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첨(尹鱗瞻)은 자가 태조(胎兆)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때 여러 차례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언사(言事)가 권귀(權貴)에게 거슬려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강직되었다가 기거주(起居注)로 벼슬을 옮겼다.
그때 궁인(宮人) 무비(無比)가 왕의 총애를 얻어 3남 9녀를 낳았다. 최광균(崔光鈞)은 무비의 사위인데, 무비가 왕의 사랑을 받은 인연으로 등급을 뛰어 8품을 받고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게 되자 사대부로 이를 갈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간관(諫官)이 최광균의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자 왕이 윤인첨(尹鱗瞻)과 간의(諫議) 이지심(李知深), 급사중(給事中) 박육화(朴育和), 사간(司諫) 김효순(金孝純), 정언(正言) 양순정(梁純精)·정단우(鄭端遇)를 불러 서명할 것을 독촉하였다. 낭사(郞舍)가 두렵고 위축되어 네, 네, 하며 물러나오니 사람들이 조롱하여 말하기를, “말하지 않으면 사간이 되고 말이 없으면 정언이며, 말을 더듬으면 간의가 되니 한가하게 무슨 논의를 하겠는가.”라 하였다.
〈윤인첨은〉 나중에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나갔다. 인주(麟州)와 정주(靜州) 2주의 경계에 섬이 있었는데 금인(金人)들이 많이 와서 살았다. 병마부사(兵馬副使) 김광중(金光中)이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고 방수(防戍)를 설치하니 금주(金主)가 힐난하고 꾸짖었다. 왕이 그 섬을 돌려주고 방수를 철거하라 명하였으나 윤인첨(尹鱗瞻) 등이 영토를 빼앗기는 것을 수치로 여겨 따르지 않았다. 금의 대부영주(大夫營主)가 정예 군사 70여 명을 보내어, 그 섬을 공격하여 방수별장(防守別將) 원상(元尙) 등 16명을 잡아 돌아갔다. 윤인첨이 놀라 의주판관(義州判官) 조동희(趙冬曦)와 은밀히 모의하고 공문을 보내 포로를 돌려보낼 것을 청하니 다음날 돌려보냈는데, 윤인첨 등이 비밀로 하고 아뢰지 않았다. 나라에서 그것을 알고 힐난하니 윤인첨은 죄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리저리 꾸며대면서 끝내 보고하지 않았다. 들어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윤인첨은〉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이 되었다가, 곧 참지정사 판병부사(叅知政事 判兵部事)에 올랐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여 동북면병마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 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로 나갔다.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의방(李義方)은 윤인첨(尹鱗瞻)이 그 모의를 알고 있었는지 의심하였고, 또 당시 문신의 우두머리라고 여겨 잡아서 해치려고 순검군(巡檢軍)으로 하여금 윤인첨을 잡아 결박하게 하였으나 유응규(庾應圭)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곧이어 상장군(上將軍)을 겸하여 중방(重房)의 회의에 참여하였으며 수태사(守太師)를 더하였다.
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키니, 왕이 윤인첨(尹鱗瞻)에게 명령하여 원수(元帥)로 삼아 3군(三軍)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절령역(岊嶺驛)에 이르러 마침 심한 눈보라를 만났는데 서경의 군사가 고개를 따라 내려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니, 관군이 혼란에 빠져 마침내 흩어져 달아났다. 윤인첨이 포위를 당하자 적과 싸우다 죽으려 하였으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정균(鄭筠)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사령관[主將]께서 스스로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정균은〉 윤인첨의 말에 채찍질하여 포위를 무너뜨리고 돌진하여 나와 겨우 벗어났으며 〈남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왕은〉 곧 다시 윤인첨을 원수(元帥)로 삼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탁성(奇卓誠)을 부원수로 삼았으며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진준(陳俊)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경진(慶珍)을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상장군(上將軍) 최충열(崔忠烈)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 섭대장군(攝大將軍) 정균을 지병마사(知兵馬事), 상장군 조언(趙彦)을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 섭대장군 문장필(文章弼)을 지병마사, 상장군 이제황(李齊晃)을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 사재경(司宰卿) 하사청(河斯淸)을 지병마사로 삼아 다시 서경(西京)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승군(僧軍)도 또한 가게 하였다.
윤인첨이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서교(西郊)에서 군대를 훈련하였는데, 정균이 은밀하게 승려 종참(宗旵)을 꾀어 이의방(李義方)을 죽였다. 왕은 군중(軍中)이 놀라고 소란스러울 것을 염려하여 근신(近臣) 유응규(庾應圭)를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게 하였는데, 군중에서는 모두 문신이 승군(僧軍)을 부추겨서 변을 일으킨 것이라고 의심하여 윤인첨을 죽이고자 하였다. 유응규가 돌아와 정중부(鄭仲夫)에게 알리자 〈정중부가〉 사람을 보내 타이르고 오해를 풀었더니 그제야 그쳤다. 승군은 이의방의 딸이 동궁(東宮)의 배필로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 내보낼 것을 요구하며 마침내 보제사(普濟寺)에 모여서 출발하지 않았으나 윤인첨 등은 그대로 가버렸다. 조위총의 심복이 연주(漣州)에 있었으므로 윤인첨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손을 잡고 이끌고 가야할 자는 안에서부터 친근하게 해야 하고, 반역자를 토벌할 때는 그 가지부터 꺾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우리가 서경을 먼저 공격한다면 연주에 있는 자들이 북인(北人)을 꾀어내어 함께 〈우리를〉 협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뒤로 적을 상대하게 될 것이니 이는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 연주는 서도(西都)를 믿고 우리가 갑자기 당도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연주를 공격해야 한다. 연주가 만약 〈우리 수중에〉 떨어진다면 북주(北州)의 여러 성은 반드시 모두 귀순(歸順)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귀순한 자들을 거느리고 역적을 공격하면 뜻이 온전해지고 힘이 하나가 되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라 하였다. 마침내 연주에 도착해서 포위하여 공격하기를 몇 달 하였더니 연주에서 조위총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조위총이 장수를 보내 구원하려 하였으나 관군이 샛길을 따라 그들을 격파하여 1,500명의 목을 베고 220여 명을 사로잡았다. 관군이 또 서경의 군사를 망원(莽院)에서 만나 갑자기 공격하여 700여 명의 목을 베고 6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연주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자 후군총관(後軍摠管) 두경승(杜景升)이 공격하였는데, 이에 서북의 여러 성이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이동하여 서경을 공격하니 윤인첨이 말하기를, “서경은 성이 험하고 견고하니 오랫동안 피로해진 군사들이 개미떼처럼 붙어서 공격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그들을 포위하여 〈성을〉 나와서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타이르고 위로하여 살 길을 열어 보여준다면, 성 안에서 위협을 당한 자가 반드시 탈출하여 항복할 꾀를 낼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조위총은 결국 굶주린 죄수 하나일 뿐이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성의 동북쪽에 흙으로 산을 쌓고 지켰는데, 조위총이 식량이 떨어져 사람 시체를 먹는 지경에 이르자 때때로 나와서 싸움을 걸었으나 윤인첨이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사로잡은 자에게는 번번이 옷과 먹을 것을 주어 다시 보내니, 성 안에서 그것을 듣고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서 귀부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윽고 관군이 또 서경의 군사와 싸워 대패시키고 잡아서 목을 벤 자가 30여 명이었으며, 그 요해처(要害處)인 봉황두(鳳凰頭)를 빼앗아 그곳에 성을 쌓았다.
〈명종〉 6년(1176)에 윤인첨이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공격하고, 두경승이 대동문(大同門)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성 안이 크게 궤멸되자 조위총을 잡아 죽이고 그 무리 10여 명을 가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위무(撫慰)하니 거주하는 사람들은 예전과 같이 안도하였다. 성조(聖祖, 태조)의 진전(眞殿)에 알리고, 조위총의 머리를 함에 넣고 병마부사(兵馬副使) 채상정(蔡祥正)을 보내어 승리를 알렸다. 또 조위총의 처자와 포로 100여 명을 보내고, 조위총의 머리를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인첨이 갑자기 서경의 군사가 성 위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것에 대해 물었는데, “사람들이 용을 세웠다[立龍]고 외치면서 그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윤인첨이 말하기를, “조위총은 죽을 것이다. 사람[人-亻]과 머리[頭-宀]를 버렸으니 어찌 살겠는가?”라 하였다.
윤인첨(尹鱗瞻)이 비서소감(秘書少監) 유세적(庾世績)을 보내어 서경 평정을 하례하는 표문을 올리니, 왕이 이부시랑(吏部侍郞) 오광척(吳光陟)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뒤〉 윤인첨에게 추충정난광국공신 상주국 감수국사(推忠靖亂匡國功臣 上柱國 監修國史)를 더하고, 참지정사(叅知政事) 진준(陳俊)을 보내어 금교역(金郊驛)에서 공로가 있는 여러 장수를 마중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개제(介弟)인 평량후(平涼侯)를 보내어 마천정(馬川亭)에서 잔치를 내려주었고, 돌아오자 또 잔치를 내려 위로하였다.
이해(1176)에 〈윤인첨이〉 죽으니 67세였다. 시호를 문정(文定)이라 하고 관비(官庀)로 장사지냈다.
윤인첨(尹鱗瞻)은 다른 사람보다 총명하여 비록 천명이나 백명이라도 한번 그 이름을 들으면 끝까지 잊지 않았다.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킨 후부터 문신(文臣)이 기가 꺾이고 힘을 잃자 윤인첨이 무신들과 더불어 같이 일하였는데, 매사에 간섭을 받아 시속에 아첨하고 스스로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서경이 평정된 이후로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일의 처리가 마땅하지 못하여 서북(西北)의 항복하고 귀부한 백성들이 여러 번 반란을 일으키니 당시 평판이 〈윤인첨을〉 가볍게 여겼다.
후에 왕이 〈윤인첨에게〉 제서를 내려 말하기를 “지난번에 조위총(趙位寵)이 서도(西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수(元帥) 윤인첨(尹鱗瞻)과 기탁성(奇卓誠) 등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그를 토벌하고 평정하였으니 내가 그 공을 기쁘게 여겨, ‘절대 잊지 않겠다.’고 하였다. 윤인첨에게 추충정난광국공신 수태사 문하시중 상주국(推忠靖亂匡國功臣 守太師 門下侍中 上柱國)을 추증하고 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붙이도록 하였다.
윤인첨은〉 후에 명종(明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윤인첨의〉 아들은 윤종악(尹宗諤)·윤종회(尹宗誨)·윤종함(尹宗諴)·윤종양(尹宗諹)이다. 윤종악은 대부주부(大府注簿)로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에 죽었으며, 윤종회는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가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가 되었고, 윤종양은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윤인첨(尹鱗瞻)의 형제 3명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윤종악·윤종함·윤종양이 또 과거에 급제하여 2대에 걸쳐 어머니가 관곡[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겨 마을에서는 그 집을 삼제댁(三第宅)이라고 하거나 또는 이수댁(二帥宅)이라고 불렀다. 윤종양은 약속을 중히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나, 전원(田園)을 넓게 차지하고 선물[饋遺]을 많이 받아서 세상의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