이복형인 경종이 보위에 있을 때 노론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다. 경종은 성불능자라 아들을 낳지 못했고 선의 왕후 어씨는 양자를 들여서 보위를 이으려고 했다. 이때 노론이 영조를 전폭적으로 밀면서 영조는 목숨을 지켰고 경종이 승하하자 보위에 올랐다. 그런데 영조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에 대한 독살 음모가 밝혀져 대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범인을 잡고 보자 뜻밖에 동궁전에서 일하던 궁녀 순정(順正)이었다.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괴이하게 여기며 의아해하다가, 이제 와서야 비로소 독약(毒藥)을 넣어 그렇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미 세자의 사친(私親)에게 독기(毒氣)를 부렸기 때문에 세자가 점점 장성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또 다시 흉악한 짓을 하였고, 강보(襁褓)에 있는 아이인 4왕녀(王女)에게도 또한 모두 독약을 썼다. 나의 혈속(血屬)을 반드시 남김 없이 모두 제거하려 했으니,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아니한가? 정명(正命)으로 죽어도오히려 애통하기 짝이 없거늘, 하물며 비명(非命)에 죽는다면 부모가 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사용하고 대궐에 매흉(埋兇: 저주하는 물건인 뼈나 해골, 혹은 짚 인형을 땅속에 묻는 것)을 했다고 주장했다. 왕의 아들 딸을 살해하려 했다는 영조의 주장은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영조가 인정문 앞에서 순정을 친국한 뒤에 처형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그런데 왕자와 옹주를 살해하려고 한 사건이 어찌 이렇게 간단하게 매듭이 지어지는가. 우리는 역사의 이면을 살펴야 한다. 짓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쫓았다. 세자가 된 뒤에 궁녀가 모자라 다시 동궁전에 들어오도록 했는데, 마음을 고쳤으리라고 생각했다. 세자 및 두 옹주를 보양(保養)하게 하다가 세자 책봉 뒤에 그를 옹주방에 소속시켰으므로 동궁의 나인이 되지 못한 것 때문에 항시 마음속으로 앙앙불락하였으니, 이른바 기심(機心: 남을 시기하여 해롭게 하는 것)이 있는 계집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는 단순하게 순정이 자신의 자식들을 살해한 이유를 성미가 불량한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행간을 면밀하게 추적해 보면 경종의 독살설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론과 남인의 복수극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 가능성은 영조가 독살되어야 타탕한 주장이다. 그러나 독살의 대상자가 영조가 아니라 그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에 의혹을 갖게 된다.
사도세자의 개혁적인 사고방식과 노론의 모함
독살 음모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영조에게 이번에는 사도세자 사건이 발생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비참한 일이 발생한다. 사도세자는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병으로 죽자 태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세 살 때 이미 효경을 읽고 정치적 식견이 탁월하여 영조가 붕당정치를 타파할 대책을 묻자 탕평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당시 정권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책을 반대하자 극한 대립이 벌어졌다. 사도세자의 개혁적인 사고방식이 노론을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총애하는 숙의(淑儀) 문씨(文氏)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도세자를 모함했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친누이 였다. 사도세자가 보위에 오른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불이익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에게 양자로 들어온 정후겸이 노론의 비호를 받으면서 화완옹주도 노론 편에서 사도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조는 불같은 성품을 갖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 침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목소리가 커서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도세자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세자궁의 관리들을 매섭게 다루어 사도세자를 공포에 떨게 했다. 시작했다. 사도세자는 죽기 1년 전 거의 매일같이 약방의 진찰을 받았다.
영종에게 주눅이 든 사도세자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남편이 뒤주 속에 갇혀 죽었으니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하여 옷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다.
혹시라도 영조에게 야단을 맞을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울화가 치밀어 엉뚱한 내시에게 화풀이를 하여 목을 베고는 했다. 이를 의대병(衣帶病: 옷을 입지 못하던 병)이라고 하는데 옷을 갈아 입을 때 수십 벌의옷을 입고 벗고 하다가 결국 영조에게 야단을 맞았다. 당번 내관 김환채를 죽여서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나인들 에게 보이시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그 흉하고 놀랍기 이를것이 어디 있으리요…. 없이 보고되고 영조는 그럴 때마다 노발대발하여 야단을 치고는 했다. 죽여야 마음이 풀립니다.” 무서워서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부자간의 대화를 시도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영조 22년 3월 2일 창덕궁 저승전(儲承殿)의 행랑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 대신들 앞에 사정없이 야단을 쳤다. 영조는 아들에게 깡패냐고 추궁을 한다. 영조의 책망을 받은 사도세자는 가슴이 답답하여 청심환을 먹고 저승전 앞뜰의 우물로 뛰어들어 자진하려고 했다. 내시들이 만류하여 자진하지는 못했으나 그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더욱 노발대발 했다. 영조는 화완옹주와 숙의 문씨의 모함으로 사도세자가 불을 질렀다고 생각했다. 사도세자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이 심해지면서 대궐을 빠져 나가 여승이나 기녀들과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다. 유흥을 즐기기 위해 평양을 오가고 돈이 모자라면 남대문 상인들에게 강제로 빌려 원성을 샀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실망했다. 그래도 아들이 백성들에게 돈을 빌렸으니 갚지 않을 수 없었다. 남대문 상인들을 대궐 앞으로 불러 직접 빚을 갚아 주었다. 조선 시대에 세자가 상인들에게 돈을 빌린 일이나 이를 갚아 준 조선의 왕도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날에는 젊은 자녀들이 카드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면 부모들이 갚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당시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신기한 일이다. 사도세자의 통렬한 반성문
그런데 사도세자는 왜 노론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는가?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백성들의 환곡(還穀)에 대하여 남은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태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어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고, 서민을 괴롭히는 대동(大同), 군포(軍布)의 대전(代錢), 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의 정책과 크게 배치되었기 때문에 배척을 받은 것이다. 화완옹주가 가세하여 사도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여 사도세자는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다. 사도세자는 마침내 통렬한 반성문을 썼다.
… 나는 불초 불민한 사람으로 효성이 얕아서 어버이의 침식을 돌보는 절차를 때맞추어 하지 못했으니, 자식 된 도리에 어긋난 점이 진실로 많았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대조(大朝)께서 전후로 가르치시기를 거듭 간곡하게 하신 것은 진실로 자애로운 성의(聖意)와 사물에 부응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불초 불민함으로 인하여 만분의 일도 우러러 본받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갑절이나 되어 비록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으나 이루지 못하겠다. 강학을 돈독하게 하지 못하고 정사를 부지런하게 하지 못한 데에 이르러서는 어느 것도 나의 허물이 아닌 게 없는데, 어제 양 대신이 반복해 진면(陳勉)함으로 인하여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추회막급(追悔莫及)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추회막급이다. 지금부터 스스로 통렬하게 꾸짖고 깨우쳐 장차 모든 일에 허물을 보충하여 단호하게 종전의 기습(氣習)을 바꾸려 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실천하여 행하지 못하고 작년과 같이 된다면, 이는 나의 과실이 더욱 심한 것이다. 오호라! 조정의 신료들은 나의 이 뜻을 체득하여 일마다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심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드물게 반복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죽음을 피해 가려는 사도세자의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사도세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장의 끝에서도 반복하여 자신의 어리석고 우둔함을 질타하고 있다. 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추회막급이다. 대한 보람도 없이 그는 끝내 뒤주 속에 갇혀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신유옥사(辛酉獄事)
역사는 사소한 사건으로 물줄기가 바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로 비롯되었듯, 사도세자의 죽음은 벽파와 시파라는 분파가 조정에 생기고 이들의 대립으로 일어났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벽파인 김귀주의 무고가 결정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숙의 문씨와 화완옹주의 무고가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사도세자는 그녀들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고, 김귀주 등이 때를 놓치지 않고 무고를 하자 영조가 결단을 내려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부자간의 갈등을 부른 벽파와 시파의 대립은 결국 순조 때 피를 부르는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으켰다. 내려 죽이고, 그녀의 오라버니 문성국은 시체를 여섯 토막 내는 육시형(戮屍刑)에 처했다. 정조 시대 내내 사도세자를 죽인 일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벽파와 사도세자를 지지한 시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시파는 정조와 영의정 채제공이 옹호했는데, 남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으켜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벽파는 시파를 숙청하기 위해 천주교도를 옹호했다는 누명을 씌워 시파와 천주교도들을 공격했다. 이로 인하여 천주교 지도자들인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최창현(崔昌顯), 강완숙(姜完淑), 최필공 (崔必恭), 홍교만(洪敎萬), 김건순(金健淳), 홍낙민(洪樂敏)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왕족인 송씨(宋氏: 정조의 서제인 은언군의 부인)와 신씨(申氏: 은언군의 며느리)가 사사(賜死)되었다. 피해 살아남은 교도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오히려 백성들에게 천주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어 신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글쓴이 이수광>
한중록 [閑中錄]
1795년(정조 19)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 1737~1815)가 쓴 자서전적 회고록이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이 있다. 사본에 따라 〈읍혈록 泣血錄〉·〈한중록 恨中錄〉· 〈한중만록 閑中漫錄〉이라고도 한다. 전체 4편이며, 제1편은 1795년, 제2편은 1801년(순조 1), 제3편은 1802년, 제4편은 1805년에 각각 씌어졌다. 제1편은 지은이가 회갑되는 해에 친정 조카의 요청에 따라 써준 글이다.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 이후 50여 년 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했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할 수 없다며 간략히 언급했고,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의 전말을 기록했다.
제2편은 67세에 쓴 글로, 사도세자 사건 이후부터 정조 초년까지 정적들에게 모함받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간으로 정조가 자신의 외가를 미워하게 되었으며, 당시의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친정을 멸문시켰음을 폭로했다. 삼촌 홍인한(洪麟漢)과 동생 홍낙임(洪樂任)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하루 빨리 누명을 벗을 수 있기를 하늘에 축원하는 내용이다.
제3편은 68세에 쓴 글로 제2편과 내용이 비슷하다. 정조가 예전에 자신에게 효성이 지극했으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학문을 열심히 했음을 회상하고 있다. 또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의 억울한 누명을 후일 반드시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되새기며, 어린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는내용이다.
제4편은 71세에 쓴 것으로, 제1편에서 차마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 사도세자의 사건 내막을 기록했다. 사도세자가 부친인 영조에게 미움을 받아 뒤주 속에서 죽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서술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게 한 발상이 아버지 홍봉한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한갖 모함이며 아버지는 결백하다고 역설했다.
혜경궁 홍씨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사도세자 사건으로 비난받는 아버지 홍봉한의 결백을 입증하는 내용을 손자인 순조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었다. 곧 홍국영 등 정적들의 모함으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홍봉한이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할 때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자 아버지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쓴 것이다.
학자에 따라 이 작품을 소설·일기·수필 등으로 보고 있는데, 인물묘사나 서사구조, 문체 면에서 높은 수준의 서사성을 갖춘 실기문학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이 작품은 첫째, 사도세자의 죽음 등 왕실의 비사(秘史)를 다룬 궁중문학이고, 순수 국문문학이며, 지은이가 역사적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실존인물이라는 점, 둘째, 문체가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멋스런 고어와 궁중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사건을 애절하고도 박진감 넘치게 서술하여 승화된 한의 미학을 보여준 점, 셋째,다양한 궁중풍속과 사도세자의 죽음 등을 자세히 그려낸 점에서 문학사·역사적 가치가 크다.
隆·健陵을 나서며...
해는 저물어 어두워 가는 왕릉을 나서며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이 왕손이라 더 즐거움과 행복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라는 걸 새삼 생각했다. 미천한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빼앗을 권력과 명예가 적어 그 암투의 피비린내가 소리소문이 적기는 하지만, 우리들 세계에도 작지만 암투는 없지 않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아웅다웅하다 한평생을 마치는 우리네 인생... 결국 사랑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란 걸 생각하게 된다.
어쨋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속세는 고금을 막론하고 忍苦의 세상이다. 참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이승의 세상이다.그렇다고 참지 못할 고통만이 있는 세상은 아니다. 적당이 참아야 할 괴로움이 있기에 살만한 세상인지도 모른다.
물질이 어느 정도 보장되니 정신이 흔들리는 요즘 우리 세상이다. 어느덧 석양으로 물들어 가는 서녘하늘을 보았다. 밤은 죽은 자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아늑하게 우거진 松林에서 한 많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오늘밤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눌까? 부디 이승의 現世에서 벌어지는 아픈 사연들도 위로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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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그리고 멋진 글 잘읽었습니다.
잘 읽어 주시니 감사... ^^
좋은글 고맙습니다 읽으며 생각컨대 역사는 초등학교에서 배워나가야 하지않을까 생각이됨니다 요줌같은 무서운 젊음들을 역사읽기로 마음을 순화 시킬수있지 않을까 합니다 불설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가 막중하고 부모의 은혜를 갚을 방법을 부처님의 설하신 불교경전 입니다,부모의 은혜가 무엇인가 또한 보은하는 방법은 남에게 베플며 진리를 실현하면서 사는것이 최상의 길이며 불효를 하면 아비무간지옥에 떨어져 지옥을 상징하고있다 자식에게 효를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모의 열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음미해 볼수있는 효에관한 대승적인 불교 경전이다,!!!
효에 대한 가르침은 내가 실천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너무나 모자란 내가 부끄럽기만 하니
자식들에게 '효'란 말 꺼내기 조차 겁이 나는구나!
제주에 가시게되면 자식들과 중문에있는 약천사에 들러 혜인 큰스님의 부모은중경의 법문을 요청해보셔도 좋으실것 같습니다 부모은중경에 대한 법문은 최고의 큰스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은 정보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