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으로 유인물을 제작하다
증언자: 박규상(남)
생년월일: 1962. 3. 12(당시 나이 19세)
직 업: 고등학생(현재 연극배우)
조사일시: 1989. 7
개 요
월산동 친구의 자췻방에 모여 고등학생 10여 명과 유인물을 만들어 각각의 고등학교와 광주시내 일원에 배포했다. 21일 오후엔 총을 들고 평소 자주 드나들던 덕림사 절에서 자체방위를 섰다. 이후 상무대로 연행되었다가 한 달 만에 훈방됨.
유인물 제작, 배포
1980년 당시 나는 광주공고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18일인 일요일,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태에서 월산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중학교 친구인 이홍재 집으로 갔다. 그곳에는 중앙여고생을 주축으로 한 여학생 4명과 진흥고의 조강일, 숭일고의 임호상 등 고등학생 1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어려서부터 월산동에서 함께 자라온 애들인데 그 중엔 부근의 덕림사란 절과 덕림교회에 다니면서 알게 된 애들도 있었다. 덕림사는 현 MBC 방송국(현) 옆에 위치한 절로서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다워서 우리들이 평소에 자주 놀러가는 곳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그곳 불교학생회에 소속된 애들도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계엄군의 만행을 이야기하였다. 어떤 아이는 광남로 부근 다방에까지 공수들이 들어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개패듯이 때린 후 끌고 갔다는 얘기도 했다. 우리는 그러한 계엄군의 만행을 듣고 치를 떨며 고등학생 신분으로서 우리들도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우선 고등학생을 상대로 유인물을 만들어 19일 등교시에 뿌리기로 하였다. 학우들과 현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 고등학생들도 대학생 형들과 같이 한번 일어나보자는 것이었다. 그날 홍재의 자췻방에서 유인물을 만들기로 하고 덕림사 불교학생회에서 등사기를 얻어왔다. 그리고 돈을 모아 16절지를 마련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일이 시작되었다. 나와 강일이는 유인물 초안을 작성했다. 자세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학우들이 일어설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날 1,200여 장을 등사한 다음 각기 1백여 장씩 나누어 가방에 담았다. 우리는 19일에 학우들보다 일찍 등교하여 교실에 몇 장씩 뿌려놓기로 했다. 등교한 학우들이 그것을 읽은 뒤 술렁거릴 때 그 분위기를 잘 이끌어 함께 교문 밖으로 나오자고 했다. 학교마다 그런 식으로 교문 밖으로 진출한 다음에 한 곳에서 모이자는 얘기도 나왔는데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한 다음 우리들은 각기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19일 아침 일찍 등교하여 유인물을 뿌렸으나 그날 휴교령이 내리는 바람에 생각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했다.
20일경 다시 홍재의 집에 모인 우리들은 이번에는 대시민 홍보용 유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어제의 것은 고등학생을 상대로 만든 것이니까 이번에는 우리 시민들을 상대로 한 유인물을 더 만들자'는 데 합의하였다. 역시 16절지 종이에 강일이와 내가 초안을 작성하여 등사를 했다.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에 없으나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소개하고 시민들이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엔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라는 등의 몇 가지 구호도 적었다. 그날 오후에 1천여 장을 등사한 다음 21일 아침에 뿌리기로 했다.
우리들은 3명 정도로 조를 나눈 다음 광주시내 일대에 유인물을 배포했다. 나는 처음에 혼자 나갔으나 도중에 강일이와 철신이를 만났다. 광주역과 광천동 일대에 배포했는데 지나가는 트럭에 올라타고 다니면서 길거리에 뿌린다거나, 혼자 걸어가면서 시민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기도 했다. 유인물을 받아든 시민들은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내가 탄 트럭에는 시민들이 올려준 김밥과 음료수, 담배 등이 차 바닥에 쌓일 정도였다. 특히 김밥이 어찌나 많았던지 그중 맛있는 것만 골라 먹을 정도였다. 어떤 아주머니는 날계란을 올려주었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날계란이 목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기 맡은 분량의 유인물을 배포한 다음에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므로 다시 모일 기회가 없었다.
총을 들고 죽음을 각오했으나
나는 강일이 철신과 함께 월산동사무소 부근에서 지나가는 트럭에 올라탔다. 차에는 청년 1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그날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시민군들이 시외곽지역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고 했다. 우리들은 시내를 한바퀴 돈 다음 시외로 나가보자며 백운동 쪽으로 빠져나갔다. 나주방면으로 가던 도중 임시활주로가 있는 넓은 도로 공간에 이르렀을 때였다. 시민군 몇이 기관단총의 총구를 위로 향하고 시험해 보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도로에는 시외지역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광주로 가는 차량들이 많았다. 그 중 어떤 차에서 카빈 한 자루씩을 각각 지급받은 우리들은 다시 광주로 향했다.
금천에 오니 그곳 주민들이 막걸리를 주었다. 막걸리를 한잔씩 마시는 동안 주민들은 위험하다며 광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계엄군이 효천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사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광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비장한 각오를 하고 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효천이 가까워지자 우리 중 누군가가 각각의 신상명세서를 써서 보관하자고 했다. 만약 죽었을 때 신원이 쉽게 파악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들은 조그만 종이에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적어 각자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사격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며 서서히 효천을 향해 차를 몰았다. 모두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효천을 지날 때는 모두 차 바닥에 엎드린 채 숨죽였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효천을 무사히 지났다.
덕림사에서 지역방위를 서다
그날 저녁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물러났으나 다시 들어올 것에 대비해 시민군들이 지역방위를 선다는 말이 들렸다. 나와 강일이 철신이는 홍재를 불러내 덕림사에서 보초를 서기로 했다. 배가 고파 주지스님 몰래 덕림사에서 식은밥을 갖다가 먹고 우리들은 보초를 섰다. 자정이 되도록 아무 일이 없자 절에서 내려와 부근의 대성국민학교 건너편에 있는 대창석유라는 주유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암호!' 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당시 시민군 사이에서는 밤에 사용하는 암호가 있었는데 우리더러 그 암호를 대라는 것이었다. 암호를 몰랐으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쪽에서 다시 물어왔다.
"시민군이오. 계엄군이오?"
"시민군이오."
"손들고 나오시오."
그 사람을 따라 주유소 앞으로 가보니 시민군 몇 명이 기관단총으로 세워두고 근무를 서고 있었다. 여차하면 쏘려고 했는데 우리 보고 운이 좋다고 했다.
다시 덕림사로 돌아온 우리들은 그곳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월산동 통장인 강일이 아버지와 덕림사 주지스님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빼앗았다.
도피생활
나는 그날 이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26일 저녁에는 학교 후배와 월산동 선배집에서 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27일 새벽에 오랫동안 총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해 하다 6시경에 잠이 들었다.
아침에 후배 놈이 급히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형님, 형님, 홍재 형이 잡혀갔어라." 놀란 내가 홍재의 자췻집으로 달려가 보니 계엄군 10여 명이 지키고 있고 홍재는 담벼락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옆에는 우리들이 제작해 배포하다 남은 유인물이 든 밀가루 부대가 놓여 있었다. 홍재 누나는 옆에서 울부짖었다.
그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난 나는 근처에 사는 강일이 집으로 달려갔다. "야, 안 되겠다. 우리도 도망가자." 강일에게 자초지종을 말한 다음 시내버스를 타고 함께 송정리로 빠져나가 함평 문장으로 갔다.
강일과 함께 그곳 이모댁에 며칠 숨어지내는 동안 경찰서에서 신원조회를 나왔다. 그래서 부근의 교회로 옮겼다. 그 후로는 교회와 이모집을 오가며 숨어지냈다. 얼마 뒤 아버지가 오시더니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했다. 강일이는 부산으로 내려가고 나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그곳 누나집에서 지냈다.
상무대로 연행되어
서울에서 거의 한 달 동안 숨어지내는 동안 수사당국에선 언론매체를 통해 계속 자수를 권유했다. 도피생활에 지친 나는 6월말에 광주로 내려와 7월 1일부터 학교에 나갔다. 7월 2일 점심시간에 내 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담임선생님이 형사가 찾아왔다며 내 의향을 물었다.
"규상아, 형사가 잡으러 왔다. 니 생각은 어떠냐? 니 뜻대로 해라. 만약 도망 간다면 도피시켜 주마."
"도망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니 그냥 들어갔다 올랍니다." "잘 생각했다. 빨리 갔다오는 게 나을 것이다."
형사들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선생님과 함께 형사들을 만나고 있었더니 얼마 후 아버지가 오셨다. 다른 학우들은 수업을 받고 있는데 형사에게 이끌려 교문을 나서는 마음이 허전하고도 슬펐다. 형사가 내 손에 수갑을 채우려 하자 뒤따라 오신 선생님이 말렸다. "채우지 마시오. 교복을 입은 학생한테 그게 무슨 짓이오." 그리고 선생님은 내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셨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졸업은 시켜 줄테니 걱정 말고 갔다 와......" 선생님은 말을 맺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학교로 들어가셨다.
나는 서광주경찰서로 끌려갔다. 며칠 뒤에 강일이도 그곳으로 잡혀왔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조사를 받고 상무대 공병대내에 있는 교회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1백여 명과 함께 지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얼차려'라는 기합 외엔 맞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8월 2일 훈방되었다. 그때 함께 활동한 애들 중 나와 임호상, 이호재, 조강일 이렇게 4명이 잡혔는데 호상이와 호재는 헌병대 영창생활을 했고, 나와 강일이는 공병대 교회에 있다가 풀려났다.
좌절감 극복하며 연극배우로 활동
나는 1980년말에 대학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재수를 하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DJ로 활동했다. 1981년부터는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연극배우로 활동하였다. '극단 공간80'과 시립극단 등에서 활동하다 1987년부터 '극단 뿌리'에 몸담고 있으면서 소극장과 광주학생회관에서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고도를 기다리며', '마지막 포옹' 등을 공연했다.
광주항쟁 이후 지금껏 나는 심한 좌절감 속에서 살아왔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계엄군의 잔인한 만행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기존의 가치관이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음악과 연극을 가까이 하는 동안 그러한 좌절감은 상당히 극복되었지만 내일에 대한 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소년이던 강일이도 광주항쟁 이후에 글을 썼으나 그도 심한 좌절감에 빠져 계속 술을 마시다 1986에 간암으로 끝내 죽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던 강일이가 죽고 나자 나는 더욱더 생활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일에 대한 비전이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지겹게 보내던 중 생활의 돌파구를 찾고자 광주경상대에 입학했다.
자식 혹은 부모를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잃었거나 육체적으로 큰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부상자나 유족들의 고통은 얼마나 심하겠는가! 광주항쟁의 진상이 하루빨리 규명되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어려운 사람들의 생활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먼저 보상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