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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저학년 산문 장원
돌탑
영주가흥초등학교 4학년 권호재
산 속 깊이 있는 작은 절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바람처럼 산길을 뛰었다. 길이 좋아질수록 바람 같던 걸음에 바람이 빠졌다. 숨도 점점 차올랐다. 그냥 돌아갈까 말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저만치 길 옆에 작은 돌탑이 보였다. 돌탑이 여기 와서 잠시 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숨을 꾹 참고 돌탑까지 뛰었다. 목까지 찬 숨을 내쉬며 돌탑을 살폈다. 훅 불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데 이끼까지 자란 것을 보면 제법 오래된 돌탑이었다. 차오르는 숨 하나와 주변의 작은 돌멩이 하나를 돌탑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 주세요. 꼭 산꼭대기 작은 절에 도착하게 해 주세요. ’
소원을 돌 틈 사이에 숨겼다. 아무도 모르게 나와 돌탑만 아는 비밀이었다. 비밀은 사람들이 몰라야 힘이 센 법이다.
가족들이 돌탑까지 올라오려면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돌탑을 더 쌓아보기로 했다. 길을 걸을 때, 흔하게 발에 차이던 돌멩이가 이날따라 귀했다. 보물을 찾듯이 주변을 뒤져서 몇 개의 쓸 만한 돌멩이를 찾았다. 별 의미 없던 돌멩이가 돌탑 위에 앉자 빛나 보였다.
아마도 이 돌탑을 쌓았던 사람들도 이런 느낌이었겠지. 돌탑에 쌓인 소원들이 서로 서로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비바람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나 혼자만의 소원만 있었다면 어쩌면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엄마가 왜 쌓아 올린 돌탑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했는지 알았다. 별 생각 없이 봤을 때는 볼링공처럼 그냥 무너뜨리고 싶은 재밌는 장난감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함부로 무너뜨릴 게 아니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소원과 소원을 끊어 내는 것이다. 긴 시간이 보호하던 귀한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제 길 위에서 만나는 돌탑에게 말한다. 쌓아 올린 소원 다 이뤄질 때까지 무너지지 말라고. 돌아가는 길에 작은 돌탑을 쌓아야지. 그 돌탑에 묶어 둔 소원은 돌탑과 나만 아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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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고학년 산문 장원
알맹이
영주남산초등학교 5학년 조민경
차근차근 배우면 나의 배움의 알맹이가 조금씩 조금씩 커진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나의 지식과 생각같이 말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지금 현재 초등학교에 다니며 나는 많은 것을 알았고 배웠다. 죽계백일장과 같이 이런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의 경험치도 늘어났다.
먼저 어린이집에 다녔을 때를 생각해보자. 오래된 일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때는 무조건 놀기만 하고 공부 생각은 1도 안 했다는 것을...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성장하고 배우면서 공부를 차츰 시작한다.
바로 유치원 때이다. 유치원에서는 낱말을 직접 써보고, 읽고, 중국어, 영어도 배웠다. 슬슬 언어에 눈을 뜨는 작은 새싹 같았다. 그 외에도 우리는 미술 등 예술 수업도 하였다.
7살 때에는 내 인생 처음으로 ‘졸업여행’이라는 것을 갔었다. 친구들과 자고, 떠들고, 놀고 정말 재밌었지만 졸업여행이 끝나고 눈물의 졸업식이 되었다.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니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한편으로는 초등학생이 되어서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드디어 초등학생이 된 나는 더 많은 과목을 시작한다. 4, 5, 6교시가 점점 적응이 되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배움의 알맹이가 커지기 시작한다. 나는 5학년을 지나 6학년 졸업식이 되면 울 것 같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초등학생에 들어서자 학원, 대회 등등 정말 수없이 참여한 것 같다. 요새 나는 너무 바쁘다. 그래서 미래의 나를 위해 배움의 알맹이를 키워 지금은 비록 작은 새싹이지만 시간이 지나 어릴 때의 나에서 지금의 나처럼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언젠가는 커다란 꽃이 피겠지!
지금은 비록 초등학생이라서 <알맹이>라는 주제로 죽계백일장에 참여하지만 좀 더 배워서 중학교, 고등학교, 또 언젠가는 대학교 때까지 죽계백일장을 다시 도전할 것이다. 과연 그때는 잘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를 꿈꾼다.
'미래의 나를 생각하며 배우자! 알맹이라는 단 세 글자에 여러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기억 하자 !'
포기하지 말고 알맹이를 키워 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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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 산문 장원
얼룩
영광중학교 3학년 김민재
내 마음 속 얼룩...
내 머리, 내 심장 속 얼룩...
16년간 드리워진 얼룩을 어떻게 지워나갈까?
얼룩이라는 친구는 참 묘하다. 멍이라는 친구는 눈에 보이면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몸 군데군데 또는 마음이라도 바로바로 생겨난다. 그리고 그 멍을 만지면, 그 멍을 느끼면 우리는 그 상처를 다시금 받게 된다.
그런데 그 얼룩은, 이 녀석의 얼룩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여기저기에 묻어진다. 분명히 아픈 적이 없었는데도 언제 한 번 내 마음을 볼 때면 그 얼룩들이 춤을 춘다.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이런 얼룩들이 언제 내 마음에 드리워졌는지 알 길이 없다. 또, 알고 싶다.
어느 날, 창문을 보고 있었는데 엄마가 말한다. 왜 한숨을 쉬고 있느냐고, 무슨 힘든 일이 있냐고. 나는 분명 아무 생각 없이 경치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그때 생각했다. 얼룩이 한숨을 만들어냈구나! 나도 모르게 생긴 내 마음 속 얼룩들이 춤을 추면서 멍이라는 친구들을 때리는가 보다.
친구들과 부모님과 형제와 다툴 때마다 이 얼룩이라는 녀석은 신이 나서 춤춘다. 더 열심히, 더 격렬하게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얼룩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내 마음을 점점 흑백으로 색칠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모든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는 얼룩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것 같다.
나는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얼룩이라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왜? 그런 사람들의 얼룩들은 춤을 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조용히, 차분히 있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얼룩이라는 친구들을 만나버렸고, 이 아이들은 신날만큼 신나 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사라진 멍들을 계속해서 때리고 있다.
하... 이러한 얼룩을 정말 어떻게 지울까? 나는 이 얼룩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가끔 명상도 해보고, 잠도 실컷 자보고, 바람도 맞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잠깐잠깐식은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바람은 모든 곳을 스치고 온 거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능력도 잠깐이면 사라진다. 정말 말을 안 듣는 아이는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얼룩을 떠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했다. 정말 그늘 없는, 햇볕만 멋지게 내리쬐는 그런 마음을 만들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듯, 얼룩은 나도 모르게 드리워진다. 얼마나 번져있는지도 모른 채 지울 생각만 하니 내 마음이 점점 더 아파오고 내 머리만 점점 더 어지러워졌었던 것 같다. 그냥 놓아두면 되는데 말이다. 얼룩이 어떻게 보면 나쁜 친구들일지는 몰라도 예쁜 얼룩들이 형형색색 모이게 되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그림은 없다. 이 아름다운 얼룩들이 춤을 추고 있다니, 생각해보자. 미술관에 걸린 그림이 춤을 춘다. 정말 아름답다.
물론 이 얼룩들이 춤을 추면 아프기는 하겠지. 그런데 좀 아프면 어떤가. 좀 아프면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아프다보면 그 아픔에도 내성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 골치 아프던 얼룩들은 더 이상 나쁜 아이가 아닌 내 마음을 아름답게, 내 마음을 양지로 만들어주는 아이가 된다.
나는 그동안 얼룩을 나쁘게만 바라보았다. 그래서인지 얼룩은 점점 더 멍들을 때리고 내 마음은 점점 더 아파왔다. 하지만 얼룩들을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니 이미 이 친구는 오히려 멍들을 감싸주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마음 아픈 소년이 아니다. 마음 속 아름다운 얼룩과 함께 이 세상을 책임져 나갈 멋진 소년이다! 얼룩진 내 마음,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이제 내 마음이 얼룩졌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내 마음 속 얼룩...
내 머리, 내 심장 속 얼룩...
16년간 드리워진 얼룩을 어떻게 지워나갈까? 아니, 어떻게 그려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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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 산문 장원
접시
영주여자고등학교 2학년 송은정
뷔페에 가면 항상 한 접시에 모든 걸 담기엔 부족했다. 한 접시 위에서 뒤얽히는 음식들을 보며 또 오긴 귀찮아, 그 음식들의 맛이 섞여 본연의 맛이 느껴지지 않아도 말이다. 왜 뷔페 접시는 항상 작은 걸까. 지금 내 접시의 크기는 나에게 충분한 걸까. 그 위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얽혀 내 모습을 왜곡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어릴 때부터 나는 우리집 애물단지였다. 그래서인지 나의 오빠들은 항상 날 괴롭혔다. 가만히 누워 있는 나를 밟고 가는가 하면 나의 추석 용돈도 다 빼앗아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유일한 나의 편인 아빠한테 전화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오빠들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밤이면 우리 셋 모두 아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시간 가량 훈계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아빠가 미워지기도 했다. 그중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 사회에 대한 아빠의 분노 같은 체념을 듣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우리들은 그 본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기회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라고 기계처럼 아빠가 가르쳐준 답을 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일찍이 시작하지 않은 것에 깊은 후회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빠는 항상 나보고 의사가 되라고 했다. 난 그저 아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1학년 때는 내 진로 결정에 있어 항상 우울한 느낌이 날 떠나지 않았다.
내 접시 위에는 수많은 진로적성검사, 취미, 흥미 등이 오고 갔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건 미술인데 미술이라는 분야는 선택의 폭이 좁고, 아빠는 의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나의 지금 성적은 그러기엔 터무니없었고, 나와의 적성과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회에 의한 ‘전망 좋은 직업’ 중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달성하기 위해선 간절한 바람과 노력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 거짓 꿈을 꾼 이후로는 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왜 이 꿈을 꾸는 것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를 다 떠나서 보이지 않는 압박에 의해 내 자신을 스스로 왜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미술을 좋아하고 항상 미술시간이 기다려지고 어려워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가 하면, 학교 행사나 활동에 있어 미술 분야는 내가 도맡아 하곤 했다. 그래서 난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어졌다. 진짜 나의 꿈을 찾은 이후로는 쓸데없이 지루하기만 했던 공부가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짝 내딛으며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고, 정말 간절한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아직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10년, 20년이 흘러서 이 시기를 되돌아 볼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했으면 좋겠다. 현재의 고통을 이겨낸다면 먼 훗날 자신의 위치에서 자랑스러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지금 내 접시 위에 미술이 가는 꿈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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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일반 산문 장원
허물
영주시 봉현면 소백로 박현이
아이들과 초여름 계곡을 찾았다. 작은 아이가 이쪽으로 와보라 팔뚝을 이끈다. 커다란 바위 아래 햇볕이 그리 강하지 않은 곳에서 잠자리 한 마리가 허물을 벗고 있었다. 지켜보기로 한다. 인내심 없던 아이들도 이 시간만큼은 숨죽여 잠자리의 허물을 벗는 과정을 살펴본다.
반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잠자리는 거친 갑옷과 같았던 허물을 벗어났다. 아직 채 펴지지 않은 날개를 푸드득 푸드득 여러 번 떨어내더니 투명한 날개를 펼치고 말렸다. 환호성이 나왔다. 잠자리는 그 소리에 놀란 듯 아직 서툰 날갯짓을 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다시 물가로 되돌아가 찰방거리며 놀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문신처럼 깊이 새겨졌다.
잠자리는 육신의 허물을 벗는다. 그 또한 힘든 생과의 사투지만 인간은 그것과 다른 허물을 벗는 과정,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끝없는 과정에 있다. 비록 육신의 허물을 벗는 과정은 없지만 영혼의 허물은 굳은 편견과 독한 오만의 껍질이 딱지처럼 앉을 때는 그것을 벗어던져야 한다.
일 년 전 말도 물도 낯선 이곳 영주로 왔다. 거친 말부터 부담스럽고 시집 가까이로 살게 되어 수시로 불려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멀리 있을 때는 잘 몰랐던 서로의 허물로 상처를 깊게 입었다. 사람 사이에는 적정거리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동네 누구네 숟가락 하나까지 공유하는 것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시댁의 과수원 일을 거들러 갈 때면 들어야 했던 게 듣고 나면 속이 더부룩했다.
사람들은 허물을 벗기보다 허물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는 알지만 어느새 나 또한 그 허물 속으로 고치를 치고 들어 앉으려 했다. 만약 누군가 그 허물의 고치를 건드리려하면 숨겨 둔 가시까지 치켜세웠다. 그럴수록 안전하다는 생각보다 더 외롭고 불안했다.
허물이란 쌓아두는 게 아니라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우기까지 일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잠자리가 물속에서의 장구애비의 허물을 벗고 한 마리의 잠자리로서 날개를 펴고 차올랐듯 영주에서의 제2의 삶이 어떤 형태로 태어날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모든 장구애비가 잠자리로 태어나지 못하듯 나 또한 그리 될 수도 있지만 시간을 견뎌보기로 한다.
2018 죽계백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