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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사지가 위치한 옆 마을을 초교.중학교 시절에는 탑거리라고 불렀다. 탑의 존재보다 칠층탑 옆의 현충탑이 성주읍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명명된 지명으로 인지 했었다. 어린나이의 학생들이 영문도 모르고 현충일 행사에 동원되어 참배하였던 길. 그 길이었지만 탑에 관한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60년대말 70년초 초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군사문화의 영향이라고 후세 비평가들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쓰라린 기억의 조각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지금은 민관군民官軍으로 호칭되지만 그시절에는 군사혁명을 미화하기 위하여 군관민軍官民으로 모든 매스컴에서 보도하였고 아산 현충사 처럼 전쟁 영웅(?)들이 대접받고 그런 전시물들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앞다투어 조성되었었다. 당시에는 동방사지석탑도 역사 가치 정통성 연륜은 매장당한 채 늘 현충탑에 가려 지나간 아픈 과거처럼 빛이 바랜 암울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기억에는.
그만하자! 대선을 목전에 두고 카페 주인장이 금기사항을 언급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텐데 ㅎㅎ
그래도 동방사지를 거쳐 왜관으로 향하는 신작로는 청운의 꿈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출세의 길이 었고 밝은 미래가 열리는 희망의 가도였다. 60년대 서정과 서경이 아우러진 미루나무와 폐유를 바른 전봇대가 일렬로 이어지는 황톳길 신작로와 달리 근대화의 상징 한국전력 변전소가 그 길에 있었었다. 또한 80년초 대구에서 선남면으로 연결된 성주대교가 준공되기 전까지 소읍 별뫼고을에서 대구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 기억의 영상 때문에 성인이 된 지금도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은 친구들이 이문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처럼 그 길을 통해서 올 것 같은 착각에 머물곤 한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사찰로 알려진 동방사지에 관한 자세한 사적은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문신인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사명이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말에도 향화가 피었음을 알 수 있으나, 경산지에 '동방사 일명의공사유지 재북산리'로 표기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폐사된 것으로 전한다.
동방사지 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에 구산선문 도입과 더불어 이땅에 들어온 풍수지리 형국을 비보하기 위한 지기탑地氣塔으로 알려져 있다. 즉 성주의 지형이 소가 누워서 별을 바라보는 상이며, 동남으로 성산, 서는 풍두산, 북으로는 다람쥐재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천은 성주를 돌아 동쪽으로 빠지고 있어 성주의 지기地氣가 냇물과 같이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세워진 탑이라 한다. 본래 9층탑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천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경신년(1930) 대홍수에 흐름이 바뀌어 탑과 냇바닥과는 1㎞의 거리로 멀어지고 사지는 논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성시기는 고려초기로 전한다.
기단, 탑신의에 양우주를 표현하였고 1층 몸돌에는 문을 깊히 새긴 것과.2층탑신까지 모각된 탱주가 동방사지 석탑의 큰 특징이라 하겠다.
1층, 2층, 3층 옥개석 4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연화문 중앙에 소공을 뚫어 풍탁風鐸을 걸도록 했다. 옥개 받침은 3단으로 각출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몇차례 답사기를 여기저기에 올렸었다. 글중에 2007년 답사기 마지막 문장이 다가온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주변정리가 되지 않아 비닐 하우스가 마치 해변처럼 보였었다. 2012.10.03 |
첫댓글 군사문화니 어쩌니 하지말고 문디자석아 니 저쪽 탑 우측에 우리동기 배기순이 운영하는 성주 하수종말처리장은 아나?.가봤나?.마당에 잉어들 봤나 나처럼 그잉어 잡을라꼬 우당탕 쿵꽝 해봤나?.정이인이 까맣게 해가지고 밤세워 근무하는 모습도 못봤지....지난 태풍(산바)으로 성주빗물펌프장 말이많은데(경찰 수사도 받고...) 저 건물안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병기 니는 모르지 ㅎㅎㅎㅎ. 못보게 한것이 아니고 관심이 없어 못본것 아닌감?.
ㅎㅎㅎ. 유구무언이요. 언제 한 잔 할래?
태기 상가는 먼저 댕기 갔더만....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