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르완다-
탄자니아에서 르완다로 오는 국경을 넘으면서 비닐봉지에 먹거리 약간을 들고 오는 우리를 국경경찰이 세웠다.
“르완다는 비닐봉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They don't like plastic bag)"
단순한 알림 수준이 아니라서 바로 그 자리에서 비닐봉지를 벗겨, 비닐봉지는 탄자니아쪽 쓰레기통에 넣고 와야했다. 참 특별한 인상이다.
그래서인지 르완다의 국경을 넘으면서 우리는 탄자니아와의 다른점을 찾기위해 창밖을 기웃거렸다.
첫 번째 다른 점은 집이었다.
탄자니아 사람들처럼 이들도 흙벽돌로 만든 흙집을 짓고 있었는데 탄자니아와 달리 집의 모양새가 꽤 튼튼해 보였고, 나름대로 디자인을 고려한 듯 문양을 새겨넣은 집도 있었고, 예쁜 정원도 보였다. 작은 나라지만 르완다가 다른 아프리카와 달리 많이 모던하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두 번째로 다른 점은 집마다 현관문이 작지만 야무지게 튼튼해보였고, 하나같이 잘 닫혀져 있었다. 탄자니아의 집들이 하나같이 열려있는 집들이라면 현대화 되어가고 있다는 르완다의 집들은 대체로 닫혀 있었다. 아니, 열려있는 집들이 아예 없었다.
세 번째는 탄자니아 사람들이 집 앞에 나와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비해 르완다사람들은 집 앞에 앉아있지 않았다. 대부분 용무가 있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른 점은 탄자니아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20리터 말통 크기의 플라스틱통에 물을 담아 긷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도가 없었던 어릴 적, 동네에 배수차가 오면 물지게를 메고 달려가 물을 받고 낑낑대며 길어왔던 때가 생각이 났다. 루완다도 아마 지형적인 문제 때문인지 물 수급이 넉넉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깨끗했다.
메인 아스팔트로드에 흙길로 이어진 골목길들, 커다란 가로수들, 아름다운 새소리들, 칼라플한 사람들의 옷차림새들, 그리고 간혹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는 탄자니아 사람들처럼 이 사람들도 친절해 보였다. 단지, 루완다 사람들이 탄자니아 사람들보다 조금 더 까매보였달까-
르완다의 수도인 키갈리에 도착한 시간이 8시 30분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고, 모던하다는데도 도시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전기사정 역시 좋지 않은가 보다. 2004년 론리 아프리카편에는 르완다가 차지하는 페이지가 몇쪽 안 되기도 하고 키갈리를 뺀 다른 도시의 지도도 없었고, 그나마 있는 키갈리의 지도역시 대략적인 것이라 승합차에 내려서 우리가 내린 곳이 어딘지 물어봐도 지도에는 없다고 했다.
‘그럼...이곳이 키갈리의 다운타운이 아닌가?’
여하튼 내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운 좋으면 로컬들 사이에서 가장 싸게 머물 수 있다는 게스트하우스 주소를 보여주며 택시모터(오토바이로 택시기사 역할들을 하는 사람들)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금시초문이란 기색이었고, 이밤에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우리를 태우고 왔던 승합차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다시 타라고 했다. 그러더니 우리를 데려다 준 곳은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그러나, 이미 도미토리는 만원(full). 난감해하는 우리를 보고 그 기사아저씨는 주변 로컬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묻더니 그보다 더 아래쪽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다고 그리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어두웠지만 남편은 걸어가보자고 했고, 우리는 짐을 내렸다. 그리고 추가요금을 얼마를 내야하나 하고 있는데 그 기사아저씨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고 바로 차에 올라탔다.
‘엥? 진짜네-’
케냐 공항에서 르완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귀국중이라는 젊은 친구들을 만났었는데 르완다사람들을 무지 칭찬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케냐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돈을 요구하며 도와주고, 탄자니아 사람들은 친절한척 도와주고, 뒤에 돈을 요구하는데 비해 르완다 사람들은 순수한 그대로라고 했었다. 지금까지 여행한 많은 나라에서 만난 기사 아저씨들중에 가장 수준급이셨던 분이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자혜선배님 형부인 최남희 선생님께 전화도 드리고, 메일도 확인해야 해서 인터넷 카페를 찾았는데 거의 문이 닫혀있었다.
시계를 보니 6시 50분-
어렵게 키니아르완다와 프랑스어를 섞어 사용하는 로컬인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 카페를 찾기는 했는데 문이 닫혀 있는 바람에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려야 했다. 그때, 양복입은 한 신사가 오더니 무슨 문제가 있는지 친절하게 물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3층에 있는 사무실로 데려가 책상위에 있는 랩탑을 내밀어 주셨다. 메일 박스에는 고아원의 호르미다스의 언제든 환영한다는 메시지와 최남희 선생님의 연락바란다는 메시지, 파스칼의 인사메일등이 와 있었다.
20분정도 쓰고, 최남희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내밀며 이 전화번호로 그냥 누르면 되냐고 물었는데 그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로 전화를 걸어보셨다. 그러더니 그 전화번호는 078이라는 지역번호가 빠진 것이라고 알려주셨고, 지금은 그쪽에서 전화를 받을수 없으니 이따가 다시 한 번 해보라고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그리고 혹시 어려움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본인의 메일과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이 사람이 우리가 르완다에서 만난 두 번째 친절한 시민이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르완다에서 유일하게 큰 마켓이라는 케냐에서 봤던 ‘나꾸마트(Nakumatt)"에 들러 아침을 사려고 하는데 그 가격에 기겁을 했다. 식빵 큰거 하나에 1500프랑, 500ml우유가 700프랑...몇개의 가격을 확인해 보면서 이곳이 아프리카인지, 유럽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더군다나 왠만한 공산품들은 유럽수준이어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거의 프랑스제품(made in france)였다. 케냐의 나꾸마트에 몰려있었던 로컬들과 달리 이곳은 우리처럼 아침장을 보러온 한가로운 서양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아하, 이곳은 르완다 거주 외국인들을 위한 매장이구나’
그리고 환전소를 갔다. 오늘 환률은 1달러에 570프랑. 국경에서의 560보다 10프랑을 더 주는 셈이었다. 그래서 우선 사용해야 하는 500달러를 환전하는데 이사람들은 2003년 이후의 달러만 받는다고 했다. 내가 내민 달러중 한 장이 2001년도 발행 달러였는데 그 돈을 환전하고 싶으면 545프랑에 해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위조달러가 많다고 해도 육안으로 확인할수 있는데 이거 너무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400달러만 환전하고, 혹시나 최선생님 전화번호 확인을 위해 부탁을 했는데 그 친구 중 한명이 기꺼이 번호를 확인해주면서 통화버튼을 눌러주었다.
“여보세요?”
반가운 최선생님이셨다. 자혜선배를 통해 메일만 주고 받았었는데 최선생님의 목소리는 내가 상상했던 목소리보다 훨씬 다정다감하셨다. 간단히 통화한 후 통화비를 지불하려고 하니까 전화를 빌려주었던 그 여자는 난색을 하며 무슨 돈이냐고, 이 전화는 자기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니, 진짜로 사람들이 친절하네...’
그리고 이어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비룽게 버스터미널’이 어딘지 알려달라는 부탁에 한 청년이 자기를 따라 오라고 앞장을 섰다. 멀지는 않지만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역시 그의 말처럼 간판도 없었고, 작은 골목 안쪽에 터미널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 청년이 아니었으면 한참 또 고생 할 뻔했다. 너무 고맙다고 인사하며 커피값이라도 건네려 했으나 이 청년 역시 르완다 사람이었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더니 달음박질치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르완다는 프랑스령으로 오랜 식민지 생활을 했고, 지금도 쉽게 프랑스인들을 키갈리에서 볼 수 있다. 비위생적이라고 모든 음식들의 노점판매를 금지 한 것도, 친환경 운운하며 비닐 사용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마 프랑스 사람들이 만든 정책 같아 보였다. 키갈리의 매연속을 누비는 오래 된 차량들이나 허름한 사람들의 옷차림은 다른 아프리카와 비슷했는데 물가가 다른 아프리카에 비해 아주 비쌌으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친절하다.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아니다. 그래서 르완다가 흥미롭기 시작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여유롭게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