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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내 주님 모신 시온 산성
2023.12.30.브솔방송
저는 이 시간 주님 모시고 ‘땅끝, 내 주님 모신 시온 산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사야 45장 22절에는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끝은 그 실상을 말하자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치 앞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땅끝임을 알지 못하고 보이는 자신의 삶에 안주하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도 밀려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늘 이 순간과 보냄 받은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내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 앞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갑자기 찾아오는 심판의 땅끝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아름다운 땅끝으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해 온 마음으로 솟아올라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서 나의 목자 되신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어린 양의 자세가 오늘 우리 각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최근에 집 안에서 움직이다가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며칠간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그때 땅끝의 의미가 새롭게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 건강보다는 내 영혼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강도 소중하지만 먼저는 내 영혼이 잘 되기를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주님의 긍휼로 허리도 좋아졌습니다. 땅끝은 우리 환경의 막다른 골목의 의미일 뿐만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섬기고자 주님 향해 솟아오른 부활의 언덕 위의 삶으로 더 필요하고 절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주님을 모시고 솟아오른 부활의 영역, 바로 내 주님께 다스림 받는 그 산봉우리에 서 있는 삶을 시온의 삶이라, 예루살렘의 삶이라 말하겠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라고 우리 신랑 되신 주님은 술람미 여인 된 우리에게 위치를 정확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바위 틈 주님 안에, 낭떠러지 땅 끝에, 은밀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비둘기 말입니다.
이와 같은 시온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이가 다윗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무엘하 5장에 보면 다윗이 주님의 허락하신 마음을 따라 예루살렘의 거민 여부스 족속을 치고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그곳에 붙이면서 “이는 다윗성이더라”했습니다. 주님도 인정하시는 승리요, 이름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22장에서 26장까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여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아름답고 견고한 시온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11장의 모습은 시온 산성에서 한눈을 팔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소돔과 고모라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27장에도 다윗은 그 마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육백인의 수하들과 함께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서 피하여 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궁핍하고 어려워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이 정하신 유대 땅을 벗어나지 않아야 했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목숨을 보존하고자 주님이 자신에게 설정해주신 구역을 벗어나서 블레셋 땅에 숨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성도가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조용한 마을들을 습격하며 강도짓을 벌이는 그 모습과 삶은 주님께 책망 받고 엄중하게 심판받아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다윗이 실수한 점이 있는 곳이 사무엘하 24장인데요. 스스로 왕위에 앉고자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헤아리며 그 가운데 다윗은 안식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왕 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며 반역이었습니다. 성도 된 우리 각자가 끝까지 헤아리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힘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헤아리고 주님을 신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 다스림을 받을 때만이 시온의 백성이고 예루살렘의 삶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헤아리고 자신에게 있는 것을 헤아리는 것은 시온 산성에 거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한 삶이 되고 맙니다. 다윗이 위치상으로는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지만 사무엘하 24장에서의 모습은 시온의 삶을 빼앗겨버리고 바카의 골짜기 곧 눈물의 골짜기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하 1장에서부터 9장까지를 살펴보면서 여기서 나타난 다윗의 삶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사무엘하 1장은 다윗이 아말렉에게 빼앗겼던 가족들과 소유물을 되찾아오고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왔지만 불타버린 시글락을 재건하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주님 앞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일들에 밀려가지고 우리의 삶을 분주하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안식과 평강을 지켜가며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이틀 그렇게 보내다가 제 사흘째 된 날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울 왕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자기 사람들과 함께 옷을 찢으며 애통해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격과 자세인지 모르겠습니다. 요나단은 사랑하는 관계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할지라도 사울 왕의 죽음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참 안타까이 생각하며 그는 슬픈 노래를 불러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자 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다윗이지요.
사무엘하 2장에서는 다윗이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도 되는지 주님께 여쭈어봅니다. 주님은 “올라가라” 말씀해주셨고 다윗은 “어디로 가야겠습니까?” 또 여쭈어볼 때 주님은 “헤브론으로 가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속해서 주님과 연합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시온 산성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무엘하 3장에서 다윗은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을 등지고 자기에게로 다가올 때에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해줍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었지만 다윗을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스라엘 전체를 다윗에게 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심복 중에 요압이 월권으로 아브넬을 다시 불러서 죽이게 됩니다. 다윗은 그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서 애통해하며 참으로 가슴을 쥐어짜고 있습니다. 아브넬을 정중하게 장사지내는 다윗의 그 모습을 보고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은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니라 아브넬에 대한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알고서는 다윗을 더욱 존경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4장,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죽은 소식을 듣고 손맥이 풀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놀랐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두 군대 장관이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수급을 다윗에게 가져왔지만 다윗은 전혀 반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영역을 키우려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다윗은 주님이 세운 사람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자기 영역에 머무르기를 원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은 시온 성을 차지했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과 백성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등극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에 순종하는 모습이 시온 산성답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은 이방인 땅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모셔왔습니다. 그때 얼마나 기뻤던지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며 반겨했습니다. 미갈은 이 모습을 보고 비난하고 부정적인 말을 했지만 다윗은 자신이 낮춰지더라도 하나님의 궤가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서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삶은 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있어야만 들어간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사무엘하 7장, 다윗은 마음으로부터 주님의 집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시킨 일도 아니었는데 마음으로부터 주님께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허락하지 않았더라도 그 마음은 주님이 받아주셨고 성전 된 자세를 가진 다윗을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축복을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보면 14절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스로 전투를 벌인 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성도들처럼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순종 속에서 이기는 자로 서가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공과 의를 행했다 했으며 그는 점령한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공과 의를 행했을 것이라 믿어집니다.
마지막 사무엘하 9장에 보면 다윗은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절뚝발이 므비보셋이 발견되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밥상에서 다른 왕자들과 똑같이 므비보셋을 대했습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식사를 했고 예루살렘에 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요나단과의 사랑을 요나단의 아들 므비모셋에게 베푸는 모습이지요.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얼만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시온에 솟아오를 때 마땅히 섬길 내 형제들과 이웃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9장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이 모습은 다윗이 내 주님 모시고 시온 산성으로 서 가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땅끝 시간은 단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내 주님 모신 시온 산성으로 깨어 있어 솟아오른 삶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요,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영광의 기회를 갖는 삶이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에도 다윗이 나옵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 했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다윗은 시온이었고, 시온은 다윗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말씀에도 주님은 다윗의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삶의 근거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65편 1절에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 요한계시록 14장 1절 이하에도 그 말씀이 있지요.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을 하나님과 주님께 드리려고 시온 산에 솟아오른 주님의 사람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요, 이름이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땅끝에서 내 주님 모신 시온 산성으로 서 가는 삶,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 내 주님 모신 시온 산성으로 서가는 삶, 생각만 해도 기쁩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내 주님 모신 시온 산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