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8주년 아침,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어제 저녁부터 미리 준비해 놓은 태극기를 달았다. 중요한 절기가 돌아오면 놓치지 않고 태극기를 달아야 하는데 혹간 깜박하는 경우가 있어서 태극기를 달지 못하게 되면 꼭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괜히 미안해지곤 한다. 해마다 기념일이나 국경일이 되면 주변의 아파트를 살펴보게 되는데 90% 정도는 태극기를 달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20층 아파트에 태극기를 단 집을 세어보면 한 줄에 한두 집뿐, 이번 광복절 날에는 티브이 뉴스에 아파트 한 줄에 한 집 밖에 없다는 뉴스를 보면서 많은 아쉬움과 염려를 하면서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와 학교에서도 자기 자식 밖에 모르는 현실적 문제로 사회문제가 되는 것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근자에 한 교육부 중견 직원이 자기의 아이는 왕의 DNA를 타고 났으니 선생님이 말도 공손하게 하고 특별히 잘 보살펴 달라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슈화 되었고 너무나 어이없는 교육의 현장에 깊은 우려를 하게 된다.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옛 선인들의 이야기가 무색하게 되어서 참으로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도 교육 현장에서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냈는데 내가 지금 그런 현실에 맞닥뜨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자문을 해보기도 하고 지금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나는 1996년에 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여 외솔 최현배 선생님에게 ‘우리말본’이라는 대 저서를 교재로 일 년간 수업을 들었다. 외솔 선생님은 키도 작고 체격도 아담한 편에 외모도 그냥 그랬으며 말도 연세가 있어서 그런지 조금 어눌하게 느껴졌고 차림새도 늘 평범한 일상복 차림에 언제나 책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고집 센 옛 선비 같았다. 일찍이 국문학자 주시경 선생님이 항상 책을 보자기에 싸서 다니므로 별명이 주보퉁이라고 했는데 우리들은 외솔 선생도 주시경 선생님 같이 책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녀서 최보퉁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를 때면 시험범위가 없이 그냥 배운 부분이 다 시험범위로 시험공부를 하려고 하니 너무 범위가 넓어서 막연한 중에 중요 내용을 골라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중간고사 시험 치는 날 아침에 교실에 가서 혹시나 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 즉 “씨갈의 분류”에 대하여 연필로 책상에 적어놓고 시간이 되어서 시험지를 받은 후 감독교수가 칠판에 시험 문제를 적는데 바로 “씨갈을 논하라” 라는 것을 보고는 얼씨구나 하고 내심 좋아 하면서 책상을 살펴보니 햇빛에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볼 욕심에 손을 가리며 고개를 기우리며 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내 시험지를 집기에 고개를 들고 보니 바로 감독 교수였습니다. 컨닝을 하기도 전에 딱 걸리고 말았다, 감독 교수가 내 시험지를 들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험지를 다시 주지도 않고 휑 가버리는 것이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어서 소지품을 챙겨서 나오는데 제일 뒤쪽에 보니 남은 시험지 하나가 댕그렁 책상 위에 놓여 있기에 아이쿠나 잘 됐다 하고 그 자리에 않아서 시험을 보고 나와서 생각하니 교수님이 너무 냉정하고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지품은 친구에게 맡겨 놓고 감독 교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 나오는 것은 보고는 따라가서 “조금 전에 시험지를 뺏겨서 시험을 못 본 학생입니다. 제가 4학년인데(거짓말) 학점이 모자라서 졸업이 어렵게 됐습니다며 좀 봐줄 수도 있는데 교수님 너무 하셨습니다” 하며 따지듯 하였더니 교수실 문 앞쯤에 와서는 갑자기 돌아서면서 내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저는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얼른 피하면서 뒷걸음으로 물러나니 교수가 나를 잡으려고 확 달려오기에 나도 잡히지 않으려고 순간적으로 돌아서서 뛰었더니 교수가 나를 잡으려고 따라 오는 것이었다. 복식 건물로, 양쪽으로 복도가 있고 끝에는 출입구가 있는데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시간이라 교문 쪽으로 가는 복도는 학생들로 꽉 차서 불리할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없는 반대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는데 교수도 막 쫓아오는 것이었다. 뛰면서도 잡히면 안 되겠구나. 만약에 잡히면 정학 처분이라도 받겠지 하는 생각에 힘을 다해 한참을 달리다 보니 저만큼 뒤에서 따라오던 교수가 포기를 하고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친구들을 만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떠들며 시험을 마친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렇게 2년이 흘러서 진짜 4학년이 되어 교직 과목 이수중에 마지막 과정으로 현장 실습을 하게 되어 동아중학교로 가니 같은 우리 학교에서 6명이 실습을 나와서 교무실 옆 한 쪽 구석에 칸막이를 하고 원탁 의자 하나를 중심으로 의자 몇 개를 놓고 교생들은 거기서 쉬었다가 수업이 시작되면 지도 교사를 따라가서 수업 참관을 하고 쉬는 시간에는 좁은 공간에 6명이 오글오글 모여서 잡담도 하고 다음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 갑자지 모르는 분이 들어오기에 무심코 쳐다보는 순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바로 2년 전에 우리말본 시험에 감독 교수로 나와는 쫓고 쫓기며 달리기를 한 바로 그 교수였던 것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옛 말처럼 딱 마주쳤으니 도망을 갈 수도 없고 바로 쳐다볼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교생들 위로 격려 차 들렸다며 모교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앞날을 위해서 열심히 하라며 일장 훈시를 하는 동안 나는 그저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가 돌아가고 나서 알아보니 농과대학 교수신데 마침 교생 중에 농과 대학생이 한 사람 있어서 배정을 받아서 오셨고 지금은 50대로 젊을 때 복싱 선수였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하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 때 잡혔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자 깊은 한숨이 절로 터졌다. 잠시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어색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진땀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일화와 외솔 선생님의 평생의 역작이며 우리나라 국문법의 초석을 놓은 책으로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우리말본‘과 ’한글갈‘이라는 책은 역사적인 가치가 충분한 사료라고 생각하여 조선일보의 사업으로 독자가 간직한 보물을 소개하는데 마침 내가 소장하고 있으며 책과 얽힌 나름대로 재미난 일화를 소개하면서 원고와 사진을 이멜일로 접수하였더니 기분 좋게 선정이 되어 연락이 와서 전화로 몇 가지 묻고 대답을 하였는데 2023년 8월15일 78주년 광복절 날 조간에 내 보물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어서 보는 순간 너무 반갑고 스스로 대견스러워서 기사를 읽기 전에 안식구에게 자랑부터 하였다. 여보! 이것 봐. 내가 제출한 나의 보물이라는 내용이 신문에 실렸어. 하고 찬찬히 기사를 읽어보니 내가 제출한 원고 중에 개인적인 일화는 빼고 행사를 주관하는 문화부에서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나 우리말본이라는 책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게 그리고 중요한 내용이 많이 첨가되어 있어서 나에게도 보탬이 되었고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문에 내 기사가 실렸다는 것이 많이 자랑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당장 몇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고 컴퓨터에 사진을 보관하였으며 안식구는 기사를 스크랩을 하여 파일에 넣어 두었다.
보물이란 귀하고 소중한 물건으로 역사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하고 오래 간직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최현배 선생님의 저서인 우리말본은 그런 의미를 넉넉하게 충족시키고도 남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최현배 선생님은 한글 전용을 몸소 실현한 분으로 한 예를 들어보면 梨花女子大學校를 순 ‘우리말로 배꽃 큰 계집 아리 배움 집’으로 또 飛行機를‘날틀’이라고 바꿔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고 시험 문제에 출제되었던 ‘씨갈’이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품사를 말하는 것으로 용어를 모두 순 우리말로 바꿔서 썼던 것이다. 예를 들면 명사는 이름씨, 대명사는 대이름씨, 동사는 움직씨, 형용사는 그림씨, 부사는 꾸밈씨, 관형사는 매김씨, 수사는 셈씨, 감탄사는 느낌씨, 지정사는 잡음씨, 조사는 토씨라고 하여 그 용법을 설명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국문법을 ‘우리말본’이라고 한 것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글을 세로로 썼는데 최현배 선생님의 한글 전용과 더불어 가로 쓰기를 하므로 쓰기의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고 하겠다.
이렇게 훌륭한 교수님께 배울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평생 잊을 수가 없고 나의 소중한 배움의 가치와 자부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재미난 일화가 있으니 더욱 오래 나의 보물로 남을 것이다.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로 은퇴 후에는 세상 말로 백수로 지내게 되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하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지금은 차가 없으니 여행을 쉽게 할 수도 없고 주로 등산을 하면서 낮에는 책도 읽고 세 번째 성경필사를 하면서 소일을 하고 조금씩 글도 써보지만 젊을 때만큼 좋은 시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낙서 수준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그래도 은퇴한 지 13년을 넘기면서 자서전과 시집, 그리고 몇 사람이 함께 공동 시집도 발간하였고 이번에 광복절 아침 신문에 나의 보물 기사가 실린 것에 보람을 느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