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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이 어떠했든, 80년대 시위대의 최전방 혹은 중심에는 흰색 혹은 검정색 가운을 입은 성직자들이 있었다. 87항쟁 때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학생들을 붙잡으려는 경찰들에게 김수환 추기경이 했던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학생들을 잡으려면 나부터 밟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2016년 겨울, 박근혜 퇴진을 위한 시위에는 수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주로 종교의식에서 사용되었던 촛불을 들고 모였기에 촛불집회라고 불렸으나, 그 집회의 최전선이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성직자들이 아니라 나라의 법과 상식이 무너진 것에 분개하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거나 무등을 태우고 나온 젊은 엄마와 아빠들이었다. 손에 촛불을 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어요."
2024년 겨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시위의 주역은 성직자도, 젊은 엄마 아빠들도 아니라, 이른바 MZ라고 불리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아이돌 콘서트에서 사용하는 반짝거리는 응원봉을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며 탄핵을 외쳤다. 음성이나 자막을 제거하고 그림만 보면, 영락없는 대규모 야외 콘서트였다. 그 축제 같은 시위대 안에 엄숙한 가운을 걸친 성직자를 위한 별도의 자리는 없었다.
싫든 좋든, 이제 종교는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아니, 이미 밀려났다. 오늘날 세속화된 세상은 나름의 기준과 논리로 움직인다. 타락한 거라고? 글쎄다. 타락의 질과 양으로 본다면, 세속사회보다 종교 내부가 훨씬 더 심하지 않을까 싶다. 종교가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재고하고 스스로를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때다. 거룩한 진리를 지키겠노라며 고집을 부리는 건 자유지만, 그 자유의 결국은 소멸일 것이다. 내 생각에 세속화는 교회 밖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루어오신 역사의 결국이지 않나 싶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나, 처음부터 하나님은 교회의 포로가 아니셨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의 변방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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