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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8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교회 이야기’ - 4. 거대한 ‘로마’를 딛고 서서
본문 : 사도행전 10장 1~2절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새번역>
시대 상황을 보았을 때 원래 이런 성경 기록이 등장해야 정상 아닐까요?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잔인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로마 황제를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들을 철저히 짓밟으며, 늘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람이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야 정상인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가장 강력한 국가가 어디였습니까? 로마였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즉위했던 BC 27년때부터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다스렸던 AD 180년까지 지중해 세계가 로마로 인해 비교적 안정을 누렸던 시기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로마화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문화, 예술, 정치 등 모든 삶의 전반적인 부분이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의 등장을 지금 사도행전 10장은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황제를 위해 지어진 도시, 그 이름도 ‘가이사랴’라고 명명한 지역의 백부장, 즉 가이사랴 황제를 위해 가이사랴라는 이스라엘 땅으로 파견되어 온 군인, 고넬료가, 그 주인공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라는 거대한 시대상과 흐름을 딛고 서서, 아니 심지어 거슬러 서서, 거꾸로 강을 오르듯, 당시에는 아주 작디작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그의 직업 특성상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했던 행동이었습니다. 반역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를 두려워해야 할 군대 백부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하들이 보기에 충분히 반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상관이 거대한 로마에 속해 있던 이들에게는 충분히 반감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에 대한 설명은 확실합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장 1~2절, 새번역>
지금 시대에도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대, 정말 놀라운 평가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고넬료라는 사람이 진실 된 사람인지 성경의 기록으로 충분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특별히 백부장의 자리에 오를 정도면, 앞으로 ‘로마’에 속해 있기만 해도, 거대한 로마라는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그 ‘로마’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당시에 다들 가지지 못해 안달이었던 ‘로마’를 버리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 시민권’을 버리고, 아프리카 오지의 마을 시민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굳이 그런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 시민권이면 전 세계 어디든 어느 정도의 편안함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시민권은 미국 시민권보다 훨씬 더 강력하면 강력했지 부족함이 없는 통행증이었습니다.
고넬료가 어떠한 계기로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전해준 이가 있었기에, 오늘 고넬료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먼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아직 세상이라는 로마를 살고 있는 예비 고넬료들이 예수를 만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예비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쉽지 않은 ‘믿음의 여정’을 겪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자라고, 로마의 법을 배우며, 로마의 군인이 된 고넬료가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문화’의 차이가 정말 너무도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서, 딛고 서서, 거슬러서, 이제 곧 베드로까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스려야 할 유대인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신들에 비하면 너무도 작고 유치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까지 받게 됩니다. 그 와중에 베드로를 통해 성령의 임재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으로서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신 사실에 놀랐다. <사도행전 10장 45절, 새번역>
베드로조차도, 유대인들조차도,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신 사실에 놀랐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문화적 충격을 적잖게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신들의 유대교를 딛고 일어서야 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를 딛고 서서, 유대교를 딛고 서서, 과거를 딛고 서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모든 편견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신 놀라운 현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화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살았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환경인지에 따라 그 ‘문화권’에 따라 사람이 형성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로마인은 로마인으로, 한국인은 한국인으로 각 자 다른 문화 속에서 ‘기독교’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문화들을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절대 기독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인으로서 기독교인,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인의 방법으로, 유대인의 방법으로, 그 어떤 방법으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기초가 되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본법 위에 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 새번역>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마주해야 할 완전히 새로운 문화이고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베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의 임재와 침례와 구원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던 로마의 문화로는 신을 사랑한다는 개념, 이웃을 사랑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다신(多神)의 문화 속에서 아무 신이나 내가 골라잡아 믿으면 되는 것이고, 이웃은 사랑이 아닌 경쟁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 로마를 딛고 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고넬료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바로 ‘교회’에서 딛고 일어서야 할 몇 가지 사항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이겨내지 못하고, 섞여 있고, 지배당하고 있는 문화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길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가지고 있는 옛 습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에베소서 4장 22~24절, 새번역>
새 사람을 입어야 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버리지 못한 묵은 것, 옛 것이 있기에 함께 묵상하고 이 시간 딛고 일어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유교적 기독교입니다.
알게 모르게 교회는 기독교와 유교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뜻이 다른 삼강오륜 등의 유교의 전통, 심지어는 유교처럼 보이는 토속신앙, 샤머니즘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적 기독교’라고 표현하면서 문화가 결합될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중 하나로 기초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언제나 그 기초는 성경이어야 하고 말씀이어야 하는데 그 기초가 말씀과 거리가 먼 것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 혈연 공동체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불평등과 서열 문화
교회는 한 아버지와 어머니에서 태어난 ‘핏줄’이 아닙니다. 즉, ‘혈연’ 공동체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혈연관계로의 가족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혈연’에 매여 있으면 가족을 넘어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에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한 아버지만 존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주로 모신 모든 이들은 평등하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할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래에서 부모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부모의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한 분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회에 오면 모두가 다 예배자로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비록 내 자녀라 할지라도 교회에서는, 예배에서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부터 먼저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혈연 공동체로 이해하게 되면 신앙의 영역조차도 하나님 아버지를 뒤로 한 채 부모가 그 역할을 하려 하는 모습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게벳의 노래’에 나오는 가사를 부모님들은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도 부모님을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존경하고 존중하며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부장적, 권위적 문화를 배척해야 합니다. 남녀도 차별되어 구분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신앙적 판단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빈부 격차에 따른 신분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특별히 목사, 부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등으로 이어지는 서열 문화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의식 중심적, 예를 중시하는 제사 같은 예배
하나님은 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겉치레와 형식은 회칠한 무덤이라 말씀하시며 경계하십니다. 왜냐하면 중심이 없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 중심적이고 예법만 중시하는 제사로 변질된 예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유교적 제사처럼 예배를 드려야만 제대로 예배를 드린 것 같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장을 입고 단정한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며 경건을 오해하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절제하며 무표정이나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을 거룩함이라 거룩을 오해하게 되면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배는 제사가 아닙니다. 예배는 죽은 이들을 위한 예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중심으로 기뻐하며 전심으로 즐거워하며, 감동과 감격과 감사의 역동적인 시간입니다. 의식도, 예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겉치레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면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3. 인과응보식 공포감 형성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자유로운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기에 우리는 이제 죽음이 아닌 영원한 삶을 보장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인과응보식으로 공포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해서, 충분히 기도하지 않아서 불행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헌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는 둥,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아 나쁜 일이 생긴다는 둥, 아프면 분명히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회개해야 한다는 둥,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둥 마치 질병이나 고난, 환란이나 걱정, 아픔,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인과응보식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교회에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지 않고, 치료를 받지 않고, 40일 금식기도, 100일기도, 1000일 기도를 한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학이라는 좋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그 선물로 인한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헌금과 건강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불성실한 예배와 나쁜 일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구원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아서,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는 인과응보식 공포심은 절대적으로 교회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자유하셔야 합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4. 말씀보다 설교가 중심이 된 기독교
성경읽기보다 설교듣기에 더 집중하는 이유는 성경책을 직접 읽으려고 하는 노력의 부족함, 게으름도 있겠지만 의존주의적이고 권위적인 교회의 모습에서 생긴 폐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그 목회자가 지나친 권위주의의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말씀을 해석하는 설교가 더 중요해 보이고, 그 설교에 따라 신앙생활이 결정되어지는 위험함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직접 읽기가 너무도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불교적 기독교입니다.
유교적 기독교보다 더 딛고 일어서야 할 문화가 바로 불교적 기독교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와 기독교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1. 사주팔자와 윤회에서 벗어나기!
구원 받아 새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팔자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점을 그렇게 자주 보러 다니는가 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여러분, 점은 안 보셔야 합니다. 장난으로라도 사주팔자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타로점 보러 가지 않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우리의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사주팔자는, 명리학은, 파고들수록 우리의 심령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평안을 빼앗아 가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윤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업보를 뛰어 넘어, 제대로 윤회하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하나님 나라와 혼합하게 되면, 마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재미로라도’ 부추기며 관심을 가지는 문화가 교회 안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현실 도피는 멋있게 보여 질 수 없다.
끊임없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희소식으로 찾아온 장소가 바로 ‘템플스테이’입니다. 그리고 그 템플스테이가 변질되어 장소만 기도원으로 바뀐 ‘기도원스테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열반과 출가를 오해하다 보니 열반과 출가를 현실 도피로 생각하는 문화가 생겼고, 또 그 문화에 영향을 받은 교회는 ‘기도원 문화’라고 하는 오해받을 만한 문화를 생성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기도원 운동이 영적으로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현실 도피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기도원에 있어야 깨어 있고,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오해가 생김으로 현실을 외면하게 되는 안타까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현실을 벗어나,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현실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현실 속에서, 함께를 지향하며,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삶을 우리 역시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복주의(현실주의, 이기주의) 기독교입니다.
기복신앙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 소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의 개념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복만을 의미한다면 기복신앙은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특별하기에 자신에게만 특별한 복이 임하여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간증을 하는 엘리트주의의 이기주의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 한탕주의에 대한 욕심 유발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랜 인내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복주의 신앙은 우리에게 마치 편법이 있고, 지름길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비법을 가지고 있다면, ‘한 방에’, ‘한 번에’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싶은 심리를 자극하여 한탕주의를 유발하게 만듭니다. 신앙은 옳은 길을 걷는 길이지 쉬운 길, 지름길을 걷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단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로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기적적인 역전은 결코 경제적인 부분에 있지 않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데 그 의가 있습니다.
2. 기도 응답 여부에 따른 하나님에 대한 평가
복을 주면 하나님, 복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식의 판단은 옳은 신앙을 가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즉 기도 응답 여부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달라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면 올바른 신앙을 소유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내가 원하는 만큼 응답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평가를 하는 이들이 주변에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생각보다 느리게, 생각보다 가끔, 원하는 만큼 들어주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가 아니면 거절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고, 어려움은 없고, 무병장수할 거라는 착각은 빨리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구한다고 해서, 금식을 하며 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마음과 노력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맞게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깨닫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지, 무엇인가를 얻고 해결하기 위한 도깨비 방망이 기도는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3. 동역자없이 나 혼자 믿는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처럼 복을 함께 나눠 받을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동역자 없이 나 혼자 살게 됩니다. 교회 없이 가나안 성도가 됩니다. 나만 복을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만 존재하는 이기주의이다 보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으로 변질되어져 결국 자기 만족의 종교생활로 빠져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고넬료처럼, 고넬료가 로마를, 로마 문화를 딛고 서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선 것처럼, 다시금 정리 정돈하여, 새로운 출발점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유교든, 불교든, 기복주의든, 나의 문화든, 말씀이 아닌 것들은 그냥 혼재된 상태로 두지 마시고, 분리수거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선명합니다. 선명해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이 있는지 오늘 깊게 묵상해 보시고, 잘 정리정돈 하시는 귀한 주일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024년 4월 네 번째 주간(28~5월 4일) 거대한 세상 문화를 딛고 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한 합심 기도 제목입니다. 이 시간은 말씀의 삶 속 임재를 위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삶의 기도를 다함께 선포하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이 선포와 같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 혈연 공동체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불평등과 서열 문화를 극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2. 의식 중심적이고 예를 중시하는 제사 같은 예배가 아닌 초심으로 중심을 분명하게 하여 전심으로 예배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3. 인과응보식 공포감에서 벗어나 성령과 함께 날마다 자유함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4. 설교를 듣는 것보다 직접 성경을 읽는 것에 더 시간을 투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5. 유교든, 불교든, 기복주의든, 나의 문화든 말씀이 아닌 것들은 그냥 혼재된 상태로 두지 않고 정리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6. 고넬료처럼 세상 문화를 딛고 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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