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과 무스탕
제대를 앞둔 남편은 사회적응 교육을 받느라 부산에서 하숙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남편 없는 시댁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보내게 된 신혼기. 꼼짝없이 낯선 갯마을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주말마다 그 먼 길을 멀다 않고 다녀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나는 멀리서 달려온 남편을 두고, 광주에 사는 여고 친구의 결혼식장에 들렸다 해질 무렵에야 귀가를 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예상치 않았던 친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반가움보다는 시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서울에서 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던 초등 친구가 남편과 맥주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은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부모님에게는 군대 후배라고 소개했으니 염려하지 말라며 내 표정을 살폈다. 한사코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친구에게 멀리서 왔으니 나를 만나고 가라며 붙잡았단다. 친구는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워하면서 다음부터는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갔다.
내가 하는 일이야 집안 청소와 세 끼 밥 짓는 일이 전부였지만, 긴장의 끈을 늦출 순 없었다. 아침이면 우물 속에 담가 둔 김칫독을 먼저 건져야만 두레박을 내릴 수 있다. 날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주말마다 찾아와 함박웃음을 안겨주고 가는 남편의 배려가 있었기에 차디찬 갯바람도 거뜬히 견디었다. 임신 사실을 안 뒤에는 시간 나는 대로 미리 구입해둔 동화책을 읽거나 극동방송에서 전하는 성경 말씀과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좋은 생각만 하려 노력했다. 따뜻한 봄날이면 공동우물가에서 사귄 이웃과 소소한 얘기도 나누며 십리 길 걸어 닷새장에 다녀오기도 했다.
아버님은 아침 식사가 끝나면 집배원의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리시는 눈치였다. 붓을 잡기 전까지 신문과 라디오는 아버님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신문 기사를 다 읽으신 다음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신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시사에 밝으셨던 아버님은 가끔 나를 불러 앉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겨하셨다. 그런 아버님의 표정은 언제나 진지하셨다.
아버님께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붓과 먹물을 챙기셨다. 다 읽은 신문지에 이마를 묻고 운필運筆을 할 때에는 천둥 벼락이 쳐도 미동微動도 않고 집중하셨다. 부모님이 거처하는 방은 걸레질을 하는 수고도 허사였다. 풀 먹여서 다듬어 놓은 광목 이부자리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먹물로 얼룩지기 일쑤였다.
아버님께서는 어디서 상냥 문 써달라는 요청만 들어오면 부리나케 바깥나들이를 하셨다. 새로 짓는 집 마룻대에 상량문을 올리는 날이면 아버님의 글씨 솜씨가 근동에 자자했으나, 당신이 쓴 글씨에 끝내 만족하지 않으셨다. 어느 집에나 걸려있을 법한 가훈 한 점 남기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아버님께서는 1983년 4월. 그토록 애지중지 아끼셨던 필묵함筆墨函을 남겨두고 소천을 하셨다. 아버님의 유품遺品정리는 내가 도맡아 했다. 누렇게 바랜 고서와 서예 체본 집은 서생원들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겹으로 접혀 너덜거리는 책장을 넘기면 쾌쾌한 냄새가 코를 진동했다. 야적장에서 비를 맞고 있거나 한쪽 귀퉁이에 처박혀 있을 쓰레기나 다름없는 폐품들이었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활자들의 신음소리와 앉은뱅이 글자들이 꿈틀거렸다. 혹시나 해서 낡은 고서古書를 뒤적이고 있었는데, 33인 중에 한 분이었던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우뚝 솟았다. 한문이어서 내용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의 무게를 지니고 있을 것 같아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 다시 책을 뒤적이다가 강암 선생이 시아버지께 보낸 친필 편지를 여러 통을 발견한 순간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상태가 좋은 고서 몇 권과 필묵함을 벽장에 옮겨 놓고 나머지 물건들은 소각을 했다.
남편의 직장과 아들의 중학교 직학을 위해 도청소재지로 이사를 했는데, 1990년 대 초 당시 여성 의류업계에는 토스카나와 무스탕 제품이 대 유행을 하고 있었다. 부잣집 부인들이야 손쉽게 사입을 수 있었지만 나 같은 소 시민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재킷을 구입하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내심 가격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당시 무스탕 재킷 가격은 백만 원을 웃돌았다. 남편의 월급으로 무스탕 재킷을 구입하면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랄 터라 속만 태우고 있었다.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고서화 화랑이 눈에 띄었다. 순간 남편도 모르게 감춰두었던 아버님의 유품遺品이 떠올랐다. 다음 날 아버님의 유품 가방을 들고 조심스레 화랑의 문을 열었다. 주인은 젊은 여인의 가방 속에 무엇이 나올까 궁금한지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가방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펼쳐 보이자 주인의 눈빛이 금세 달라졌다. 물건들을 한참 동안 유심히 살펴보더니 집에 다른 물건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고서화에 대한 나의 안목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아버님의 체취가 고스란히 담긴 필묵함만은 보존을 하고 싶어 발설發說하지 않았다. 화랑에서 예상했던 액수보다 많은 돈을 가방에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드디어 무스탕 재킷의 모델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입안에서 단물이 터졌다.
아버님이 소천 하신 지 40년이 되었다. 나는 복지관에서 배우다 그만두었던 캘리 그래피 연습을 하느라 아버님의 필묵함을 열어 자색 벼루에 먹물을 부었다. 금세 필묵함속에서 아버님이 걸어 나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기억에는, 단순히 흘러가버린 시간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여 새로운 나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무스탕 재킷을 입고 앞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중년여인의 미소가 증명사진 속에서 환하다. 시간의 흔적과 은밀함을 간직한 무스탕 재킷은 유품으로 빗어낸 아버님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