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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의 인물들
[초한지]와 초-한 전쟁
[초한지] 또는 [초한연의]는 [삼국지연의], [열국지]와 더불어 고대 중국의 실제 역사를 소재로 여러 영웅, 책사, 여인들의 대결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 대표적 중국 군담소설의 하나다. [삼국지연의]가 그렇듯, [초한지]도 시대와 나라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문화권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어필하는 매력으로 끊임없이 읽혀지며, 영화나 만화, TV 드라마 등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하지만 [초한지]는 다른 군담소설에 비해 좀 색다르다. [삼국지연의]나 [열국지]가 적어도 백 년 이상의 세월을 포괄하며 무수히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데 비해, [초한지]는 통일 진나라가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쟁패전을 벌이다 결국 유방이 승리하기까지 대략 10여년 남짓의 세월을 다룰 뿐이며, 등장인물도 그리 다채롭지 않다. 게다가 [삼국지연의]가 나관중이라는 단일 저자를 내세운 김성탄 편집의 정본으로 전해지며 [열국지]도 풍몽룡을 저자로 하는 정본이 있는 반면, [초한지]는 뚜렷한 저자도, 정본도 없다. [초한지]의 시대를 직접 살았던 한나라의 육가가 저술한 [초한춘추]와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인 [사기]를 바탕으로 해서 명대의 [서한연의]를 비롯한 온갖 판본이 등장했는데,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한국 소설가 김팔봉이 1956년에 펴낸 [통일천하], 일본의 시바 료타로가 1970년대 말에 쓴 [항우와 유방]을 비롯하여 [정비석 초한지](1984), [이문열 초한지](2008) 등 현대 소설가들이 여러 고전 판본을 참고해 엮어 쓴 작품들이 일종의 정본처럼 읽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처럼 비교적 구성이 단출하면서, 하나로 집대성된 고전의 무게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초한지]가 왜 [삼국지연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것일까? 그것은 반대로 그 구도가 단순명확하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열국지]나, 적과 아군이 수시로 바뀌는 전쟁 끝에 조조도 유비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삼국지연의]에 비해, 대결 구도가 뚜렷하고 승패도 확실히 갈리는 [초한지]야말로 이분법적인 처세술이나 인물론을 적용해 볼 수 있는 좋은 틀이다. 또한 [초한지]의 소재가 된 실제 초-한의 쟁패전은 누가 고대 중국의, 크게는 동아시아 문명의 주인공이 되느냐를 판가름한 전쟁이 되었기에 비록 그 기간은 불과 몇 년이었지만 역사적 의의가 컸다. 그리고 처음에는 누가 봐도 유리했던 항우 쪽이 결국에는 패자가 되었으므로, “왜 항우는 졌는가?” “무엇이 유방을 성공하게 했는가?”라는 의문이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초한지]의 내러티브는 고대 동양사를 탐구하는 학자나, 유방에게서 성공의 교훈을 배우려는 CEO나, 항우의 비극적 운명에서 영감을 얻는 예술가 등등에게 실로 많은 흥밋거리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기마대와 전차대를 나타낸 청동상. 동한 시대의 것이다
왜 항우는 지고 유방은 이겼는가? “나는 재능에서 장량, 소하, 한신에 못 미치지만 이들 모두를 다룰 수 있었는데,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유방 스스로의 해답이 [사기]에 적혀 있거니와, 결국 항우와 유방의 성격 차이가 초-한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는 것이 [초한지]의 주제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 [초한지]에서는 [사기]에 나오는 유방 스스로의 인물 비교론에다, 한신의 비교론(“항우는 재능에서 유방을 능가하지만, 성격이 지나치게 소심하고 자기중심적이므로 큰 인물이 못 된다”)에서 유추하여 유방은 후덕한 군자이고 항우는 도량이 좁은 소인배였으므로 결국 천하는 유방에게 돌아갔다고 풀이했다. “재주를 배우기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동양의 고전적 교훈의 완벽한 사례인 셈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판에 박은 해석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이 대표적인데, 그가 보기에는 항우는 소인배라기보다 고상하고 신사적인 사나이였고, 유방이야말로 후안무치한 졸장부였다. 항우의 추격에 놀라 자식들을 수레에서 집어 던지면서까지 살겠다고 버둥대는 모습이나, 영원한 평화를 철석같이 약속하더니 인질을 되찾자마자 물러나는 항우의 뒤통수를 치는 모습을 볼 때 유방이야말로 소인배가 아닌가? 그에 비하면 항우는 때로는 난폭했지만 의리를 존중하고 약속을 지키는 자세를 고집했으며, 그 결과 패배자의 오명을 쓰고 만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유방에게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의뭉스런 “간사한 최후의 승리자” 상을, 항우에게서 요시츠네 같은 “비운의 영웅” 상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보면 “세상은 착하면 손해 보는 법”이라는 ‘현실적 교훈’이야말로 [초한지]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인 듯도 하다.
물론 실제의 역사는 이렇게 한 가지의 교훈으로 정리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다. 초, 한의 대표자들의 성격 차이가 전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소설의 단순명확한 구도는 뭔가 비교하고 교훈을 얻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며, 여기에 두 영웅을 둘러싼 책사, 무사, 여걸, 미인 등 여러 인물상이 더해 주는 깨알 같은 재미가 더해짐으로써 오늘날도 [초한지]의 인기를 시들지 않게 하고 있다.
[초한지]의 인물들
나는 전설이다 - 항우(項羽, BC 232~202)
보통 항우라고 알려진 그의 본래 이름은 항적(項籍)이며, 우(羽)는 자(字)이다. “항우장사”라는 우리네 속담 표현도 있듯, 그는 보통 “산이라도 뽑아버릴” 초인적인 힘을 가졌지만 꾀도 전략도 없이 오직 몸으로 부딪쳐 싸우는 “순수 무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그려낸 항우도 그런 모습으로, 범증은 항우의 ‘무사도’ 정신에 감탄하면서도 “책략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며 위태롭게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사기]에 나타난 항우의 본모습과 거리가 있다. 사마천에 따르면 항우의 어린 시절 숙부 항량이 글을 가르치려 하자, “사나이는 자기 이름만 쓸 줄 알면 된다”며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았다. 무술을 가르치려 하자, “무술이란 한낱 병사의 재주”라며 역시 거들떠보지 않았다! 항량이 이번엔 병법을 가르치니, 비로소 큰 관심을 보이며 익혔다. 또한 시바 료타로의 항우는 언제나 공명정대하며 그 때문에 상대의 비열한 책략에 말려들어 늘 손해를 보는 사람이지만, [사기]에 따르면 항량이 처음 반란을 일으킬 무렵 항우는 회계군수 은통을 암살하고 그 세력을 빼앗는 역할을 했고, 이후 초나라 부흥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도 자신을 견제하는 장군 송의를 암살했다.
나중에는 홍문에서 유방도 암살하려다 그만두었고, 한때 의제라고 받들던 초회왕마저 암살했으니,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뒤통수를 치는 것이 항우의 장기였던 셈이다. 또한 그는 유방의 아버지와 처자식을 오랫동안 인질로 잡고 있었고, 항복하지 않으면 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것을 과연 공명정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모순은 사실 [사기] [항우본기]의 묘사에서 비롯된다. 사마천은 항우의 일생을 다루며 전반부에서는 여느 군벌처럼 이해타산에 밝고, 책략에 의존하고, 냉혹한 모습을 주로 그렸다. 특히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는 이야기는 항우를 덕이 없는 폭군으로 보는 전통적 관점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항우본기] 후반에서는 그의 초인적인 무공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가 많이 두드러진다. 한나라의 대표적인 장사 누번을 “눈빛만으로 제압”했다거나, 항우가 한 번 소리치기만 해도 “한나라 장수들이 바람에 쓸리듯 넘어지는” 장면은 ‘항우장사’의 진면목인 듯싶다. 또한 사면초가에 몰려 “우야, 우야, 너를 장차 어쩌란 말인가” 하며 눈물을 흘리고, 오강 나루터까지 무사히 탈출했으나 “강동의 팔천 자제와 함께 강을 건너왔거늘, 이제 그들이 전멸했으니 혼자서 돌아갈 면목이 없다”며 자결하는 모습은 그를 낭만적인 영웅으로 바라볼 근거가 된다.
한왕조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한고조의 숙적이었던 항우를 왜곡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고대 역사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공평한 시각으로 유명한 사마천은 항우와 유방의 대결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널리 수집하여 기록물과 종합해 [항우본기]를 썼다. 한 시대를 이끈 제왕 또는 왕조의 일대기에 해당되는 “본기”의 편목을 항우에게도 주어 [진시황본기]와 [고조본기] 사이에 오도록 했다는 점도 그가 항우를 차별대우하지 않고, 한때 천하를 뒤흔들었던 그의 위상을 제대로 평가했음을 짐작케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순되는 듯 보이는 항우의 성격은 “소수정예 병력의 영웅적 지휘자”였던 그의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군대가 대체로 들에서 일하던 농민을 강제징집하거나 밥과 돈으로 꾀어 모아들인 오합지졸 군대였던 반면, 항우는 전쟁의 전문가들로 정예병력을 운용했으며 따라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줄곧 승리를 거두었던 듯하다. “초나라 전사들은 누구나 한 명이 열 명을 이겼다.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자치통감]) 그런 전사들의 충성을 얻으려면 지휘관 스스로도 용맹스러운 전사임을 과시해야 한다. 또한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며,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항우의 상황이 불리할수록 그가 직접 일선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두드러졌으며, 한편 ‘누가 진짜 우리 형제들이냐?’면서 ‘적과 아군’을 엄격하게 나누는 경향이 커짐으로써 정적이나 적군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군 지휘관으로서는 탁월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치가로서는 약점이었다. 무보다 문을 경시하고, 널리 인재를 포용하지 못하기 쉽기 때문이다. 장량과 한신도 한때는 항우의 밑에 있다가 등을 돌렸고, 영포와 팽월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초-한 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항우가 싸움터에서는 최고였지만 옥좌에서는 기껏해야 이류였다는 평가를 뒷받침한다.
한편 유방은 인재들을 진심으로 따르게 만들지는 못했다. 항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할 때 한신, 팽월, 영포가 모두 그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다가, 물질적 보상을 해준다는 말에 겨우 군사를 움직인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전쟁 후의 무자비한 공신 숙청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써서 남들이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고, 믿지 못할 사람이라도 이용가치가 있는 동안에는 기용해야 하는데, 항우는 지나치게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만 고집한 나머지 쓸 수 있는 세력의 범위를 좁혔다. 그것이 항우의 첫 번째 패인이라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다음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인지의 비전이 불충분하거나 모순적이었던 것이 두 번째 패인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서초패왕’이 된 그는 한편으로는 “진나라의 무리한 통일을 무효로 하고, 이전의 여섯 왕국을 복원한다”는 원칙에 따라 진나라가 멸망시킨 제, 초, 연, 조, 한, 위 여섯 나라를 부활시키면서도 전국시대의 강국들을 견제하고자 제나라는 세 개, 연나라는 두 개 식으로 분할했고 한나라의 유방, 구강의 영포 식으로 출신이 비천한 장수들도 군공에 의거해 분봉했다. 이는 당연히 구왕실 출신자들의 강한 불만을 낳았다. 그러나 유방이나 영포 등도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런 점을 파고든 유방의 초-한 전쟁 명분이 먹혀듦으로써 항우는 한때 천하를 다 차지해 놓고도 서초 하나만의 힘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장기적으로 힘이 모자라 패하고 만 것이다. 전략적인 실패였다. 초나라 명문가의 후예이지만 한편으로 구왕실의 후예는 아니었던 항우의 어정쩡함이 어정쩡한 비전을 낳았다고 할까.
결국 항우는 정치력에서 유방보다 뒤졌으며, 군사적 재능으로 그 격차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지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유방보다 열다섯이나 연하인 2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문에서의 연회, 수수 전투에서의 패배 등 다분히 “우연”에 따라 유방이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그때 유방이 죽었다면 아마도 항우는 다시금 패왕으로서 천하를 제압했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연륜이 쌓이면서 더 안정적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이후의 동양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수많은 시인과 사상가, 역사가들은 그런 궁금증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병가의 승패는 기약할 수 없는 법.
부끄러움을 참는 것도 사나이의 일이 아닌가.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았으니,
권토중래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을!
- 두목(杜牧), [제오강정(題烏江亭)]
그대는 한 송이 꽃과 같이 - 우희(우미인, ?~BC 202(?))
당당한 서초패왕 항우가 자신이 결국 패배했음을 깨달았을 때 마지막으로 외친 사람의 이름, 그것은 비운의 명장이자 할아버지가 되는 항연도 아니고, 숙부이자 주군이던 항량도 아니고, 모사이면서 “아부(亞父)”로 깍듯이 예우했던 범증도 아니었다. “우야, 우야. 너를 장차 어쩌란 말인가!” 이는 마지막에도 “여자 타령”을 했다는 이유로 후대 유학자들이 항우를 더더욱 나쁘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그의 인간적 진솔함을 드러내는 근거이고, 항우와 우희(虞姬),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을 상상하며 애틋한 마음이 일게 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전설과 야담 속에서 항우가 ‘항우장사’로 이미지화되면서 우희는 절세미인으로 이미지화되었다. 가장 남자다운 남자와, 여자다운 여자라는 식이다. [우미인전] 같은 고전소설에서는 그녀가 본래 선녀였다고 그리기도 했다. [열국지]의 서시, [삼국지연의]의 초선, 그리고 당나라의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손꼽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녀의 흔적은 미미하다. [사기]는 [항우본기]의 막바지에 가서 그녀를 살짝 언급할 뿐이다. “항왕에게는 우라는 이름의 미인(美人)이 있었는데, 총애하여 항상 데리고 다녔다.” 또한 항우가 “우야, 우야” 하며 [해하가]를 부르자, 우희도 따라 불렀다고 적혀 있고 그 뒤로는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그러나 [초한지]에서는 그녀가 이렇게 [해하가]의 답가([우미인가])를 부르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 한다.
한나라 군대가 이미 땅을 빼앗았나요.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여.
대왕의 뜻이 이미 다했다면,
천첩도 살기를 바라지 않아요.
또한 도무지 그녀의 신상에 대한 기록이 없는 역사서를 보충하여, 그녀는 원래 제나라 사람이었고 항우의 부하가 된 우자기의 누이인데, 우연히 항우의 눈에 들어 열렬한 사랑을 받은 끝에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희, 또는 우미인이 정말 황후였을까? ‘미인’이라는 칭호는 고대 중국 왕실에서 후궁의 하나로 귀인(貴人)보다 아래인 여성에게 주어졌으며, “총애하여 항상 데리고 다녔다”는 [사기]의 기록은 황후의 신분과는 걸맞지 않아 보인다. 귀족의 자제인 항우에게는 일찌감치 정혼한 정부인이 있었고, 우희는 유방의 척희(戚姬)처럼 나중에 맞이한 애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묘하게도, 우(虞)와 척(戚)은 모두 슬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유방이 가장 사랑했다는 척희도 그의 사후 여후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
전설은 계속해서 우희가 스스로 죽자 그녀가 흘린 피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났고, 이를 “우미인초(개양귀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한 편의 시로 읊은 송나라의 증공(曾鞏)을 비롯해, 많은 문인들이 여기서 영감을 얻곤 했다.
향기로운 영혼이 번뜩이는 칼빛 아래 하늘로 날아가니,
젊은 여인의 피가 변해 들판에 꽃이 피었다네.
향내 나는 마음아, 쓸쓸하게도 차가운 가지에 머물렀구나.
옛 노래를 들으니, 우미인이 눈썹을 찡그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구나.
슬픔과 원망 속에 헤매는 넋, 근심으로 말도 못하니,
마치 그 옛날 초나라 노래를 듣던 마음이라.
-증공, [우미인초(虞美人草)]
남성 위주의 역사와 남성 위주의 역사 서술 속에서, 우희의 설 자리는 들판의 한 송이 꽃에 불과했다. 그러나 티라모스와 티스베, 로미오와 줄리엣,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도미와 아랑 등등에서처럼, “슬픈 불멸의 사랑”이라는 동서고금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는, 그녀가 숱한 전설과 예술작품으로 항우 못지않게 활짝 피어나고, 길이 향기로운 이름을 남기게 했다.
경극 [패왕별희]의 한 장면
한을 품은 여자는 강하다 -여치(여후, ?~BC 180)
우희가 “중국 4대 미인”이라면, 한고조 유방의 정비였던 여치(呂雉)는 측천무후, 서태후와 더불어 “중국 3대 악녀”로 꼽힌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3대 악녀”는 곧 “3대 여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치는 산양의 단보, 오늘날 산둥성의 단현에 해당하는 곳에서 지방 호족인 여씨 가문의 딸로 태어났으며, 아후(娥姁)라는 별명 또는 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아후를 유난히 예뻐하여 반드시 제일 가는 신랑을 얻어주겠다고 별렀는데, 아버지 여공이 패현에 들렀을 때 그의 눈에 들고자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가지고 한 번 뵙기를 청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액수인 일만 전을 내겠다고 한 사람을 만나 보니 일만은커녕 일전도 내기 힘든 백수건달인 유방이었다. 그러나 관상에 일가견이 있던 여공은 한눈에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았고,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치를 그의 부인으로, 또한 여치의 동생은 유방의 친구이자 개백정으로 살아가던 번쾌의 부인으로 주었다고 한다.
유방은 여치와 혼인하기 전에 얻었던 여자에게서 비(肥)라는 아들을 얻어 키우고 있었고,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던 유방의 입장상 갓 시집온 여치는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황소처럼 밤낮으로 일해야 했다. 여기에 의붓아들까지 길러야 하고, 그녀 스스로 한 아들(盈)과 딸을 낳아 길렀으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방은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듯 매일 술타령에 계집질을 일삼으며 한참이나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이 결국 반군의 우두머리가 되더니 관중에 입성하고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한왕의 자리에 이르자, 자연히 왕비가 된 그녀도 이제는 오랜 고생의 보답을 받는가 싶었다.
하지만 초-한 전쟁은 그녀에게 또다른 아픔을 안겨주었다. BC 205년에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패배해 달아나자, 성에 머물러 있던 그녀는 식구들과 함께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그녀는 그로부터 2년여를 포로의 몸이 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초한지]에 따르면 항우는 한 번은 그녀를 성벽 위로 끌어내서 유방에게 “이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항복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방은 천연덕스레 “그러든지 말든지”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녀의 마음에 대못이 박혔으리라. 또한 항우를 쓰러트리고 황제가 된 다음에도 유방은 그녀에게 정식 황후라는 지위는 주었으되 남편으로서의 사랑은 주지 않았고, 척희를 비롯한 여러 후궁들과만 좋아 지냈으므로 그녀의 마음은 갈수록 모질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왕조의 수도였던 장안. 여후 집권기에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여자로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로서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유방의 “공신 죽이기” 계획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다. 죄를 짓고 유배 중이던 팽월을 유인해서 유방에게 데려가서는 죽이게 한 것도 그녀고, 초-한 전쟁 최대의 공로자였던 한신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체포해 죽게 만든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한신의 경우 유방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그 일족을 몰살해 버렸고, 팽월은 살을 저며 젓갈로 만들고는 그것을 여러 제후들에게 돌려 본보기를 보이도록 했다. 한으로 얼어붙은 여자의 마음은 한껏 잔혹해져 있었다. 유방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공신 죽이기를 그녀가 앞장서서 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고, “쓸모가 있는 이상 내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하여 그녀를 폐하고 척희를 대신 황후로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은 일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쇠해져 가던 유방이 죽는다면 그 다음은? 여후(呂后)의 아들 유영이 적장자로서 태자에 봉해져 있었으나, 유방은 척희의 아들 여의(如意)를 아끼는 것이 누가 봐도 분명했다. 애가 탄 여후는 염치 불고하고 장량을 찾아가 그의 지혜를 빌려달라고 애걸했다. 난처해 하던 장량이 결국 “폐하께서 부르셨지만 오지 않던 ‘상산사호’라는 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초빙하여 태자님의 사부로 삼는다면 폐하께서도 태자를 존중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라고 하자 그대로 실천하여 태자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BC 195년에 한고조 유방이 죽자, 이제는 여후의 세상이었다. 사마천은 이때부터 여후가 죽는 BC 180년까지를 [여후본기]로 서술하여, 이 시대 천하의 진정한 지배자는 여후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녀는 곧바로 유영을 즉위시키고(한혜제), 척희를 유폐하며, 조왕에 봉해져 있던 여의를 소환해 독살했다. 아들의 죽음을 알고 몸부림치는 척희의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지져버리고, 독약으로 말도 못하게 한 채 변소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사람돼지(人彘) 구경이나 해 보시라”며 아들 혜제를 불러왔다. 중국에서는 돼지를 변소에 두고 길렀기 때문에 척희의 몰골을 돼지에 빗댄 것이었다. 혜제는 이를 보고 넋이 나가서 말했다. “이건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소자는 당신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년 남짓 정무를 폐하고 술만 마시다가 죽어버렸다. 장례식에서 여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 속내를 내다본 진평은 여씨 일족을 왕후에 봉해 여씨의 집권을 든든히 하라고 건의했다. 득의양양한 여후는 여태, 여록, 여산 등을 각각 왕으로 봉하며 다른 일족들도 요직에 앉혔다. “백마의 맹세”를 통해 “유씨 외의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던 유방의 원칙을 보기 좋게 깨트린 것이다. 좌승상에는 예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정부라는 소문도 있던 심이기를 앉혔다.
여후는 혜제의 아들 공(恭)을 황제로 세웠으나(한소제), 그녀의 어머니 또한 여후에게 살해되었다 하여 원망한다는 말을 듣고는 3년 만에 폐위, 살해했다. 그 밖에도 조왕 유우, 양왕 유회, 연왕 유건 등을 죽음으로 몰았으며 이들을 대신해서 여씨 일족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또한 유씨 왕족들을 여씨 일족의 여자들과 강제 혼인시켜, 그녀들을 통해 유씨들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그녀의 생전 마지막 명령이 여통을 연왕에 봉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여씨 천하를 만들려는 그녀의 집념은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BC 180년이 되자 아마도 60이 넘었을 그녀는 급속히 쇠약해졌으며(전설에 따르면 조왕 유여의가 변한 푸른 개에게 물린 뒤 죽을 병이 들었다고 한다), 이 틈을 노려 진평과 주발이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그녀가 죽자 주발은 북군 진영으로 뛰어가서 “여씨를 따를 사람은 오른쪽 어깨를, 유씨를 따를 사람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외쳤으며, 이에 모든 병사가 왼쪽 어깨를 드러낸 채 무기를 잡으니 여씨 일족은 허망하게 일망타진되고, 대왕 유항이 황제로 옹립되었다(한문제). 유방은 죽음의 자리에서 여후에게 “유씨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주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사실이라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사람돼지”를 비롯한 여러 잔혹한 행동, 그리고 “감히” 여자가 남편의 왕업을 빼앗고 남자들 위에 군림했다는 점에서 이후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대표적인 악녀로 기록했다. 그러나 그녀가 엘리자베스 바토리 같은 그야말로 악녀라 불릴 만한 여성 권력자들과 달랐던 점은, 당대에 피해를 본 사람은 일부 권력층에 한정되고 대부분의 백성은 오랜 전란 끝의 평화를 누리며 번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보통 암살이나 감시 등에 의존함으로써, 걸핏하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었던 남성 권력자들과는 달리 백성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았다. 북쪽의 최대 위협이었던 흉노도, 묵특선우가 여후에게 오만불손한 편지를 보냈음에도 분노를 삭이고 평화공존을 도모함에 따라 그녀의 집권기에는 전쟁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그녀야말로 “지친 백성을 쉬게 한다”는 한고조의 정책을 올바로 계승하여, 이후 한문제, 한경제 시대에 한왕조가 전성기에 이를 수 있도록 한 유능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권력자로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녀가 왜 그토록 “여씨 천하”를 만들기에 전념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자신의 권력을 든든하게 만든다는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생애 마지막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여씨 왕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모습이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여자의 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내로서 외면받고 여자로서 모욕받은 그녀가, 남편이 세운 제국의 틀은 그대로 가져가되 그 상층부에서 남편의 혈족은 남김없이 배제함으로써, 남편의 성씨를 중국 땅에서 아예 말려버림으로써, 오뉴월의 된서리 이상의 한풀이를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풍운에 몸을 맡기고, 장기판 위의 말이 될지라도
“선비” 또는 “사(士)”는 동양의 독특한 집단-계층이다. 근대 이전에는 중국과 한국을 제외한 어디서도 평생 글공부만 해온 남자들이 지식인이자 관료로서 국가를 이끄는 중추로 활약했던 경우가 없다(인도처럼 성직자 집단이 최상층을 차지하는 사회에서도, 실권은 무력을 가진 계층에게 있었다). 보통의 경우는 항우와 그를 따르던 강동의 자제들처럼 뛰어난 용사로서의 군주와 그를 따라 전쟁을 일삼는 무사 집단이 국가의 주축이며, 세습 귀족으로서 민중을 지배했다.
하지만 사(士)라는 글자가 본래 도끼를 옆으로 놓은 모양이라는 지적도 있듯, 본래의 사는 동양에서도 무사 집단을 의미했던 듯하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며 군주가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면 군사력만이 아니라 고도의 행정 능력이, 그리고 적은 병력으로도 큰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병법이나 기술 지식, 생산력 증대에 필요한 농업 지식,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한 제례에 필요한 예법 지식, 나아가 정치철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맹자를 처음 접견한 양혜왕이 “선생은 무슨 이익을 주시려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는 이야기에서 보듯, 공부를 많이 한 선비는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여기에 호응해 제자백가의 학술이 발달했고, 무예가 아니라 글공부를 통해 입신출세하려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선비 집단을 형성해갔다. 그런 목적에 충실한 선비들로 유가와 법가의 박사(博士)들이 있었고, 공사를 넘나들며 특유의 의리를 세우려 했던 묵자 계열의 지사(志士), 그리고 출세 자체를 회의하며 스스로의 세계에 몰입하려 했던 도가의 은사(隱士)까지 나타났다. 진시황이 실시했다는 ‘분서갱유’는 다소 과장과 왜곡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진나라의 통일 시기에 이들 선비들이 불만을 품는 경우는 많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다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한과 초의 쟁패전이 불꽃을 튀기자, 이 풍운에 몸을 맡기고 자신의 포부를 펴 보려는 선비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나는 장량, 소하, 한신을 모두 기용했지만, 항우는 범증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해 패했다”는 유방의 평가는 이들 선비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초-한 쟁패전의 관건이었다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실제로 거사의 명분을 세우고 전체적인 전략을 짜는 일에는 범증과 장량이 크게 기여했으며, 소하의 행정 능력이 없었다면 유방은 항우와의 긴 싸움에서 물자 조달을 제대로 받지 못해 먼저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쓰임새가 모호한 경우도 많았다. 무예와는 달리 학문이란 당장 가치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방은 “말만 번드르르하고 실속은 없는 선비들을 싫어해, 그 관을 빼앗아 오줌을 누곤 했다”고 하며, 역이기와 숙손통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들을 차갑게 대했다. 세객이자 책사로서 톡톡히 활약하게 되는 육가도 한때 유방을 배신했던 것을 보면 유방이라고 해서 아무런 배경도 풍채도 없는 선비를 가능성만 보고 중히 쓰는 사람은 못되었다.
반면 항우는 아직 숙부 항량의 밑에 있을 때 범증을 만났고, 그를 “아부”라 부르며 오랫동안 공손히 대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결국 초-한 전쟁의 도중에 중요한 참모를 내친 쪽은 유방이 아니라 항우였다. 그것은 결국 항우의 본질이 동양적이라기보다 서구적, 아니 일반적인 군벌형 지도자로서, 글줄이나 읽고 멋진 말만 할 줄 알지 스스로는 닭 잡을 힘도 없는 선비라는 인종을 마음 깊이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무식한 건달 출신이었던 유방은 선비들을 고깝게 보는 한편으로 존경하고 의지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지도자에게는 열등 의식도 적당히 있어야 하는 것일까.
초-한 전쟁의 결과 한나라가 고대 동양의 중심이 됨으로써, “선비들의 시대”는 움직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한무제의 대에 이르러 동중서를 비롯한 박사들이 “유교의 국가화”를 이룩한 이후, 중국과 한국의 전근대 역사는 왕과 선비(신하),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 누가 진짜 “나라의 뿌리”인가 하는 논쟁을 종종 일으키면서.
[초한지]의 인물들(2)
장막 속과 산림 속 - 장량(張良, BC 262(?)~189)
장공(長空)에 걸린 달아, 만고 인물(萬古人物) 네 알리라.
영웅은 그 누구며, 호걸은 누구누구.
아마도 제일 인물은 장자방(張子房)인가 하노라.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장량(좌)과 “국사무쌍”의 장수로 당대를 뒤흔든 한신(우)
조선 영-정조 시대의 인물인 이정보의 시조에서도 보듯, 자(字)를 자방이라고 했던 장량은 불세출의 책사, 전략가의 대명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사마휘가 제갈량의 기량을 칭찬하며 “한나라 사백 년의 기업을 일으킨 장자방에 비할 만하다”라고 했을 만큼, 항우가 무력의 상징이라면 지혜의 상징은 장량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기]에서 “이름이 알려진 일도 없고, 용맹한 공적도 없었다. 다만 어려운 일을 쉬운 가운데 도모하고 큰 일을 작은 일 속에서 처리했다”라고 평가한 사마천의 말을 봐도(그는 장량을 다룬 [유후세가]를 소하의 [소상국세가], 조참의 [조상국세가] 뒤에 놓았다), 또 정작 [초한지]를 봐도 생각만큼 모든 것이 장량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를 포함한 “한왕조 건국 3걸” 중 한신은 군사지휘에서, 소하는 병참지원에서 확실한 공적을 세우고 있는 반면, 장량의 공헌도는 다소 모호하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일거수일투족을 제갈량의 조언대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초한지]에서 유방의 꾀주머니는 장량만이 아니고, 진평, 역이기, 육가 등이 두루 활약하고 있다. 장량의 인생사도 일정하지 않아서, 그는 초년에는 ‘지사’로, 중년에는 ‘책사’로 살았으며 말년에는 ‘은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유방 진영에서 유일하게 자방이라는 자를 갖고 있었던 점에서도 보듯, 장량은 한나라 진영에서는 보기 드문 명문가 후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한(韓)나라 사람인데, 나라가 망한 뒤에도 3백 명의 노복을 거느릴 만큼 가세가 떨쳤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장량은 그렇게 유복한 삶에 안주하기를 거부했으며, 재산을 팔아 한나라를 복원하고 진나라에 복수하려는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창해역사라고 불리는 뛰어난 무사를 고용해 박랑사라는 곳을 지나던 진시황의 수레를 습격했지만, 암살은 실패했으며(BC 219) 수배범이 되어 천하를 유랑한다.
그 뒤 황석공이라는 신비한 도인에게서 병법서를 받고 그것을 익혀 책사가 되었다고 하며, 초나라 왕족 경구에게 의탁하려다가 우연히 유방을 만나 수하가 된다. 그런데 병법서([사기]에는 주나라 태공망이 쓴 병서라고 되어 있고, 오늘날 전하는 [삼략]이 이것이라고도 한다)를 익혔다지만 장량이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일은 없었다. 그 까닭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해서라고 하지만, 한신처럼 전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대신 장량은 전체적인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거나, 반대로 작은 잔꾀를 강구하는 식으로 유방을 도왔다. 유방이 서촉으로 들어가며 잔도를 불태워 중원으로 돌아올 뜻이 없다는 제스처를 보인 일이나, 그곳에서 거병하며 항우가 초회왕을 살해하고 옛 왕국들의 후예를 푸대접한 점을 명분으로 세운 일, 전쟁이 끝나고 새 제국의 수도를 관중(장안)으로 정한 일 등은 모두 장량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홍문의 연회에서나 형양성 포위전 때 유방을 구사일생으로 도망치게 한 것도 그의 꾀였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유방은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내어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재주”가 탁월하다며 장량의 공로가 한신이나 소하 못지않다고 추어주었다. 그리고 유후라는 작위와 함께 3만 호의 식읍을 상으로 내렸는데, 장량은 사양했다고 한다.
이 다음부터가 모호한데, [초한지]와 각종 전설은 그가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또는 공신들이 토사구팽을 당하는 현실을 보고 질린 나머지 세상을 버리고 은둔했다고 한다. 적송자라는 신선을 따라 산림에 은거하다 스스로도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기]에 따르면 그는 후계자 문제를 놓고 여후에게 조언을 해 주는 등 계속 중앙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혜제가 죽고 본격적으로 여씨 천하가 될 때, 장량의 아들인 장벽강이 대신들에게 꾀를 줌으로써 한바탕 피바람을 막았다는 대목도 있다.
장량은 과연 어떻게 말년을 보낸 것일까. 아마도 공신 제후의 한 사람으로 편안히 마친 쪽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선 같은 이미지에 맞지 않을뿐더러, 한고조가 유력한 공신들을 다 없애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공적이 뛰어난” 장량은 무사했다는 것도 이상해 보인다. 그러므로 세상을 버리고 은둔했다는 전설이 만들어졌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대업을 이루고 나면 남양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리라”고 했던 제갈량처럼, 현실 참여와 개혁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에 초탈한 존재이고자 하는 선비의 집단적 자의식을 반영하는 모습이다.
내 뼈를 돌려다오 - 범증(范增, BC 277~204)
[초한지]에서 ‘항우 대 유방’의 구도는 한 단계 내려온 책사의 수준에서는 ‘장량 대 범증’이 된다. 그만큼 당대의 라이벌로 서로 묘수를 교환하며 불꽃을 튀겼을 것 같지만, 장량이 비교적 젊은 나이(50대 초반?)에 유방의 수하가 된 반면, 범증은 아직 항우가 항량의 부하일 때 이미 70이 되어 있었다.
[항우와 유방] 등에서는 범증을 자연에 묻혀 새와 짐승을 벗삼아 살던 은사로 묘사한다. 그러나 진나라의 폭정에 분노한 나머지 세상을 편안히 할 영웅을 찾아 힘을 보태려 했고, 그래서 항씨를 돕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이(그 자신을 위해서나, 천하를 위해서나) 소설의 구도다. 아무튼 [사기]의 범증은 항량이 항우를 데리고 거병했을 때 제 발로 찾아와 전략을 제시했다고 한다. “진승이 왜 망했는지 아십니까? 명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진나라의 폭정을 싫어했지만 근본도 없는 자를 왕으로 받들고 싶어하지도 않았던 것이죠. 당신은 초나라의 귀족이니, 일단 명분이 섭니다. 그러나 더 힘을 키우고, 오래 가려면 명분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멸망한 초나라 왕실의 후손인 미심을 찾아 그를 왕으로 받들고(초회왕), 나중에는 의제(義帝)로까지 높임으로써 “진나라에 멸망한 옛 6국을 복원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도록 했다. 이는 확실히 적절한 전략이었으며,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사실상 천하의 주재자까지 올라간 것은 그의 독보적인 무력 외에도 범증의 전략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항우의 움직임에서 전략적 탁월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천하의 영토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6국 복원의 원칙과 논공행상의 원칙을 어정쩡하게 섞어 씀으로써, 결국 양쪽 모두에게서 반발을 샀다. 그리고 “천하의 목덜미를 움켜쥔 요충지”로 평가받던 관중을 뒤로 하고 고향인 서초로 물러갔으며, 자신의 손으로 세운 의제를 살해함으로써 그의 반대 세력들에게 더할나위없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범증은 뭘 하고 있었을까? [사기]는 유방의 진면목을 꿰뚫어보고 그를 홍문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한 것 말고는(그는 보기 드물게 성을 내며, “더벅머리 아이놈과 일을 못 하겠구나! 우리는 모두 유방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범증이 이런 저런 결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범증이 제갈량처럼 항우의 모두 중요한 결정을 입안했다고 보는 쪽에서는 “결국 항우보다 범증이 문제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 않았을까. [초한지]에서 항우는 범증의 계책을 대부분 오만하게 무시해 버리는데, 그것은 과장이라 해도 천성적 무인인 그가 나이 많은 책사의 “귀찮은 잔소리”를 얼마나 귀담아들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자신의 군대는 범증의 조언 따위 무시해도 거의 항상 이기기 때문에, 범증을 “아부”라고 존중하는 척 해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실제로 중시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더구나 그는 누구보다 자기 피붙이를 믿는 사람이었다. 항우의 또 다른 숙부인 항백도 군사의 직위에 있었고, 그는 홍문에서 범증에 반대해 유방을 구원한 것을 비롯해서 범증의 주장에 대립 의견을 세우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항우는 점점 더 항백의 말만 들었다!
이렇게 보면 항우가 진평의 계책에 걸려 범증이 모반했다고 의심, 그를 저버렸다는 이야기도 그 맥락이 더 쉽게 이해된다. 사실 그때까지 항우가 범증을 유비가 제갈량 믿듯 신뢰하고 중시했다고 여긴다면, 한 차례 이간질로 그렇게 “뼈아픈 실책”을 저지르는 항우야말로 정말 철없는 인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한참 동안 범증을 뒷방 늙은이 대접을 하던 끝의 일이라면? 항우로서는 범증이 평소에 불만이 많았을 거라고, 모반을 꾸밀 만도 하다고 여길 만 했고, 이간질을 완전히 믿지는 않아도 범증에게 더욱 더 차갑게 대했을 것이다. 어차피 별로 아까운 인재도 아니니 말이다!
앞뒤 관계가 어찌 되었든, 그런 대접을 받게 된 범증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뿐이었다.
“천하의 일은 이제 정해졌습니다. 뒷일은 대왕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바라건대, 이 늙은이의 뼈를 돌려주셔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자신의 몸과 마음은 이미 주군에게 바쳤으니, 영원히 주군의 것이다. 그러나 뼈만은 돌려주기를, 그래서 몸과 마음은 두고 갈지언정 뼈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이었다. 자신은 결코 배반자가 아니라는 항변인 동시에, 믿었던 사람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의 슬픔, 남의 승부에 의탁했던 평생의 꿈이 깨져 버린 장기말의 분노가 절절이 배어든 말이었다.
그리하여 항우의 진영을 나선 범증은 고향으로 가는 길에 올랐으나, 도착하기 전에 울화가 솟구치고 등창이 나서 객사했다고 한다. 그 뒤에 항우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초한지]에서 묘사된 것보다 실제로는 범증을 잃은 것이 항우에게 큰 손실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로써 자신이 선비를 중시하지 않는다, 인재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표시를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가 계속해서 유방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근거가 된다.
다리 밑을 기어도 눈은 하늘을 본다 - 한신(韓信, ?~BC 196)
“한왕조 건국 3걸”의 하나이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대의 공로자 한신. 그러나 그의 말로는 누구보다도 비참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장량이나 범증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소설적 상상력이 포함된 듯도 보이지만, 한신의 비범함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로 보인다. 그는 대장군에 임명되어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유방의 병사들을 항우군 못지 않은 강군으로 키워냈으며, 파촉을 견제하던 삼진을 격파하고, 병력을 분할해 북상하여 위나라, 대나라, 조나라, 제나라, 연나라 등 중국 북부를 1년여 만에 정복해 버렸다. 이는 항우조차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막기 위해 보낸 항우의 용장, 용저마저 유수 전투에서 철저히 격파하자 항우는 한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사기]는 적고 있다.
하지만 그의 출신은 도무지 보잘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초한지]에서는 이를 덧칠하여 한신이 장량처럼 한(韓)나라의 후예이며, 진나라의 수배를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비천하게 행동했다, 불량배의 다리 사이를 기어간 것도 그런 의도였다고 서술하지만 [사기]에는 그가 초나라의 회음 출신이며 “돈도 배경도 없어서 관리가 되지도, 장사를 하지도 못해 늘 남의 밥을 빌어먹으며 살았다”라고 적혀 있다. 사마천은 직접 회음을 방문하여 한신의 이야기를 수집했는데, 한나라의 후예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다만 “빌어먹는 처지임에도 기개가 남달라서, 어머니가 죽자 장례비조차 없었는데도 높은 곳에 무덤을 써서 큰 집들을 내려다보도록 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남의 다리 사이를 기어갈망정 포부는 높고 컸던 모양이다. 그 점은 천민 출신으로 가장 먼저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서서 한때 왕이 되었던 진승이나, 백수건달이면서도 “언젠가는 황제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유방과 비슷했다. 그래서 이 ‘맨발의 청춘’은 부와 권력을 쥐게 된 다음에도 유방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아무튼 그러던 그가 어떻게 불세출의 명장이 될 기량을 연마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항량이 거병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고, 항우 밑에서는 몇 차례 계책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묵살당했다. 그래서 유방이 촉으로 들어갈 때 그 뒤를 따라갔지만, 거기서도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해 미관말직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의 그릇을 알아본 소하가 탈영을 하면서까지 한신을 유방에게 천거했으며, 한신 따위는 널려 있는 사람인데 뭘 그러느냐는 유방에게 “나라를 떠받들 선비로써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國士無雙)!”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파초대원수로서 그야말로 국사무쌍에 어울리는 공훈을 세우지만, 유방으로서는 그가 미더우면서도 불만스러웠다. 자신의 본진이 항우에게 몰리는 상황에서 북쪽 땅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야속했고(한신으로서는 타당한 선택이었고, 그가 만약 섣불리 남하했다면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파멸할 수 있었다), 도무지 겸손할 줄 모르며 자신의 재능과 공로를 솔직하게 말하는 모양도 편치 않았다. 가령 그는 유방에게 “폐하는 약 10만 군사를 지휘할 능력이 있으시고,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말했으며, 항우에게 시달리고 있는 와중의 유방에게 “제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하니 임시 왕의 지위를 허락해 달라”고 통보하기도 했다. 당시 유방은 불같이 성을 냈으나, 지금은 한신의 비위를 건드릴 때가 아니라는 장량의 설득을 받아들여 “임시는 무슨! 하려면 진짜 왕을 해야지” 하며 제왕으로 인정해 주었다. 아마 속으로는 ‘이 놈, 일단 싸움이 끝나기만 하면.......’ 하며 칼을 갈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방은 해하에서 항우를 쓰러트리자마자 제나라로 침공하듯이 달려가서 한신의 병권을 빼앗고, 제왕 대신 초왕에 봉했다. 인간적인 미움뿐 아니라, 한신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우려가 낳은 조치였다. 이에 앞서 모사 괴철(괴통)이 한신에게 “이왕 이리 되었으니 천하의 삼분의 일의 세력을 잡고, 한과 초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라”고 조언했으며 항우도 밀사를 보내 그러기를 종용했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데, 유방이 자신을 알아준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 일단 표면적 까닭이며, [초한지] 등에서는 천하를 통일시키는 대의를 위해 그랬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한신은 자신이 토사구팽을 당할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듯하다.
초왕이 된 한신은 고향 회음으로 가서 백수건달 시절의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베푼 사람은 모두 찾아내 보답했으며, 자신을 다리 밑으로 기어가게 한 불량배에게도 높은 관직을 주었다. 이를 두고 “밥 한 끼를 천금으로 갚는 한신! 그가 어찌 꿈엔들 한왕을 배반하려 했겠는가!”라는 후대의 평가도 나왔는데, 아무튼 오래지 않아 파국은 찾아왔다. 어쩌면 그것도 그의 의협심 때문이었다.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매가 그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이를 누가 밀고하자 반역 혐의를 씌웠던 것이다.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머리를 바치며 무죄를 호소했지만, 유방은 그를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한신으로서는 참지 못할 대접이었다. 역시 일등공신이자 유방의 동서이기도 했던 번쾌와 만났을 때 번쾌는 자신을 “신(臣)”이라고 부르며 그를 극진히 대접했으나, 한신은 “살아서 번쾌 따위와 동렬에 설 줄이야!”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번쾌의 처형에 해당되는 여후에게 들어갔는지 몰라도, BC 196년에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반란 모의(실제였는지는 의심스럽다)를 눈치챈 소하가 여후와 작당하고 그를 유인하여 체포한 것이다. 그를 출세하게 만든 사람도 소하이고, 파멸하게 만든 사람도 소하인 것은 우연일까. 마지막 순간 그는 “괴철의 책략을 받아들일 것을!”하고 한탄했지만 여후는 그의 목을 베도록 했다(삶아 죽였다고도 한다). 그의 일가족도 남김없이 몰살되었다.
그의 최후를 논평하여, 사마천은 “만약 한신이 도리를 지키고 겸손하여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거나 재능을 뽐내지 않았다면, 그는 주공이나 태공에 견줄 만한 국가의 원훈으로 길이 남았으리라”고 말했다. 결국 처신을 약빠르게 못한 탓에 괘씸죄를 산 데다 1인자에게 불안감을 심어 줌으로써 스스로를 망쳤다는 것이다. 장수로서 그의 재능은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의협심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헛된 객기 취급을 받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