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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위기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등장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 단독 황제로서 재위 324~337년)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의 탐험을 위해 선택된 출발점이며, 그의 통치가 이루어 낸 오랫동안 지속된 발전은 그보다 앞선 시대의 맥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이른바 3세기의 위기(235~284년)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성공적인 위기 극복의 시기(284~337년)이다.
‘3세기의 위기’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기사 계급 출신 장교 막시미누스가 황제 자리를 찬탈한 235년으로부터 또 다른 장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 284년 사이를 말한다. 이 길지 않은 시기에 무려 51명이 로마 황제로 선포되고 그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가장 많은 수가 전세가 기울 때 휘하의 군대에 죽임을 당했다. 이 시기는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진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남쪽에서는 북아프리카의 유목민 약탈자들이, 그리고 서쪽과 북쪽에서는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게르만계 집단들이 로마 제국을 괴롭혔다. 로마 제국은 여러 적을 동시에 상대할 능력이 없었다.
원정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 통치자들은 세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상대로 반발이 격심하고 인기가 떨어졌다. 주화의 가치는 계속 하락해 매점매석과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게다가 단명한 황제 대다수가 군인 출신이어서 그들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대단히 벅찬 과제에 직면했다. 그 과제란 바로 강력한 중심인 수도 로마와 원로원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제국의 변경에서 위협하는 적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246년 도시 창건 1천년[로마인들은 로마시가 기원전 753년에 탄생했다고 믿었다]을 맞이한 로마는 여전히 매우 중요했고 황제들은 원칙적으로 로마를 통제하고 찬사와 인정을 받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잇따른 원정 때문에 황제는 전투가 벌어지는 무대와 가까운 도시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를테면 다뉴브 전선에 가까운 시르미움(지금의 세르비아 북부에 위치한 스렘스카미트로비차)이나 라인 전선에 가까운 트리어(룩셈부르크에 인접한 독일 도시), 페르시아 전선에 가까운 안티오키아가 대표적이다.
이 시기 황제 대부분은 제국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처하여 강력한 군주가 다스리던 평화로운 시대로 돌아가려 했음이 분명하다.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고심한 끝에 많은 황제가 아들과 권력을 나누고, 보다 유연하게 지휘하고 야전군을 영구화하여 군대를 발전시켰으며, 권력과 안전을 증명하기 위해 신들과 결부 지어 황제의 인격을 강조하는 등의 조치를 실시했다.
250년대 초반에는 전염병(아마도 천연두)이 크게 유행해 막대한 희생자를 냈으며 심지어 몇몇 황제는 죽음을 맞았다. 전반적으로 절박한 군사적 상황과 질병의 피해가 확산되자 데키우스 황제같은 통치자들은 이 중대한 국면을 초자연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현재 안고 있는 어려움은 전통적인 신앙을 버린 데 신들이 분노한 때문으로 여겼다. 해결책은 종교적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이었으며, 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었다. 그들은 250년 내내 로마 제국 어디에서나 표적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교 서적은 물론 신성한 물건과 예배 장소의 파괴를 의미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교회의 성직자와 일반 신자에 대한 고문과 처형을 의미했다.
큰 변화는 284년 디오클레티누스의 즉위와 함께 이루어졌다. 장교 출신으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점에서, 얼핏 보기에는 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제국 운영의 모든 부분에서 대담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과거의 악순환을 끊어 내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사실 그가 실시한 조치 중에는 새로운 것도 있지만 많은 것이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두 가지의 결합은 적절한 시기에 추진력을 얻어 적절하게 집행된 것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누스가 단독 황제로 있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285년 막시미아누스를 부제 즉 카이사르로, 이듬해에는 정제 즉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우스를, 막시미아누스는 헤라클레스를 수호신으로 두었다. 293년 두 공동 황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갈레리우스를 부제로 뽑음으로써 사두정(사분 체제)이 시작되었다. 네 황제는 영토를 분할하여 각각 로마 제국의 거대한 영역을 통치함으로써 적의 침입에는 신속하게 대응하고 행정사으이 문제에는 즉각 대처할 수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미르)로부터 동쪽을 다스렸고, 갈레리우스는 시르미움과 테살로니키에 거주하며 다뉴브 국경 지역을 담당했으며, 막시미아누스는 밀라노에 거주하며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콘스탄티누스 는 트리어에 머무르며 라인 국경을 비롯한 갈리아와 대브리튼섬을 담당했다.
두 부제는 각각 두 정제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고 양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권력이 혈연이 아니라 지도자 자질에 따라 선택된 사람과 공유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변함없이 이 조치들의 원동력으로서 전통적인 로마의 가치관을 강력하게 강조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제국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시스템의 가치는 곧 입증되었다. 로마 제국은 페르시아인을 상대하여 성공을 거두는 동시에 다뉴브와 라인 국경을 지켜 냈고 대브리튼섬에서 제국의 통치와 질서를 회복했다.
군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각별히 집중한 분야인데, 로마 제국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도시에 성벽이 세워지고 요새가 지어졌으며 지방 군대가 확대되었다. 3세기 말까지 이렇게 안전해짐으로써 사두정은 내부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 전역과 신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지방의 수는 두 배로 증가해 약 100개에 이르렀다. 이 지방들과 중앙 정부 사이에는 디오이케시스(Dioecesis) 12개와 프라이펙투라(Praefectura) 3개 또는 4개가 지방 행정 단위 기구로 설치되었는데, 모두 행정 통제와 세금 징수 강화가 목적이었다. 세금 징수는 가장 중요한 지출인 약 4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이집트에 부여했던 세제상 특권을 박탈하고 로마 제국 전체에 균일한 세제를 확립했으며 세금 대부분을 현금으로 거두어들였다. 처음에는 5년마다, 그다음에는 15년마다 실시한 인구 조사는 세금 대장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지방에서는 협조를 받기 어려워 인구 조사가 자주 시행되지 못하여 세금 대장은 여전히 부정확했다. 세금을 기록하고 합리화하려는 추진력은 극도로 평가절하된 통화개혁(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단순히 액면가를 두 배로 올렸다)과 상품 및 서비스와 최고 가격을 고정하는 칙령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조치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농업 노예는 귀한 데다가 값비쌌기 때문에 수입과 생산을 가능한 한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자유 노동력을 점차 토지(식민지)에 귀속시켰고, 그들은 사회적 지위 측면에서 볼 때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기세를 유지하려면 신의 은총이 필수적이었다. 동방의 신앙들을 체제 전복으로 간주하여 박해한 일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원론적인 마니교가, 303년에는 그리스도교가 국가의 안정을 저해하는 존재로 선포되었다. 대박해(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가 제국 전역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서방의 부재 콘스탄티우스는 상당히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뿌리 뽑고 파괴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했으며, 교회의 물질적 재산과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개인을 공격했다. 많은 순교자가 이 시기에 죽었고,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들을 새로운 영웅으로 삼았다.
성공적이었던 사두정은 305년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305년은 두 정제가 즉위한 지 약 20년, 부제가 즉위한 지 10여 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구상한 대로 두 정제가 사임하고 두 부제가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유래없는 일이었다. 두 부제 자리는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아닌 새로운 인물 즉 갈레리우스의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세베루스가 차지햇다. 사두정의 첫 20년이 네 통치자의 화합으로 제국의 적들을 물리치고 기적적으로 안정기에 돌입한 시기였다면, 그 후 20년은 격변의 시기였다. 사실 305~324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단 한사람이 통치하는 제국으로 돌려놓기 위해 분투한 시기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1세 자신이다.
그는 콘스탄티우스와 헬레나라는 여성 사이에 태어났다. 헬레나는 한낱 비천한 신분의 첩실이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306년 요크에 있던 그의 병사들은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307년 세베루스가 살해되었고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고 정제로 즉위했다. 이듬해 사두정의 엣 황제들과 현임 황제들이 지금의 빈 외각에 있는 카르눈툼에서 만나 상황을 정리하고 향후 계획을 수립했다. 리키니우스가 황제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고, 얼마 뒤 네 사람 모두 정제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두정은 첫 사두정만큼 안정적이지 못했다.
지도자 사이의 고질적인 내전이 다시 나타나 처음에는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에 대항했으나 곧 좌절되었다. 도피한 그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전례에 따라 로마에 방어벽을 쌓았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그를 격파했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감사의 뜻으로 개선문을 바쳤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311년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교도 박해를 공식적으로 끝내고 그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준 후 사망했다. 흔히 그리스도교도에게 자유를 준 것이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막시미누스는 갈레리우스의 영토를 손에 넣으려 소아시아를 서둘러 공격하고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했다. 313년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를 격파하고 같은 해에 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살아남은 두 황제의 유대를 강화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316~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두 차례 침략하여 전쟁을 벌였으며 종교적 카드를 사용하여 성공했다. 리키니우스는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한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해방자로 자처한 것이다. 324년 보스포루스해협의 아시아 쪽에 면한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튀르키예 위스퀴다르)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상대하여 거둔 최후의 승리는 사두정의 종말과 함께 그의 유일한 통치자로서의 시작을 의미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중대한 사건을 기념하고자 새로운 거주지를 선택했다. 유럽과 아시아가 교차하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비잔티온에 있으며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두고 크리소폴리스와 마주 보고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이다. 황제는 새로운 의식과 정치적 기능에 맞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야심 찬 건축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일련의 행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계획을 완료하거나 추진했다. 재정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래 지속된 것은 통화개혁이다. 309년 또는 310년 순도 높은 금화 솔리두스가 만들어졌다. 무게가 약 4.5그램인 솔리두스는 급격하게 중요성이 저하해 가는 은화 그리고 매일 거래에서 사용되는 공동 통화인 동화와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었다. 솔리두스를 주조하는 데 필요한 금속은 이제는 사라진 사두정 황제들이 다스리던 일부 지역에서 공급했으며, 때로는 이교도 사원의 재산과 실각한 관리나 통치자의 몰수 재산에서도 나왔다. 솔리두스는 도입 초기부터 퍽 안정적이었고 11세기까지 그러했다.
이제 세금과 로마 제국의 관리들의 임금은 모두 솔리두스로 지급되었으며, 그 흐름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제국은 금화로 세금을 거두었고 그것을 다시 관리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솔리두스의 성공과 안정성은 자신의 통치하에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무역을 발전시키겠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계획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상거래에 매기는 새로운 세금인 흐리사르이론(Chrysargyron, 라틴어로는 콜라티오 루스트랄리스(Collatio lustralis)의 도입은 무역으로 인한 수입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국가는 무기와 같은 필수품을 위한 공방을 독자적으로 갖고 있었으며, 원재료는 국가의 영지에서 공급하거나 부족할 때마다 지방에서 현물 기부와 강제 매수를 통해 확보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혁의 또 다른 대상은 군대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규모를 약간 확대했지만 황제 자신이 이끄는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하여 필요한 곳에 투입할 수 있는 변화를 가했다. 나아가 퇴역 군인에게 버려진 토지를 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군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농업 생산이 붕괴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군 계급 간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하는 황실 근위대에게 무상으로 식량을 배급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재위에서 가장 주목받는 측면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일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분명 그리스도교도로서 죽었지만, 문제는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선택한 이유와 시기이다. 303년 대박해가 시작될 무렵 그가 어린 소년이었다는 후대의 선전과 달리 그는 이미 서른 살 정도였으며, 대박해에 반대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스도교 사료는 312년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거둔 승리를 결정적인 전환으로 기록한다. 사료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첫 두 철자 ‘키(X)’와 ‘로(P)’가 결합되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키로가 하늘에 나타나는 환영을 보았다. 반면 이교도 사료는 그보다 앞선 310년 아포롤 신과 결부된 태양 환영을 이야기한다.
아마 콘스탄티누스는 아폴로 또는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 사두정 황제 사이에 유행했고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또한 숭배했다)와 관련된 천체 현상인 태양 후광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것을 후에 그리스도교적 문맥으로 재해석했을 뿐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스스로 이 해석을 생각해 내지 않았다면 후대의 그리스도교 사가들은 이 같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십자가 문양과 함께 “이 표지로 승리하리라!”(En toutoi nika!)라는 문장이 나타났다고 한다.
늦어도 312년부터 콘스탄티누스는 대단히 직설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지지했다. 특히 로마에 교회를 설립하고 기부를 했다. 그리스도교들의 화답 또한 뜨거웠다. 박해받는 동안 그리스도교도들은 심판의 날이 올 것을 열망했다. 고통과 수고로움으로 가득 찬 낡고 힘든 세상이 끝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에 자리를 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느님의 최악의 적이자 황제는 적그리스도로 규정된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근본적으로 변모했다. 로마 제국과 로마의 평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급을 가능하게 하고 구원의 배가 되었으며, 로마 황제는 무시무시한 적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리스도교도 로마 황제의 나라는 서서히 융합되어 갔다.
이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유일한 참된 신을 믿는 로마 황제이므로 신도들의 공동체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는 310년대에 박해의 압력에 굴해 신앙을 부정한 사제들을 둘러싸고 분열된 북아프리카의 교회에 적극 개입했다. 313년 이후 그들의 복위로 갈등이 깊어지자, 황제는 주교들을 모아 논쟁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분열을 종식하고 치유하려 했다. 도나투스파[4~5세기에 걸쳐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키운 그리스도교 종파. 보편 교회와 교리나 신학적 견해로는 대립하지 않았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하에 신앙을 지킨 이들은 배교자들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극적으로 교회에 개입한 것은 320년대이다. 이집트 사제 아리우스는 삼위일체 위격 간의 복잡한 관계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표현했다. 성부가 성자를 창조했으므로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아리우스파)이 있었는데, 단호하고 거침없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된 이 아리우스파의 저항은 격렬했다.
균열이 커져 가자 325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은 다름아닌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리스도교 주교들은 비로소 황제의 선의를 누린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는 동시에 황제는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 절차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비잔티움 역사 내내 이어지는 황제와 교회 사이의 권력 역학의 씨앗을 뿌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소환된 주교들에게 자신이 ‘교회 바깥의 주교’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아리우스파의 교의는 니케아에서 거부당했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 (Homoousios, 이 새로운 용어는 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을 공유하는 실체로 간주되었다. 의견의 불일치가 해소되었다고 선언되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 정치에서 격동의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