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일본의 옛 수도)를 비롯한 혼슈(本州)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고 일본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죽자 그 부장(副將)으로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큐슈를 정벌하고, 1590년 혼슈의 나머지 지역을 평정함으로써 전 일본의 통일을 이룩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방영주들과 무사계급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새 영토를 마련해야 했고, 그 때문에 1588년부터 조선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이 때 동해지방의 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공격에 반대했으나 조선 영토에 탐이 난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정벌을 지지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은 어떠했는가?
조선의 제14대 선조임금은 1567년 즉위하여 유학(儒學)을 장려하고, 국정을 쇄신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575년 이후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정치기강이 문란해졌다. 그런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침략의 조짐이 보이자,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에 파견해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 결과 서인(西人)인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략해 올 것이라고 보고했고, 동인(東人)인 김성일은 그 반대의 보고를 했다. 보고를 받은 선조임금은 이렇다 할 국방대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전라도 동부해역 해군사령관) 이순신 장군은 머지않아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수영 관할의 모든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선(戰船)과 무기와 식량을 비축해 나갔다. 또한 적의 화공(火攻)에 대비하여 종래에 전선으로 쓰던 판옥선(板屋船)에 철갑을 씌운 거북선을 개발했고, 총통(銃筒)을 정비하여 대대적인 함포해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벌에 대한 영주들의 의견은 분분했으나 히데요시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1592년 4월 조선침략을 개시했다. 4월 13일에는 일본 병선(兵船) 700여척을 앞세워 부산포를 공격했고, 14일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 부산성을 공격하고, 뒤이어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이 각각 부산과 다대포를 공격해 들어갔다.
조선군은 무방비 상태였고, 일본군 철포의 위력은 막강했다. 일본군의 기습에 경상좌수영(경상도 동부해역 해군사령부)과 부산성, 동래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경남일대를 점령한 고니시군(軍)과 가토군(軍)은 조령(鳥嶺)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하고, 또 구로다군(軍)는 추풍령을 넘어 진격하여 상륙 20일만에 한양성을 함락시켰다. 일본군이 쳐들어 오자 선조임금은 이미 평양으로 피난했다.
한양 점령후 고니시군은 계속 평안도로 진격하여 상륙 60일만에 평양을 점령했다. 또, 가토는 함경도, 고니시는 황해도로 진격하여 전 국토가 일본에 점령당하게 되었다. 임금은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피난하며 명(明)나라에 구원을 청해야 했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강원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갔다가 가토 기요마사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장군은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곧 전선 24척을 출동하여 5월 7일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 이후 사천(泗川),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자 일본 수군은 전함 73척을 동원하여 견내량(見乃梁)에 집결했다. 그런데 견내량은 수로(水路)의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공격하기 곤란한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巨濟島)와 고성(固城) 사이에 있어 공격하기가 좋고 적이 후퇴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먼저 판옥선(板屋船) 몇 척으로 적선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하고 총공격을 가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한산도 대첩) 이러한 전공으로 이순신장군은 1593년 8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승격되었다.
이와 함께 내륙에서는 명나라(明軍)가 개입하기 시작하여 일본군의 기세가 꺾이고, 명일(明日) 양국간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일본의 고니시는 명과 화평하자는 의견이었고, 가토는 조선 영토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고니시는 명(明)과의 협상을 밀어 붙여 양측이 모두 조선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다.
그 후 약 3년간 전쟁은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1596년 9월 명일 양국간의 최종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다음해 1월 가토군(軍)을 선두로 조선을 전면 재침략해 들어왔다.(정유재란) 그런 위급한 상황이었던 1597년 2월 이순신은 서인(西人)과 원균의 모함으로 선조임금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관직을 박탈당했다. 죄목은 군공(軍功)을 날조하여 임금을 기만하였다는 것과 적장(敵將) 가토의 머리를 베어 오라는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패전을 계속하다가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전사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참전하였다가 원균이 죽자 그해 8월 다시 삼도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선조임금은 이때 이순신에게 면사첩(免死牒, 사형집행정지)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장군은 전라도 수영에 남아 있는 전선 12척으로 수백척의 왜적과 싸워야 했다.
남해안으로 들어온 일본 수군이 서해로 진출하기 위하여는 해남의 명량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장군은 서남해안의 물길을 면밀하게 분석한 끝에 적을 명량(鳴梁)으로 유인, 조수가 적선(敵船) 쪽으로 흐를 때는 신속하게 공격하고, 아군쪽으로 흐를 때는 그 자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는 전법을 구사했다. 명량의 특이한 물길을 잘 모르는 왜군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서로 부딪쳐 부서졌다. 또 울돌목에서는 조선군이 물속에 설치한 쇠줄에 걸려 침몰되었다. 장군은 이 전쟁에서 적선 133척을 격파하였다.(명량대첩) 그 후 장군은 본영을 고금도로 옮겨 전열을 가다듬고 명나라 제독(提督) 진린(陳璘)과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1598년 8월 일본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고전하고 있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제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1598년 11월 고니시의 군대는 순천에서 퇴각하면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왜군이 노량(露梁)으로 집결할 것을 미리 알고 노량으로 진격, 일본 전선(戰船) 500여 척 중 400여 척을 격파하고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노량해전) 그러나 이 싸움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향년 54세였다.
이 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죽음은 몇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어차피 퇴각하는 일본군과의 싸움에 사령관이 최전선에서 진두지휘를 할 필요가 있었던가? 이 장군이 적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는데 장군은 갑옷도 입지 않고 전투에 임했던가? 이러한 의문 때문에 이 장군은 전사(戰死)가 아닌 의도적인 죽음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전쟁에 승리하더라도 선조의 미움과 당파싸움에 다시 희생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수십만 일본 군졸들이 노량해전에서 죽어갈때 가토와 고니시는 남해를 빠져 나가 고향 구마모도(熊本)로 돌아왔다. 그 때 일본에서는 죽은 히데요시의 아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간에 이른바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아들 편에 서고, 가토는 신흥세력 이에야쓰 편에 섰다. 1600년 고니시는 이 전투에서 가토의 칼에 맞아 죽었다. 약관 42세였다.
가토는 이에야쓰의 신임을 받아 구마모토의 영주가 되었다가 1611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제3군 대장 구로다는 정유재란때 다시 조선침략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일찍 귀국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때 이에야스편에 서서 전공을 세우고 후쿠오카의 영주가 되었다. 구로다는 세 장수중에 가장 오래 살다가 1623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기서 이순신장군과 왜장(倭將) 가토와 고니시, 구로다의 최후를 비교해 보는 우리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