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 우리 통합측 교단은 제101회 총회가 안산제일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앞으로 100년 미래를 내다보며 시작되는 첫 출발입니다. 그 출발을 다시 거룩한 교회로 시작했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다시 거룩한 교회로” 이런 주제가 정해진 이유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한해를 앞두고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적 시간은 단지 기억하고 기념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기회를 주신 시작으로 알고 다시 거룩한 교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먼저 동영상을 보겠습니다.)
동영상에 소개된 마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로 27살에 초빙을 받고 또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로마 순례자로 라테라노 성당을 가게 됐는데 라테라노 성당은 가장 오래된 교황의 저택이 있는 곳이기에 성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많은 순례자들이 찾습니다. 기이한 것은 이곳에 오면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핍박받고 재판받을 때 빌라도의 궁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이 스칼라 산타 계단입니다. 예수님이 밟았던 이 계단을 천사에 의해 온전한 모습으로 로마에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라테라노성당으로 가는 계단을 무릎으로 한 계단씩 오르는데 오를때마다 9년간의 속죄를 보증 받는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반드시 이 계단을 오르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습니다.
루터도 이 계단에 오르면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들이 진정 속죄를 받았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루터가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한 계단을 밟는 순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무릎을 꿇은 계단이라며 십자가 표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계단만은 속죄의 기간이 2배로 계산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표시를 밟는 루터에게 강력한 말씀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무리 계단에 십자가 표시가 예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 계단 끝까지 올라가면 속죄가 2배나 된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인들을 대신 되신 것만 믿으면 충분하다!"........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죄 사함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만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순례자여행을 중단하고 독일로 돌아와 비텐베르크 만인성자교회에 1517년 10월 31일 로마 카토릭에 잘못된 95개의 반박문을 붙여 잘못된 교리를 반박 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입니다.
루터가 카토릭에 대한 잘못된 교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톨릭은 믿음의 첫째 법칙이라고 하지만 개신교는 믿음의 유일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이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행위도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개신교는 ‘오직 은혜’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우리는 ‘오직 성경’이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교회의 결정과 교황의 말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그러나 성모를 통하여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성모구원설’도 말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그러나 교황도 영광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을 제시하며 95개 반박문으로 로마 카토릭과 싸우며 종교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된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 즉 개혁과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혁명이란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동학농민혁명, 4.19혁명, 5.16군사혁명 이런 혁명이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혁명과 개혁은 그 의미에 차이가 있습니다. ‘혁명’은 다른 사람을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은 나를 쳐서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개혁: 가죽을 벗겨낸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이란 “나를 쳐서 가죽을 벗기듯 잘못된 신앙관습들을 벗겨 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500주년 종교개혁주일을 통하여 다시 개혁되고 회복되어야 할 부분은 다시 거룩한 교회로부터 출발하자는 것이 우리 통합측 교단에서 이번 101회기 총회주제로 삼고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며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I. 우리교회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 개혁의 해답은 성경입니다. 교회의 개혁은 조직이나 이론으로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경을 멀리한다는 것을 상상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경보다 사람의 권위에 성경이 가려져 있는 현실이 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헌번이란 법이 있습니다. 이법은 성경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헌법이 성경위에 있을수 없습니다. 성경이 교회에 나아갈 길을 나침판처럼 제시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칭찬한 요시야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에게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야 시대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모세의 율법인 두루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성전을 수리하게 하던 중 제사장 힐기야가 두루마리를 발견하여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요시야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철저한 회개와 더불어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요시야 시대의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이방종교를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타파하고, 일월성신 숭배를 타파하였습니다.
신앙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시아왕부터 말씀앞에 무릎을 꿇은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왕하23:25.....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성경은 개인과 교회와 국가를 개혁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약 3만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책 가운데 가장 많은 인명이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 외에 어떤 이름도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은 아닙니다. 행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장로교 신조 1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인 성경을 믿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므로 행위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최근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행위가 신앙에 일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머릿속에서 지식으로만 맴돌고 가슴속에 감동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거하다”는 말은 영속적으로 머무는 상태를 말하며 항상 성경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박물관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의 성의와 당시에 사용하던 성경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제들의 성의는 화려함의 극을 달리고 있고, 성경 또한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장식으로 수놓은 표지를 입힌 보물입니다.
‘볼세비키 혁명’이라 불리는 1917년의 공산혁명이 일어날 당시 사제들은 성의 장식으로 다투고, 성경의 표지를 자랑하였습니다.
당시의 관심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성경장식이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부패가 전 국민의 98%가 정교회 교인인 러시아를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책에 교회가 쇠퇴할 때 나타나는 모습을 이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보다 회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에 대한 관심보다 교회가 세운 연합기관들에 더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경 말씀을 상징화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상징화하여 성경의 가치를 축소하는 것은 교회를 쇠퇴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상징적인 말이 아니라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장식용이 아닙니다...... 성경은 상징적인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개혁의 기본이며 시작임을 믿습니다.
2. 우리교회가 모두 거룩한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교회란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합니까?.... 우리는 보통 교회를 말하면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 외형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종탑이 누가 높으냐가 기준입니다. 예배당 면적이 얼마나 크냐가 기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한 번도 예배당을 위해 벽돌 한 장을 쌓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엡1:23......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교회로 다시 돌아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예배당을 돈을 많이 들려 수리한다든지 오래된 예배당을 헐고 새로 짖는 것이 먼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선행 되어야 할 것은 레19:2......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세워지면 됩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데쉬인데 잘라서 떼어 놓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거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는 구분되어 전혀 흠과 티가 없이 성결하신,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너희는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을 거룩하게 하려고 쪼개었습니다. 쪼개는 것은 잘라놓는 것이 거룩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짐승이 쪼개어졌지만 이런 행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아브라함이 언약 앞에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모습입니다.
벧전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 나오면 성도라고 불러줍니다. 성도란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호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거룩합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에 그 은혜를 입어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가 세상에서 거룩한 행실로 살아가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후 초대교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고난이 열매가 되어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 그래서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유롭게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황제가 공포를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예배드린 후 부터 이제 교리싸움 밥그릇싸움으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주된 원인도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건축비가 부족하니까 이미 죽은 사람들의 죄를 돈을 받고 사죄하는 면죄부 제도를 두었습니다. 내면을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에 치중했습니다. 겉모습만 화려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부도덕한 윤리적인 문제로 얼마나 주님의 교회가 상처를 입고 흠집이 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예수님은 외식한자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불었듯이 마치 한국교회가 겉으로 들어나는 것으로 보여지고 정작 내면을 썩어있는 모습이 오늘 우리성도들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어떠습니까? 저와 우리 성도 여러분께 자신에게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천국에 계시지만 옥한흠목사께서 생전에 계실 때 한복협 월례회 때 한국교회 타락을 3가지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증가하는 성직자 수’라고 했습니다. 옥한흠목사는 “성직자 수가 많아지고 신학교가 번창하는 것을 갖고 대단한 부흥이 오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이는 교회 안에 자기부인이 약화된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되는 것이 정말 광나는 직업처럼 느껴져서 지원하는 사람도 많고 아들에게 세습시키고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타종교를 비교하는데 불교가 타락할 때 전국 남자들의 70%가 전부 승려였던 티벳이란 나라가 그랬다고 합니다. 로마제국 시절 기독교가 가장 많이 뻗어 나갔던 시기가 성직자들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성기 때 성직자 수가 증가되고 이로인해 기독교의 타락현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 ‘늘어나는 종교기관’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하게 교역자가 많으니까 그들을 먹여 살리려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고 당연히 많은 조직과 기관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세 번째..... ‘기복신앙이 대세를 이루는 현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듣기 좋은 이야기(설교)를 하다보면 자기부인을 강조하는 말은 당연히 약해져서 세속 화의 길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파괴된 도덕성을 회복할수 있을까? 그러나 옥한흠 목사님은 1907년 길선주목사 집회 당시 체험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문은 아직 열려있기에 성령의 능력 때문에 회개가 가능하다”고 은총의 미래를 소망했습니다.
엘리야시대때 이세벨로부터 핍박당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남모르게 남긴 7,000명이 있었듯이 한국교회에도 남겨진 7,000명이 분명히 살아있기에 소망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승권목사도 동의합니다.
주향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거룩한 성도답게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을 겸손하게 구해야합니다. 우리 자신이 거룩한 교회가 되어가도록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거룩한 교회로써 세상의 빛이 되어야합니다.
모세시대 때 성막을 완공했을 때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마쳤을 때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 하고 그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성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교회가 되고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맞이한 우리 교회가 다시 거룩한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개혁은 나부터 실천할 때 오직 말씀으로....오직 믿음으로.......오직 은혜로 매일 매일 샘물처럼 거룩하게 살아갈 때 거룩한 교회로 회복될 것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