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 신림동과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있는 삼성산을 다녀와서!
오늘은 두가지의 역사와 유래를 지닌 서울 관악구와 안양시에 걸쳐있는
삼성산을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 산행동호회에서 영준 대장님의 안내로
다녀왔습니다. 서울대학교 인근의 시계탑 앞에 19명의 대원들이 집결하여 오전 10:00가
조금 지난 시간 들머리인 관악산 공원입구로 들어선 산행은 삼막사로 이어지는 장군봉을
지나 양지바른 곳에서 간식시간을 마치고 하산 원점회귀하는 길을 통해 서울대 입구로
내려와서 근처 식당에서 뒷풀이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노래방에서 여흥을 즐기다가
집에돌아오니 밤 열시 이십분이었습니다
삼성산(三聖山)
'삼성산'은 서울특별시의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
금천현의 진산(각 고을을 진호(鎭護) 하는 주산(主山))이며, 관악산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 소재 온온사가 있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5리 지점에 있는 과천현의 진산이어서
두 산이 별개의 산임을 밝히고 있다.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정화시켜「삼성산(三聖山)」 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
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인
아미타불과 그 왼쪽에 있는 관세음 보살 및 오른쪽에 있는 대세지 보살을
삼성(三聖)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산중에는 삼막사를 비롯하여 염불암, 망원암, 안양사, 성주암(서울) 등의 사찰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1592)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역임하고 후에 우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
(1556∼1618)이 생전에 이 산에 올라 읊은 「차유삼성산운(次游三聖山韻)」이란 장시와,
일제강점기에 고백록(高百祿)의 시조가 전해진다, 또 일찍이 (900) 왕건이 금주, 과주
등의 고을을 정벌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가다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안양사를 지어
오늘날의 안양시명이 탄생되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삼성산(三聖山)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순교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천주교 성지.
내용
1836년(헌종 2) 이후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P. 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J. M. Imbert, 范世亨) 주교, 그리고 샤스탕(J. H. Chastan,
鄭牙各伯)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 피신했으나 은신처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앵베르 주교가 8월 10일에, 그리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뒤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세 선교사들의 시신은 3일간 효시를
당한 뒤 강변 모래밭에 함께 매장되었는데, 약 20일 뒤에 박 박오로 등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 뒷산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1843년(헌종 9)에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서쪽 봉우리인
삼성산(三聖山) 북쪽 끝자락의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다. 박 바오로는 그 이장 경로와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장소를 아들 박순집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고, 박순집은 훗날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자 이러한 사실을 교구에 보고하여, 시복 판사로 활동하던
푸아넬(V. L. Poisnel, 朴道行) 신부가 1886년(고종 23)경에 이들의 무덤을 확인했다. 1901년
10월 21일 이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졌다. 이들 3명은 1925년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시성되었다.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 등의 도움을 받아 삼성산 무덤
자리를 찾은 뒤, 같은 해 5월 12일 그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여 김수환
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박순집의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서울
대교구와 신림동 본당에서 1989년 무덤 자리 일대의 임야 약 16,000평을 확보한 뒤 세
성인의 무덤을 조성하여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남아 있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고 제대 등을 설치한 다음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 등이 축복식을 거행했다.
‘삼성산’이란 명칭은 본래 고려 말 명승 나옹·무학·지공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
되었으나, 이곳에 세 선교사의 유해가 안장되고 그들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름에 따라
천주교회 안에서는 ‘삼성산’을 ‘세 명의 성인 유해가 안장된 성지’로 설명하게 되었다.
현재 삼성산 성지는 삼성산 본당에서 보살피고 있다.
참고문헌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오기선,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 1988)
『한국천주교회사』중(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천주교 삼성산 성당(www.ssss.or.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군봉[將軍峰]
장군이 거처하였다고 전하는 산인데 관악구 봉천동에서
관악구 신림동에 걸쳐있는 봉우리
관악구 봉천제8동과 신림본동에 걸쳐 있는 관악산
줄기의 산봉우리로서, 예전 어떤 장군이 거처하였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슬픈 계절에 만나요.
백영규: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 / 사러름
귀뚜라미 울음 소리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바람결에 보일것 같아 그의 모습 기다렸지만
남기고 간 뒹구는 낙엽에 난 그만 울어버렸네
사랑인 줄은 알았지만 헤어질 줄 몰랐어요
나 이렇게도 슬픈 노래를 간직할 줄 몰랐어요
내 마음의 고향을 따라 병든 가슴 지워버리고
슬픈 계절에 우리 만나요. 해맑은 모습으로
사랑인 줄은 알았지만 헤어질 줄 몰랐어요
나 이렇게도 슬픈 노래를 간직할 줄 몰랐어요
내 마음의 고향을 따라 병든 가슴 지워버리고
슬픈 계절에 우리 만나요.
해맑은 모습으로...해맑은 모습으로........
........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사랑인 줄은 알았지만 헤어질 줄 몰랐어요
나 이렇게도 슬픈 노래를 간직할 줄 몰랐어요
♥
내 마음에 고향을 따라 병든 가슴 지워버리고
슬픈 계절에 우리 만나요 해맑은 모습으로
바람결에 보일것 같이 그의 모습 기다렸지만
남기고간 뒹구는 낙엽에 난 그만 울어버렸네
2018-02-0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