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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절대적 근본주의에 상처를 입은 나도 교회를 경계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 아침이면 좋은 옷을 차려입고 서로 웃지만, 그런 겉모습으로 비열한 마음을 숨기기가 더 쉬움을 나는 직접 경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위선의 낌새만 보여도 무조건 반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교인들이 다 나 같다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 당연히 마음이 겸허해졌고 그때부터 나는 남의 영성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성에 집중했다.
나는 교회 안의 위선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라 결론지었고, 그래서 그런 판단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자 점차 여유가 생기면서 마음이 더 너그러워지고 남들을 더 용서하게 되었다. 완전한 배우자, 완전한 부모나 자녀를 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우리는 가정이라는 제도를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라고 왜 버린단 말인가?
*어떻게 나는 교회 회의론자에서 옹호론자로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바뀌었을까? 나는 왜 교회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을까? 바로 시간이 가면서 교회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배웠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학교를 골라 다닐 수 없는 것만큼이나 교회도 내 선택 소관이 아니었지만, 나중에는 선택권을 충분히 발휘하여 차례로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녀 보았다. 그 과정을 통해, 바른 교회를 찾는 열쇠는 내 안에 있음을 배웠다. 내 시각이 관건이었다. 일단 보는 법을 익히고 나자 교회의 소속 교단 따위의 문제들은 훨씬 덜 중요했다.
나는 교회를 대할 때 위를 올려다보고, 주위를 둘러보고, 밖을 내다보고 안을 들여다보아야 함을 배웠다. 교회를 겨우 참고 견디던 내가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새로운 시각 덕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나 같은 이들을 두고 말하기를, 사람들이 교회를 극장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객석에 앉아 무대의 배우를 주시하고, 배우는 모든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배우가 제법 즐겁게 해주면 우리는 박수와 환호로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교회는 극장의 반대라야 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예배의 관객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주인공으로 여겨 왔던 사역자는 사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알려 주는 보조적 역할을 맡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마치고 떠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이다. 이제 나는 예배 시간에 위를 올려다보려고 한다. 시선을 강단 너머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성도들이 어설픈 실력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의 관점 변화 덕분에 이런 경우를 참아 낼 수 있었다. 사역자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게 하려고 평신도들이 직접 노래나 시를 짓고, 미니드라마를 공연하고 삼중창을 부르고, 워십 댄스로 자신을 표현하는 교회가 많다. 그런데 솔직히, 객관적인 미학의 기준이든 단순한 예배 진행의 차원에서든, 그런 시도는 나의 예배를 별로 고양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깨달은 진리는, 가장 중요한 관객은 회중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주된 이유는 즐거움을 제공하거나 약한 모습을 받아 주거나 자존감을 세워 주거나 우정을 북돋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 일에 실패하면 교회는 실패하는 것이다. 사역자, 음악, 성례, 기타 예배의 부속물'은 예배자들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준다는 궁극적 목표를 떠받치는 보조 장치일 뿐이다. 행여 그 사실에 의구심이 들면 나는 다시 돌아가 구약을 읽는다. 구약 성경에서 성막과 성전의 예배 규정에 할애된 지면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할애된 지면과 거의 맞먹는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으며, 예배의 핵심도 결국 그것이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행위라고 했다.
우리는 교회에서 구경꾼처럼 강단을 쳐다볼 수도 있고, 위로 하나님을 올려다볼 수도 있다.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 동물 제사를 자세히 설명하신 하나님은 나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 외양간의 황소도 우리의 염소도 나에게는 필요 없다. 숲속의 짐승과 야산의 소떼가 다 내 것이다.” 그들은 예배의 외양에 치중하느라 핵심을 다 놓쳐 버린 것이다. 그분의 관심은 마음의 제사에, 내면의 태도인 복종과 감사에 있었다. 이제 나는 교회에 가면 연극 비평가처럼 편안히 앉아 미학적인 평가를 하기보다 배후의 정신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세계 역사상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이 대등한 자격으로 모인 최초의 기관이 교회이건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쉽게 망각하는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각종 벽을 허물었다. 대부분의 타종교와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환영했다. 그리스 사람들이 웬만한 사회 집단에서 노예를 제외시킬 때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를 받아들였다. 유대교 성전은 인종과 성별로 예배자를 차별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식탁에 다함께 둘러앉았다. 남성 위주의 로마 귀족 정치와는 대조적으로 기독 교회는 여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도자 역할을 맡겼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던 사도바울은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고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을 생생히 드러냈다.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엡3:9-10). 우리가 서로 다른 멤버들로 공동체를 이루면, 그걸 계기로 이 세상은 물론 초자연 세계까지 우리를 주목하게 된다.
*유년기에 겪은 율법주의에 대한 반작용 탓인지 라살 스트리트 교회의 빌 레슬리 목사는 은혜라는 주제에 도무지 싫증이 안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은혜가 끝없이 필요함을 인식했고 거의 매주 은혜를 설교했고, 주변 모든 이들에게 지극히 실제적인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었다. 일요일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마치 삼투압처럼 점차 은혜를 빨아들였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은 내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임을 나는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 없이 거저 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늘거나 줄어들 수 없다.
내 유년기 교회에 가장 눈에 띄게 부재한 요소는 결론적으로 은혜였다. 경쟁과 판단과 서열의 세상(비은혜의 세상)에 우리의 교회들이 은혜를 소통할 수만 있다면, 그러면 사막의 유목민들이 오아시스로 모여들듯이 교회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열심히 모이는 곳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교회에 가면 안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에 있는 경쟁과 비판의 독을 제거하고 대신 은혜로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내가 찾는 교회는 은혜가 특징인 교회다.
*나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여러 번 통독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뜻하신 일의 완성이요 실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인종과 국적과 성별의 장벽을 허물고,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로마 제국에 두루 흩어져있던 다양한 회중에게 바울이 보낸 각 편지의 첫 문단을 읽어보라.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사실은 인종이나 경제적 지위나 기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구분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정체성은 미국인이나 콜로라도 주민이나 백인 남성이나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보다 더 중요하다. 교회는 그 새로운 정체성을 기뻐하는 곳이고 차이점이 많지만 이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 속에서 그 정체성을 실천하는 곳이다. 우리의 사명은 점점 종족주의와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일종의 대안 사회를 살아내는 것이다.
*때로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기관들 속에서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치시는 훈련장으로 가정이란 제도를 만드셨다는 생각이 든다. 가정이 가장 잘 돌아갈 때는 서로의 차이를 무시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차이를 즐거워할 때다. 건강한 가정은 강한 식구를 끌어내리지 않으면서 가장 약한 식구를 세워준다.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자식을 제일 사랑하느냐고요? 나는 병든 자식이 나을 때까지는 병든 자식을 제일 사랑하고 집 떠난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집 떠난 자식을 제일 사랑한답니다."
인간의 제도 중에서 유일하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 가족이다. 출생 자체로 이미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상하고 특이하고 별난 사람들과 본의 아니게 하나로 묶이게 된다. 그리고 교회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상하고 별난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내 경험상 그런 공동체는 인간의 다른 어떤 기관보다 가족을 더 닮았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공동체를 가장 함께 살기 싫은 사람이 반드시 살고 있는 곳"이라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는 매년 추수감사절에 모이는 가족에 대해서든 매주 일요일 아침에 모이는 회중에 대해서든 똑같이 적용된다.
*그 두 정지 화면 한 선수가 자유투 라인에 구부리고 서 있는 장면과, 친구들의 어깨에 올라 타 기뻐하는 장면이 내게는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율법 아래서 내 운명은 내 모든 행위에 달려 있다. 관중과 코치와 선수 스카우트 담당자들의 마음에 들려면(하나님의 마음에 들려면 슛을 넣어야 한다. 내 영원이 거기에 달려 있다. 넣지 못하면 영원히 낙인이 찍힌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우리를 다른 길로 부른다. 그 길로 나아가는 조건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에 있다. 우리는 성취해 내야 한다는 부담 없이 그냥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은 이미 값비싼 승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까지 경쟁을 통해 행위에 점수를 매기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승리 팀의 선수 탈의실처럼 기뻐 환호하는 곳, 감사하는 곳이다. 모두가 용서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그 놀라운 소식을 축하하는 곳이다. 교회는 율법주의의 성채가 아니라 세상에 빛을 밝히는 은혜의 등대불이다. 그것이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교회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디에 사시는가?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시나이 반도의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은 당신과 나같이 평범하고 못난 사람들 속에 살기로 하셨다. 콜로라도의 우리 교회 목사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이 점을 부각시킨다. 누가 그에게 "정말 아름다운 교회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아, 감사합니다. 제가 그동안 다이어트 했는데 이렇게 알아봐 주시니 기쁩니다 라고 답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콜로라도나 시카고 같은 곳들의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로 이루어진다는 게 그의 요지다.
일요일 아침에 예배당 좌석을 채운 사람들을 둘러보면, 하나님이 어떤 모험을 감행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제 하나님은 불기둥이나 구름 기둥으로도 아니고 갈릴리에 오신 아들의 물리적인 몸을 통해서도 아니고 내가 다니는 교회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다른 모든 교회를 구성하는 잡동사니 인간들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대변하고 세상에 하나님을 구현해 보이도록 부름받았다. 마르틴 루터는 우리를 '하나님의 탈'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세상이 직접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신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 진리가 주는 충격에서 영 헤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가 고린도의 일상적 문제들을 그토록 진지하게 대한 것은 그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앞에서, 우리 자신은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우리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쉽게 낙심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형편없이 드러낼 때가 많아서다. 그래도 나는 고린도전서 같은 책을 보면 불쑥 희망이 솟는다. 12-14장의 그 원대한 말들을 바울은 누구한테 썼던가? 바로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모욕하는 자 등 고린도의 잡다한 무리였다.
*건물, 시설, 똑똑한 사업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 등은 모두 교회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힘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찾는 교회는 고통에 대한 과민성을 길러 주는 교회다. 사람들이 노숙자를 외면하고 고개를 흔들며 제 갈 길을 갈 때, 종들은 “아니, 우리는 이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노숙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듯이 그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이라도 그들을 섬기실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 방식을 돌아보면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했다(빌 2:5-7). 강해지는 길은 약함을 통해 나 있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사역의 모본이다.
*사역하는 사람들은 그 기회를 통해 긍휼과 겸손, 인내 같은 자질을 배울 수 있다. “포춘" (Fortune) 지 선정 500대 기업 대다수가 아예 의제로 삼지도 않는 내용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보상을 감히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 소중한 것이며, 다른 직업으로 아무리 돈과 명예를 쌓아올려도 이 보상만큼 값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가장 자주 반복하신 선언은 우리가 목숨을 잃음으로써 얻는다는 것이다. 목숨을 잃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과민성은 자원이자 뜻밖의 선물일 수 있다. 우리 가슴을 무너지게 하는 눈물이 또한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양분이 될 수 있다.
*사역하는 사람들은 그 기회를 통해 긍휼과 겸손, 인내 같은 자질을 배울 수 있다. “포춘" (Fortune) 지 선정 500대 기업 대다수가 아예 의제로 삼지도 않는 내용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보상을 감히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 소중한 것이며, 다른 직업으로 아무리 돈과 명예를 쌓아올려도 이 보상만큼 값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가장 자주 반복하신 선언은 우리가 목숨을 잃음으로써 얻는다는 것이다. 목숨을 잃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과민성은 자원이자 뜻밖의 선물일 수 있다. 우리 가슴을 무너지게 하는 눈물이 또한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양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