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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개관
한대까지 중국문화다운 요소가 정착이 되었다면, 중국의 중세라고 할 수 있는 위진남북조, 수당오대 시대에는 중국문화가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 차례의 폭넓은 변화를 꾀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크게 본다면, 이민족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였던 시기였다.
한말 이래로 북방의 유목민족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화북을 지배하여 이윽고 이들의 혈통이
중국 내에 스며들어갔다. 그러한 지배층의 종족적인 면이 자연히 문화적인 면에서도 반영이 되었다.
불교 등과 같은 외래교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식주 생활 등을 비롯하여,
이 시기를 통하여 북방민족의 문화적인 여러 가지 영향이 중원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가 정착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배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법제적인 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도시의 발전에서 이념형의 도시구조를 발전시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대는 문화의 포용성으로서 중국문화 자체의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 반면에 정치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는 동요와 전란의 시대로 계급과 민족간의 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권의 분열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기 220년에 부패한 동한 정권은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이 정립한 국면으로 대치되고,
국내는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사마씨司馬氏는 위를 찬탈하고 265년 전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265-316)을 세웠고 서진의 패망 후 일단의 관료와 사족이 강남으로 도피하여
東晋(317-418)왕조를 건립하였다. 북방의 소수민족들은 연이어 중원으로 이주하여
서로 다른 지역에서 16개의 정권을 건립하니 역사에서 이를 16국이라 부른다.
420년 송宋의 유유劉裕는 동진을 멸망시키면서 일어났고,
북위北魏(386-534)도 439년 북방을 통일하여 반세기 동안의 남북분립국면을 형성하여
남북조시대가 되었다. 연속되는 전쟁으로 북방은 파괴되었으나 강남의 경제 문화는 상당히 발전하였다.
북방에서는 북위의 분열 후 북제北齊(550-577), 북주北周(556-581)가 이어지고 남방은 송宋(420-479),
제齊(479-502), 양梁(502-557), 진陳(557-589)의 왕조가 교체되었다.
581년 양견楊堅이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隋왕조를 세우고 이어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은 다시 통일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한대 말기의 찰거察擧제도를 발전시켜 조위曹魏(220-265)에서
구품관입제九品官入制를 형성하였으며 사족제도의 특권을 확립하였다.
사족의 행위와 사상은 당시의 문학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부유한 생활조건과 창작환경을 배경으로 사족 중에서 일단의 우수한 문학가와 예술가가 출현하였다.
사상면에서는 한말의 부패한 경학의 속박이 타파되고 현학玄學이 대두하였다.
현학의 기본사상은 유심적이지만 현학의 발전은 논리사변의 발전과 이론탐색에 대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촉진하여 직접, 간접으로 문학과 예술의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
문학 창작의 발전과 더불어 문학이론의 연구도 신속하게 전개되었고 인물품제人物品題의 기풍,
문학이론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회화이론의 연구를 촉진시켜 사혁謝赫의 『고화품록古畵品錄』으로
대표되는 고대 회화의 역사와 왕희지의 서론 등, 화론과 서론이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불교는 중국에 전래된 후 남북조시대의 통치자들에게 이용되어 매우 빠르게 발전하였고,
불교의 전파는 중국 고대문화의 형성에 새로운 요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이민족의 침입으로 북방의 사족과 민중이 대거 양자강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남방의 경제문화의 발전을 촉진하였으며,
남방은 사회적인 안정으로 경제가 번성하였다. 북위는 북방을 통일하고 孝文帝(471-499)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여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였다. 따라서 황하, 양자강 유역내의 봉건경제와 문화는 일찍이 보지못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는 강성한 당왕조의 출현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진■ 남북조시대의 서예
위, 촉, 오 삼국의 뒤를 이은 것은 진晋(265)이고, 이 때를 서진이라하며, 서진의 150년간은 서예에 있어 볼만한 명품이 적다. 316년 서진이 흉노에 의해 무너지자 곧 317년 남경에서 동진을 세웠다.
동진은 100여 년간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문학의 도연명, 회화의 고개지, 서예의 왕희지가 주역이었다.
진은 뒤에 남■북조로 다시 나뉘며 수隋(588)가 이를 통일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조시대란 건강建康(건업建業■금릉金陵■말릉秣陵■남경南京, 지금의 강소성 강령부)으로 수도를 정한 오吳■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진陳의 6대에 걸친 370여 년을 말한다.
즉 송(420-589)■제(479-502)■양(502-557)■진(557-589)을 남조라하고,
북위■동위(534-550)■서위(535-557)■북제(550-557)■북주(557-581)를 북조라고 한다.
북쪽의 이민족이 압박하자 한족의 사족들은 강남으로 이동해 새로운 남조귀족문화가 형성되어 이것이 수당문화에 까지 이어진다.
서예에 있어서 삼국에서 육조시대는 예서가 사라지고 해■행■초서가 발전한 시대이다.
청나라의 완원은 서예를 남파와 북파로 나눈 『남북서파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여기서 남파의 글씨는 운韻이 있고, 북파는 글씨는 골骨이 있다고 했다.
특히 행■초는 남조의 동진시대에 꽃이 핀다.
또한 ‘북비남첩’이라고 하여 북방에는 비, 갈, 마애 석각이 많아 해서에 특징을 보이고,
남방에는 첩이 많아 행■초에 특징을 보인다.
남조의 많은 지식인들은 도교와 서예, 음악, 그리고 청담을 즐기며 시대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한편, 위진시대 서론은 각종 서체의 특징을 묘사하고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위항은 「사체서세」라는 글에서 고문자(古文字), 전서, 예서, 초서의 4가지 서체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설명하였고, 각 서체의 미를 분석하였다.
위삭(衛鑠, 위부인)은 필진도에서 서예기법과 창작, 심미적 특징에 대해 논술하였다.
남북조 시대의 서론은 작가를 평가하거나 창작론이 성행하였다. 이 외에도 양흔의 「채고래능서인명」,
왕승건의 「논서」, 유견오의 「서품」 등이 유명하다.
서진의 서예가는 위관과 그의 아들이자 『사체서세』의 저자인 위항, 그리고 삭정索靖과 육기陸機 등이 있다. 육기의 <평복첩平復帖>은 초서로 현재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육기의 조부는 오나라의 승상이었다. 육기는 48세에 모함을 받아 피살 되었다.
평복첩은 장초와 금초의 중간형태로 작자를 알 수 있는 최초의 묵적 진본이다. 9행 84자이다.
서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왕희지가 활동한 동진은 316년 강남에서 사마예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 유행한 현학은 귀무론貴無論(천지 만물이 무위를 근본으로함)으로 연결되고,
서예는 운치를 숭상하고 골기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는 종이가 생활화 되었고,
실용보다 예술행위로서의 창작이 성행하였다.
무엇보다 동진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행■해서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비와 묘지로는 <찬보자비>, <왕흥지묘지> 등이 있다.
왕희지(303-361, 321-379)는 낭야의 임기(지금의 산동성) 사람으로 자는 일소,
동진의 문벌귀족인 왕광의 아들로서 우군장군과 회계내사를 지냈다.
그의 <이모첩>은 행서로서 정면을 취한 세가 많다.
<난정서> 신룡본은 353년 왕희지가 51세 늦봄에 41명의 명사들과 회계군 난정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서문을 쓴 것이다. 서예사상 ‘천하제일행서’로 평가받고 있다.
난정서는 태종이 죽을 때 소릉에 함께 묻었기 때문에 전하지 않는데 우세남과 저수량의 임본이 유명하고 풍승소馮承素의 모본이 유명하다.
풍승소의 모사본은 당 중종의 연호가 찍혀 있기 때문에 ‘신룡본’이라고 한다.
왕희지는 용필에서 정봉과 측봉을 잘 썼다. <정무본 난정서>는 구양순의 탁(拓) 서(書)로 전해진다.
<평안첩>은 왕희지의 행서, <상란첩>은 왕희지의 행초서, <초월첩>은 왕희지의 초서이다.
초월첩의 초월은 정월을 말한다. <십칠첩>은 왕희지 초서의 대표작이다.
왕희지가 남긴 서한은 모두 20여 통으로 사람들은 금초의 최고규범으로 간주하고 있다.
왕법의 금초 특징은 글자와 글자 사이에 필획이 연속되지 않은점과 글자의 세(勢)가 안으로 수렴되었고, 또한 종향(밑으로 향함)적인 종세를 갖추었고, 초서의 선에 힘을 잃지 않고 있다.
<황정경>은 왕희지의 소해이다. 황정경은 위진시기 유행한 도가의 양생수련과정에 관한 책으로 왕희지 해서의 명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글자의 세는 종세를 이루며 주필을 살리고 있다.
왕헌지(344-386)는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중서령의 벼슬에 올라 왕대령이라고 부른다. 왕희지와 버금간다고 세상에서는 ‘이왕’이라고 부른다.
<십이월첩>은 왕헌지의 행초서로 저수량이 이것을 보고 ‘대령십이월첩’ 여섯 자를 써놓았다.
왕헌지가 그의 부친과 다른 것은 행초서를 이어쓴 것이다. 송나라 미불은 십이월첩을 최고라고 하였다.
<찬보자비爨寶子碑>는 동진 405년에 제작 되었고, 특징은 방필, 사각형의 예서, 넓고 두터운 필획,
양 끝이 흔들리는 듯한 자태이며, 비석의 윗부분에 비액이 있고 13행에 매행 4자의 제자가 있다.
<찬?맛謎?>가 발견됨으로써 동진시대에도 석각작품이 제작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찬보자비>는 <찬용안비>와 더불어 ‘이찬’이라고 불린다.
아울러 강소성에 있는 <예학명>과 더불어 남조 최고의 석각서예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조시대의 석각은 <찬용안비爨龍顔碑>와 <예학명瘞鶴銘>이 대표적이다.
남조시대는 왕희지의 영향으로 지첩과 각첩이 대부분이고 석각은 적다.
<찬용안비>는 송 458년, 높이 338㎝이다. ‘이찬’ 가운데 찬용안비는 해서형태로 예서의 기미가 조금 남아 있다. <예학명>은 남조 양의 해서로 마애였다. 행관은 좌에서 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북조시대의 석각은 각석, 묘지, 조상기, 마애, 전문 등 여러 가지이다. 먼저 각석을 보면,
<장맹룡비>는 북위 정광 3년(522)의 해서이다. 현재 산동성 공묘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는 북위해서 양식의 표준으로 주필이 있고 결구는 편정하다.
청 후기부터 많은 연구가들이 이 비를 북위해서의 최고라고 평하고 있다.
<고정비>는 비양에 24행, 매행 46자의 위해魏楷가 새겨져 있다.
기필과 수필, 결구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보이고 있다.
조상기를 보면, <우궐조상기>는 해서로 북위 19년(495)의 작품으로 조상기 중 제일 이른 작품이다.
결구가 기울어졌고, 필획이 방준하다.
<시평공조상기>는 북조북위 태화 22년(498)의 작품으로 용문이십품 가운데 체격이 가장 우수한 작품이다. 방필해서의 최상품으로 양문으로 새겨 소박하고 중후하다.
마애각석을 보면, <정문공하비>는 북조북위 영평 4년(511) 정도소의 작품이다.
정문공비는 상비가 산동성 천주산에 있고, 하비가 운봉산에 있다.
내용은 정(鄭)희(羲)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다. 결구는 넓고 방원을 겸비하고 있으며 형체는 모나고 필세는 원활하다. 이 비는 원필을 위주로 하고, 원필 속에 방필을 첨가하였으며 운필을 천천히 하였다.
전서의 필세와 예서의 글자형태를 첨가하여 강건하면서 질긴 필획을 표현하고 있다.
<석문명>은 북조북위 영평 2년(509)의 작품으로 현재 한중박물관 소장되어 있다.
양계초는 ‘일품’이라고 평했다.
이 비는 북위 해서 가운데 선은 부드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지만 모지지도 예리하지도 않다.
묘지명을 보면, <원현준묘지>는 해서로 북위 연창 2년(513)의 작품이다.
1918년 하남성 낙양성에서 출토되었고, 현재 강소성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정교하고 정연한 북위해서의 표준형태이다. <최경옹묘지>는 해서로 북위 희평 2년(517)의 작품이다.
용필은 둥근 힘이 함축되었고, 측필은 매우 적다. 필획이 가늘면서도 힘이 있다.
■위진 시대, 그리고 위진 현학
삼국지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진 시대, 군계일학■계륵■백안시 등의 고사를 만들어 낸 죽림칠현의 시대, 그 시대가 바로 위진 시대이다.
위진 시대의 역사는 한마디로 틈새의 역사이다. 통일 왕조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중국의 역사나 철학사를 서술할 때 위진남북조 시대는 대부분의 경우 생략되고 만다.
'진한 ■ 수당 ■ 송원 ■ 명청', '한당 경학, 송명 리학'.
그 결과 위진 시대의 철학이나 역사 또한 과소평가되어 우리는 종종 그 학문적 가치를 간과하고 만다.
그러나 진한과 수당의 두 통일기를 잇는 이 분열의 시대는 문화적으로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는 특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불경의 번역 작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었고, 죽림칠현으로 대표되는 노장적 분위기 속에서 제도권 내의 학자들은 유가의 입장을 높이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석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어 하안의 『논어집해』, 왕필의 『주역주』■『노자주』, 곽상의 『장자주』 등이 빛을 보았다.
이러한 위진 시대의 성격은 '현학玄學'이라 일컬어지는 당시의 철학 체계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현학이란 무엇인가
중국 도가(道家)의 학문을 일컫는 말. 본시 노장(老莊)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현(玄)이란 노자(老子)에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을 초월한 우주생성(宇宙生成)의 근원을 말하며
이것을 또한 도(道)라고도 한다.
한대(漢代)에는 노장의 학문은 유교와 더불어 당시 사람들의 교양의 대상이었고,
삼국(三國)■위(魏)■진(晉) 시대에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담론(談論), 또는 철학론적 색채가 짙었으며, 청담(淸談)이 행하여졌다.
『송서(宋書)』의 「뇌차종전(雷次宗傳)」이나 『남사(南史)』의 「문제본기(文帝本紀)」에 의하면 438년 유학(儒學)■현학■사학(史學)■문학(文學)의 4관(四館)으로 된 4학(四學)을 세웠는데
현학은 하상지(何尙之)로 하여금 건립케 하였다고 되어 있고 『당서(唐書)』의 「선거지(選擧志)」에는 741년에 비로소 숭현학(崇玄學)을 설치하여 『노자(老子)』 『장자(莊子)』 『문자(文子)』 『열자(列子)』 등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위진 시대는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활발했던 시기이다.
중국 정신사의 거의 전 시대를 관통하는 유학이 실학이라는 기치 아래 현실의 문제에 천착했다면,
이 시기의 현학은 중국철학사에서는 예외적으로 유와 무의 문제, 언어와 의미의 관계 등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현학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 의미는 쉽게 규정될 수 없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을 보면 인물도 다양하고 사유도 복잡했다.
노장의 뜻을 좇아 한가로이 소요하던 죽림칠현이 있는가 하면,
하안이나 곽상처럼 노장을 앞세우고서도 유가적 제도를 공고히 하려 했던 현학자들도 있었고
유가나 도가의 틀에 맞추어 불교를 해석하던 격의불교의 승려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이 시대는 유도불 삼가의 정립을 예견하는 시대였고,
현학은 유학과 노장학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