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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개
본문 마태복음 4장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회개와 자복 우리는 회개를 자주 언급하지만 회개가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회개에 대한 그릇된 이해 때문이다. 회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와 자복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복하다’는 ἐξομολογἑω(엑소몰로게오)이다. 뜻은 1) ‘고백하다’ - 제가 이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2) ‘동의하다’ - 저에게 지적하신 잘못들을 인정합니다. 3) ‘약속하다’ - 앞으로는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백이든 동의든 약속이든 모두 다 입으로 말로 하는 것이다. ‘회개하다’는 μετανοἑω(메타노에오)로 아예 돌아서거나 길을 바꾼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회개는 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복이 회개의 시작일 순 있지만 그 자체가 회개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복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회개이다. 죄가 많아서 교회 못가겠다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죄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자복은 하면서도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의 회개는 대부분 경우에 자복으로만 끝나버린다. 자복이 하나의 출발점이라면 회개는 선으로 지속적인 삶을 의미한다.
회개의 중요성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전제조건이다.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나라를 얻는다. 침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를 제일 먼저 강조하였다(마3:1,2 ; 4:17). 회개가 중요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마11:20-24), 반드시 망한다(눅13:1-5). 하나님의 신뢰받는 계속적인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도 회개가 중요하다. 주님을 믿다가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고도 회개치 않으면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신다(계2:4-5). 부모가 자식을 모두 사랑하지만 신뢰하는 자식은 따로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신뢰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이는 회개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회개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행2:37-38). 회개하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영육간에 유쾌한 삶을 사는 것이다(행3:19). 유쾌하다는 말의 뜻은 ‘시원하다’이다. 죄는 우리 몸과 영혼을 무겁게 한다. 죄짓고 오랫동안 도망 다니다 붙잡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차라리 속이 편하다고 말한다. 죄는 인간을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성령과 동행하면 몸과 영혼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상쾌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 유쾌한 삶도, 신뢰받아 쓰임 받는 종도, 하나님 나라와도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회개 없는 삶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이다.
침례요한의 회개촉구 침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했다(눅3:7-9). 다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는 질문에 자신의 여유분을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이 회개의 삶이라고 대답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금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했고(눅3:12-13),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 협박하지 말며, 중상모략하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며 살라고 말했다(14). 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헤롯을 책망했다. ‘책망하다’의 헬라어 ‘엘렝코’는 ‘유죄를 선고하다’는 뜻이다. 헤롯에게 죄가 있음을 경고하고 회개를 권고한 것이다(눅3:19). 이렇게 요한은 자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삶과 행동이 수반되는 회개의 열매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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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은 옳은 말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질책과 명령만으로는 인간의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막1:4-5). 교회에서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듣고 입으로 죄를 자복해도, 그 자복이 교회 밖에서 회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이 이끄신 회개 1.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며 부자였다. 그가 부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정축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눅19:1-2).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세리가 왜 이렇게 잘 사느냐? 너는 양심도 없느냐’고 질책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부당하게 탈취한 재산은 네 배로 갚겠다고 했다. 삭개오는 자복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회개의 삶을 실천했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를 불러 그의 집에 들어가셨다(5-7). 예수님을 모시게 된 삭개오의 기쁨과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삭개오를 위해 이를 기꺼이 감수하셨다. 그것은 불의한 세리장 삭개오로서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유대인 중에서 로마의 하수인인 자신과 함께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의 비방을 받으면서까지 자기 곁에 계셔 주셨다. 예수님의 그 사랑 앞에서 삭개오는 그동안 우상으로 섬겨 온 재물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2.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경우 즉시 사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체력이 건강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릴 경우 사흘이 지나서 죽기도 한다. 예수님은 못 박힌 지 6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이는 그 정도로 주님의 육체가 허약했음을 말해 준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형수는 횡경막이 기도를 막아 숨이 끊어지기 까지 기력이 있는 한 악에 받쳐 온갖 욕을 다 내뱉었다. 두 강도 역시 십자가에 못 박히자마자 함께 못 박힌 예수님을 욕하기 시작했다(마27:38-44). 그러나 예수님은 처참한 죽음의 상황에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못 박은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자기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도의 내용을 들은 한 강도는 그 사랑 앞에 마음이 움직여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회개의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눅23:39-43).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우 두 가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직접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자발적으로 회개의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복이 회개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 준다. 말씀 속에서 살펴본 회개 1. 가출한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방탕하게 살다가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는 돼지 먹이도 먹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을 때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를 향해 돌이켜 돌아갔다(눅15:17-20). 대부분은 이 부분을 탕자의 회개로 본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회개의 전부라면 지금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이유는 단지 종살이를 하더라도 육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다. 그리고 탕자를 만난 아버지가 그를 종으로만 대우한다면 탕자는 배고픔이 해결되면 다시금 집을 떠날 기회를 엿볼 것이다.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탕자는 상식적으로 아버지보다 아들이 먼저 알아보아야 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거지꼴인 아들을 알아보고 단숨 에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내게 밥만 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산을 절반이나 날려 버린 자신을 여전히 아들로 대해주며 자신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었다. 이 사랑 앞에서 아들의 회개는 점이 아닌 선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동기는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얻기 위해, 또는 경재적인 이유로 교회 문턱을 넘는다. 회개의 삶은 어떤 동기로 교회 문턱을 넘었든지,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살려주시고 품어주시고 자녀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깨닫기 전에는 자복으로 끝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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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울은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그 어떤 핍박이나 곤고도, 죽음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롬8:35-39). 자신의 전 일생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잦아들고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속에 날마다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 중심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회개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체포조의 일행 중에 사울(바울)만을 구원해 주셨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서 유독 바울만 집어내셨듯,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도 않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바울은 구원받은 이후 그날 현장에서 어떻게 자신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창세전부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해 주셨다는 것 외에는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엡1:3-5).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나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엡2:8-9). 그래서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하나님의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 일평생 사도 바울로 회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바울이 일평생 전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였다(고전2:1-2). 예수께서 자신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의 재물이 되어주셨기에 자신이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죄에서 해방된 사람’(누룩 없는 자)은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 증언한다(고전5:7). 그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양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 할 때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유월절이었다. 양의 피를 발라 둔 이스라엘백성의 집은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 갔다(출12:13). 그래서 유월절은 넘어간다(passover)는 뜻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재물 되심은,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가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누룩을 내어버리는’ 회개의 삶을 살게 됨을 강조한 것이다. 4.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런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 속에 거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된다(갈2:20).‘대속’,‘속죄’(atonement)는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값을 대신 치루는 것을 말한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심으로 죄의 올무에 빠져 있던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것이 바로 ‘atonement'(어토운먼트)인데 이는 세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at-one-ment' - 'at'은 ‘…에’라는 전치사, 'one'은 ‘하나’를, ‘ment'는 ‘상태’를 의미하는 접미사이다. 주님으로부터 구속받은 자는 주님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임을 일깨워 준다. 내 자식이 아프면 부모인 나도 아프다. 그 아이와 나 사이에 atonement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백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졌다.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된 상태를 이루니 주님의 부활과도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속에 살아계신 주님을 위해 살았다. 그의 생애가 회개의 삶으로 일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주님께서 당한 십자가의 고난 그리고 부활과 atonement가 일어난 사람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신의 정과 욕심이 못 박힌 것을 확인한다(갈5:24). 5. 바울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회개의 삶으로 일관하였음에도, 자신의 삶을 완성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빌3:13-14). 과거에 한 일을 되돌아보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간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업적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푯대로 삼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자신의 업적이 아무리 커도 자신을 살려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 자신은 부족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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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남긴 유언장과도 같은 글이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4:6) 포도주 같은 액체를 하나님께 부어 드리는 제사를 관제라 했다. 컵에 가득 찬 액체를 부으면 다 쏟아지는 것처럼 자신의 생이 이제 끝났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내가 믿음을 지켰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셨다”고 고백했다. 누가 외에 모두 떠나고, 겨울이 오는 추위와 죽음을 앞둔 극한 상황 속에서(4:9-13)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7.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기 전, 이미 존재했던 자생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 전에 복음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알려 주기 위해 로마서를 썼다. 바울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맏아들인 예수를 본받게 하기 위하여 택정하셨다고 말씀하였다(롬8:29-30).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올려 주시기 위해 미리 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정했다고 다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30). 하나님께서 불러주시지 않으면 그만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제외하시지 않고 불러주셨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돈을 잃게 하고, 어떤 이는 건강을 상하게 하고, 어떤 이는 사람문제로, 혹은 진정한 사랑으로 부르신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다음에 우리 죄를 심판하기만 하신다면 부르심을 받지 않음만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셨는데 거기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있다. 독생자를 십자가 제물로 삼으시고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 깊고도 넓은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힘입어 당연히 회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입으로 자복은 하면서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잘나고 건강한 사람이 많은데 왜 나처럼 흠 많은 사람을 구속해 주셨는지, 부요하고도 불안한 사람이 많은데 왜 내게 믿음을 주셔서 주님의 평강 속에 살게 하시는지, 성령으로 내 마음을 감동하셔서 갈수록 주님에 대한 믿음을 더 크게 해 주시는지 그 사랑의 깊고도 넓은 사랑을 설명할 수 없지만 확실히 아는 것 하나, 이 땅에서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동안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그 사랑을 잊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자복의 점이 아니라 아름다운 회개의 선으로 연결될 것이다.
결론 1. 회개는 우리의 행위 이전에 우리의 중심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에만 집착하여 돌이키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회개란 행위 이전에 본질적인 문제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기미가 생기고 피부가 상하는데 약을 바르면 얼마간 상태가 호전 되는 듯 보이지만 원상복귀 된다. 그래서 피부를 상하게 하는 몸속의 본질을 다스려 피부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회개 역시 잘못된 행위보다-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2. 회개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어있음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회개의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깨어있으면 그 사랑을 힘입어 회개의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때에는 자복이 곧 회개가 된다. 자복하는 동인이 하나님의 사랑이므로, 회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중심이 하나님과 바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자복과 회개가 구별되지 않는다(요일1:9). 3. 다른 사람을 회개로 이끄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나의 삶이다. 회개에 대해 생각만 하는 것은 철학이다. 회개하라고 소리치는 것은 율법이다. 복음은 회개의 동인인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자식은 야단쳐도 바뀌지 않는다.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야 그 사랑 속에서,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식의 삶이 달라진다. 주위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오늘도 도처에서 회개의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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