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프케 여행2 - 실리프케 성채에 오른후 5일장을 구경하며 굑수강 다리에 가다!
5월 24일 터키 남부 지중해 에 위치한 휴양도시 크즈칼레시 Kizkalesi 에서 돌무쉬 버스
를 타고 왼쪽으로 지중해 바다를 끼고 40분을 달려 셀레우코스 1세 에 의해 굑수강
연변에 건설된 9개의 셀레우키아 중 유일하게 현존 하는 실리프케 Slifke 에 도착합니다.
호텔에 체크인후 로마 신전 과 아타튀르크의 집 을 보고는 산 정상에 쌓은 실리프케성
으로 가려고 물으니.... 1번 버스와 3번 버스는 운전 기사가 가지 않는다기에 그냥
보내고 2번 버스 가 도착하기에 다시 물으니 버스 기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타라고 합니다.
눈치로 보건대 아마도 이 버스는 현장 까지는 못가고 근처를 지나가니
내려서 걸어가야 하나 보다고 짐작하는데 로터리를 지나 버스가
언덕길을 오르니.... 저만치 앞에 높이 솟은 성채 가 그 위용을 보여줍니다.
생각했던 대로 버스 기사가 내리라기에 요금 1.5 리라씩을 내고는 큰 도로에 내리니
오른쪽으로 작은 언덕길 이 있어 걸어 올라가는데..... 도중에
오토바이 탄 사람에게 물으니 좌측 언덕 좁은길 말고 그냥 계속 올라가라고 하네요?
조금 더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골목길이 보이길래 이 길로 가면 저 위에 보이는
성채로 이르는 지름길 이라고 보고 들어갈까 망설이는데....
좀 전의 오토바이가 도로 달려 내려와서는 여기가 아니고 좀 더 올라가야 한답니다.
10분 정도 걸으니 야트막한 언덕 으로 버스가 서는지 표지판 도 보이는데 여기서
다시 좌회전을 하여야 할 것 같은데.... 이 주변의 단독 주택들은
나무와 꽃 을 집 마당에 많이 심은 탓에 참 볼만한게 여유로움도 함께 느낍니다.
언덕에서 왼쪽 좁은 골목길 을 따라 올라 주택가가 끝나는 지점 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비포장 도로가 이어지는데 인적이 없는
길이지만 높은 산에 오를때는 이처럼 갈지자로 비스듬히 길을내는 법이지요?
다시 10분을 더 올랐는데도 성채 는 다시 얼마나 더 걸어 올라야할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마눌은 힘이 드는지 쉬어가자고 말합니다.
실리프케성 Slifke Kalesi 서쪽 성채는 중세에 건설된 것으로 원래는
2중으로 된 성벽 과 23개의 탑 이 있었으나 현재는
외곽 성벽과 저장고, 저수지, 궁전등 극히 일부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 성채에는 저수지 로 테키르 암바르 Tekir Ambari 라고 해서 바위를
파서 만든 물 저장고 가 있으니 세로 46m, 가로 23m,
깊이 11m 인데... 성채에서 나선형 돌게단 으로 내려갈수 있다고 하네요!
잠시 쉬면서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여긴 제법 높은 언덕 으로 저 아래로 계곡이
보이고 굑수강 이 휘감아 돌아가는데.... 시가지 가 주변에 펼쳐진 모습을 봅니다.
저 강에서 제3차 십자군 에 나선 신성로마제국(독일) 프리드리히 황제 가 무려 10만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르마라해를 건너 아나톨리아를 남진해
룸 셀주크의 수도 콘야 를 짓밟고는 보무도 당당히 여기 굑수강 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강을 건너다가 말이 강 바닥에 미끄러운 돌을 밟아 넘어지니 황제도 떨어져 물에
빠졌는데 무거운 갑옷 을 입었는지라 평지에서도 일어서기 어려운데
물속 에서야...... 해서 "익사하니 독일 3차 십자군은 해산" 되고 말았다던가요?
왕자가 소수의 병사만 거느리고 팔레스타인 으로 가고 나머지는 독일로 되돌아 가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세습제가 아니고 유력 제후가 선출 하는지라 누가 다음
황제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쟁 군비와 보급 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해산 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조선에서는 임금님이 말을 타고 물살이 센 강 을
건넌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하는 일" 이지요?
아니 말은 커녕 임금 은 나룻배를 타지도 않습니다. 혹시라도 나룻배가 뒤집히면
죽을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한 짓을 할 간 큰 임금 이 있을리 없지요?
조선말까지 한강등 전국 큰 강 에 단 한개의 영구적인 다리는 건설하지 못했으니 나룻배 로
강을 건너야 하는지라.... 조선 임금님들은 한분만 빼고는 배로 강을 건넌 왕 이 없습니다.
세종, 세조, 숙종에 이어 정조대왕은 아버지 세도사자의 능에 가려고 한강 을 건너면서
위험한 나룻배를 탈수 없으니 강 양쪽에 말뚝을 박고 80척의 배를 모아 판자를 대어
못질해서는 그위에 잔디와 흙을 깔아 임시 다리를 만든 다음 견마잡이 말을타고 건넜지요?
엣날 조선의 지체 높은 분들은 말을 타기는 하는데 산과 들을 달리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쉬운 평지 만 가는데, 그것도 말의 바깥쪽 눈은 가리고
견마잡이가 말 고삐를 단단히 잡고 걸어가는 말의 등에 올라탔을 뿐 입니다.
조선시대 등산유람기 를 읽어보면 양반들은 산의 8부 능선까지도 4명의 종이 메는 뚜껑없는
평교 가마 를 타는데 경사가 심한 바위투성이 산을 종들이 죽으라고 메고 올라
도저히 더 오를수 없는 마지막 꼭대기는 종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올렸던 것 이지요?
물론 만일의 경우 를 대비해 배다리 하류에 12척의 배 를 배치해 왕의 속도에
맞추어 함께 건넜는데 순행을 다녀오면 저 배들은 해체해 원래 주인 에게
돌려 주었으니... 나룻배 로 건너는데 비하면 엄청난 비용 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꼭 한분 나룻배로 한강 보다는 강폭이 좀 좁기는 하지만 임진강을
건넌 분 이 있으니.... 바로 선조 임금님 인데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잠을 설치며 바로 피란 준비 를 서두릅니다.
왜군이 서울에 나타나기 사흘전인 4월 30일 공포를 이기지 못한 임금 은 캄캄한
야밤중인 새벽 2시에 쏟아지는 장대비 를 맞으면서 궁문을 빠져나가는데
가마군들이 달아나니... 왕과 왕비를 제외한 후궁과 왕자들도 모두 걸어야 했지요.
식사도 못하고 쉬지않고 걸어 임진강 에 도착하니 다시 캄캄한 밤중 이라 지친 신하들이
내일 날이 밝으면 건너자고 간청해도 일주일 후에나 임진강에 도착하는 왜군 임에도
공포에 질린 임금 은 그 캄캄한 밤중에 감히 나룻배를 타는 대단한 용기(?) 를 보입니다!
말을 타고 강을 건너다 익사한 제3차 십자군 프리드리히 황제 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서
벗어나 다시 산을 오를려니 이미 마눌은 맥이 풀린지라 다시 저 아래 강과 시가지 를
조망하고는 내려와 얕은 고개마루에 버스정류소 가 있기로 앉아서 잠시 쉬어가기로 합니다.
앉은지 한 5분쯤 되었을까요? 다시 일어나서는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는
중에... 마침 버스가 언덕을 넘어오는데 이런??? 3번 버스 이네요!
버스에 올라타니 언덕길을 내려가 대로변에 이르러 좌회전을 해서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그럼 좀전에 시내에서 3번 버스 기사 는
내 말을 발음이 신통치 못했던 탓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버스 기사에게 굑수강에 걸린 석교 다리 인 “굑수 타쉬큐프류”에 간다니까 도중에
로터리에 세워주며 오른쪽을 가리키는데 느낌상 여긴 아니지 싶은데도 아직
시내 지리 방향감각 이 완전치 않는지라 망설이니 승객도 맞다기에 그만 내립니다.
내려서 보니 여긴 좀 전에 우리가 2번 버스를 타고 지났던 로터리 같은데 확신은 들지
않기로 주위를 둘러보고 걸으니 아무래도 아닌지라..... 또 의사 소통 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지나가는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우리가 향하던 반대방향 인..... 좀 전에 우리가 내렸던
그 3번 버스가 가던 큰 도로 를 따라 걷는데 20분을 훨씬 넘게 걸을 줄이야?
도중에 학교도 지나고 관공서도 지나 한참을 걸어 10여분 이상을 걸으니 강변
에 도착하기로 여긴가 했더니 좌회전을 해서는 강변 길 을 걷는데...
마침 5일장 이 섰는지 천막 수백개 가 양쪽으로 이어지는 아주 혼잡한 길 입니다.
이쯤에서 “굑수 타쉬큐프류” Goksu Tas Kupru 위치만 알려주고 그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은데 계속 앞장을 서시니 좀 부담 스럽기도 한데..... 하지만 10분 이상을
수백개 천막을 지나니 드디어 다리 가 보이는데 그러고도 다리 앞 까지 걸으시기에....
걱정이 되는게 무슨 수고료나 아님 가게 쇼핑 등 다른 요구 가 있을거라고
생각해 가슴이 조마조마 했는데.... 이런? 쿨하게 돌아 서시네요!!!
그간 여행을 다니면서 세상에는 일본인과 러시아 할머니 들이 제일 친절 하다고
생각했는데..... 터키인들도 그에 못지 않다는걸 오늘 확실하게 체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