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해야 할 일
2024.06.30.(성령강림후제6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 지으려는 것이다. 17/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태 18:15-20)
들어가는 말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릅니다. 하지만 제자임을 자부하는 우리들 역시 때로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너의 잘못을 죄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곧 정죄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가지고 그를 죄인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를 전제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잘못했다는 이유로 형제자매를 죄인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하나님은 작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형제자매로 인정하시고, 작은 사람들을 하늘나라의 중심으로 맞아들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형제자매는 누구인가요? 그들은 작은 사람들이 아닌 바로 동료 제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가 전제될 때, 형제자매의 죄는 분명해집니다. 제자들의 죄란 작은 사람들을 하늘나라, 즉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의 중심으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15)
형제자매의 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사람들을 그들의 형제자매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들을 중심에 받아들이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본문은 예수님이 군중을 향해 설교하시는 장면도 아닙니다. 이 장면이 군중을 향해 말한 것이라면, 형제자매들이란 불특정한 누군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의 누군가가 교회 안에 있는 너에게 죄를 지으면’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네 형제’라고 말한 형제자매는 제자들이며, 그것은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즉 형제자매란 우리 가운데 있는 나 또는 너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자매가 죄를 짓는 대상이 누구인지 살펴봅시다. 우리 성경은 ‘너에게’를 괄호 안에 넣고 있습니다. ‘너에게’란 단어가 없는 사본들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사본들을 따르면 죄의 대상은 분명해집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15) ‘형제자매의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향한 시기나 질투가 아닙니다. 동료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가슴을 후려치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형제자매의 죄란 제자들이 경계해야 할 ‘작은 사람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인인 형제자매를 향해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의 죄는 나에 대한 잘못된 언행이 아닙니다. 따라서 형제자매는 나에 관한 문제로 고발할 수 있는 대상도, 용서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는 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는 나의 형제자매입니다. 제자 된 형제자매들끼리의 시기와 질투, 상처받음은 단지 서로 대등한 입장이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미성숙일 뿐이며, 이것은 서로 화해하면서 떨어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를 향해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형제자매의 죄를 드러낸 후 다시 형제자매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의 죄를 드러냄
하늘나라를 이 땅위에 세우라는 주님의 부름을 받은 공동체는 형제자매의 죄를 드러내야 합니다. 죄의 방치는 하늘나라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15) 개인적 충고는 그의 죄를 그가 보도록 드러내는 것입니다. 드러내야 하는 형제자매의 죄란 이런 것입니다. ‘너는 지금 공동체에서 작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면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곰곰이 따져볼 것입니다.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5) 형제자매가 나의 말을 들으면, 나는 다시 형제자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16) 형제자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의 죄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은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 지으려는 것’(16)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자매가 여전히 자기가 작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제 이 문제를 교회에 말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리는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는 제자로서 교회의 구성원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17)
작은 사람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늘나라에 속하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그는 하늘나라의 현장에 발을 디디고 있긴 하지만 이방인이며,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세리처럼 이방인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형제자매가 아닌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본문에 표현된 교회는 곧 이 땅에 실현된 하늘나라이기에 교회 공동체의 결정은 곧 하늘나라의 결정이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
다시 해야 할 일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여기서 ‘거듭’(again)은 어떤 상황을 반복하며, 무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두 사람이 합심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16절에서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간 상황과 연결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형제자매를 위해 찾아간 ‘두 사람’이 서로 합심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자매를 찾아간 그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함께 일하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를 찾아가 그의 죄를 드러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작은 사람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지쳐버린 형제자매를 찾아가 다시금 함께 하늘나라를 세우자고 설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다시 돌아와 형제자매가 될 수 있을까요? 형제자매를 찾아간 제자들도 그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심지어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 즉 다시 형제자매가 되는 일도 우리가 그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면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잃지 않는 일이란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잃지 않으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자녀도 잃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하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사람들을 맞아들이지 못하는 형제자매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그 형제자매를 잃지 않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 두세 사람이 형제자매를 위해 만나는 곳에,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20) 그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작은 사람들을 우리의 중심에 맞아들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이 이유 없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한 결 같은 마음으로 어린아이들, 그리고 작은 사람들과 함께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실제로 떨어져 있기도 한 우리 자신을 보며 놀랄 때도 있습니다. 작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일관되게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제자들의 형제자매와 같은 죄 가운데 빠지곤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형제자매들에게,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상태인지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죄 가운데 빠졌음을 드러내 줄 형제자매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빠졌음에도 아무도 그것을 상기시켜주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체는 하늘나라를 실현하는 살아 있는 교회, 살아 있는 공동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그가 다시금 형제자매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를 위해서도 똑같이 기도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형제자매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