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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25일 수요일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주님 성탄 대축일에 모든 사제는 세 대의 미사를 거행하거나 공동 집전할 수 있다. 다만 제때에 그 미사를 드려야 한다.>
주님 성탄 대축일, 참으로 기쁜 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늘의 군대와 함께 기뻐하며 노래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어둠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빛을 보게 된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마리아가 해산 날이 되어 아들을 낳자,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 아기는 구원자라 전하며 수많은 하늘의 군대와 함께 하느님께 찬미드린다(복음).
제1독서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9,1-6
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4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2,11-14
사랑하는 그대여,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으로 당신 자리로 삼으신 곳은 ‘구유’였습니다. 구유는 ‘여물통’입니다. 더럽고 냄새납니다. 볼품없고 너무나 하찮은 곳입니다. 결코 메시아가 누울 자리가 아니지만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가장 거룩한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구유 안에 담겨 있는 이 신비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구유’와 같은 장소가 있습니다. 죄로 더러워지고 얼룩져 보여 주기 싫은 곳, 바로 그곳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거처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더럽던 그곳이 가장 거룩한 곳,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빛이 되어 주셨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티토 2,14).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이토록 외진 시골에서, 저희끼리만 지내면, 세상 울적한 분위기일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가족 같은 동네 주민들, 먼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피정객들과 함께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어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 그 사이로 분명히 탄생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이런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오늘 이 대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엄숙한 순간이어서,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유능한 의료진이나, 그도 아니라면 탈 없는 출산에 도움을 줄 분들의 보살핌 아래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 여건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출산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요셉 성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소와 말들이 이게 뭐지 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지극일 호의적이지 않은 출산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너무나 독특하고 이해되지 않는 육화강생의 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봅니다.
제가 자주 타고 다니는 모닝 승용차가 27만 킬로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달리고 있는데, 꼭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도 생활 40년째로 폐차장 가기 직전 중고차인데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아직 잘 달리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우울하고 서글프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 시름시름 아프고, 고장 나고, 매일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네 삶 한가운데도 탄생하시고 길이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연세 들었다고 우울해 할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큰 고통 속에 계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에 허덕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 없어 답답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들의 힘겨운 일상 그 한 가운데 매일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과 쓰라린 상처 그 사이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면 즉시 탄생하신 구세주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탄생하신 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름 임마누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이란 의미입니다.
‘선한 의지’가 도대체 무엇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탄을 축하 드립니다!
오늘 성야 미사에서는 목동들이 천사들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을 듣습니다. 여기에는 그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뵐 자격이 있음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 안에는 무슨 일을 해서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가톨릭의 전통적 해석,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곧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직역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의미는 의역이고 현대 신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데에는 “선한 의지”란 단어의 뜻의 중요성을 번역하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의지’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의지와 욕구를 발휘합니다. 그중에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다는 뜻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통해서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는 철사 어미보다는 젖이 나오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인형 어미를 어미로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이 선한 의지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고 우울감입니다. 태어나면 아기들은 다 선한 의지를 가집니다. 젖을 먹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엄마를 찾으려는 의지입니다. 엄마를 찾지 못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서 엄마보다는 엄마 젖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선한 의지가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원숭이 새끼들을 일부러 어미와 격리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며 발견한 것은 새끼 원숭이들은 먹이와 편한 시설이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줄 어미를 찾고 무리를 찾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덕분으로 할로우 박사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치유하는 길은 사랑받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기처럼 사랑만을 요구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첫 번째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이혼하고 맙니다. 할로우 박사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고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사랑을 만났습니다. 이때 ‘구원자 원숭이’의 개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격리 6개월이 안 된 원숭이들은 정기적으로 다른 무리의 원숭이들과 사귀다 보면 우울증이 사라진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부인도 두 아이를 낳고는 암으로 사망합니다. 인간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전기충격으로 우울증을 극복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첫 번째 아내와 재혼했지만, 상태는 계속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실험실의 원숭이들을 학대했다는 비난 속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알았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신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음을. 그러나 ‘착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삐딱하게만 보는 주인공은 한 스승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나를 창조한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아기들은 착한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은 착한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면 정체성이 생긴 것입니다. 엄마를 만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는 나를 창조하여 나에게 생명과 같은 젖을 주는 존재입니다. 이 착한 뜻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메시아의 표징이 구유에 뉜 아기였던 것입니다. 밥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면 자신들은 자녀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을 찾기를 원하는 이들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누구를 구원하실까요? 아기처럼 엄마를 찾지 않으면 죽는 게 낫다는 착한 뜻을 가진 이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어떤 이들은 돈으로 가난에서 구원되려고 하고 먹는 것으로 배고픔에서 구원되려 합니다. 그렇게는 메시아를 만나지 못합니다. 착한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처럼 세상없어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메시아만을 찾는 착한 뜻이 있나요? 그러면 오늘 밤에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의지는 구원자를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달라스 성당에 와서 첫 번째 맞이하는 성탄입니다. 오늘 ‘예수 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예: 예수님 사랑이 가득한 밤,/ 수: 수줍게 웃는 얼굴들 가득하네./ 성: 성탄의 종소리가 마음을 울리고,/ 탄: 탄생의 기쁨이 온 세상을 채우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겨울, 유럽의 참호 전선은 추위와 공포로 가득했습니다. 병사들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12월 24일 밤, 서부전선의 한 구역에서 독일 병사들이 조용히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들은 영국 병사들이 화답하듯 자신의 언어로 같은 노래를 부르며, 참호 사이에 따뜻한 연대의 기운이 피어올랐습니다. 다음 날, 양측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참호에서 나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담배, 초콜릿, 심지어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축구 경기를 하며 잠시나마 전쟁을 잊었습니다. 그날만큼은 총성이 멈추고, 적대감 대신 형제애가 넘쳤습니다.
오늘만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선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평화도 도시 예루살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대한민국의 정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온 인류를 위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참된 빛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분은 위엄 있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로 인해 어두웠던 세상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 빛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받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빛은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혼란스럽더라도,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모습으로, 굶주린 이들을 배를 불리시는 곳으로, 교만한 이들을 내치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일깨우시는 곳으로 오십니다. 흠이 있고, 주름이 가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진정한 이유입니다. 화려한 궁전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그 기쁨을 찬미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가짜별을 본 것이 아닙니다. ‘믿음, 사랑, 희망’이라는 진실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던 동방박사들, 오늘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성탄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이라면 우리 모두도 기뻐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의 성인
성녀 에우제니아(Eugenia)
활동년도 : +257년경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에우게니아
로마 순교록에는 분명하게 성녀 에우게니아(또는 에우제니아)가 기록되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불확실하고 로맨틱한 전설이 되어 전해온다. 이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의 백작 성 필리푸스(Philippus, 9월 13일)의 딸로 그녀의 부친은 로마 황제 콤모두스(Commodus)의 치하 때 이집트의 총독으로 활약하였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부친의 집을 빠져 나와서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주교이던 헬레누스(Helen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성녀 에우게니아는 그 이후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때까지도 남장을 하였기 때문에 수도원장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병을 간호하던 여인으로부터 간통죄로 고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의 재판관이 바로 그녀의 부친이었다. 재판 중에 그녀는 자신이 여자이며 바로 재판관의 딸이란 사실을 밝혔다. 이때 그녀의 부친이 감동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성녀 에우게니아는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는데, 그중에는 자신의 어머니인 클라우디아(Claudia)도 포함된다. 그 후 어머니를 따라 로마를 방문하였다가 그리스도인임을 공인하여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녀 아나스타시아(Anastasia)
신분 :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 시르미움(Sirmium)
활동연도 : +340년경
같은이름 : 아나스따시아
판노니아(Pannonia) 시르미움(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 태생으로 알려진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아퀼레이아(Aquileia) 에서 시르미움으로 갔다가 붙잡혀 같은 해 12월 25일 팔마리아(Palmaria) 섬에서 참수당했고, 유해는 훗날 성당으로 바뀐 아폴로니아(Apollonia) 의 집에 안장되었다.
전설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로마 귀족 프로텍사투스(Praetexatus) 의 딸로서 이방인이던 푸빌리우스(Pubilius) 와 결혼 하였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페르시아 선교여행을 떠나 아퀼레아까지 갔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그녀 역시 체포되었다.
그녀는 배에 실려서 팔마리아 섬으로 끌려갔는데, 그 배에는 죄수들이 가득하여 괴롭힘을 당하다가 성녀 테오도타(Theodota) 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구출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5세기부터 로마에서 공경을 받고 있으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은 근거가 희박하다.
복자 야고포네 (Jacopone)
활동년도 : 1230-1306년
신분 : 수사, 시인
지역 : 토디(Todi).
같은 이름 : 야고뽀네, 자코포네
야고포네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토디의 베네데티(Benedetti) 가문에서 태어나 볼로냐(Bologna)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다. 1267년경에 그는 바나 디 귀도네(Vanna di Guidone)와 결혼하였으나 아내가 곧 타계하여 그들의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뜻하지 않은 이런 죽음이 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그는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어 드러나는 통회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1278년에 토디에 있는 산포르투나토(San Fortunato) 수도원에 평수사로 입회하였는데, 그의 뛰어난 겸손이 크게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재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신앙적인 시와 찬미가를 썼는데, 몇 편은 라틴어이나 그 대부분은 움브리아 방언으로 서술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시는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애송되었다. 또 수도원에서는 작은 형제회의 영적 형제들 그룹에 들었는데,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5세(Coelestinus V)는 이들에게 독립된 공동체 생활을 허용하고 또 초기의 엄격한 규율을 그대로 지키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영적 형제들 문제가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 결과 그는 거의 5년 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에 참으로 아름다운 시들을 썼다. 그의 대표작은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고통의 성모”(Stabat Mater Dolorosa)이다. 1303년에 그가 석방되자 이번에는 오르비에토(Orvieto) 근교에서 은수자로 생활하다가, 콜라초네(Collazzone)에 있던 클라라 수도원으로 갔다. 그는 중세의 가장 이름 있던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진실한 의미에서 바보가 된 사람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