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
심산유곡(深山幽谷), 계곡이 깊어 배 밑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 2리, 백운산(해발 1,087미터)과 구학산(해발 985미터) 연봉 사이로
십여리를 들어간 곳에는 계곡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터가 펼쳐진다.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큼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지닌 배론은 우선 그 경관이 수려하다.
배론 입구에 위치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원주 - 제천 간의 탁사정(濯사亭)은
배론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수려한 자연도 배론이 안고 있는 신앙의 유산에 견준다면 그 빛을 잃는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천 3백 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한 가지만으로도 가히 현양의 가치가 충분한 신앙 유산들이 몰려 있는
배론이야말로 최적의 순례지로 추천할 만하다.
더욱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편리한 교통과 피정센터를 비롯한 쾌적한 편의 시설들은
순례를 위해 '엄숙한 마음가짐' 외에는 다른 준비물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가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룬 곳이 바로 배론이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또 구워 낸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잃은 가족을 수소문하거나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 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다.
배론의 두 번째 신앙 유산은 1855년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이다.
깊은 산골 장주기의 집에 세워진 신학당에는 학생 열 명에 두 신부가 있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형장의 이슬이 됐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신학당 역시 폐쇄되고 만다.
신학당은 1978년 복원된 후 2001년 3월 2일 배론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된 후 2003년 재복원되었다.
배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산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이다.
한국 최초의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 신부는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이곳 배론의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혹자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을 만큼
최 신부의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배론 성지는 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 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또한 대성당과 소성당 두 동으로 건립된 기념성당은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라 불려온 지명과 어울리도록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2002년 10월에는 성지 초입에 순례자들의 집을 봉헌하여
성지를 찾는 신자들의 식당과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04년 11월에는 대성당 뒤편에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의
거룩한 삶의 여정을 한 눈에 보고 묵상함과 동시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한 자리에서 만나 기도할 수 있는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을 조성해 봉헌하였다.
조각공원 내에는 고 탁희성 화백의 작품을 오석에 새긴 30개의 조각 작품으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담고 있고, 그 내부는 납골 봉안소로 사용하고 있다.
2005년 7월 건축된 지 30여 년이 지난 순교자들의 집을 새단장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곳에서는 최대 100명까지 단체로 피정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해 9월에는 황사영 순교 현양탑 앞에 황사영 알렉시오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2010년 9월에는 신자들에게 문화와 영성을 교육하고
교구 교회사와 영성을 기록 · 보관 · 연구함으로써
교회와 지역사회 문화 발전에 기틀이 될 '문화영성연구소'를 설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수려한 자연, 풍부한 신앙 유산 그리고 편리한 교통과 시설로 배론은
최적의 성지 순례 여건을 갖추고 있어 한 번쯤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볼 만한 곳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으로, 원주에서 제천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용소막 성당은
배론 순례길에 반드시 들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용소막 성당에는 성서학자인 고(故) 선종완 신부 기념 유물관이 있고
여기에는 선 신부의 유품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성서와 자료들이 풍성해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2년 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