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기쁨
나는 눈이 아주 작습니다. 어찌나 작은지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는 “우리 아기 눈이 있어 없나?” 하며 일부러 눈을 벌려보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갓 태어난 내가 눈을 깜빡깜빡해서 “어머나, 우리 아가 눈이 있기는 있구나!” 하며 기뻐하셨답니다. 그렇게 눈이 작았던 탓에 어려서는 ‘오산집 쪼끔 눈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래도 눈이 작아 볼품없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관상을 좀 볼 줄 하는 이들은 내가 작은 눈에 종교 지도자의 기질이 있다고 합니다. 카메라의 조리개도 구멍을 좁힐 수 록 더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 지도자는 남보다 멀리 내다보는 선견이 있어야 하는 점에서 그런가 봅니다. 내 코도 별나기는 마찬가지여서 한눈에 봐도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게 생긴 고집불통 코입니다. 관상이 영 허튼 소리만은 아닌 것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생겼나’ 싶습니다.
나는 평안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남평 문씨 문경유文慶裕와 어머니 연안 김씨 김경계金慶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음력 1월 6일이 내가 태어난 날입니다. 상사리에는 증조할아버지 때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수천 석의 농사를 손수 지으시며 자주성가로 가문을 일으키신 증조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시고 그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밥 한끼라도 더 먹이는 것을 보람으로 아는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팔도강산 사람에게 밥을 먹이며 팔도강산에서 축복이 몰려든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방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우리 동네 너머 사람들까지도 ‘아무 동네 문씨 댁에 가면 밥을 거저준다’는 것을 모두 알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고단한 수발을 척척 해내면서 불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도 쉬는 법이 없을 만큼 부지런하셨던 증조할아버지는 틈틈이 짚신을 삼아 장에 내다 파셨고, 늙어서는 “후대에 우리 자손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하고 빌면서 오리를 여러 마리 사서는 놓아주시곤 했습니다. 또 사랑방에 한문 선생을 들여 동네 청년들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증조할아버지에게 ‘선옥善玉’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우리 집을 일컬어 ‘복받을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자랄 적에는 그 많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고 그저 밥술이나 먹고살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밥 먹이는 가풍만은 여전해서 식구들이 먹을 밥이 없어도 남을 먼저 먹였습니다. 그 덕분에 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배운 것이 바로 남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로 피난을 떠나던 이들이 지나던 길목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이었는데, 우리 집이 바로 선천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었습니다. 집도 땅도 모두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만주로 향하던 사람들이 우리 집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집 앞을 지나가는 팔도 사람들에게 언제든 밥을 해서 먹이셨습니다. 거지가 밥을 달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냉큼 밥을 내가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먼저 당신 밥상을 번쩍 들고 나가셨습니다. 그런 집안에 태어나서인지 나도 평생 밥 먹이는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내게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내가 밥 먹을 때 밥을 못먹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숟가락질하던 손이 그냥 멈춰버립니다.
열한 살 때였습니다. 석달 그믐날이 다가와 마을 천제가 떡을 하느라 분주한테, 형편이 어려워 밥을 굶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여 온종일 집 안에 뱅뱅 돌며 어찌 할 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쌀 한 말을 지고 뛰쳐나갔습니다. 식구들 몰래 쌀자루를 내가느라 자루에 새끼줄 하나 엮어 맬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깨에 쌀자루에 질어진 채 힘든 줄 도 모르고 가파른 산비탈 길을 이십 리나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 가슴이 벌렁벌렁 풀무질을 해댔습니다.
우리 집 옆에는 연자방앗간이 있었습니다. 방앗간 안게 있는 불싸라기가 밖으로 내나가지 않게끔 사방을 잘 둘러막아 겨울에도 웃풍이 없이 꽤 훈훈했습니다. 어쩌다 집 안의 아궁이에서 숯불이라도 얻어다 피우면 온돌방보다 더 뜨뜻했습니다.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거지들 중에는 우리 집 연자방앗간에 터를 잡고 겨울을 나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나는 그 거지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 이야기가 재미나서 걸핏하면 연자방앗간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 삼은 거지의 밥까지 같이 차려서 방앗간으로 밥상을 가져 오셨습니다. 내 숟가락 네 숟가락도 없이 밥 한 그릇을 같이 떠먹고, 담요 한 장을 나눠 덮으며 함께 겨울을 보냈습니다. 한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그들이 멀리 떠나고 나면 그들이 돌아올 다음 겨울이 기다려지곤 했습니다. 몸이 헐벗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헐벗은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따듯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밥을 주었고 그들은 내게 사랑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이 가르쳐준 깊은 우정과 따뜻한 사랑은 오늘까지도 내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세계를 돌며 가난과 배고픔에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때마다 남들에게 밥을 먹이는 데 조금도 아낌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