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보호위원회"를 열것을 요청했다. 한 달 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난 연휴. 다가올 한 주도 견뎌내야 한다. 이런 시기엔 무감해져야 한다.
동물적 충동과 공격성의 캄캄한 벽... 소통불능의 벽 앞에서 초라하게 모욕 당하는 일에 너덜너덜해진 나. 힐링이 필요했다. 혼자 고요하게 인간적 세계로 침잠할 수 있는 곳. 청운 문학도서관에서 찰스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을 읽으면서 황량한 현실을 조망한다. ... 의미 같은 거 묻지 않고 돌파해내야 할 시간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의미에 깔려버릴 것 같은 예감에 가득한 경험... 나는 그 속을 돌파하고 있는 중이다.
'심연'같은 게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대상이 있다. 그런 영혼이 있다. 그런 대상 앞에서 의미 따위를 묻는 일은 나약해지는 첩경이다.
의미가 지겨울 때가 있다. 의미가 그리울 때도 있다.
표면에 머무르기. 그러자 지금은 그래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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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에서 구세주(=예수)가 세상에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냈던 계기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통해서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멀리서 별을 보고 예수를 찾아온 일이 곧 신의 출현을 상징하는 사건인 것이다. 신의 출현, 현현(顯現)을 의미하는 '공현(公現)'을 영어로는 'epiphany' 라고 쓴단다. 그리고 이들 동방박사가 예수를 방문했던 1월 6일을 공현축일로 기념하는데 에피파니는 공현축일을 의미하기도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단어가 문학에서는 그 뜻이 확장되어 '평범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진실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 혹은 그런 장면이나 작품'을 뜻한다. 이렇게 에피파니의 뜻을 확장시킨 이는 [율리시즈(Ulysses)],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등으로 유명한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다. 그는 어떤 의미나 가치가 고조되거나 마술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인 듯한 갑작스럽고 극적인 순간에 관심을 가졌고, 그런 순간을 '신의 출현'으로까지 비유했던 것이다. 위의 두 작품에서도 에피파니는 중요한 극적 장치로 활용되며, 조이스는 후에 71편에 이르는 에피파니(작품)를 창작하기도 했다. (제임스 조이스와 에피파니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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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명 경우 모더니스트들은 존재의 에피파니를 거부함으로써 자연주의의 반(反)에피파니적 흐름과 손을 잡는 것처럼 보인다.
... 로런스는 '심연'에, 또 사물들에게 강제로 의미를 부과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으며, <이론의 지팡이>에 나오는 한 구절에서 강제로 의미를 부여하는 이 경험의 무게로부터의 해방을 "감정의 축축한 벽과 육중한 사슬로 둘러싸여 있고, 감정과 혐오스런 분위기로 가득한 끔찍한 마법에 걸린 성"에서 탈출하는 것에 비유했다.
집도 차도 없다. 아무런 걱정 없는 무사태평, 영원한 무관심만 있을 뿐.
어쩌면 근심거리들 사이에 놓인 거대한 휴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직 이 휴지기 속에서만 우리는 - 먼지만 나오는 낡은 껍질처럼 - 의미의 무의미함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가 의미의 무의미함 그리고 다른 차원을 발견하는 것은 오직 이런 휴지기 속에서다.
시간성도 없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많은 실재... 무엇도 의미만큼 무의미하지는 않다.
- 로런스 <캥거루> 중에서
사물의 날카로운 제시, 명확한 기술... 무엇보다도 경계들을 유동적으로 만들고, 사물들이 서로에게 흘러들어가도록 허용하는 너절한 사고방식과 지각 형태를 피해야만 한다. 파운드에게 만약 문학이 사회에서 어떤 기능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이 명료함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부패해버리면... 바로 그러한 매체 자체, 그러한 일의 본질 자체, 곧 언어를 사물에 적용하는 일이 망가지면, 다시 말해 시시하고 부정확하거나 과장되고 오만해지면 사회적, 개인적 사유와 질서의 장치 전체가 엉망이 된다."
이것은 참된 경험을 되찾기 위해 사물들의 표면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모더니즘의 주제에는 아주 흔한 일이지만, 이것 또한 사물들의 표현에 머무를 수 있을만큼 충분히 깊었던 그리스인들에 대한 유명한 언급이 잘 보여주었듯이 니체에 의해 이미 예견되었던 바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