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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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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정시의와 조선시대의 표준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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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 표준시간을 서울의 경도 127도 30분에 맞춰 정하자는 논의가 일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이유인 즉 슨, 동경 127도 30분에 위치한 우리 나라가 경도 135도에 맞춘 일본 東京의 표준 시각을 쓰고 있어 실제 시각과 30분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표준시는 60년대 초, 127도 30분의 표준시로 바꾸어 썼다가 다시 재조정한 시각으로 무엇보다 일본의 표준시가 아닌 세계시에 맞춘 시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랜 옛날에는 무엇을 기준으로 표준시간을 정하였을까? 조선시대에는 세계시(world time)가 아닌 한양의 지방시(local time)를 표준으로 삼았다. 세종대에 <칠정산 내편>을 엮은 이후 한양을 기준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정하고 태양이 한양(후반기에 위도 37도 39분 15초로 확정)에 남중하는 시각을 오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도의 개념인 동서편도가 전해지자 기존의 표준 시각이 한양과 연경(북경)의 편도 15도를 감안해 1시간의 시간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양의 표준시를 무엇으로 측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준시계에 맞추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표준시간 알려주기 지금은 우리나라 국립천문대에서 알려주는 표준시보에 시계를 맞추지만 6.25직후 50년대 천문대시설이 빈약하던 시절에는 일본 동경천문대에서 보내주는 낮 12시 시보를 라디오에서 중계하였다. 시간을 맞추려면 손목시계의 용두를 빼어 시계를 정지시킨 다음 기다렸다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뚜 뚜 뚜 뚜 소리에 맞추어 용두를 제자리에 끼어 시계가 다시 가도록 해주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표준시간을 알아내어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을까? 조선시대 국가의 표준시계는 보루각 자격루였다. 세종대에 장영실이 처음 만들어 경복궁의 보루각에 설치한 이 시계는 세종 16년(1434년) 7월 초하루부터 국가의 표준시계로 채택되어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양의 표준시각을 알렸다. 이 시계는 기본적으로 인정(人定)·파루(罷漏)와 오정 시보를 위한 것이었다. 자격루 시보에 맞추어 종루에서 인정과 파루에 종을 울렸는데, 종로에 위치한 종루에서 경복궁 안의 보루각에 들어 있는 자격루 시보에 맞추어 종을 치려면 너무 멀어 들리지 않으므로(직선거리로 800미터) 경복궁에서 종루에 이르는 곳곳에 초소를 짓고 경회루 남문→ 광화문→ 병조장문→월차소 행랑→수진방 동구의 병문→의금부→종루의 순서로 자격루 시보를 전달하는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 제도는 구한말 인정·파루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시계의 기준시간 맞추기 조선시대에는 시간측정용 항아리에 시간눈금을 새긴 잣대를 넣고 물을 흘려 넣어 물이 차 올라 잣대가 뜨는 대로 눈금을 읽어 시간을 알아내는 유입식 물시계(inflow-clepsydra)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하루의 시간을 측정하고 나면 항아리가 물로 가득 차므로 더 이상 시간을 측정할 수 없어 항아리의 물을 비운 뒤에 새로 물을 넣기 시작하여 시간을 측정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항아리의 물을 빼고 잣대를 새로 설치하는 동안은 시간 측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므로 장영실은 측정용 항아리 2개를 만들어 교대로 사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을 짜내기도 하였다. 물시계를 새로 시작하는 시각은 오정이며 이 시각을 기준시계(보통은 해시계)로 알아내어 물시계 관리자들에게 알려주면 되었다. 우리가 라디오 시보에 따라 시계를 맞추듯이 기준시계 관리자가 오정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를 물시계 관리자에게 보내면 이것을 신호로 빈 항아리에 물을 흘려 넣기 시작하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기준시계로 사용된 기기가 일성정시의였다. 日星定時儀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이는‘해와 별로써 시각을 결정하는 기기’였다. 즉, 해시계로써 물시계를 교정할 오정시각을 정확히 구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별시계로써 북극성의 위치를 추적하여 천문시간(항성시)을 구해줌으로써 밤시각을 정확히 측정하고 아울러 365일의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경복궁에는 북극성을 관찰하기 편리한 만춘전 동쪽에 일성정시의대를 쌓고 일성정시의를 올려 놓아 이곳에서 밤낮으로 담당관리가 시각을 측정하도록 하였다. (그림 참조) 세종대왕의 발명품 일성정시의의 구조와 원리 그리고 사용법은 세종실록 77권에 실린 김돈의 「간의대기」 서문 중, 「일성정시의명병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성정시의는 당시 동양에서 사용하던 원둘레 365.25도를 적용하였으며, 주천환(周天環, 주: 원둘레를 365.25도로 매긴 환으로 1도는 1일을 나타낸다), 일귀백각환(日晷百刻環, 주: 해시계의 눈금을 새긴 환이며, 당시의 하루 시간은 100각이다), 성귀백각환(星晷百刻環, 주: 야간에 항성시를 측정하는 별시계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용이 이들을 물고 있는 형상을 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이와 같은 일성정시의를 4개를 제작하여 하나는 경복궁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고 나머지 2개는 평안도와 함길도의 원수영에 내려보내 군사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세종대의 유물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성종대에 이것을 소형화시킨 소정시의의 유물이 하나 남아있어 홍능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또한 중종대에도 창경궁에 보루각을 하나 더 건립하면서 일성정시의대를 축조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보물 85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1980년대에 영국의 Needham박사는 <세종실록>과 유물을 바탕으로 일성정시의를 복원하였다. 최근 이용삼 교수(충북대 천문우주학과)와 필자는 Needham의 복원도를 바탕으로 세종 일성정시의를 복원하는데 성공하였다(사진참조). 일성정시의는 원대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성귀의(星晷儀)를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성귀의에 관한 기록은 중국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일성정시의는 분명 세종의 발명품으로서 필자는 이를 자격루, 흠경각루, 현주일귀, 측우기와 더불어 세종대의 5대 발명품으로 꼽는다. 용어해설 : 초저녁에 도성문을 닫아 통행금지를 알리는 시각을 인정, 새벽에 도성문을 열어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리는 시각을 파루라 한다. 인정에는 종을 28회, 파루에는 33회 울리는데, 28회는 28수(宿) 별자리의 수에서, 33회는 불교의 33천(天) 에서 유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