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중[ 尹石重 ]
수많은 동요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부르게 해준 동요의 아버지
출생 - 사망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이 ‘어린이날 노래’는 윤석중선생이 시를 짓고 윤극영선생이 곡을 붙인 동요로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보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기가 태어나 처음 배우는 ‘짝짜꿍’도 윤석중이 지은 노래이다. 윤석중은 이 외에도 수많은 동요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부르게 해준 동요의 아버지이다. 상실의 시대에 태어나 상실의 환경에서 자라다 윤석중(尹石重, 1911.5.25 ~ 2003.12.9)은 국권피탈이듬해인 1911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수표정(동) 13번지 초가집에서 윤덕병과 조덕희 사이에서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시대부터 세도가로 알려졌고 아버지 윤덕병(1885-1950)은 무신론자로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하던 지식인이었으며 어머니 조덕희는 천석지기 집안의 무남독녀 외딸이었다.
윤석중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서 자란다. 많은 형제들도 모두 일찍 죽어 그는 외톨이가 된다. 석중(石重)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마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라’의 시대였다고 윤석중은 회상한다. “밖에 나가 놀지 마라.”를 비롯하며 “많이 먹지 마라, 배탈 날라. 뛰어놀지 마라, 넘어질라. 남의 집에 가지 마라, 병 옮아올라.” 등등. 일찍 혼자가 되어 딸 하나만 키웠던 외조모는 외톨박이 외손자 윤석중 때문에 늘 걱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윤덕병은 무신론자로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운동, 사회운동에 헌신한 분인데 석중이 아홉 살 때 재혼한다. 그와 더불어 석중은 수은동 외가에서 아버지를 만나러 수표교를 건너 본가를 왕래하게 된다. 출생부터 그를 둘러싼 상실의 환경은 “어머니는 왜 나만 남기고 돌아가셨을까, 언니랑 누나랑 많았다는데 왜들 오래 못 살고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고 이러한 의문은 그에게 생각하는 버릇을 갖게 했다. 실제로 그 의문은 어린아이로서는 풀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어린이들을 위한 문화운동, 문학운동에 일생을 다하는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생의 여러 의문들을 안고 수은동 외가에서 수표동 본가를 오가던 윤석중은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성찰이 문학으로 물길을 내게 된 것이다.
열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윤석중은 열 살(1921년)이 되어서야 교동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일본말을 배우는데 일본노래 ‘봄이 왔네(春が来た)’에서 모티브를 얻어 우리말로 된 시 ‘봄’을 쓰게 된다. ‘봄이 왔네’라는 이 노래는 우리말로 하면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어디 왔나, 산에 왔네, 마을에 왔네, 들에도 왔네.”이다. 윤석중은 학교에서 야단을 맞으며 “봄이 왔네”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일본 노래를 못 부른다고 선생님께 혼나면서 ‘우리나라에도 버젓이 봄이 있는데 하루(봄春의 일본말)가 다 뭐람’ 하는 생각이 들어 배울 때마다 정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따뜻한 봄이 오니 울긋불긋 꽃봉오리, 파릇파릇 풀잎사귀”로 시작되는 ‘봄’을 쓰게 되고 이 시가 <신소년>에 뽑힌다. <신소년>에서 일찍 문학성을 인정받은 어린이 윤석중은 1923년 [상록수]를 지은 심훈의 조카 심재영과 <꽃밭>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만든다. 1925년에는 초등학교(학제 5년)를 1년 월반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양정고보에 들어간다. 그해 <어린이>(1925년 4월호)에 ‘오뚝이’가 입선으로 뽑힌다.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고나야/술에 취해 얼굴이 빨개가지고/비틀비틀 하는꼴 우습고나야”로 불리는 ‘오뚝이’는 거드름이나 술기운을 빌린 으스댐, 떨어져도 안 아픈 척 체면 차리는 당대 어른들의 모습을 오뚝이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같은 해 8월 15일에 윤석중은 동인회 ‘기쁨사’를 만들어 등사판 잡지 <기쁨>을 일 년에 네 차례 출간하고 <굴렁쇠>라는 회람잡지도 만들어 동인들끼리 돌려보게 된다. 회람잡지<굴렁쇠>는 두꺼운 표지에 “회람잡지 굴렁쇠”라고 쓰고 각자가 지은 동요와 글동무들에게 알릴 일을 작은 편지에 곁들여서 원고를 묶었다. 이 원고를 서울의 윤석중이 진주의 소용수에게 보내면 소용수가 읽은 뒤 자기 글을 실어 마산의 이원수에게 보내고, 이원수가 읽은 뒤 자기 글을 실어서 언양의 신고송에게, 신고송이 울산의 서덕출에게, 서덕출이 수원의 최순애에게……이렇게 한 바퀴 돌아가면 다시 윤석중에게 오는 것이다. 그때 동인으로는 진주의 소용수, 마산의 이원수, 언양의 신고송, 울산의 서덕출, 수원의 최순애, 그리고 원산, 북청, 김천, 안주, 신천에도 동인들이 있어서 글을 실은<굴렁쇠>는 우리나라 남북으로 굴러다니게 된다. 또한 같은 해 11월부터 윤석중은 <어린이>지 부록이었던 <어린이 세상>을 맡아 꾸리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개벽사’에 드나들게 되고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일하게 된다.
조선의 동포들아/ 이천만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주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조선물산장려가’ 부분
위의 시는 1926년 양정고보 2학년 때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당선된 ‘조선물산장려가’이다. 이 시가 당선되면서 윤석중은 천재적 어린이 예술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윤석중은 이후 왕성하게 시창작 활동을 한다. 1927년 여름방학에는 ‘봄편지’를 쓴 ‘굴렁쇠’의 동인인 울산의 서덕출을 만나러 떠난다. 서덕출은 척추장애가 있는 소년이었다. 서울에서 윤석중이 내려온 것을 안 ‘굴렁쇠’ 동인 언양의 신고송, 대구의 윤복진이 합류하여 네 사람은 굴렁쇠처럼 돌아가며 한 소절씩 시를 쓰게 되는데 이 시가 “오동나무 비바람에/잎떠는 이 밤/그립던 네 동무가/모였습니다.//이 비가 개이고/날이 밝으면/네 동무도 흩어져/떠나갑니다.(중략)” 하는 ‘슬픈 밤’이다.
양정고보 시절 춘원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있는 신문에 윤석중의 시가 연달아 발표된다. 어느 날 윤석중(尹石重)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윤석동(尹石童)으로 잘못 인쇄된다. 중(重)자가 동(童)자와 비슷해서 생긴 일인데 이를 보고 “석동(石童)이라는 아호가 좋소, 누가 지었지?” 하는 춘원의 칭찬에 석동(石童)은 그의 아호가 된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운동이 발발하면서 윤석중은 그들과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쓰고 5년 동안 다닌 양정고보를 졸업 며칠 앞두고 자퇴한다. 1930년 가을에는 19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한다.1932년 7월 20일 첫 창작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신구서림, 1932)을 출간하고 1933년에는 35편의 동시를 실은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출간하며 방정환이 맡았던 잡지 <어린이>의 주간이 된다. 1935년 9월 10일에는 독립 운동가이며 조선건국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던 여운형의 주례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 사는 박용실과 결혼한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의 발행과 글짓기 운동을 전개하다
윤석중은 1923년 심재영, 설정식과 함께 만든 등사판 잡지 <꽃밭>을 시작으로 회람잡지 <굴렁쇠>를 만들어 동인들의 집을 굴러다니게 하였고 1931년에 방정환 선생이 타계하자 <어린이>지의 편집을 맡아 본다. 이후 <어린이>가 폐간된 후 조선중앙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잡지 소년중앙>을 창간하는데 1년을 못 채우고 개벽사에서 최영주와 함께 잡지 <중앙>을 맡게 된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어린이 잡지<소년>을 맡는다. 이때 강소천의 ‘닭’이 <소년>에 발표된다. 그해 가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의 양해를 얻어 우리나라 최초의 그림잡지 <유년>을 출간한다.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기러기’ 1연
창간호가 종간호가 된 <유년>에 실린 ‘기러기’는 원제가 ‘벤조를 뜯어라(Massa’s in the Cold, Cold Ground’)인 포스터의 곡에 붙여 동요로 불리게 되었다. 1939년 윤석중은 <소년>지 편집을 맡아 본 지 2년 만에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의 계초장학금을 받아 동경 상지대학 신문학과에 유학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에서 벨기에 ‘고라르’신부를 도와 우리말 잡지<빛>을 발간한다. 해방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인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고 어린이 해방가 삼아 ‘어린이날 노래’를 짓는다. 또한 문교부에서 졸업식 노래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로 시작되는 ‘졸업식 노래’를 짓고 ‘짝짜꿍’에 곡을 붙인 정순철을 만나 노래로 만든다. 그때 윤석중은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가 마음의 꽃다발을 생각하고 쓴 것인데 이후 졸업식장에 꽃다발이 그렇게 많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윤석중은 부친과 새어머니를 비롯한 이복동생을 모두 잃는다. 이듬해인 1951년 11월 11일에 윤석중은 ‘윤석중 아동 연구소’를 차리고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에게 ‘내가 겪은 이번 전쟁’이란 주제의 글을 모집하여 뽑힌 글들을 책으로 엮어낸다. 동족 전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어린이들의 글을 통해 알리려는 윤석중 방법의 반전운동이었다. 1954년에는 ‘윤석중 아동연구소’의 이름을 바꿔 <새싹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새싹회> 산하에 어린이합창단, 어린이 합주단, 글짓기 교실, 애기회 등을 두었다. 소파상을 제정하고(1957), 장한 어머니상도 제정하였으며(1961) 해송동화상(1955), 새싹문학상(1973)도 제정한다. 그리고 계간지 <새싹문학>을 창간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2011년 봄치로 115호) 열세 살에 발간한 잡지 <꽃밭>에서부터 오늘날의 <새싹문학>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를 위한 잡지의 발간은 윤석중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이들을 향해 달리면서 굴리던 굴렁쇠였다.
1986년의 모습 | 소파 방정환의 동상을 남산에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기던 날(1987년) |
아시아의 노벨상,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받다
윤석중은 1978년 동양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언론 문학창작상)을 받는다. 이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동심은 국경이 없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자유자재로 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며 “나의 직책은 문학가이지만 길이길이 어린이를 돌보는 작은 시중꾼이 되겠노라”고 말한다.
새신을 신고/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 ‘새신’
무엇이 무엇이 똑같은가/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 ‘똑같아요’
나란히/나란히/나란히/밥상위에 젓가락이/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장대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달 따러 가자’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 ‘우산 셋’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잘다 - ‘기찻길 옆’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할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 댁에 - ‘집보는 아기’
그는 일생동안 1,300여 편에 가까운 시를 썼다. 그리고 800여 편이 동요로 불렸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부천의 창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강원도, 제주도 등 30여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교가를 지어주었다. 그가 남긴 동요를 살펴보면 그의 문학인생은 아기들의 생활모습은 물론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정을 나누며 동심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상실의 시대에 태어나 상실의 환경에서 자란 그는 스스로 “노래 나그네”로 어린이의 시중꾼으로 한평생을 살다가 2003년 12월 9일 생을 마감하였고, 2003년 12월 9일 대전 국립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인물한국사, 노경수, 장선환)
2023-04-0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