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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9 - 영국왕 에드워드 3세 프랑스 와 100년 전쟁을 시작하다!
1066년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기사 5천명과 병사 1만으로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영국으로
건너가서는 영국군을 쳐부수고 노르망디 왕조를 열었고.... 앙주 백작 헨리 2세는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와 결혼해 프랑스 서남부에 아키텐 등
거대한 영토를 얻은후 1154년 12월에 영국으로 건너가 플랜타지네트 왕조를 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반역해 내란에서 이겨 영국 왕위를 차지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조상들의 프랑스
영토를 확장하니..... 프랑스 내에서도 프랑스왕 필립 2세 보다 7~ 8배나 더 넓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제3차 십자군전쟁을 다녀왔지만, 동생 존왕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패배하니
가스코뉴만 남았는데 존왕의 손자로 롱생크라 불린 에드워드 1세가 다시 영국을 부흥시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의 아들로 웨일즈왕자 라고 불렸던 에드워드 2세는 왕비와 신하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1327년 1월 29일
15살의 에드워드 3세가 아버지를 이어 잉글랜드왕위에 올랐는데, 후견인은 랭커스터
백작 헨리였지만 실질적인 섭정은 어머니인 이사벨라 와 그녀의 정부인 모티머 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가 등극한 해에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에든버러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을 통해 로버트 1세는 정식으로 스코틀랜드왕으로
인정받았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으며 로버트
1세의 아들 데이비드 와 에드워드 3세 의 여동생 조안의 정략 결혼이 이루어 집니다.
에드워드 3세의 치세 초기 3년 동안 잉글랜드는 모티머가 사실상 통치했으니 그는 자신
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국정을 농단했는데... 그는 마치 백작에 올라 에드워드 2세의
아우 켄트 백작을 조작된 음모로 몰아 살해하자 그의 지지자 다수가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1322년에 죽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아우인 헨리가 모티머의 적이 됩니다.
대비 이사벨라는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모티머를 적극적으로 감쌌으니 과거에 아버지 에드워드
2세가 동성들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었으나, 이제는 아버지를
죽도록 한 모티머와 어머니 사이의 치정관계가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1328년 1월 24일 요크에서 필리파와 결혼하면서 직접 국정을 맡기로 결심
했으니... 모티머의 독단적 통치에 분노한 데다가 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어머니
이사벨라의 행동에 혐오감을 느끼게 된 왕은 어머니의 섭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녀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티머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새로 랭커스터 백작이 된 헨리를 비롯한 젊은 귀족들과 동맹하여 왕권을
확고히 장악한 다음 모티머가 머물고 있는 노팅엄성을 공격했는데... 야음을 틈타 왕의
군사들이 성 안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침입하여 모티머를 체포하니, 의회는 그의
유죄를 선고하여 교수형에 처하고는 대비인 이사벨라를 노퍼크의 라이징성에 유폐합니다.
이사벨라는 멜 깁슨 감독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소피 마르소가 분한 여인으로 프랑스
필리프 4세의 딸인 공주로 영국의 왕세자 에드워드 2세에게 시집와 시아버지
에드워드 1세의 명으로 반란군인 윌리엄 월레스를 만나러 갔다가 눈이 맞아 연인
으로 변하는데.... 실제로는 이때 이사벨라의 나이는 10살 이니 감독이 만든 허구입니다.
18살의 에드워드 3세는 친정을 시작했고 잉글랜드는‘잃어버린’20년 만에 다시 유능한
군주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어려서 부터 기사적인 생활방식에 젖어있던
에드워드는 성인이 되면서 승마를 좋아하고 창 시합, 마상 시합, 사냥 등 전투의
위험을 즐겼으니 용기와 성실함, 관대함은 기사들이 추종할 모범으로 여겨졌습니다.
젊은 에드워드 3세는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의 유업을 이어받아 왕권과 국력 신장
에 주력하였고....... 로버트 1세가 세상을 떠난 스코틀랜드를 침략하려고 했는데,
예전에 에드워드 1세때 잠깐 왕위를 차지했던 존 베일리얼의 아들 에드워드
베일리얼이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침입해 왕위에 올랐으나 1332년에 쫓겨났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직접 보복에 나섰으니... 1333년에 핼러든 힐에서 스코틀랜드군
을 격파하고 베일리얼을 복위시키니 스코틀랜드왕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
로 피신했고... 베일리얼은 에드워드 3세에게 신서하고 로우랜즈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겨주었는데 이듬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다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저항 배후에 프랑스왕의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만일 그가 스코틀랜드를
점령하면 프랑스왕이 아키텐의 봉토를 몰수하리라고 짐작했으니...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인들의 반항을 꺾기 위해서는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국내
에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무리에게는 수지맞는 모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또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왕의 불순한 책략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잉글랜드 상인들의 주요한 고객으로서
잉글랜드의 양모 무역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플랑드르(벨기에 북서부)의
여러 도시들에게 프랑스의 세력이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근본적인 요인은 가스코뉴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에 있었으니, 필립 6세
가 아키텐에서 에드워드의 영주권을 자신의 종주권 아래 두고자 한데 대해... 에드워드는
자신의 독립적 주권을 유지하리라 결심했으니,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법적 권리를 주장하고 그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기엔느의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이를 거부하고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에서 완전한 주권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아키텐을 그의 막내아들의 영유로 넘기고 그를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영국인들이 가스코뉴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고, 필립
이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양국 사이의 협상은 성사될 수 없었습니다.
1337년 당시 까지도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을 줄곧 도와주었고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양모 상인들의 고객인 플랑드르의 모직물업자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잉글랜드 의회의 비난에 맞서 필립 6세가 가스코뉴의 병합을 선언하자, 에드워드는
필립 4세의 딸인 이사벨라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점을 이유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합니다.
프랑스왕 필립 6세는 필립 4세의 조카에 불과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필립 4세의 외손자로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했지만... 게르만족 프랑스의 살리법에 의하면 여자와 그 자식들은
왕위계승권이 없으며, 1329년 필립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을 때 에드워드는 그를 프랑스
합법 왕위계승자로 인정했고 가스코뉴를 영유한 봉신으로서 필립 6세에게 신서한 바 있습니다.
그 후에도 에드워드는 10여년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있다가 필립이 가스코뉴의 병합을
선언하자 프랑스 왕위를 요구한 것인데...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그후 100년 넘게 계속되니,
물론 100년 동안 실제 전투가 줄곧 계속된 것은 아니고... 1453년에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
영토에서 영국인들이 쫓겨나기까지 100년 동안은 전쟁 사이 휴전과 평화가 점철된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쫓겨났다고 해서 대 프랑스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으니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요구는 그후
조지 3세 시대까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지속되었는데.... 즉 잉글랜드 왕들은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될때 까지, 프랑스 왕위에 대한 그들 주장을 공식적으로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드워드는 직접 프랑스로 건너가 공격하는 길을 택했는데 이는 프랑스 각 지방마다 지역 할거주의
가 성했으니 잉글랜드가 전쟁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우선 플랑드르는 전쟁이
일어나면 잉글랜드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조건으로 내세우며 양모를 계속 공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또한 잉글랜드령이었던 가스코뉴에 밀사를 보내 중부 프랑스로 향하는 접근로를 열어
주겠다고 알렸으며... 프랑스 본토를 직접 공략하려는 전략은 약탈을 통해 필요한
보급품을 얻을수 있어 전비가 덜 들 것이었으니, 프랑스 내부의 지원 약속과 약탈
에 의한 전비 조달의 전망에 고무된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시작할 명분을 노렸습니다.
영국군의 프랑스 공격은 1341년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속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에서 잉글랜드
와 프랑스가 각기 다른 후보자 편을 들면서 시작되었으니... 1342년 이후 에드워드 3세는
브르타뉴로 침입해 대부분을 석권하고, 이곳을 전진 기지로 하여 프랑스령 깊숙이 쳐들어갑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장남인 흑태자와 함께 1만 2천 명의 병력으로 노르망디 의
라 우그에 상륙하여 동쪽으로 횡단하여 캉 시를 유린하고 7월 26일 카엔 전투와
8월 24일 블랑셰타크 전투에서 승리한후 프와시에서 센 강을 건너 파리로 향했
으나 필리프 6세는 아키텐에서도 병사들을 불러들여 생드니에 대군을 집결시킵니다.
프랑스군의 저지에 막힌 에드워드 3세는 벨기에 플랑드르로 철수하기 위해 북상을 개시하니
프랑스군은 뒤를 쫓았으나... 잉글랜드군은 낮은 개천을 방위하여 프랑스군 분대를 격파
하고 솜므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니 잉글랜드군을 포위하려던 프랑스군의 작전은 실패했고,
잉글랜드군은 전투에 유리한 지형이 있는 크레시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프랑스군을 기다립니다.
8월 26일 아침에 잉글랜드군은 웨일스에서 징병한 장궁병 부대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크레시 근교 낮은 산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적인 진형을 짠 에드워드 3세는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으니 잉글랜드군 중앙에 3개의 보병대
를 배치하고, 16살이었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그 중 한 부대를 지휘하도록 합니다.
완만한 경사에 걸쳐 역 V 자형으로 구성된 양익에 장궁병부대를 배치하고, 공격에 약한 그들
에게 기병의 돌격과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캘트롭과 장애물들을 전방에 깔아 놓았으며
에드워드 3세 자신은 후방에 진을 구축하고 풍차를 지휘소로 삼았으니 후방 언덕이
시야 확보와 안전에 좋았기 때문으로 에드워드 3세와 측근들은 그 곳에서 전투를 지휘합니다.
정오쯤에 이르러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도착했는데 프랑스군의 기사
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고, 혈기왕성하여 무질서했고 적을 무시했으니
필리프 6세는 급히 추격해 온지라 당일은 휴식을 하고 다음날 공격
하려고 했지만 통솔이 어려움을 알고는 계획을 바꾸어 당일 전투 개시를 결정합니다.
영국군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아일랜드에 프랑스내 가스코뉴와 아키텐및 노르망디에 플랑드르
백작과 브르타뉴공작 및 신성로마제국 에노백작등 4,000명 기사와 7,000명 장궁수에
5,000명 장창병으로 대포 5문을 가졌으며 프랑스군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보헤미아
왕국, 뤽상부르백작, 로렌공국에 마요르카오아국, 제노바공국 및 나바라왕국등 60,000
기병과 15,000 노궁수를 보유했으니..... 그럼 16,000 대 75,000 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했습니다.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군의 장궁병에 대항하기 위해 제노바 노궁병들에게 전열을 맡겼고,
후열을 프랑스 기사 중기병부대로 채웠으니 1346년 8월 26일 프랑스 기사들은 언덕위
영국군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갔으나 잉글랜드 궁병들의 세찬 화살 공격 앞에서 대패합니다.
선공은 프랑스군측인 제노바인 용병들로 구성된 노궁병들이 사격을 개시했으니 15,000명의
노궁병이 볼트의 소나기를 날렸는데 동시에 프랑스 악단의 음악이 울려 퍼졌으니 이에
웨일스의 자유농민들로 구성된 장궁병 부대들이 응사하기 시작해 사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노궁병들은 전투에서 완전히 쓸모 없음을 사상자로 증명했으니 이들은 1분당 4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는데, 그에 비해 영국 장궁병들은 1분에 15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으니 에드워드 1세
시대부터 시간을 들여 연습을 시켜 숙련도가 높아져 노궁에 비해 다루기 힘들던 장궁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고 행군하는 동안 제노바 노궁이 비를 맞았기 때문에 위력이 급감해 있었습니다.
장궁병들은 비가 오는 동안 활줄을 풀어 놓아서 이런 대참사를 피할수 있었는데 더욱 노궁병들은
트레이드 마크인 파비스 방패도 가져오지 않았으니 후방 보급부대에 놓아두고 싸운 것이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채 노궁병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채 퇴각하는데 사정거리나 명중률로 보면
노궁이 더 뛰어났으나, 장궁병이 언덕 윗쪽에서 아래로 사격을 했기에 지리적인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궁병들을 겁쟁이라고 생각한 프랑스 군대가 도망치는 노궁병 들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기사들이 줄을 맞춰 돌격했지만 경사와 진흙탕
, 잉글랜드군이 미리 뿌려둔 장애물들이 돌격의 속도를 늦추어 위력을 감소
시켰으니 프랑스 기사들이 헤매고 있는 동안 장궁병들은 화살의 커튼을 뿌립니다.
무려 16번이나 돌격 시도를 했지만 프랑스 기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전열을 전혀 흐트러
뜨리지 못했고 흑태자 에드워드가 전투 중 위기에 처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구원병
을 보내는 것을 거절했는데 나중에 그는 그것이 "자신의 아들이 분발하기를 원해서"
였다고 말했으니..... 그 결과 흑태자는 자신이 아주 뛰어난 군인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잉글랜드군은 코니쉬 보병과 웨일스 보병이 진군하는 동안에 계속 장궁을 쐈으니 이 사격
때문에 많은 프랑스 기사가 죽었으며, 밤이 되자 필리프 6세는 총퇴각을 명했으니 아주
당혹스럽고 처절한 프랑스군의 패배였는데.... 프랑스군과 제노바 용병들의 사상자는
11명의 왕자와 1,200명의 기사를 포함 15,000명 정도로 필리프 6세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반면에 영국은 기록에 보면 200명으로 매우 적은 숫자라 신빙성이 낮으니 아마도
과소평가 되었을 공산이 큰데 사망자중 프랑스 측의 중요한 귀족은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4세의 친부 얀,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 로렌 공작 라울 등 입니다.
프랑스군이 퇴각하자 잉글랜드군은 부상자 중에서 몸값을 받을만한 사람을 추려냈으니 부상이
심해 옮기기 어려운 기사는 미제리코르테라는 칼로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겨드랑이
부분으로 심장을 찌르거나 바이저 틈새로 머리를 찔러 죽였는데 크레시 전투에서는 소작농이
기사를 죽였으며, 기사는 기사가 아닌 평민의 화살에 맞아 죽었으므로 기사도는 종말을 고합니다.
크레시 전투는 잉글랜드·웨일즈 장궁병이 프랑스의 노궁병과 중무장 기사 조합 보다 우수함을
증명한 전투였는데, 자유 농민이었던 장궁병은 당시의 노궁병 보다 화살을 더 많이, 더
멀리 쏠 수 있었기 때문이니 크레시 전투의 결과는 이후 상당기간 전술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크레시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11개월동안 포위공격한 끝에 프랑스 북부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향후 200년 넘게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으며 잉글랜드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주요 교두보가 되지만, 전쟁은 흑사병 으로 인해 휴전 협정을 맺고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1348년 부터 유럽에는 흑사병이 만연하여 사회적 위기가 닥쳐왔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는 싸움을 끝낼 결정적 수단을 찾지 못한채 전쟁은 만성적인
상태로 빠져들었는데... 1350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장이 뒤를 이어 1355년 전쟁을 재개하자, 영국군의 두 방향으로 원정대를 보냅니다.
에드워드 3세 왕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로 칼레로 부터 시작되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른 부대는 보르도에 흑태자의 지휘하에 가스코뉴와 툴루즈로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던
1356년 프와티에에서 장의 프랑스 대군과 맞부딪쳤으니... 프랑스 기사들이 영국군 진영
으로 돌진했으나 다시 완패하고 말았으며 왕인 장을 위시한 많은 프랑스 귀족이 포로로 잡힙니다.
푸아티에 전투는 1356년 9월 19일 전투로 백년전쟁의 1,2기를 거쳐 3차례 영국에게 결정적 승리를
안겨준 전투중 두번째니 3번의 전투는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인데
1356년 8월 8일 흑태자 에드워드는 기병 약탈전을 영국령 아키텐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수행합니다.
영국군 약탈 출격 부대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으니 영국인과 프랑스의 가스코뉴 출신 군대는
수많은 마을들을 불태워 없애고, 철저히 약탈하며 루아르강 인근의 투르(Tours)에 이르렀는데
폭우로 인해 에드워드 군대는 도시와 성을 공격하지도 마을을 불태우지도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작전의 지연은 프랑스 왕 장 2세가 에드워드의 군대를 따라 잡아 격멸하겠다는 시도를 현실화
할수 있게 해주었으니... 노르망디에서 랭커스터 공작 헨리의 영국 군대와 대치 중이던 왕은
영국군에 포위당해 있던 투르의 북방인 샤르트르에 대군을 소집했는데 기동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17,000 명의 보병들을 해산해 버렸으니.... 이는 양군의 병력 차를 크게 줄여주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이동을 듣고 에드워드는 질서있게 후퇴하였으니 프랑스군은 푸아티에 남서쪽에서
영국군을 따라잡았는데 흑태자는 16세때 크레시 전투에서 사용된 전술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심했으니... 군대를 좌측의 시내와 뒤편의 숲으로 보호되는 수비에 좋은 평원에 배치 합니다.
푸아티에에서 보르도로 가는 주된 교통로인 옛 로마 도로 위에 엄청난 양의 약탈품으로 가득찬
짐수레들을 놔두어 오른쪽 측면을 보호하는 방벽으로 삼았으며 하마한 기사와 병사들을
세개의 대열로 편성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즈 출신 장궁 궁수들을 양 측면에 V 자 형태로
배치하였으며 소수의 기병 부대를 장 드 그레이 3세의 지휘하에 후방의 숲 속에 매복시킵니다.
프랑스군은 4개의 단위로 편성되었는데 최전방에 선 첫번째 부대는 클레르몽 장군이 지휘하는
300명의 정예 기사와 독일인 용병 파이크맨으로 구성된 혼성부대니 이 부대의 임무는
영국의 궁수 대열로 돌격하여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뒤에는 하마한 기사로 구성된 세개
의 보병집단이 따랐으니 지휘관은 샤를 5세인 왕세자 도팽, 오를레앙 공작, 국왕 장 2세였습니다.
영국군 좌익의 위장 퇴각은 전투를 개시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프랑스 기사들이
궁수들을 향해 성급한 돌진을 하게 만들었지만 영국군들은 예상하고 있었고
재빨리 적에게 화살 비로 공격을 가했으니 특히 기사가 탄 말이 목표물 이었습니다.
프랑스 기사 갑옷을 영국 화살이 관통하지 못했고 갑옷 표면에 미끌어지거나 화살촉이 깨졌다고 기록
하지만 영국에서는 뾰족한 송곳 같은 촉을 가진 화살은 그 시대 대부분의 플레이트 아머를 관통
하는 성능을 가졌다고 했는데 정지된 상태의 판금철판에 대한 장궁사격 에서는 영국측 기록이
맞지만 갑주는 굴곡이 있고 목표물인 움직이는 사람은 좋은 표적이 아니니 양쪽 다 일리가 있습니다.
마갑은 측면과 후면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영국 궁수대는 기사들의 측면으로 위치를 옮겨서 말을
쏘았으니 이는 돌진하는 기사들을 저지하는 널리 알려진 방식인데 쓰러지는 말들이 적의 전열을
붕괴시켜 적 기사들의 집단이 가하는 위협을 없앨 수 있으니 그런 경우 기사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첫번째 기마부대 공격후 왕세자 도팽이 이끄는 보병 부대인데 이들은 갑옷을 입은
상태의 무거운 몸으로 1킬로 떨어진 적군 진영 게다가 길도 오르막이었으니
행군하느라 기진맥진하였던 상태였는데 이들은 하마만 하였을 뿐 영국의
하마 기사들 처럼 궁병, 창병과 혼성 대형을 이루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영국군 전열에 이르지도 못한채 쏟아지는 화살비에 큰 손실을 입고는 부대를 재편하기 위해서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 세 번째 부대인 오를레앙 공작의 보병들은 왕세자의 부대가
공격도 시도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공황상태에 빠져서 뒤돌아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달아나는 프랑스군은 국왕 장 2세가 인솔하는 마지막 전열의 움직임도 묶어 버렸으니 이때
영국 궁수들은 화살을 다 쏴 버린 상태였지만 장 2세의 제4 부대가 패주하는 부대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궁수들은 재빨리 보병들 사이에 섞여 보병대오를 형성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말에 올라타 즉흥적으로 기병대오를 형성하려 시도했습니다.
이윽고 장 2세의 네번째 부대가 전선에 이르러 격전이 벌어졌는데 그러나 흑태자
에게는 후방 숲속에 잠복시켰던 기병대가 있었고, 이들은 숲에서 빠져 나와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측면과 후방을 기습하니 프랑스군은 포위당한다는
두려움에 도주를 시작하였고 프랑스 왕 장 2세는 측근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게 있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참패였으니 프랑스는 왕의 귀환을 위해서 몸값
으로 나라 전체의 1년치 수익의 두배인 300만 크라운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러나 장 2세는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영국에서 이국생활을 즐기다가 몸값을 위해 귀국했지만
몸값을 준비할 능력이 없다며 1364년에 영국으로 자진해서 되돌아 왔다가 수개월 후에 병사합니다.
136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평화조약이 맺어졌으니 조약으로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요구
를 포기하고, 칼레와 퐁티외를 제외한 르와르강 이북의 모든 땅에 대한 요구를 버리는 대신
프와투, 기엔느, 가스코뉴·리무쟁 등을 포함한 아키텐 전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양도 받았습니다.
브레티니 조약 이후 9년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으니 가스코뉴의 통치자인 흑태자는 1367년
프랑스와 동맹한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와 다툰 카스티야 왕 페드로를 원조하기
위해 에스파냐에 침입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가스코뉴로 돌아왔습니다.
전비 소모로 재정이 궁핍해진 흑태자는 새로운 호별세(戶別稅)를 강요함으로써 가스코뉴인
들의 격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으니... 여전히 프랑스 왕을 그들의 최고 군주로 생각하고
있던 가스코뉴인들은 흑태자를 장의 아들인 샤를 5세에게 고발하자, 파리 고등법원
에서 소환장을 받은 흑태자는 거부했으며 이에 샤를은 아키텐 공령의 몰수를 선언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또 시작되었고 에드워드는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했으며 1370년 흑태자
는 잉글랜드 편에서 이탈한 리모즈의 주민 3,000명을 학살했지만 전세는 대체로 잉글랜드
에 불리했으니... 프랑스인들은 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배웠으며 유능한 왕 샤를과
탁월한 장군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지휘하에서 정규전을 피하고는 게릴라 전술을 택합니다.
잉글랜드의 해군력은 약한데 반해 프랑스 해군은 카스티야 선박의 도움을 받았으니 영국군은
고전했으며... 1371년 흑태자는 병을 얻어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이길 가망이 없어져 가는
전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 반면, 프랑스는 영국인들을 몰아
내겠다는 결의가 더욱 확고하니 잉글랜드는 칼레, 보르도, 바이욘만 유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막대한 돈이 필요했던 에드워드 3세는 의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
데... 관례적 수입만으로 막대한 전비를 감당할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여러 상인들이나
도시 및 주와 개별적으로 협의하는 대신, 전국적인 의회 안에서 그들의 대표들과
상의 함으로써 비상시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치세 50년 동안에 의회는 48회나 열렸으며 1295년의 모범의회를 구성했던 모든 계급, 즉 고위
성직자, 대영주, 하위 성직자 대표, 주 기사와 도시 대표가 소집되었으니.... 잉글랜드 의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의회가 귀족원과 평민원이라는 역사적 구조를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잉글랜드 의회도 처음에는 프랑스의 삼부회처럼 성직자, 귀족, 평민의 세 신분이 각기
따로 모이는 기구가 되는 추세였으나 잉글랜드에서는 고위 성직자들이 세속
귀족들과 같이 모인 반면, 하급 성직자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모임인 성직자 회의
를 따로 가지고 있어..... 성직자들이 의회 내에서 별도의 모임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과세부담을 지고있던 기사들과 시민들은 국왕의 재정적 요구에 맞서기 위한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시정을 바라는 불만 사항 역시 같은 성격의 것임을 깨달았으니,
1339년에 각 주에서 선출된 기사들은 시민대표들과 함께 모여 행동을 같이하는 기구를 형성했으니
잉글랜드 의회는 작위 귀족과 일부 고위 성직자가 상원을, 기사들과 시민들이 하원을 구성하게 됩니다.
상원은 중요한 재판을 맡고 하원에서 잘못 결정한 것을 시정하고 국왕에게 조언하였으며 과세
에 동의 및 법률을 제정했으니... 이런 권한은 에드워드 2세 때 확고하게 자리 잡혔는데
14세기 말이 되면 자주 소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사와 시민들은 자신의 회의
장소에 따로 모여 공동의 청원을 토의하고 제출했으며 과세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게 됩니다.
각계각층의 부와 영향력의 소유자들로 부터 선발되어 구성된 하원은 헌정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모든 법의 제정과 특별세의 징수에 하원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하원의원들의 청원은 국왕의 동의를 얻게 되었으니 국왕
의 선출이나 폐위와 같은 국가의 중대사 까지도 하원의 참여하에 처리 되었습니다.
의회가 획득한 최초의 권한은 과세에 대한 통제였으니 1297년에 국민의 동의 없이
어떠한 보조세나 세금도 부과할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한 의회는 ... 에드워드
3세의 치세 초인 1340년 세금 부과에 상원과 하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
을 확립했으니, 의회는 직접세와 간접세 양쪽에 대한 과세 통제권을 확보 했습니다.
13세기 말에 의회는 법률에 대한 동의권 또한 갖게 되었는데, 그러한 권한은 의회내 귀족
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 하원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법률에 대한 동의권을 획득하게 되었고... 청원을 법안으로 바꿈으로써 법안
제출권 또한 갖게 되니 왕의 윤허를 조건으로 왕의 과세에 대하여 동의하기에 이릅니다.
중세의 잉글랜드 의회는 사법적 기능을 맡은 최고의 기관이기도 했으니 상원은 나라의 최고
법정을 구성했는데... 한편 사법과 관련하여 하원이 맡은 중요한 역할은 부패한 관리에
대한 탄핵이었으니, 하원이 부패한 관리에 대한 고발을 상원에 제출하면 상원이 이에
대해 심판했고 과세에 대한 동의의 선결 조건으로 불만 사항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게 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으로 “영어를 장려한 왕”이니 잉글랜드 지배층은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대부분 프랑스어만을 썼는데, 백년전쟁을 일으켜 농민들로 이루어진 징집병들인 하층민
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영어를 이용해 민족감정을 고취시키니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
를 침략하고 민중들을 프랑스화시키며 잉글랜드인의 언어 영어를 말살하려고 한다고 선전합니다.
그런후 에드워드 3세는 곧바로 전쟁 준비를 위한 의회를 소집했는데, 본래는 프랑스어만 사용되던
의회에서 귀족들에게 이제부턴 공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했으니... 영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된 첫번째 일로 이런 영어 장려 정책은 리처드 2세, 헨리 4세 등을 거치며
이어졌고, 마침내 백년전쟁이 끝날 때 즈음에는 완전히 영어가 잉글랜드의 언어로 굳혀지게 됩니다.
에드워드 3세의 치세 말기는 궁정내 스캔들과 부패, 전쟁 수행의 실패, 프랑스 내에서의 군사적
손실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으며... 에드워드 3세는 연로해지자 1371년 랭카스터 공작인
3남 곤트의 존에게 행정권을 맡기니, 존은 곧 에드워드 3세의 정부 앨리스 페러즈와 왕의
총신 윌리엄 래티머 경, 런던의 부유한 상인 리처드 라이언즈 등에게 둘러싸여 전제정치를 합니다.
흑태자와 마치 백작이 이끈 일단의 귀족들이 하원을 이용하여 이들을 몰아냈으니, 1376년 선량
의회에서 하원의 대변자인 피터 들라 매어는 상원에 나아가 하원의 이름으로 래티머와
라이언즈의 죄상을 고발했으며... 상원은 그들의 유죄를 선고하여 투옥했고 의회는
페러즈를 국외로 추방하고 자문회의를 재편하여 9명의 새 귀족들을 자문회의에 참가시킵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곤트의 존은 1377년에는 다시 의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존은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괜찮은 활약
을 했지만 몇번의 부진으로 인해 정전협정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으니,
프랑스 전쟁 지휘 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 섭정활동에 더 주력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속에 1376년 흑태자가 죽고 1377년에는 에드워드 3세도 사망했지만
그가 일으킨 백년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습니다.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보다 앞서 병사했으니, 다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곤트의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발생하니 이를 장미 전쟁이라 부르는데...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리처드 2세 치세 때 청원파의 일원으로써 활동하나 국왕의 분노를 사서 처형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