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환벽당 김윤제 매화
봄은 꽃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싶다. 북풍한설이 바뀌어, 코끝을 스치는 남녘에서 오는 바람이 상큼하다 못해 움츠렸던 몸과 맘이 훨훨 날 듯 가볍다.
이내 겨우내 메마른 가지에 개미 눈이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어느새 왔는지, 눈을 비비고 다시 비벼도 나무는 연두나 연분홍 옷을 입는다. 그 자연의 변환은 누구도 막지 못하고 더하여 잡지도 못한다. 그저 그 순환 속에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살아있음의 은혜에 삼가 허리를 굽힐 일이다.
봄에 꽃을 보러 간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움이다. 온 산천에 찾아온 꽃을 보는 게 봄인데 굳이 어디로 보러 간단 말인가? 내 옆의 행복을 못 보고 산 너머로 행복을 보러 가는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보고 있는 봄의 꽃은 맞이함이 맞는 말이다.
무등산 품 안을 나온 창계천이 충효동에 이르러 낮은 언덕 아래 깊은 소를 만들었다. 이곳 언덕에 무등은 물론 툭 트인 산하를 눈 아래 둔 정자가 환벽당(環碧堂)이다. 환벽은 소나무 대나무 등 늘푸른나무가 빙 둘러 에워싼 고리이다. 그러니까 환벽당은 그 푸른 고리에 얹힌 빛나는 보석이니 아름다움을 한층 멋지게 감싼 셈이다.
이 늘푸른 고리라는 김윤제(1501~1572)의 환벽당 당호는 신잠이 지었다. 본관이 광산인 김윤제는 충효리에서 태어났다. 1528년 진사, 1532년 문과에 급제 승문교리 겸 춘추관이 되었다. 홍문관교리,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은 그의 종손이고 정철, 김성원 등은 제자이다.
이웃하여 김성원의 그림자도 쉰다는 식영정의 당호는 임억령이 지었다. 김성원(1525~1597)은 1551년 향시에 일등,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0년 침랑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에 동복현감으로 군량과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조카 김덕령이 무고로 옥사하자 은둔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던 중 화순 동복 성모산성에서 왜병을 만나 부인과 함께 온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 죽었다. 이에 산 이름을 모호산(母護山)으로 불렀으니 지금의 모후산이다.
김윤제와 김성원은 우거진 배롱꽃 붉은 그림자에 자미탄이라고도 했던 환벽당과 식영정 사이의 창계천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오가며 학문을 토론하고 제자에게 가르쳤다.
여기 환벽당 아래 창계천의 조대는 찾아온 손님들과 낚시를 하던 곳이다. 또 용소는 창계천의 깊은 소다. 어느 날 낮잠을 자던 김윤제가 그 깊은 소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때맞춰 아버지를 따라 창평을 들려 순천으로 가던 열여섯 살 정철이 그곳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소 위 언덕에 아름드리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쌍송이라 했는데, 그 소나무 그늘에서 정철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김윤제는 깜짝 놀랐다. 정철의 영특함에 매료된 김윤제는 제자로 삼아 붙든 뒤 이듬해에 외손녀와 짝을 맺어 주었다.
이 환벽당이 6·25에 경찰서로 쓰이며 대나무를 모두 베어 이제 옛 정취는 눈 안의 그림이다. 여기 환벽당에 봄이면 산수유 한 그루, 2백여 살 매화 한 그루가 새 봄맞이를 한다.
옛날 중국 산동에 한 젊은이가 약혼한 지 사흘 만에 약혼녀를 잃고 약혼녀의 무덤을 지키며 살았다. 젊은이가 무덤에 흘린 눈물이 떨어진 곳에서 나무가 돋아났으니 그게 매화이고, 홀로 늙어 죽은 젊은이는 새가 되었으니 휘파람새이다. 혹여 새봄에 환벽당에 들려 이들 산수유 매화에 봄맞이를 하거든 휘파람새 소리도 들리는지 귀 기울여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