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기념
(9월 3일,수)
오늘 성 대 그레고리오 교항 학자기념일입니다.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했던 가장 훌륭한 교황이었습니다. 쉽게 프란치스코 교황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가을을 맞이하여 시를 나누겠습니다. 시성 타고르의 시입니다.
영겁의 시간을 거쳐 당신의 문 앞에 왔나이다
-라빈드라나스 타고르
두 손을 치켜들고 더 많은 청을 드리고자
영겁의 시간을 거쳐 당신의 문 앞에 왔나이다.
당신은 주고 또 주셨나이다.
때로 천천히 조금씩 주시다가
때로 갑자기 넘치도록 주셨나이다.
저는 어떤 것은 받고
어떤 것은 슬그머니 버렸나니
제 손에 받아들기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나이다.
어떤 것은 한낱 노리개로 쓰고
어떤 것은 싫증을 내고 부숴 버렸나이다.
파선한 배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당신이 주신 선물이 헤아릴 수 없음과
선물에 가려 당신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나이다.
끝없는 기대가 제 마음을 소진하였나이다.
받으소서.
오, 받으소서.
이제야 ‘받으소서’가 저의 절규가 되었나이다.
이 걸인의 걸망에서 모든 것을 흩으소서.
이 성가신 파수꾼의 등불을 꺼 주소서.
이제 제 손을 잡으시고
저를 당신 선물의 노적더미에서
왕관을 쓰지 않으신
당신 현존의 순수한 무한 안으로
저를 드높여 주소서.
이어서 ‘9월이 오면’이라는 시, 나눕니다.
9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두 사람의 시가 모두 우리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점에서 좋은 시입니다.
이어서 가을 시 하나 더 읽지요.
가을이 오면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신 꽃입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지으신 것은 우리 자신을 나누라고 축복하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지닌 것, 아니 바로 우리 자신을 나눌 때, 우리는 그분이 지으신 창조 목적, 바로 그분을 닮게 되지요. 그리고 우리를 다 준다고 해도 잃을 것이 없지요. 모든 것이 그분에게 받은 것이고 본래 내 것이 없으니까요.
가을햇볕
- 안도현
부서지렴.
글썽이는 가을볕
풀씨 날려 울음 타는
슬픈 언저리
아이들 꿈의 향기만큼
부서지렴.
수수깡 안경으로 엿 본
가을의 속살.
강아지풀 같은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를 뵈지 않게 미끄러지며
부서지렴. 울면서
울면서 어린 생각을 빗질하고
다시 어린 꿈을 닦아내고
그 맑은 눈물무늬
글썽이는 가을볕
부서지렴.
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수수깡 안경으로 엿 본 가을의 속살’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썼었지요. 안경을 쓰면 왠지 무엇이든지 더 잘 보일 것 같고, 멋있어 보이던 시절이 있었지요.
가을이 담고 있는 속 내음새를 맛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고, 수수깡으로 만든 안경 모습이 그려져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그 가을의 속내를 들여다보며 시인은 부서지라고, 아이들로 상징되는 그 순수 사이로 미끄러지며 산산이부서지고 그 속에 잠기라고 속삭입니다. 가을볕은 그렇게 순수한 어린 아이의 생각을 빗질하고 그 맑은꿈을 무늬로 수놓으며 글썽이듯 가슴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가 을
-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 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가을 하늘은 깊은 우물처럼 맑고 깊고 그윽합니다. 시인은 그 그윽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가을이 하늘에 파란 물로 우물을 판다고 노래합니다. 그 우물에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우물에 비친 그리운 사람의 눈은 그리움으로 촉촉이 젖어 있습니다.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우리 손으로 마음대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손으로 잡아 오래 간직할 수는 없지요.
다만 마음속에 담아 둘 뿐이지요. 하느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혼자서는 지닐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산 위에 부는 바람도, 맑은 공기도 나 혼자 차지할 수는 없지요. 들도 산도 햇볕도 혼자는 차지할 수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만의 사랑이란 없습니다. 사랑도 기쁨도 함께 혼자가 아닌 서로가 나눌때 커집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자연,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것이 가장 사랑스러울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의 천진한 미소는 억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저절로 별 빛 같은 눈망울이 됩니다. 바라보는 눈 속에 별이 떠오르는 모습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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