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 나이 | 활동내용 |
1870년(고종 07) | 1세 |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鎭川郡 德山面 山尺里) 산직(山直) 마을에서 가난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출생하다. 본관은 경주(慶州), 고려조(高麗朝)의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政丞)을 역임한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22대손이고. 조선조(朝鮮朝)의 인조 원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명신(名臣) 이시발(李時發)의 11대손이며. 현종(顯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경휘(慶徽)의 10대손이다. 아명(兒名)은 복남(福男)이고. 자(字)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혹은 碧蘆舫主人)다. 동기(同氣: 형제)로는 11년 아래인 상익(相益)이 있다. |
1876년(고종 13) | 7세 | 서울 장동(長洞 : 장박골-오늘날 명동 성모병원 자리)에 살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하여 전통적 유학 공부에 전심(專心)하다. 이제촌(李齊村)이란 한학자에게 8세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양부(養父) 이용우(李龍雨)는 선생의 11代祖 시발(時發)의 아들중 현종(顯宗)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경휘(慶徽)와 좌의정(左議政) 경억(李慶億) 형제 중 경억의 후손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承政院의 正三品堂上官)와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하였으며, 가산(家産)도 부유했으나 무사(無嗣)하여 일족이 많이 사는 진천에 내려가 여러 아이들 중 이상설이 영특(英特) 하므로 데려와 후사(後嗣)로 삼아 서울 양부댁에서 성장하다. |
1882년(고종 19) | 13세 | 생부(生父) 행우(行雨)와 양부(養父) 용우(龍雨)의 연상(連喪)을 당하다. |
1883년(고종 20) | 14세 | 생모(生母)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상(喪)을 당하다. |
1885년(고종 22) | 16세 | 고종(高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한 서당보(徐堂輔)의 아들로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한 서공순(徐公淳)의 장녀 대구서씨(大丘徐氏)와 혼인(婚姻) 하다. |
1887년(고종 24) | 18세 | 신병 치료차 강원도(江原道)에 가서 섭렵(涉獵)하며 요양하다. |
1888년(고종 25) | 19세 | 이범세(李範世)‧ 여규형(呂圭亨=圭準)‧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의 학우와 서울 정릉의 신흥사(新興寺)에서 합숙하며, 신학문을 수학하다. |
1889년(소종 26) | 20세 | 이상설선생은 어려서부터 비범(非凡)하여 재동(才童), 또는 신동(神童) 이라는 칭송을 들었고, 20세 전후에는 “문행남하위관(文行南下尉冠)”이라는 칭송을 듣다. |
1891년(고종 28) | 22세 | 양모(養母) 고령박씨(高靈朴氏)의 상(喪)을 당하다. |
1894년(고종 31) | 25세 | 이해 초(年初) 조선조 최후의 전시(殿試) 과거인 갑오 식년시(甲午 式年試)의 문과에 병과(丙科, 12등/57명)로 급제하다. 당대 대문장가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으로부터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고 칭송 받다. |
1895년(고종 32) | 26세 | 4월 7일에 비서감(秘書監=承政院) 비서랑(秘書郞-從六 品)에 임명되다. 그해 6월 17일 비서랑에서 면직하다. |
1896년(건양 1) | 27세 | 1월 20일에 성균관 교수에 임명되고, 1월 25일에 성균관교수 겸 성균관 관장(成均館館長)에 임명되다. 2월 22일에는 성균관 관장을 사임하고, 한성사범학교 교관(漢城師範學校敎官)에 임명되다. 3월 25일에는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사임하고, 4월 19일 탁지부재무관(度支部財務官)에 임명되고, 6월 20일에 의원사임하다. 이 탁지부재무관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무렵 헐버트(H.B, Hulbert) 박사와 친교를 맺고, 영어. 불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新學文)을 공부하다. |
1904년(광무 8) | 35세 | 1월 14일에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을 사임하다, 6월 22일에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이 요구하는 『전국황무지개척권(全國荒蕪地開拓權)』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그를 배척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리다. 이에 광무황제(光武皇帝-高宗)가 이 상소문을 가납(嘉納)하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고 해서 “광무가지(光武嘉之)”라는 말이 전한다. 선생의 상소 후 조야(朝野)에서의 반대상소가 연이었으며, 또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방불케 하는 보안회(輔安會)가 소집되어 연일 종로를 비롯한 서울 거리에서 규탄 대회를 개최하여 결국 일본의 기도를 좌절시키다. 8월에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다. 대한 협동회는 부회장에 이준(李儁). 총무에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에 이상재(李商在). 서무부장에 이동휘(李東輝). 편집부장에 이승만(李承晩). 지방부장에 양기탁(梁起鐸). 재무부장에 허위(許蔿) 등이 선임되어 이미 뒷날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인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
1905년(광무 9) | 36세 | 9월 6일에 학부협판(學部協辦 : 오늘날의 차관급)에 임명되다, 9월 11일에 학부협판에서 법부협판(法部協辦)으로 전임되다, 이 해를 전후하여 여준(呂準).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범세(李範世). 이희종(李喜鍾) 등과 외국 서적을 들여와 만국공법(萬國公法-국제법’의 이전 말)등 법률을 번역 연구하였는데, 그 중 『십간섭(十干涉)』이란 역문(譯文)이 전한다. 11월 2일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다. 이 때는 일제가 포오츠머드 조약을 바탕으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 소위 보호조약)』을 강요 하기 위해 특파사절인 이토오(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를 내한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였다. 이상설선생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등과 협의하여 상하가 순국의 결의로서 조약 체결을 거부하기로 추진하다. 11일 저녁에 덕수궁의 수옥헌(漱玉軒)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이토오(伊藤博文) 주재 아래 대신회의가 강제로 개최되고, 이완용(李完用). 박제순(朴齊純)등 오적(五賊)의 찬성으로 조약체결이 선언되었다. 이때 이상설선생은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참찬(參贊) 이었지만, 일군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야 조약 체결 사실을 알고, 감금에서 풀려나온 참정대신 한규설과 손을 맞잡고 통곡하다. 조약 체결을 안 18일에 이상설선생은 곧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 19일에 그 조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아니한 사실을 알고, 황제가 순사직(殉社稷)의 결심으로 오적(五賊)을 처단하고 조약(條約)을 파기할 것을 주장한 상소를 올리다. 이 같은 상소를 구 후 22일과 24일 또한 그 다음달 8일 까지 전 후 5차에 걸쳐, 올렸으며, 12월 8일에 체직(遞職) 되어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게 되다. 한편 조약 체결 직후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심상훈(沈相薰)등 원로대신들을 소수(疏首)로 백관(百官)의 반대 상소와 복합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다. 11월 30일에 민영환(閔泳煥)의 순국을 듣고 종로거리에 나가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하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시민이 메고 집에 데려와 소생되다. |
1906년(광무 10) | 37세 | 이해 4월 18일에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망명길을 떠나 중국 상해를 거쳐 러시아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다. 이어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들어가 8월경에 사재(私財)를 털어 그곳의 서전(瑞田)터에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다. 처음 70평의 건물에 서전서숙을 열고, 22명의 청소년들을 모아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박정서(朴禎瑞). 김우용(金禹鏞). 황달영(黃達永)등과 함께 역사. 지리. 수학. 국제법. 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철저한 항일 민족교육을 무상교육(無償敎育)하다. |
1907년(광무 11) | 38세 | 3월경에 용정(龍井)에서 네델란드 헤이그(海牙)에 비밀사행(秘密使 行)때문에 서전서숙을 여준(呂準) 등에게 맡기고,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을 대동하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다. 서전서숙은 이해 10월 까지 운영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폐숙(閉塾)하였다. 그러나 그 설립목적과 이념은 가까이는 명동(明東)학교와 신흥(新興) 학교로 이어지고, 멀리는 국내의 각 지방마다 한족의 터전에는 어디에나 이같은 민족주의교육이 확대되어 수많은 민족운동의 역군이 배출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백만 명의 한민족이 사는 북간도(北間島)를 비롯한 남. 북만주와 시베리아 지방에 민족주의교육을 펴고, 나아가 조국독립운동 기지화의 계기를 만들다. 이해 6. 7월에는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鐘)과 함께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高宗)의 수석 밀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 4월 20일자 고종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5월 21일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준과 함께 러시아 귀화(歸化) 2세 차고려(車高麗)의 안내를 받아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노도(露都-러시아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이르다. 그곳에서 이범진(李範晉)과 협력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세 밀사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도착하다. 이와 전후하여 이 비밀사행(秘密使 行)을 크게 도운 헐버트(H. B. Hulbert) 박사도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러시아 수도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하였고, 7월에 들어 미주(美洲)에서 윤병구(尹炳求). 송헌주(宋憲澍)도 그곳에 도착하여 밀사들을 돕다. 이로부터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에 짓밟히는 한국의 실정과 국권 회복문제를 제기시키고 최선을 다했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협상의 성격을 띤 이 회의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다. 그러나 6월 27일에는 한국의 정당한 주장을 명백히 밝힌 공고사(控告詞)를 평화회의의 각국 위원들에게 보내고, 7월 9일에는 이위종(李瑋鍾)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 독립 문제를 부각시키다. 7월 14일 저녁에 밀사 중 한사람인 이준(李儁)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그곳 뉴브 아이큰다우는 공원묘지에 매장하다. 7월 19일부터 헐버트박사와 이위종. 송헌주. 운병구를 대동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여러나라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한국의 영세 중립을 역설하다. 8월 9일 일제에게 제주되는 친일 정부에서 헤아 사행의 정사(正使)라 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판결로 사형이 선고되고, 부사(副使) 이준과 이위종 밀사에게 종신형이 선고되다. |
1908년(융희 2) | 39세 | 각국 순방 중에 이상설(李相卨)선생은 2월에 영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갔으며,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학사원(學士院)에서 명예 학사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다음해 4월까지 1년 남짓 동안 머무르며 미국 조야에 한국 독립지원의 호소를 계속하는 한편, 각지의 교포를 결속 시켜 조국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데 힘쓰다. 또한 이상설은 8월 11일부터 15일 사이에 콜로라도 주(州) 덴버 시(市)에서 개최된 애국동지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도록 막후 역할을 하고 그 회의에 이승만(李承萬)과 같이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하다. |
1909년(융희 3) | 40세 | 2월 1일에 미주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합성협회(合成協會)를 합동하여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고, 후에 이상설선생과 같이 연해주로 간 (鄭在寬)을 총회장으로 선임하다. 이상설선생은 이 국민회의 조직에 막후 역할을 한 것 같다. 4월 22일 이상설((李相卨)은 정재관(鄭在寬). 최정익(崔正益). 송종호(宋鍾浩) 등과 국민회 제1차 이사회를 열고 국민회의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과 함께 연해주로 출발하다. 이 원동행(遠東行)은 국민회의 미주 본토 중앙 총회와 하와이 지방 총회의 공동 결의로 만주와 만주와 연해주에서 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간 이상설선생은 이승희(李承熙). 김학만(金學萬). 정순만(鄭淳萬) 등의 동지 들을 규합하여 조국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위해 이해 여름에 이승희를 그 후보지 물색차 노만(露滿) 국경지방 흥개호(興凱湖) 남쪽 북만주 밀산부(密山府)에 보낸다. 이해 가을에 홍개호 남쪽 봉밀산(蜂蜜山) 부근의 땅, 45방(方)을 사서 1백여 가구의 한교(韓僑)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기 시작하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이고, 그 곳에 한민(韓民) 학교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다. 이상설선생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와 같이 경영하는 한흥동을 왕래하며, 그 경영을 보살피는 한편, 국내외 유지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금을 모집하다. 이승희는 이곳에 4년 동안 머무르며 그 곳을 한민족의 터전으로 이룩하는데 헌신하다. 이해 10월 26일에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르빈에서 이토오(伊藤博文)를 총살하다. 안중근 의사는 이상설(李相卨)선생을 가장 숭모하였으며, 일제 측의 문헌에 의하면 이상설선생이 안의사로 하여금 이토오를 총살하도록 지령하였다는 조사 기록을 남겼다. 이해 음력 8월에 이상설선생은 연해주 맹령(孟嶺)에서 유인석(柳麟錫)을 만나 의병 항쟁 등,광복 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음 12월에 그에게 『권계심서(勸戒心書)』를 보내다. 이해 블라디보스톡에 ‘흥수단(興修團)’을 조직하여 남도인(南道人)의 자위책(自衛策)을 강구하다. 그동안 북도인(北道人)의 한 무리가 지방색을 나타내어 매사에 삼남인(三南人)을 모해(謀害)하므로 이상설선생이 백방으로 조정하여 융화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남도 인들의 세력이 고약하여 부득이 자위책으로 흥수단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해에 이상설선생은 이승희와 의논하고 이수인(李洙仁)을 본국에 보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자금과 광복 자금을 모집케 하다. 또한 선생은 이해 11월경부터 다시 개최키로 예정된 만국평화회의에 제2차 밀사를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상설 선생은 1907년의 제1차 밀사 때의 경험을 비추어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하고자 국내에 널리 연락하여 추진시켰고, 러시아 수도의 이범진(李範晉). 미국의 헐버트박사. 국내의 김동필(金東弼) 등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였다고 한다. |
1810년(융희 4) | 41세 |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6월 21일에 류인석(柳隣錫). 이범윤(李範允). 이남기(李南基) 등과 같이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류인석(柳隣錫)을 선임했다. 그리고 7월 28일에는 류인석(柳隣錫)과 같이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 황제에게 13도 의군 편성을 상주(上奏: 임금에게 말씀을 아뢰어 올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 황제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다. 8월 27일 일제의 ‘한일합병(韓日合倂)’을 계기로 연해주와 간도(間島)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다. 성명회에서는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열강에 대해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보내다. 이상설선생이 초(抄)하고, 유인석 이하 8,624명에 달하는 민족운동자의 서명이 붙은 이 선언서에서 “우리는 세계속에서 ‘대한국(大韓國)’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민은 ‘대한국민인(大韓國民人)’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의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장차 어떻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 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조국의 독립의지를 표명하였다. 이해 9월 11일에 일제가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벌여 이상설선생을 비롯 하여 이범윤[李範允-법부대신 및 주로공사(駐露公使) 이범진(李範晉)의 동생]. 김좌두(金佐斗). 이규풍(李奎豊)등 성명회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간부 수십명이 러시아 관헌에 피체(被逮) 되다. 러시아 총독은 그 중 이상설선생을 니콜리스크(오늘날 우스리스크)로 추방하다. |
1911년 | 42세 | 이해 초, 이상설선생은 러시아 관헌에 의한 니콜리스크 추방에서 풀려 다시 브라디보스톡으로 오다. 12월 19일에 한민장(韓民長). 김학만(金學萬). 이종호(李鍾浩). 정재관(鄭在寬). 최재형(崔在亨)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다. 권업회에서는《권업신문(勸業新聞)》을 간행하고, 북간도에서 이동휘(李東輝)를 초청하여 회무를 맡기고 한민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교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이상설선생은 때론 권업회의 회장 또는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다. |
1912년 | 43세 |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상설(李相卨)선생은 광복군(光復軍-독립군)의 양성과 독립운동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러시아 극동총독 콘지다스지와 친교를 맺고 교유하다. 콘지다스지 총독은 이상설의 인물됨을 알고 예우하여 고문으로 삼고 거처를 마련해준 다음, 생활비로 매월 1백루불씩을 지급했다고 한다. |
1913년 | 44세 | 이해에 뒷날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部)를 함께 세울 이동휘(李東輝). 김립(金立). 이종호(李鍾浩). 장기영(張基永) 등이 중국령인 라자구(羅子溝-중국 길림성 왕청현 )에 대전학교(大甸學校)라는 명칭의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사관(光復軍士官)을 양성하기 시작하다. 이해 12월 경에 어떤 사이비 애국자가 이상설선생을 매장하기 위해 일제의 밀정으로 몰려는 음모(陰謀)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설선생은 아무 변명도 없이 모든 공직을 내놓고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바로프스크로 옮겨 머물며,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이제 몸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읍국읍가우읍가(泣國泣家又泣己)」”는 시(詩)를 읊었다. 그러나 이동휘. 이종호. 이강(李剛). 이갑(李甲). 정재관 등, 지도급 인물들이 신한촌(新韓村)에 모여 “조국의 부흥을 보기도 전에 사당(私黨)을 만들어 동포로서 상호 반목하는 자는 동지 들이 함께 단결하여 군부(君父-임금과 아버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의 원수로 삼는다”는 결의를 하고, 이상설선생을 중심으로 권업회(勸業會)를 발전시켜 가다. 이해에 현지에서 한흥동 건설에 앞장섰던 이승희가 남 만주로 가다. 그것은 4년 동안 경영하던 한흥동에 한족의 단합이 잘 되지 않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선생의 일이 많아 크게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
1914년 | 45세 | 이동휘(李東輝). 이동년(李東寧). 이종호(李鐘浩). 정재관(鄭在寬)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동지들을 모아 국망 후, 최초로 망명정부의 이름을 전할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部)』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다. 이 광복군 정부는 마침 노일전쟁(露日戰爭) 10주년이 되는 해에 세워져 러시아의 설욕의 계기가 될 노일개전(露日開戰)의 기운이 두터워 보였고, 또한 시베리아 한교(韓僑)의 그 곳 이주 개척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이 기념행사를 계기로 크게 활동을 벌여 군 자금을 모아 광복군에 의한 조국독립전쟁을 기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해 8월에 서구쪽에서 먼저 일어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으며, 제국주의의 실리에 밝은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현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 사회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해 9월에는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하다. |
1915년 | 46세 | 3월경 중국 상해 영조계(英祖界)에서 그곳에 망명중인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과 청도(靑島)에서 간 조성환(曺成煥). 시베리아에서 간 류동열(柳東說). 국내에서 간 유홍열(鴻烈)과 간도(間島)에서 간 이춘일(李春日) 등, 민족운동자들이 회합하여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본부를 북경에 두고, 이상설(李相卨)선생을 본부장에 선임하다. 일제측 기록에 의하면, 이때 이상설선생이 상해와 북경까지 직접 간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를 확실히 방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신한혁명단의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이 국내에 들어와 비밀리에 고종에게 국외에서 이상설선생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신한혁명 단을 조직하여 고종을 당수(黨首)로 추대하려 한다고 상주하다 일 군경에게 발각되어 1915년의 소위 보안법위반사건(保安法違反事件)이 발생하다. |
1916년 | 47세 | 이해에 이상설(李相卨)선생은 독립운동의 오랜 망명생활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저 결국 피를 토하는 중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기후가 보다 온화한 니콜리스크(우스리스크) 송황령(蘇皇嶺) 이민복(李敏馥)의 집에 치병 차 옮겨 투병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동지들이 비밀리에 본국으로 연락하여 부인 서씨(徐氏)와 아들 정희(庭熙)가 와서 간호하다. |
1917년 | 48세 | 3월 2일(음력 2월 초 9일)에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蘇皇嶺 또는 雙城子라고도 함)에서 향년 48세로 순국하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 이회영(李會榮)등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었다. 그의 유언대로 동지들에 의해 수위푼하 강가에서 화장되고 생전에 남긴 그의 문고(文藁)도 모두 거두어 불태워 졌다.(*) |
1962년 | |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상훈법(賞勳法)에 의한 독립운동 유공자로 대통령장(復章)을 추서하다. |
1971년 | | 3월 1일에 보재 이상설선생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출생지인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남산골에 높이 10척의「보재 이상설선생 숭모비」를 건립하다. |
1975년 | | 5월 31일에 보재 이상설선생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 지역을 넓혀 이상설선생 현양(顯揚)『숭렬사(崇烈祠)』를 건립하고 존영(尊影)을 봉안하다. |
1996년 | | 8월 3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의 선생의 생가 경내로 이전 중건하고 주변을 정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