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며느리가 3대째 운영, 6·25 때도 군인들 상대로 장사 전직 대통령 중에도 단골 많아… 마이클 잭슨도 먹이고 싶었는데"
흔히들 비빔밥 하면, 전주를 떠올린다. 보기에 화려하고 맛이 꽉 찬 비빔밥은 오랫동안 전주의 보물이자, 자랑이었다.
전주 완산·덕진구청에서 영업신고 날짜를 기준으로 꼽은 전주의 최고(最古) 비빔밥 전문점은 한국집. 1968년 영업을 시작했다.
한국관, 성미당, 가족회관 등이 그 뒤를 잇는다. 한데 이보다 더 오래된 비빔밥집은 뜻밖에도 전주가 아니라 경상남도 진주 대안동에 있다.
'천황(天凰)식당'. 1929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영업신고증엔 1965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돼 있다.
문인이자 사학자였던 육당 최남선(1890~1957년)이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조선상식문답'은 진주비빔밥의 존재를 거론한 최초의 자료로 꼽힌다.
1946년 책으로 펴낸 이 자료에서 그는 우리나라 각 지역 유명 음식을 꼽으면서 '전주는 콩나물, 진주는 비빔밥'이라고 썼다. 과거엔 전주비빔밥만큼이나 진주비빔밥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 경상남도 진주 대안동에 있는 '천황(天凰)식당'./송혜진기자 enavel@chosun.com
1929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다는 천황식당은 겉모습만 봐도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건물이 한 번 불탔고, 그 폐허 위에 다시 집을 지었으니 건물 나이도 어느덧 60살. 6·25 전후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일본식 가옥이다. 더께가 내려앉은 기와지붕, 곰보유리로 된 창문, 푸른색 페인트를 붓에 묻혀 '천황식당'이라고 손으로 쓴 간판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다.
끼익, 문을 열었다. 반들반들하게 닳은 나무탁자마다 인조가죽을 씌운 푸른 의자가 네 개씩 놓여 있다. 석유난로 위 올라앉은 놋쇠주전자가 '피익' 물 끓는 소리를 냈다.
천황식당의 예전 이름은 '대방네'였다. '대방네'는 주인 김정희(56)씨의 시할머니 故 강문숙 할머니의 별명이었다. 식당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땔감 팔던 인부들이 시장이 파할 무렵이면 강문숙 할머니 집으로 찾아왔다. "남은 땔감 모두 드릴 테니 밥 한술만 먹게 해주이소." 그렇게 인부들의 밥을 차려주다 결국 가게를 차리고 백반 정식을 팔기 시작했다. 김정희씨는 "다들 급하게 한술 뜨고 가려는 사람들이다 보니 백반 정식과 국밥을 팔던 게 곧 비빔밥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밥집은 기대 이상으로 장사가 잘됐다. 6·25 전쟁 때도 가게가 불타기 직전까진 전쟁에 참가하는 군인들을 상대로 비빔밥을 팔았다.
가게가 모두 불에 타 무너지고 나서도 강 할머니는 다시 그 위에 목조가옥을 지었다. 시할아버지는 책을 뒤져 식당이름을 '천황식당'이라고 붙였다. 하늘의 새, 즉 봉황이라는 뜻. 길이길이 번성하라는 의미다. 그 후 며느리 오봉순 할머니가 가게를 물려받았고, 3대 며느리인 김정희씨가 다시 물려받아 2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김정희씨는 "식당이 시작된 사연이 어떻게 보면 진주비빔밥의 유래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진주향토음식연구원 등에 따르면, 진주 비빔밥은 임진왜란 때 전투에 나선 군인들을 먹이기 위해 만들던 음식이었다. 1593년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에게 성이 함락되기 직전, 백성과 군인들이 마지막으로 성에 남아 있던 소를 모두 잡아 육회를 만들고, 그릇이 모자라 밥과 나물을 한데 넣고 섞어 비벼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설도 있다. 비빔밥에 못 넣은 남은 소고기 부위는 모조리 국으로 끓여서 함께 먹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요즘도 진주 비빔밥엔 선짓국이 딸려 나온다. 김씨가 말한 "비슷한 구석"이란 이처럼 전쟁터에서 시작된 음식이란 뜻일 게다.
한쪽에선 제례음식에서 나온 음식이라고 주장한다. 1984년에 발간된 '한국민속종합보고서'에 따르면, 진주 비빔밥은 진주 제사음식에서 떨어져 나온 음식이다. 여러 가지 나물을 담은 모습이 꽃처럼 아름다워 한때 '꽃밥(花飯)'이라고도 불렸다는 말도 나온다.
▲ 천황식당 비빔밥(6000원). 왼쪽엔 선짓국이 놓여 있다. 뒤에 보이는 건 불고기(1만5000원)다./송혜진기자 enavel@chosun.com
천황식당 진주비빔밥은 전자(前者)에 가깝다. '꽃밥'이란 이름이 무색한,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음식이다. 사골국물을 사용해 밥을 짓는 전주비빔밥과 달리 이곳에선 맹물에 밥을 짓는다. 밥 위에는 제철나물을 올린다. 여기에 어린 배추, 양배추, 고사리 데친 것, 조물조물 무친 김자반(일명 속데기)과 육회를 올리고, 마른오징어와 마른 홍합을 삶아낸 포탕을 한두 숟갈 더한다. 슴슴하지만 부드럽고 촉촉한 맛을 내는 비법도 여기에 있다. 곁들여 내는 선짓국 역시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다.
김정희씨는 "모든 비결은 장맛에 있다"며 뒷문을 열었다. 커다란 마당과 툇마루가 있는 별채가 나왔다. 마당엔 항아리 30여개가 들어찬 장독대가 있다. "시할머니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보(家寶)임더." 장독을 열어 보인다. 독마다 간장, 고추장, 묵은지가 들어찼다. "보시다시피 우리 집 음식은 다 장맛이 안 받쳐주면 맛이 없거든예. 귀찮아도 직접 담가 먹는 수밖에 없지예." 고추장을 담글 땐 밀과 콩을 삶아 이틀가량 발효시켜 말린 것을 섞어 만든다. 이렇게 만든 고추장은 좀 더 구수한 맛이 난다고. 미리 전화로 예약하면 별채에 딸린 온돌방에서 식사할 수 있다.
▲ 이곳 불고기는 석쇠에 직접 굽는다(사진 위), 별채 앞 장독대. 고추장·간장·묵은지를 직접 담근다(사진 아래)./송혜진기자 enavel@chosun.com
여러 전직 대통령도 이곳을 다녀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주에 올 때마다 이곳에 들르곤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변호사 시절 이곳 별채에서 지인들과 비빔밥을 먹고 갔다.
수많은 얘깃거리를 지닌 진주비빔밥이지만, 이제 서울에서 먹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실제로 전주비빔밥은 1960년대 초부터 전국 각지에서 성업했지만, 진주 비빔밥 식당이 타지(他地)에서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진주에서도 이젠 천황식당 외에 '제일식당' 정도가 명맥을 잇고 있다. 김정희씨는 "이젠 우리 뒤를 잇는 식당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이 생전에 비빔밥을 좋아했다고 하지예? 우리 동네 비빔밥 맛도 한번 보여주고 싶었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 갔어예."
첫댓글전주비빔밥 보다 진주비빔밥의 전통이 더 오래되었군요. 슴슴한 나물을 얹은 꽃밥은 전국의 유명한 백화점에서는 으례히 자리를 하고 있지요. 한국의 대표적인 맛있는 음식 중의 하나입니다. 옛향기가 배어있는 진주의 천황식당에 가보고 싶네요. 진주벚꽃을 보러 가면 꼭 찾아보겠습니다.
첫댓글 전주비빔밥 보다 진주비빔밥의 전통이 더 오래되었군요. 슴슴한 나물을 얹은 꽃밥은 전국의 유명한 백화점에서는 으례히 자리를 하고 있지요. 한국의 대표적인 맛있는 음식 중의 하나입니다.
옛향기가 배어있는 진주의 천황식당에 가보고 싶네요. 진주벚꽃을 보러 가면 꼭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