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내 고향 제천
정운종(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0-농사일 돌보며 왕복 60 리 통학 길 꿈만 같아
가끔 고향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다보면 유년 시 절이 주마등처럼 떠 올 라 온갖 상념이 교차한다. 일제 강점기 코 흘리며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해 일본어 교육을 받다 8.15 광복, 뒤이어 몰아친 6.25전쟁,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 많은 보릿고개 가정형편에도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어렵고 힘들어도 오로지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님 덕분임을 어찌 모른다 하겠는가.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이른바 '보국대'로 징집되신 아버님이 전쟁터에서 지게로 탄약, 연료, 식량, 보급품 등을 운반하실 때 어머님을 도와 농사를 돌본 일,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철 우산도 없이 6년 동안 왕복 60리길을 달려야 했으며 발을 옮겨 딛지 못할 정도로 폭설이 내린 험준한 고갯길을 넘나들며 영어 단어 한자라도 더 외우겠다고 깨알처럼 적힌 종이쪽지를 꺼내 읽다 바람에 날려버리기 일쑤였고 겨울이면 위풍이 심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하다 잠이 들거나 어렵게 구한 촛불을 켜놓고 자다 책을 불태울 번한 일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맴돈다. 방학 때면 동네 한문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줄줄 외우고 서당 훈장님을 집으로 초대해 책 시세를 했던 일은 나의 성장기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추억담이다.
아버님의 성품은 유달리 불같아서 남의 잘못을 절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는, 요즘 시제 말로 대쪽 같다는 평판을 들으실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나의 잘못도 용서 하지 않으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번은 동네 친구들과 놀다 싸운 일이 있는데 공부 안하고 싸움질이나 한다고 어찌나 호되게 걱정을 하시는지 겁이나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배회한 적이 생각난다. 자상하실 때는 또 얼마나 자상하신 성품인지 약주가 거나하신 날이면 자식들을 훈계하고 칭찬하시는 일도 많으셨다. 종이 한 장 노끈하나 버리지 않으시고 차곡차곡 모아 두셨다가 뒤에 요긴하게 쓰시고 헌 천이나 가죽조각으로 담배쌈지나 라이타 주머니를 손수 지어 간직하시던 절약정신과 재활용의 알뜰하심도 모두가 본받을 산 교훈임에 틀림이 없다.
부모님의 좌우명으로 존경스러웠던 것은 투철한 경조(敬祖) 사상이었다. 매년 아홉 분의 제사를 정성껏 모시면서 항상 근본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아버님, 설날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안 사당 참배를 모두 마치셔야 잠자리에 드셨던 것은 투철한 경조사상의 진면목으로 머리가 숙여진다.
어린 시절 고향을 생각 하면서 6.25 한국전쟁을 겪은 수난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우리시대의 아픔이다. 敵치하에선 인민군가를 강제로 배워야 했고 농사지은 낱알을 세고 애써지은 농산물을 몽땅 바치라는 통에 어안이 벙벙해 하시던 마을 어른들이 부역이다 뭐다 해서 시달리던 모습,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여기 저기 버려진 발싸개며 수류탄, 이름 모를 탄피들이 논밭에 뒹굴고 있을 때 초등학교 동창 한명이 버려진 수류탄을 분해하다 변을 당한 일등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온갖 희비의 쌍곡선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맴돈다.
0-천혜의 산자수명, 문전성시 한방명의촌
제천(堤川)은 금성면(錦城面)을 비롯해 청풍(淸風) 수산(水山) 한수(寒水) 덕산(德山) 송학(松鶴) 봉양(鳳陽) 백운(白雲)면 등 하나같이 아름다운 지명이 모인 곳이다. 절경인 청풍호반의 벗 꽃 축제와 유람선으로 옥순봉 ,구담봉을 지나 단양팔경을 관상하거나 청풍호(일명 내륙의 바다) 주변 맛 집에서 쏘가리 매운탕으로 입맛을 돋우고 케이블카로 비봉산을 오르며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즐거움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이다.
비연의 주인공 금봉이의 사연이 서러워 울고 넘는 박달재, 항몽(抗蒙)의 유적지 월악산 영봉과 덕주산성, 글자그대로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움이 빼어난 금수산, 비단금(錦)자에 함축된 의미도 아름답지만 내가 태어난 금성면 월림리(月林里)는 그 지명이 뜻하는 대로 달(月)과 수풀(林)이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마을이다.
마을 경관은 그렇다 치고 제천은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조선조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수암 권상하가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고 구한말엔 의암 유인석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봉기 했던 곳이 바로 제천이다.
이런 제천은 삼한시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3대 수리시설로 꼽혔던 의림지, '시심(詩心)은 의림지의 맑은 물과 같다'고 한 시인도 있지만 의림지는 신라 때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그 풍광에 심취했던 곳으로 이름나 있기도 하다. 제천은 특히 의림지와 함께 조선조 생육신 원효의 충절을 기려 세운 관란정(송학면),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쫓겨 목숨 걸고 찾아든 천주교 베른 성지(봉양면),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 총대장으로 봉기했던 유학자 유인석을 기리는 자양영당으로 경건함을 더해준다.
유인석의 뒤를 이어 궐기한 의병장 이강년, 정운경을 비롯한 의사나 열사들의 수가 5백 명도 넘는다는 기록을 보면 제천 사람들이 얼마나 쌔게 왜군과 싸움을 벌였는지 알만하다. 제천이 한방의 도시로 유명해 진 것은 태백산맥에서 나는 좋은 약재의 집산지가 되면서 부터다. 이 같은 좋은 자연 조건 덕분에 제천 시는 “한방의 도시”라고 이름 붙여질 만큼 전통 한방과 관련한 산업들이 발달해 왔다. 맑은 공기와 좋은 물, 산에서 나는 좋은 약재들이 어우러져 대구와 마찬가지로 전국의 한약재가 모이는 3대 약초 시장의 한곳으로 손꼽힌다. 제천 시내를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한 ‘한방명의촌’에는 중풍 후유 증이나 아토피 등과 같은 난치성 질환의 치료에 중점을 두고 있는 한방전문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자랑이 과했는지 모르나 서울에서 한 시간, 반나절 생활권으로 가까워진 고향, 제천에 가면 한방(韓方)에 낫는다.’는 말을 새삼 되새겨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대한언론 202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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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필자 정운종 인사 올립니다. 원로언론인 단체인 대한언론인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실은 글인데 반응이 좋아 옮겨 보았습니다. 삽시간에 800여명이 보셨으니 나름대로 보람을 느낍니다. 격려전화까지 주시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코로나 사태 잘 넘기시고 하시는일 만사형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 선배님, 건강하시지요?
어려운 학창시절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지금 2~40대 젊은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
인지 이해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봉 전 신아일보 사장의 평전을 내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