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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 이발사]
S# 1 효자동 거리. 낮.
멀리로부터 달려오는 자전거 한 대. 이 자전거를 따라 효자동 거리의 구석구석이 소개되는데...
자전거가 어느 이발관 앞에 멈춰 선다. “효자 리발관”이라는 낡은 간판.
머리가 지저분하고 덥수룩한 자전거 위의 남자가 이발관 안으로 들어간다.
[자막 : 1959년]
S# 2 이발관 안. 낮.
순박한 인상의 노총각 이발사 한모. 진지한 자세로 이발에 임하고 있다.
Narr. : 저희 아버지는 이발사이십니다.
이름은 성자, 한자, 모자, 성한모. 두부 한모라고도 불리셨죠.
한모의 옆쪽에서는 스물다섯 살 경자가 간이침대 위에 누운 아저씨를 면도해 주고 있다.
Narr. : 어머니는 면도사이셨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처음 배우신 일이 면도였죠.
이발을 하고 있던 한모의 시야에 갑자기 경자의 몸매가 들어온다.
치마 위로 드러나는 허리와 엉덩이의 곡선, 그리고 가슴. 한모의 가위가 움직임을 멎는다.
S# 3 이발관 앞. 낮.
문 밖까지 나와 손님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한모. 그리고는 이발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데...
“음마야, 왜 이라는데요?” “에이, 잠깐 얘기 좀 하자니까요.” 하는 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올 때...
Narr. : 아버지는 평범한 이발사이셨지만...
평범한 일만을 하셨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발관 위로 카메라가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무대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Narr. : 왜냐하면 아버지는...
대통령이 사는 동네의 이발사이셨기 때문이죠.
S# 4 최씨네 쌀집. 밤.
[자막 : 1960년 3월 15일]
자막이 사라지면...
담배 연기 자욱한 속에 동네 아저씨들이 왠지 은밀한 분위기로 모여 앉아 있다.
가게 벽에 붙은 선거 벽보들을 툭툭 쳐가며 일장 연설을 하는 최씨.
최 씨 : 우리가 누구야. 경무대 지역 주민 아냐. 우리가 앞장서서 나라 발전과 사회 안정에 이바지해야 된다고. 다들 무슨 얘긴지 알겠지?
이거야 이거! 우리가 북쪽 빨갱이들하고 맞서려면 오직 이박사, 이승만 박사밖에 없는 거야. --
Narr. : 통장이었던 최씨 아저씨는 언제나 나라 걱정을 많이 하셨고...
나라가 하는 일은 항상 옳다고 믿으셨죠.
최 씨 : -- 문제는 이기붕씨란 말야. 죽었다 깨도 이기붕씨가 부통령 돼야 돼. 그래야 이박사한테 힘이 생기는 거라구. 무슨 얘긴지 알겠지? --
Narr. : 아버지 역시 나라가 하는 일은 항상 옳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최씨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많은 일을 하셨죠.
최 씨 : -- 자, 그래서 승리의 V. 이거야, 이거!
후보자들의 사진이 쭉 붙어 있는데... 부통령 후보 중 기호 1번(리기붕)은 승리의 V자를 그리고 있다.
손가락으로 승리의 V를 만들어 보이는 최씨. 그러자 아저씨들도 승리의 V를 서로에게 그려 보이며 후보를 확인한다. 뒤늦게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한모. 모두들 V자를 그리며 한모를 쳐다본다.
S# 5 투표소로 사용되는 학교 교실. 낮.
칸막이 안이 서로 오갈 수 있게 된 3인조 내통식 기표소.
기표소 안. 눈을 크게 뜨고 투표용지를 노려보는 한모. 정성을 다해 기호 2번 밑에 붓두껍을 꾹 누른다.
서로의 표를 확인하는 기표소 안의 세 사람.
갑자기 손씨, 문씨가 기겁을 하며 한모에게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인다.
[자막 : “이봐, 승리의 V라니까!”]
어리둥절한 한모, 손가락 두 개를 들며 투표용지를 보여준다.
[자막 : “그래요, 기호 2번.”]
손씨가 이번에는 손가락 한 개를 들어 보인다.
[자막 : “승리의 V. 기호 1번!”]
멍하니 손가락 두 개를 들고 있는 한모.
[자막 : “기호 2번이라며...”]
한모의 손가락 하나를 억지로 접어버리는 문씨.
[자막 : “기호 1번!”]
한 손은 손가락 두 개를, 다른 한 손은 손가락 한 개를 들어올린 채, 양쪽을 번갈아보며 갈등하는 한모.
손씨, 문씨의 인상이 잔뜩 구겨지는데...
결국 한모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기호 2번 아래의 표시를 열심히 지우기 시작한다.
기호 1번 밑에 다시 붓두껍을 누르는 한모.
S# 6 개표소로 사용되는 학교 강당. 밤.
백열등 아래 진행되는 개표 상황. 검표원과 기자들, 참고인들로 아수라장인데...
최씨와 한모도 동네 사람 몇과 함께 검표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표를 세다가 표를 한 장씩 삼켜버리는 최씨. 옆에 있던 손씨도 따라서 표를 삼킨다.
눈치를 보던 한모 역시 표를 꿀꺽 삼키는데... 목에 걸려서 켁켁.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개표장이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뭐야! 정전이야?”, “불 켜!”, “표를 지켜라!” 등의 고함이 오가고, 여기저기서 멱살잡이와 실랑이가 벌어진다. 연신 터지는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사이로...
최씨와 한모가 탁자 위에 정돈된 표 꾸러미들을 슬쩍슬쩍 빼돌린다.
S# 7 교사(校舍) 뒤쪽. 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는 포대 자루. 안에서 한모가 낑낑거리며 자루를 밀어주면... 밖의 어둠 속에 서 있던 최씨가 받아서는 얼른 거적으로 감싼다.
창문 밖으로 간신히 몸을 빼 뛰어내리는 한모. 받아주려던 최씨 위로 엎어진다.
S# 8 인근 야산. 밤.
맨땅에 내리꽂히는 곡괭이. 한모와 최씨가 열심히 땅을 파고 있다.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포대 자루. 투표용지 몇 꾸러미가 삐져나오고...
한모와 최씨가 그 위에 흙을 덮기 시작하는데...나무 뒤쪽에서 사람 하나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낸다.
커다란 덩치에 껄렁껄렁한 차림의 안씨.
안 씨 : 어이.
화들짝 놀라는 한모와 최씨.
최 씨 : (안씨를 알아보고는) 자네... 여기서 뭐하나...
씩 웃으며 구덩이 앞에 쭈그리고 앉는 안씨.
구덩이 안을 빤히 내려다보며, 평소 버릇인 듯 콧바람을 킁킁 내뱉는데...당황하는 한모와 최씨.
최 씨 : 이거... 감자야. 좀 묵혔더니 썩어버렸네.
별 거 아니라는 듯 일어나는 안씨. 한 번 더 씩 웃어주고는, 돌아서서 산을 내려간다.
걱정스럽게 안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모와 최씨.
한 모 : 형님...
최 씨 : 괜찮을 거야.
S# 9 작명소 앞 거리. 낮.
일군의 대학생 데모대가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친 뒤 경찰에 쫓겨 우르르 도망칠 때...
지나가던 한모가 학생들 뒤에 대고 주먹질을 해댄다.
“사주, 팔자, 작명” 간판이 달린 집으로 향하는 한모.
S# 10 작명소 안
흰 종이 위에 먹으로 한자가 씌어진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글씨를 쓰는 사람은, 러시아식 털모자를 쓴 뿔테 안경의 60대 노인.
책상 건너편에서 한모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노인이 ‘광호(廣浩)’와 ‘낙안(樂安)’ 두 이름을 적은 뒤 한모에게 건넨다.
종이를 받아들고 멍하니 내려다보는 한모.
노 인 : 거꾸로 들었어.
한 모 : (뒤집어 보지만 여전히 깜깜) 이름이...
노 인 : 그건 광자, 호자라고 쓴 거고... 그건 낙자, 안자라고 쓴 거야.
광자, 호자는 권세가 붙을 이름이지만, 명을 보장하지는 못하네.
한 모 : 오래... 못 산다는 말씀이신가요?
노 인 : 그런 말은 안 했어.
낙자, 안자는 재물은 안 보이지만, 큰 근심 없이 편하게 살 이름이야.
한 모 : 가난하지만... 편하게 산다... 는 말씀이신가요?
노 인 : 그런 말은 안 했어.
둘 다 좋은 이름이니까 잘 선택해.
한 모 : 근심 없이 오래오래 살면서, 재물도 모으는 그런 이름은 없습니까?
대답 없이 책상 위를 정리하는 노인.
한 모 : 저... 어떤 게 더 좋을까요?
한 모 : 내가 애 아버진가?
한 모 : 예?
노 인 : 자네가 아버지 아냐. 아버지가 알아서 해.
한 모 : ...
S# 11 이발관. 낮.
탁자 위에 두 이름을 적은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고... 최씨, 왕씨, 손씨, 문씨가 빙 둘러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왕 씨 : 나 같으면 낙안이를 하지. 오래 사는 게 최고야.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일찍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최 씨 : 그래 왕가야, 왕가는 쫄쫄 굶으면서 오래오래 살아라.
왕 씨 : 그럼,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야지.
한 모 : 어떤 게 좋을까요?
최 씨 : 사내라면 짧게 살아도 큰소리 한 번 쳐보면서 살아야지.
왕 씨 :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사내가 아니면 어쩔 거야?
뒤늦게 깨닫고는 아리송해지는 한모. 그 때, 이발관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엔진 소리들이 들려온다.
최 씨 : 어이고, 각하 행차하시나 보네.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가는 최씨. 다른 아저씨들도 어기적어기적 따라 나간다.
S# 12 이발관 앞 길. 낮.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급 승용차 행렬이 지나간다.
구경 나온 주민들 중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멍하니 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최씨는 열렬한 박수를 보냄은 물론, 언제 준비했는지 품안에서 종이 태극기를 꺼내 흔들기까지 한다. 손씨, 문씨도 박수를 보낸다.
왕 씨 : (조용히) 사사오입 해 가지고 말도 안 되게 헌법 바꿔치운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부정선거까지 했으니... 평생 해 잡수시겠군.
가운 입은 채 뒤쪽에 서 있던 한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한 모 : 저... 근데 그... 사사오입 말이에요.
다들 사사오입, 사사오입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입이라는 말은 그게...
왕 씨 : 그걸 몰랐어? (쯧쯧 혀를 차고는, 땅에다 나뭇가지로 숫자를 열심히 써가며 설명한다) 들어봐. 사사-, 넷은 버리고, 오입-, 다섯은 들인다. 하나를 나누어서 사로 떨어지면 하나로 안 치고, 다섯으로 떨어지면 하나로 본다는 얘기야.
땅바닥의 숫자를 유심히 보지만, 통 못 알아듣는 한모.
최 씨 : (왕씨가 그린 걸 발로 쓱쓱 지우며) 이런 건 됐고...
쉽게 말해서, 엿을 하나 뚝 잘라.
한 모 : 예.
최 씨 : 어느 한 쪽이 길겠지?
한 모 : 예.
최 씨 : 그럼 긴 쪽은 하나로 치고, 짧은 쪽은 하나로 안 친단 얘기지.
왕 씨 : 그게 말이나 되냐구!
최 씨 : 왕가야, 넌 만두나 많이 팔 생각해.
한 모 :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인데요?
최 씨 : 그게 무슨 말이냐면... (답답하니까, 자기도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린다) 이거 봐봐. 애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려면 열 달이 걸리잖아.
한 모 : 그렇죠.
최 씨 : 그럼, 뱃속에 애가 사람 한몫인가 반몫인가?
한 모 : ...
최 씨 : 애매하지? 아홉 달이면 어때?
한 모 : 사람이나 다름없죠. 아홉 달이면 손도 다리도 다 있을 텐데...
최 씨 : 여덟 달이면?
한 모 : 그것도 사람이나 다름없죠. 핏뎅인데...
최 씨 : 일곱 달이면?
한 모 : ...
최 씨 : 여섯 달이면?
한 모 : ...
최 씨 : 그럼 몇 달부터 애라고 봐야 되는 거냐고? 애매하지?
왕 씨 : 애매하긴, 빌어먹을. 애가 나오면 애가 되는 거지.
최 씨 : 그래서 다섯 달. 다섯 달이면 사람 한몫으로 보고, 그 밑으론 사람으로 안 본다는 얘기야.
왕 씨 : (최씨가 그린 걸 발로 탁탁 지우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최 씨 : 왜 말이 안 돼? 왜 말이 안 돼?
서서히 이해가 되는지 한모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최씨와 왕씨는 삿대질까지 하며 말싸움을 계속하고, 그것은 점점 힘겨루기로 변해간다.
S# 13 왕씨네 만두가게. 밤.
왕씨가 가게를 정리하는 시간.
만두 한 접시를 놓고 마주앉은 한모와 경자. 배가 불러 있는 경자는 냉랭하기만 하다.
한 모 : 식 올리자.
경 자 : 싫어예.
한 모 : 식 올리자.
경 자 : 안 해예.
Narr. : 어머니는 시골에 정혼을 해 둔 사람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면도사도 몇 달만 하실 생각이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일이 모두 틀어지고 만 거죠.
한 모 : 식 안 올리면 어쩌겠다는 건데. (왕씨와 여학생 손님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애는 낳아야 될 거 아냐.
경 자 : (울먹울먹하며) 애 안 날랍니더.
한 모 : 배가 그렇게 불렀는데 어떻게 애를 안 나.
경 자 : 안 낳을 수도 있어예.
한 모 : (단호하게) 그런 거 없어. 사사오입이야.
경 자 : 뭔 소린데예?
한 모 : 사사오입! 즉, 뱃속의 애가 다섯 달이 넘으면 애를 낳아야 된다는 얘기야.
경 자 : 뭐라고예?
한 모 :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법이 그래. 사사오입이면 헌법도 고치는데, 그까짓 애 하나쯤은 문제도 아냐.
갑자기 서러워지는지 마구 울기 시작하는 경자.
경 자 : 아이고, 인자 내는 우야노! 우야노!
경자의 울음에 한모가 한 풀 꺾인다.
한 모 : ... 울지 마. 애기 이름도 지어놨어.
경 자 : 뭔데예?
한 모 : 낙안이.
경 자 : 뭐라고예?
한 모 : 낙안이.
경 자 : 나가이? 성나가이? 촌스럼기도...
아이고, 내는 우야노! (더욱 서럽게 울고)
왕씨와 여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무안한 한모.
Narr. : 그렇게 해서 제 이름은 우리 동네 개도 다 아는 “사사오입에 낙안이”가 되었습니다.
S# 14 효자동 거리. 낮.
가운을 입은 채로 리어카를 밀며 급하게 달려오는 한모. 리어카에는 만삭의 경자가 실려 있다.
경 자 : 아이구 엄마야, 내 죽네, 내 죽어! 승한모 니 때문에 내 죽는데이!
한 모 : (이를 악물며 혼잣말로) 그래, 애만 낳거든 보자.
경 자 : 지금 뭐라노!
한 모 : 쫌만 참으라고.
[자막 : 1960년 4월 19일]
한모가 골목 끝에 도달해서 걸음을 멈추면... 대로에는 대규모 학생 데모대가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 펼쳐져 있다. 소방차는 데모대를 향해 물을 뿌려대고 있고... 전방에 펼쳐진 대치 상황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한모. 그 때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일제히 전진하고... 결국 경찰은 소방차를 버리고 2차 저지선으로 물러나는데...소방차를 앞세운 데모대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학생대표 : 경찰은 부정선거의 주범을 잡으러 가는 애국 청년들의 앞길을 막지 마라!!
학생들이 따라서 구호를 외친다. “막지 마라! 막지 마라! 막지 마라!”
데모대 있는 곳까지 다다른 한모, 선두 그룹과 본진 사이에 생긴 약간의 틈바구니를 뚫고 힘겹게 리어카를 미는데... 경자는 계속해서 “내 죽는다!” 비명을 질러대고...
경찰 저지선 쪽에서 경찰서장이 메가폰을 통해 외친다.
경찰서장 : 여기는 대통령 각하가 계시는 경무대 앞이다! 더 이상 진출 시에는 법에 따라 발포한다! 시위대는 불법 집회를 중단하고 속히 집으로 돌아가라!
학생 대표도 이에 굴하지 않고 구호를 외친다.
학생대표 : 부정선거의 주범인 이대통령은 즉시 물러나라!
학생들 : 물러나라!! 물러나라!!
학생대표 : 국민을 우롱하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
학생들 : 다시 하라!! 다시 하라!!
갑자기 진통이 심해지는지 경자의 비명이 더욱 날카로와진다.
경 자 : 성한모 니 때문에 내 죽는다, 내 죽는다!!
학생들 : 내 죽는다!! 내 죽는다!!
난데없는 구호에 당황하는 학생 대표. 다시 구호를 외친다.
학생대표 :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경 자 : 성한모 니 때문에 내는 죽네!!
학생들 : 내는 죽네!! 내는 죽는... 다? (우왕좌왕)
한모가 정신없이 군중들 사이를 힘겹게 뚫고 가는데... 데모대가 다시 일제히 전진하고, 학생들 중 일부가 리어카를 빼앗아 경찰 쪽을 향해 달린다.
한 모 : (허둥지둥 뒤쫓아가며) 어, 어... 안 돼.
경 자 : (리어카 위에서 울부짖는다) 승한모 이노마야!
이번에는 경찰들이 밀어붙이자, 학생들은 리어카를 버리고 후퇴하고... 한모가 리어카를 향해 달려가다가는, 경찰들이 곤봉을 들고 밀려오자 뒤돌아서 도망친다.
경 자 : 이노마야, 이리 안 오나! 어데 저런 게 다 있노!
아이고 배야, 내 죽는다아-!
한 모 : (도망치면서도) 기다려-!!
이번에는 대열을 정리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다시 밀어붙인다.
도망을 치는 경찰들. 그러면서 리어카는 길 한가운데에 내팽겨진 채로 있는데...
얼른 리어카로 달려가는 한모.
경 자 : (빤히 올려다보며) 니는 얼라만 나오면 내한테 죽는데이.
아니고 배야! 내 죽는다-!
리어카를 끌며 한모는 어떻게든 길 바깥쪽으로 빠져보려고 애쓰는데...
탕- 탕-!
갑자기 총성이 울린다. 쓰러지는 학생들.
비명 소리. 땅에 엎드리고, 다급하게 도망치고... 아비규환이 되는 군중. 한모도 놀라서 털썩 주저앉는데...
앉은걸음으로 천천히 리어카를 밀어 현장을 빠져나가는 한모. 놀란 경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S# 15 골목길
학생들이 우왕좌왕 뛰어다니고, 부상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한모가 리어카를 밀며 나아갈 때... 한 학생이 한모의 흰 가운을 본다.
학생1 : 의사 선생님, 여기도 도와주세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는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안 한모, 당혹스럽다.
한 모 : 저 의사 아닌데요.
학생2 :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학생3 : 애국 청년을 도와주세요.
한 모 : 의사가 아니라니까요. 저는...
학생4 : 우선 여기 좀 도와주세요.
학생3 : 애국 청년입니다.
학생2 :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학생3 : 애국 청년입니다, 선생님.
난감한 한모. 학생들의 시선에 못 이겨, 쓰러져 있는 학생3에게 다가간다.
머리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고, 학생3은 계속 신음 소리를 내는데... 가만히 보니 심한 상처라기보다는 엄살인 것 같다.
단추까지 열어젖히는 학생3. 어쩔 수 없이 한모는 학생3의 가슴에 귀를 대보고...
학생3 : (제정신이 아닌 듯) 부정선거... 다시 하라...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짓던 한모, 갑자기 가운 주머니에서 이발용 가위를 꺼내들고는 학생3의 머리카락을 쏜살같이 자르기 시작한다.
학생3 : 아... 아...
학생2 : 어떻습니까?
한 모 : 많이 다쳤네요.
학생3 : 애국 청년입니다...
머리카락을 다 잘라낸 한모, 손수건을 꺼내 상처 부위에 대 준다.
한모의 능숙함에 감탄하는 학생들, 명의(名醫)라도 만난 듯 한모를 우러러본다.
학생2 :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학생4 :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한 모 : (얼떨떨한데)
Narr. : 아버지는 ‘선생님’이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좋으셨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이발사와 의사는 한 끗발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셨죠.
한 모 : 전부 여기 태우세요.
학생들이 학생3과 부상당한 학생들을 부축해 리어카에 태운다.
학생3이 경자 옆에 눕혀지는데... 경자는 다시 진통이 온다.
경 자 : (학생3의 목을 잡고 조르며) 아이고, 내 죽는다!
학생3 : 아-!
리어카를 밀며 달리는 한모와 학생들.
Narr. : 그 날 저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경무대 앞에서는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힘들게 태어난 만큼 오래오래 잘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곤 하셨죠.
S# 16 이발관. 낮.
선반 위의 진공관 라디오에서 이승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라디오 :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이발 의자에 앉은 경자, 태어난 지 이레째 되는 낙안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한모. 최씨, 왕씨 등 동네 아저씨들도 빙 둘러서서 낙안을 구경하는데...
라디오 : 하나,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할 것이며...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라디오 쪽으로 슥 돌아간다.
F.O.
S# 17 이발관 안채. 새벽.
한모가 돌 갓 지난 낙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있다.
부엌에서는 경자가 아침을 짓고...
[자막 : 1961년 5월 16일]
한 모 : 그렇지 낙안아, 하나둘, 하나둘-
그 때 갑자기 지진이 난 것처럼 굉음과 함께 땅과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놀라는 한모와 경자.
S# 18 이발관 앞 길
한모가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탱크 한 대가 가게 앞을 지나간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한모. 게다가 탱크가 가게 앞에서 멈춰 서기까지...
탱크 안에서 군인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지도를 펼쳐들고 고민을 하더니, 한모를 향해...
군 인 : 청와대가 어디야?
한 모 : (손가락으로) 저쪽이요.
땅에다 침을 한 번 탁 뱉더니 탱크를 출발시키는 군인.
한 모 : 짜식, 어디서 반말이야.
한모도 침을 탁 뱉는다.
S# 19 이발관. 낮.
slow motion으로... 돈통으로 지폐가 떨어진다.
Narr. : 군인들이 청와대를 차지한 게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죠.
그 군인들이 중고생 삭발령을 내려주었거든요.
돈들이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학생들의 줄이 이발관 밖까지 이어져 있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바리깡으로 학생들의 머리를 미는 한모.
낙안을 등에 업은 경자는 행복한 얼굴로 돈통의 돈들을 정리한다.
F.O.
S# 20 이발관. 낮.
F.I.
제법 넓어진 가게 안. 이발 의자들도 새 것들로 바뀌어져 있다.
태극기 액자 옆에 통치자의 사진을 걸고 있는 한모.
“왼쪽이 기울었다, 오른쪽이다” 이래저래 간섭하는 최씨. 영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는 왕씨.
이발 보조로 들어온 스무 살 진기는 아예 관심도 없다. 그리고...
눈을 동글동글 뜨고 올려다보는, 열 살배기 낙안.
왕 씨 : (빈정) 이발소에다 참 잘~ 하는 짓이다.
최 씨 : 그래, 좀 더, 좀 더... 됐어, 됐어.
자, 봐봐. 이제야 좀 대통령 각하가 사시는 동네 이발관이란 표시가 나잖아.
한 모 : 역시 형님 말대로 하니깐 좋네요.
최 씨 : 그럼. 이렇게 해 놔야지 누가 와서 보건 ‘아, 역시 대통령 각하가 사시는 동네라 다르구나-’ 그러지. 안 그러냐 낙안아?
낙 안 : (눈만 멀뚱멀뚱)
최 씨 : 뭘 알아야지...
살짝 기분이 상한 한모, 낙안에게 다가온다.
한 모 : 낙안아.
낙 안 : 예.
한 모 : 여기가 무슨 이발관이라고?
낙 안 : 효자 이발관이요.
한 모 : 효자 이발관 주인은 누구지?
낙 안 : 아부지.
한 모 : (흐뭇)
효자 이발관은 어디 있지?
낙 안 : 효자동.
한 모 : 효자동에는 누가 살지?
낙 안 : ...
한모가 청와대 쪽으로 눈짓을 하는데... 마침 안채에서 경자가 나온다.
낙 안 : 엄마?
한 모 : 엄마 말고... 조기... 조기...
낙 안 : 대통령.
한 모 : 아니지. 대통령 각하.
낙 안 : 대통령 각하.
한 모 : 그렇지. 어르신은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낙 안 : 예, 아부지 각하.
한 모 : 아냐, 아버지는 각하라고 부르는 게 아냐. 그냥 아버지라고만 불러.
낙 안 : 예.
경 자 : 여기가 무슨 국민학교 교실인교? 그 사진은 왜 붙이노?
한 모 : 무슨 소리야? 이발관도 공공장소라고. 공공장소에 각하 사진 다는 게 뭐 어때서.
경 자 : (코웃음) 태극기나 제대로 거소 고마.
한 모 : 뭐가...? 맞는데...
거꾸로 걸려 있는 태극기.
S# 21 영추문 앞. 낮.
전차가 땡땡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면...
웃통을 벗고 배를 튕기며 노는 아이들. 한껏 숨을 들이 마시고는, 갈비뼈의 수를 센다.
낙안과 또래 아이들은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를 하는데...
--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 성깍쇠를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 성깍쇠를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아이1 : 야, 잠깐 잠깐. 성깍쇠가 뭐야?
영 종 : 깍쇠 말야, 깍쇠.
아이1 : 그게 뭔데?
영 종 : (낙안을 가리키며) 얘네 아빠가 성깍쇠잖아.
낙 안 : 깍쇠 아냐!
영 종 : 깍쇠 맞잖아. 우리 아빠가 낙안이네 아빠는 깍쇠라고 그랬어.
아이1 : 그래, 그럼 낙안이가 절루 가.
낙 안 : 성깍쇠 아냐!
영 종 : 너희 아빠 깍쇠 맞잖아!
영종에게 달려드는 낙안.
S# 22 이발관. 낮.
한모가 한창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는데...
얼굴이 퉁퉁 부르튼 낙안이 이발관 안으로 들어온다.
낙 안 : 아부지.
한 모 : 낙안아, 손님 계실 땐 아버지 찾지 말라고 그랬지?
낙 안 : 아부지.
한 모 : 그리고, 너무 뛰어다니면 금방 배 꺼진다고 그랬지?
낙 안 : 아부지.
한 모 : 왜?
낙 안 : 애들이 아부지보고 성깍쇠라고 놀려요.
이발 받던 손님과 진기가 피식 웃는다.
갑자기 화가 나는 한모.
한 모 : 어떤 놈들이 그 따위 소리를 해!
S# 23 안씨네 연탄가게. 낮.
가게 앞에서 혼자 땅따먹기를 하는 영종.
한모가 낙안을 앞세우고 씩씩거리며 걸어온다. 손가락으로 영종을 가리키는 낙안.
한 모 : 네가 나보고 깍쇠라고 그랬다메?
영 종 : 아뇨.
낙 안 : 그랬잖아!
영 종 : 내가 언제!
한 모 : 이놈이 거짓말까지 해? (한 대 쥐어박는다)
영 종 : 아니라니까요!
한 모 : 어린놈이 어디다 대고 소릴 질러!
영 종 : (더 크게) 아니예요!
한 모 : 안 되겠다 너. 너 나하고 같이 파출소 가자!
영종의 손을 덥석 잡아끄는 한모. 놀란 영종이 질질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리는데...
한 모 : 뭘 잘 했다고 울어! 너같이 버릇없는 애들은 파출소 가서 혼나봐야 돼!
그런데 몇 걸음 못 가서 연탄지게를 진 안씨와 마주친다.
안 씨 : 무슨 일이야?
영 종 : 어엉- 아빠아-!
영종이 안씨의 아들이란 걸 안 한모, 당황하기 시작하는데...
한 모 : 얘가... 안씨 자네 아들이야?
안 씨 : 무슨 일이야, 응? 말 좀 해 봐 영종아.
영 종 : 아으씨가... 안 그래는데... 깍쇠라오 그래다으고 때리이자아나아요...
안 씨 : (예전 버릇처럼 콧바람을 킁킁 내뱉으며) 똑바로 좀 말해 봐.
영 종 : 다른 애들이 아저씨보고 깍쇠라고 그랬는데... 나보고 그랬다으고 때리자아나요...
안 씨 : 그럼 깍쇠보고 깍쇠라 그러지, 이발사님이라고 그럴까.
(영종에게)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영 종 : 파출소오...! 어엉!
안 씨 : 뭐? 아니 이 사람이 애를 데리고.
한 모 : 아... 아니, 나는 그냥... 애가 울길래 달래주려고...
(비실비실 웃으며 영종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아, 자네 아들이었구나. 어쩐지 인물이...
S# 24 이발관. 저녁.
의기소침해서 소파에 앉아 있는 낙안.
한모가 흘끔흘끔 낙안의 표정을 살피는데...
낙 안 : 아부지는 영종이가 아부지 놀렸는데 왜 돈을 줘요?
한 모 : 얘기 했잖니. 아버지랑 영종이 아버지랑은 예전부터 절친한 사이야.
이리 와 봐라, 낙안아.
낙 안 : ...
한 모 : 얼른.
마지못해 이발 의자 위에 올라가 앉는 낙안.
한 모 :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낙안아. 이발사란 말이다...
너, 저 밖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 보이지?
낙 안 : (끄덕끄덕)
한 모 : 저게 뭘 뜻하는지 알어?
낙 안 : (설레설레)
한 모 : 저 흰색은 말이지, 붕대를 의미하고... 붉은색은 동맥, 파란색은 정맥. 쉽게 말해서 피를 말하는 거지.
이게 뭔 소린지 알겠냐?
낙 안 : (설레설레)
한 모 : 그게 바로... 이발관이라는 곳은 옛날에는 병원과 같은 곳이었다는 얘기야.
옛날에는 병원에다가도 저 표시를 붙여놨었거든. 옛날에는 의사가 머리도 깎고, 수술도 하고 그랬단 말이지.
그러다가 (양팔을 쭉 벌리며) 이렇게 길이 갈라지면서, 의사는 수술만 하게 되고, 이발사는 머리만 깎게 됐다는 말씀이야. 알아듣지?
(낙안의 환상) 한모가 의사복장을 하고 경자가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다. 이발의자를 눕히고 손님을 진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낙 안 : (멍하니 있으면)
한 모 : 다시 말해서, 옛날부터 이발사와 의사는 한 끗발이라는... 아니, 한 형제간이었다는 말이야.
이제 알겠지?
낙 안 : (그제야 끄덕끄덕)
한 모 : 그래서 이 까운도 의사들 까운하고 비슷한 거란다.
낙 안 : 아...
한모의 흰 가운을 보는 낙안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데...
한 모 : 낙안아. 이제부터 누가 아버지보고 깍쇠라고 놀리거든...
속으로 비웃어줘라. 의사하고 이발사하고 형제지간인지도 모르는 놈, 이런 무식한 놈... 하면서 말야.
낙 안 : 속으로요?
한 모 : 그래, 속으로. 무식한 사람들은 그냥 속으로 비웃어주는 게 최고야. 알겠지?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까닥까닥하는 낙안.
낙안의 머리를 막 쓰다듬어주는 한모.
S# 25 이발관 앞 길. 낮.
멀리로부터 지프차 한 대가 달려와 스쳐가더니, 곧 멈춰 서서 이발관 앞으로 후진한다.
S# 26 이발관
한모가 한창 노인의 머리를 이발해 주고 있는데...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에 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30대 후반 남자가 창문으로 고개를 슥 내밀더니, 이발관 내부를 둘러본다.
장혁수.
그가 창문을 통해 이발관 안으로 들어온다. 부하 직원 한 사람도 따라 들어오고...
어리둥절해서 괜히 주눅이 드는 한모. 졸고 있던 진기도 슬그머니 일어나는데...
장혁수가 벽에 걸린 통치자의 사진을 본다.
장혁수 : 어이.
장혁수를 바라보는 한모는 그 눈빛에 벌써 기가 죽는다.
장혁수 : 나 좀 쉬었다 갈 테니까 손님 내보내.
한 모 : ?
장혁수가 웃옷을 벗자 권총 지갑이 드러난다.
손님들을 내보내는 한모.
이발 의자에 앉자마자 눈을 감는 장혁수.
바짝 긴장한 한모가 장혁수의 이발 의자를 천천히 뒤로 젖혀주는데...
눈을 떠 한모를 노려보는 장혁수. 움찔하는 한모. 그러나 장혁수는 다시 눈을 감고...
금세 코를 골기 시작하는 장혁수. 부하 직원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고...
멍하게 서 있는 한모. 경자가 안채에서 나오며 소리를 내자, 한모가 얼른 조용히 하라며 입에 손을 갖다댄다. 어리둥절한 경자.
S# 27 같은 곳. 시간의 경과.
정적 속에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리고...
문 앞에 선 한모는 들어오려는 손님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이며 조용히 돌려보낸다.
그 사이 잠에서 깨는 장혁수. 담배를 피워 무는데...
장혁수 : 여기서 가게 한지 얼마나 됐나?
한 모 : 한 십 오륙 년 됐습니다.
장혁수 : 그럼 이 동네 사정도 잘 알겠군.
한 모 : 그럼요.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장혁수 옆에 가서 공손하게 서는 한모의 품이, 마치 부관이라도 된 것 같다.
장혁수 : 혹시 이 동네에 의심 가는 사람 없나?
한 모 : 예? 글쎄요...
장혁수 : 의심 가는 사람 있으면 이야기하라구. 요즘 수상한 자를 찾고 있으니까.
한 모 : 예... 알겠습니다.
장혁수가 더 말이 없을 듯하자, 한모가 돌아서는데...
장혁수 : 특히 말이야.
한 모 : (바로 뒤돌아서며) 예.
장혁수 : 오늘 밤 정도에 말이지... 이 부근에 말이지...
나올 것도 같은데...
한 모 : 수상한... 사람이요?
장혁수 : 그래.
한 모 : 보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장혁수 : 나한테 알려주다가는 못 잡아.
한 모 : 그럼...
장혁수 : 신고를 하라구. 알았지? 오늘 밤 열두 시쯤이야. 이 부근에서.
한 모 : 알겠습니다. 그런 놈이 있으면 잡아야죠.
한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는 장혁수. 가죽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 한모에게 건네주고는 이발관을 나간다.
S# 28 이발관 앞 길
멀어져가는 지프차.
한모와 경자, 진기, 그리고 최씨, 왕씨 등도 차가 청와대 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본다.
Narr. : 어머니는 다시는 그 손님을 받지 말라고 하셨지만, 최씨 아저씨는 무조건 잘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힘 있고 빽 있어 보이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면서요.
S# 29 안채의 방. 밤.
잘 준비를 하는 한모네 세 식구. 경자가 불을 끈다.
낙 안 : 나 가운데서 잘래.
경 자 : 아부지가 어른이니께 가운데서 자야재.
낙 안 : 싫어잉. 나 가운데서 잘래.
경 자 : 시끄럽다.
한 모 : (가운데 자리를 내 주며) 자, 이리와.
낙안이 신나서 가운데로 파고든다.
어둠 속에서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낙안이 속삭인다.
낙 안 : 아부지.
한 모 : 왜.
낙 안 : 내 동생은 언제 생겨요?
한 모 : 낙안아.
낙 안 : 예.
한 모 : 세상엔 사람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단다. 너도 좀 책임이 있고.
낙 안 : 아부지.
한 모 : 왜.
낙 안 : 딴 데서 동생 데려오면 안 돼요?
한 모 : 어디서 강아지나 한 마리 데려다 키우자.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낙 안 : (히죽) 예.
잠시 정적이 흐른다 싶더니... 천장에서 쥐가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그 소리를 듣는 낙안.
낙 안 : 아부지.
한 모 : 왜.
낙 안 : 쥐.
쥐들이 아예 우르르 몰려다니며 천장을 휘젓고 다니는데...
“에잇” 하며 천장으로 베개를 집어던지는 한모. 포물선을 그린 베개가 경자의 배 위로 떨어진다.
경 자 : 에고 깜짝이야!! 뭐하는 기가?
다리를 쭉 뻗어 발가락으로 베개를 집어 올리는 한모. 낙안이 키득키득 웃는다.
덕분에 천장이 조용해지고, 다시 정적이 흐르는데...
한모와 경자가 쌔근거리기 시작할 때... 낙안은 여전히 두 눈을 뜨고 있다.
지붕에서 드득, 드득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던 것.
낙 안 : 아부지. 아부지.
한 모 : ... 왜.
낙 안 : 지붕에서 이상한 소리 나요.
한 모 : 쥐야.
낙 안 : 쥐 아닌데...
한 모 : 낙안아.
낙 안 : 예?
한 모 : 자자.
그 때, 괘종시계가 열두 번을 치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는 한모.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S# 30 이발관 옆 골목. 밤.
골목으로 나와 보니, 사다리 하나가 한모 집 지붕 위로 걸려 있다.
조심조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보는 한모.
웬 남자가 지붕 위에서 쌍안경을 들고 어딘가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
S# 31 효자동 파출소. 밤.
경찰 하나가 잠을 쫓던 조용한 파출소에 한모가 들이닥친다.
한 모 : 간첩 나타났어요, 간첩!
S# 32 이발관 옆 골목. 밤.
이발관 주위를 에워싸는 한모와 파출소장, 경찰1.
경찰1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데...
인기척을 느낀 지붕 위 남자가 반대쪽으로 도망치다가는, 발을 헛디뎌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반대쪽에서 기다리던 파출소장에게 붙잡히는 남자. 한모도 달려들어 한몫 거든다.
남 자 : 놔, 놔 이 새끼들아.
파출소장 : 당신 간첩이죠?
남 자 : 놔. 나 지금 특수 임무중이란 말야, 이 병신새끼들아.
파출소장 : 그러니까... 간첩이시잖아요.
경찰1도 달려와 남자의 손을 꺾는다.
남 자 : 간첩 아니라니깐 그러네!
야 임마, 어쭈, 이거 못 놔?
경찰1 : 간첩 아닌가 봐요.
한 모 : 간첩 맞아요! 간첩이 자기가 간첩이라고 그러는 간첩 봤어요?
파출소장 : 그럼 간첩 맞네!
남자를 패기 시작하는 파출소장과 경찰1. 한모도 덩달아 때리는 시늉을 한다.
한 모 : 간첩이 간첩이지... 씨...
Narr. : 간첩이 간첩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중앙정보부 직원이었죠. 우리 뒷집에 일본에서 온 조총련 유학생이 살았는데, 그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 됐든 그 일로 아버지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셨죠.
S# 33 이발관. 낮.
탁자 위에 화투판을 벌여 놓고 동네 아저씨들과 도리짓고땡을 하는 한모.
밖에서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부하 직원을 대동한 장혁수가 이발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놀라는 한모와 아저씨들.
마치 처음 온 것처럼 이발관 안을 훑어보는 장혁수. 화투판까지 확 엎어버리자, 좌중은 당황하고...
장혁수 : 성한모가 누구야?
한 모 : ... 전데요. 어서옵-
장혁수 : 당신이 그저께 정보부 직원을 잡았어?
한 모 : 예?
장혁수 : 옷 갈아입어.
한 모 : ?
장혁수 : 자, 지금부터 3분 내로 복장 교체한다. 실시.
한 모 : 실시.
후다닥 안채로 뛰어 들어가는 한모.
장혁수의 살벌한 시선이 느껴지자, 슬금슬금 이발관을 빠져나가는 아저씨들.
S# 34 지프차 안. 낮.
허름한 양복 차림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한모.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기가 잔뜩 죽어 있는데...
차가 청와대로 향하고... 후문에서는 검문도 없이 경례를 받으며 무사통과.
S# 35 청와대 접견실. 낮.
소파 끄트머리에 초조하게 앉아 있는 한모.
반대쪽에는 경찰서장이 앉아서 한모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는 한모.
의전 직원들이 방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준비를 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문이 벌컥 열리면서, 지적인 머리스타일의 40대 남자가 들어온다.
중앙정보부장 박종만.
벌떡 일어나는 서장과, 그것에 놀라 덩달아 일어나는 한모.
박종만 : 당신이 신고한 사람이야?
한 모 : ... 예.
대답하기가 무섭게 박종만의 구둣발이 한모의 정강이를 강타한다.
“윽” 하며 털썩 주저앉는 한모.
박종만 : 간첩하고 정보부 요원도 구분 못 하나! 어느 부대 출신이야? 엉?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한모의 머리를 빗당겨 때리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는 박종만.
한모가 머리와 정강이를 막 비비고 있을 때... 서장이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서 장 : 자네가 성한몬가? 나 종로 경찰서장이야. 반갑네. 자네 덕에 나도 표창장 받게 생겼어.
한 모 : ... 예.
서 장 : 아주 잘 했어. 중앙정보부 요원이 내 부하의 손에 잡히다니... 히히히.
이제 각료들이 방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선다. 그 안에 장혁수가 있고... 박종만도 떫은 표정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잠시 후...
통치자가 들어온다.
얼어붙는 한모. 그런데 통치자가 곧장 한모 앞으로 다가오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통치자. 한모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는, 통치자의 손을 잡는다.
통치자 : 이름이?
한 모 : 서... 성한모... 입니다.
통치자 : 성함모?
한 모 : 아... 아니, 저...
성, 한모입니다. 두부 한 모 할 때 한모 입니다. 두부 한 모...
미소 짓는 통치자. 그러자 각료들도 잔뜩 점잖은 체 하며 따라 웃는다.
통치자 : 임자 같은 사람만 있으면 (박종만 쪽을 보며) 간첩은 우리 효자동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겠어.
한 모 : 감사합니다, 각하.
Narr. : 아버지도 나중에 알게 되셨지만...
그 간첩 사건은 모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장혁수의 얼굴) 경호실 아저씨가 꾸민 거였습니다.
(굳어 있는 박종만의 얼굴) 중앙정보부 아저씨를 곤란하게 하려고 그랬다나요.
장혁수를 노려보는 박종만의 살벌한 시선. 부딪히는 두 사람의 눈빛.
S# 36 이발관. 아침.
벽에 액자 하나가 더 붙어 있다. 청와대에서 받은 ‘모범시민 표창장’.
진기와 낙안이 액자를 닦는다.
진 기 : 참, 나... 아침에 닦았다니까요.
한 모 : (수건을 개며) 닦으라면 닦아. 그런다고 유리가 녹아 흐르냐?
그 때 창 너머로 지프차가 와서 멈춰서는 게 보이더니...
장혁수가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장혁수 : 주목. 지금부터 3분 내로 이발 도구 챙긴다. 실시.
한 모 : 예? 이발 도구... 요?
장혁수 : 말이 많다!
한 모 : 예! 이발 도구...
허둥지둥 장비를 챙기는 한모.
S# 37 청와대 어느 방. 아침.
큰 거울 하나가 있고, 그 앞에 의자와 탁자 하나씩, 그리고 방 한 가운데에 소파와 라디오, TV가 있다.
장혁수 앞에서 바짝 얼어 있는 한모.
장혁수 : 몇 가지 일러두겠는데.
첫째, 반드시 각하라는 존칭을 쓰도록.
둘째, 항상 고개를 숙이고 필요시에만 고개를 들 것.
셋째, 이게 중요한데... 이발을 다 한 후 면도를 할 때에는 ‘각하, 면도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래’라는 대답이 있을 때 면도를 시작할 것. 아무 때나 면도칼을 들이대면 안 된다. 알겠나?
여기 서약서에 싸인해.
서명 란에 또박또박 이름을 쓰는 한모.
장혁수 : 이발은 15분 이내에 신속하게 하되...
용안에 상처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한 모 : 용안이면...?
장혁수 : 그래, 용안. 각하의 얼굴. 알겠나?
한 모 : 아...
장혁수 : (군대식으로) 대답이 왜 이래? 알겠나?
한 모 : 예.
장혁수 : 복창 불량이야. 알겠나?
한 모 : 예.
장혁수 : 어허. 엎드려뻗쳐.
한 모 : (재빨리 엎드려뻗쳐 한다)
장혁수 : 하나에 ‘복창’, 둘에 ‘불량’. 하나!
한 모 : 복당!
장혁수 : 둘.
한 모 : 불량!
장혁수 : 하나.
한 모 : 불량!
장혁수 : 하나아-.
한 모 : 복당!
장혁수 : 둘.
한 모 : 불량!
장혁수 : 자, 따라해. 각하는!
한 모 : 각하는!
장혁수 : 국가다.
한 모 : 국가다!
장혁수 : 각하는.
한 모 : 각하는!
장혁수 : 국가다.
한 모 : 국가다!
장혁수 : 일어섯.
한 모 : (일어나면)
장혁수 : 실수 없이 해야 한다. 알겠나?
한 모 : (헐떡이며) 예!
문이 열리고...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통치자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들어온다.
한모 옆까지 오는 통치자. 한모는 시선을 45도 내리깐 채 숨을 헐떡이는데...
통치자 : 어디 아픈가?
한 모 : 아닙니다.
통치자 : 근데 왜 그러고 있나.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가는 어찌 해야 될지 몰라 장혁수를 보는 한모. 그러나 장혁수는 무심한 얼굴로 서 있고... 한모는 다시 시선을 떨군다.
의자에 앉는 통치자. 장혁수가 한모에게 ‘시작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신속하게 수건으로 통치자의 목을 감싸고, 이발용 천을 감는 한모.
가위와 빗을 들고 통치자의 머리에 가까이 대 보지만... 손이 떨려서 주저주저.
통치자가 고개를 약간 들어 한모를 본다. 장혁수도 긴장하는데...
용기를 내 빗질을 시작하는 한모.
막상 시작을 하자 금세 한모의 가위질 솜씨가 돌아온다.
통치자 : 이발한 지는 얼마나 됐나?
깜짝 놀라며 빗을 놓치는 한모.
한 모 : 십... 십육 년 정도 됐습니다.
얼른 떨어진 빗을 찾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가위질만 해대는 한모.
다가와서 빗을 주워주는 장혁수. 꾸벅 인사하는 한모.
통치자는 계속 눈을 감고 있지만, 한모의 이마에선 땀이 줄줄.
침묵에 잠긴 방 안에 가위질 소리만 나지막이 울리고...
다듬는 머리라 이발이 금방 끝난다. 면도 준비를 하는 한모.
한 모 : 각하, 면도를 하겠습니다.
아무 대답 없이 눈만 감고 있는 통치자.
당황하는 한모. 장혁수를 보지만, 역시 인상만 쓰고 있고...
한 모 : 저... 각하... 면도... 를-
통치자 : (말을 끊으며) 그래.
한 모 : (안도) 감사합니다, 각하!
면도 거품을 만들어 통치자의 턱에 바르는 한모. 그리고는 면도칼을 들고 목으로 가져가는데... 손이 떨려서 바로 시작하질 못한다.
통치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형상. 장혁수가 금방 달려올 것처럼 긴장하는데...
그것을 본 한모, 더 이상 어쩌질 못하고 면도를 시작한다.
떨리는 손으로 대충 면도를 끝마칠 즈음.
한모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핏줄기가 슥 새어나온다.
놀라는 한모. 다행히 장혁수는 딴 곳을 보고 있다.
면도 거품을 닦아내는 하는 척 하며 수건으로 얼른 지혈을 하고... 스킨을 바르면서도 그 상처 부분만 은근히 힘을 줘서 꾹꾹 눌러대는 한모.
감았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통치자. 거울을 보려고 하는데, 본능적으로 한모가 그 앞에서 자꾸 얼쩡거리며 시야를 가린다.
통치자가 손짓하면,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비켜서는 한모.
그러나 다행히 피가 아직 새어나오지 않은 상태.
통치자 : 수고했네.
한모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돌아서서 문 쪽으로 가는 통치자. 장혁수도 따라 나가고...
한모는 그 뒤에 대고 허리가 끊어질 듯 인사를 한다.
조용해진 방안. 긴장이 풀리자 자신도 모르게 통치자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한모. 그러다가는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서 의자를 탁탁 털어내고...
S# 38 청와대 현관. 아침.
장혁수를 뒤따라 나오는 한모. 장혁수가 멈춰 서자, 뒤따라 선다.
장혁수 : 다음 주 월요일날 일곱 시까지 들어와. 이건 출입증이야.
그리고, 이 일을 한다는 건 절대 비밀로 해야 돼.
한 모 : 예?
장혁수 : 그럼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동네방네 다 소문내고 다닐 건가?
한 모 : 아... 아닙니다!
장혁수 : 각하는.
한 모 : 예? (머뭇거리다가) 아...
각하는! 국가다!
장혁수 : 다음 주에 보자구.
휙 돌아서서 들어가는 장혁수.
S# 39 이발관. 낮.
멍하고 얌전하게 이발관으로 들어오는 한모.
기다리고 있던 경자와 진기가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한모는 그냥 구석으로 가더니, 모아 둔 신문 더미를 무심히 펼쳐본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경 자 : 무슨 일인교? 저 안에 들어가서 뭐 했는데?
한 모 : 진기야, 가게 문 닫아라.
진 기 : 예? 아직 대낮인데...
경 자 : 가서 뭐 했냐고?
한 모 : 아무 것도 안 했어.
경 자 : 그럼 일없이 사람을 오라가라 했단 말인교?
한 모 : ...
경 자 : 뭐가 있습디까, 저 안에?
한 모 : 있긴 뭐가 있어, 있을 게 있지.
경 자 : 뭐든 본 게 있을 거 아인교.
멍하니 안채로 들어가는 한모.
진 기 : 와, 우리 아저씨 출세했네.
아줌마, 진짜 문 닫아요?
경 자 : 닫긴 뭘 닫노!
S# 40 안채의 방. 낮.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고 누워 있는 한모. 한숨만 푹푹 쉬는데...
낙안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낙 안 : 아부지. 많이 아파?
한 모 : 안 아파.
낙 안 : 그럼 왜 누워 있어요?
한 모 : 생각하는 거야.
낙 안 : 무슨 생각?
한 모 : 살아날 생각.
낙 안 : (무슨 말인지 캄캄)
S# 41 (S#8의) 야산. 비 오는 밤.
빗줄기 속에서 한모가 손전등으로 예전의 그 구덩이를 비쳐보면...
포대 자루가 땅 위로 슬쩍 삐져나와 있다.
삽으로 그 위에 더욱 단단하게 흙을 메우는 한모.
Narr. :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청와대에 들어가실 때마다 항상 그 포대 자루가 걱정이 되셨다고 합니다.
갑자기 천둥이 치면서, 한모는 안씨의 환영을 보는데...
깜짝 놀라 눈을 부릅뜨는 한모. 그러나 주위엔 아무도 없다.
S# 42 이발관 앞. 새벽.
이발관 문을 빼꼼 열고 주위를 살피는 한모.
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발 가방을 품에 안고 청와대 쪽으로 뛰듯이 간다.
Narr. : 그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저는 아버지가 청와대 직원들의 머리를 깎아주게 된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S# 43 청와대 어느 방. 아침.
Narr. : 그 분의 머리를 직접 만지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죠.
통치자의 머리를 손봐주는 한모.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장혁수.
통치자 : 성실장.
한 모 : 네, 각하.
통치자 : 이번에 새로 생긴 한강다리 가 봤나?
한 모 : 아직 못 가봤습니다, 각하.
통치자 : 왜, 한 번 가보지 그래.
한 모 : 네, 각하.
통치자 : 사람들이 다리에 대해서 무슨 말들을 하나?
한 모 : (조심스럽게) ... 댕기기들 편해졌다고 합니다, 각하.
통치자 : (미소)
장혁수 : 제일, 제이, 제삼 한강교는 모두 각하의 영도력의 상징입니다.
통치자 : 성실장은 애가 몇인가?
한 모 : 아들놈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열 살입니다.
통치자 : 한참 시끄러울 때 낳겠군.
한 모 : 그렇습니다, 각하.
사실 그놈이 사사오입으로 태어난 놈입니다.
통치자 : 사사오입?
한 모 : 네, 각하. 넷이면 버리고 다섯이면 들인다고...
통치자 : 알아.
한 모 : 아, 예...
통치자 : 그게 어쨌는데?
한 모 : 실은 저희 부부가 결혼 전에 실수로 애를 갖게 된 거였습니다.
그걸 알게 된 게 임신한 지 5개월이나 지나서였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왜 사사오입이라는 말도 있고 말입니다. 이왕 5개월이니까 사사오입해서 사람으로 치자, 무조건 낳자, 그렇게 제가 우겼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지금도 저희 애를 부를 때 ‘사사오입에 낙안이’, ‘사사오입에 낙안이’ 그러기도 하고...
한모는 통치자가 재미있어 하리라 예상하고는 혼자 히죽이지만... 통치자는 웃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이 굳어진다.
긴장된 얼굴로 이발 마무리를 하는 한모.
통치자 : (거울에 머리를 비춰보며) 배운 놈들은 말이지, 그게 문제야.
사사오입이 뭐냔 말야. 나도 일본 군관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그 사사오입이라는 말, 다 일본에서 건너온 말 아니냔 말야.
장혁수 : 맞습니다, 각하.
통치자 : 마음 같아선 그 잔당들을 국회에서 말끔히 청소해 버려야 되는 건데...
예나 지금이나 나라 말아먹는 놈들은 배운 놈들이라구, 배운 놈들.
“에잇” 하면서 방을 나가는 통치자.
장혁수가 따라 나가면서 ‘왜 그런 말을 했냐’는 얼굴로 한모를 노려본다.
S# 44 벌판. 한낮.
허허벌판에 나무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 사형장.
한모 홀로 기둥에 묶여 있다.
일렬로 세워져 있는 총.
“준비! 사격!”
총구에서 불꽃들이 피고...
총을 맞은 한모, 마지막으로 힘겹게 속삭인다.
한 모 : 사사오입...
S# 45 안채의 방. 밤.
“사사오입” 신음 소리를 내다 퍼뜩 깨어나는 한모.
일어나 앉으며 가슴이 멀쩡한지 만져본다. 온몸은 땀에 젖어 있고...
경자와 낙안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한 모 : 내가 괜한 소릴 했어...
S# 46 청와대 어느 방. 아침.
통치자가 이발이 끝난 머리를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는데...
부동자세로 긴장하고 있는 한모의 이마에선 땀 한 줄기가 삐질 흘러내린다.
척 손을 올리는 통치자. 놀라는 한모.
그러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장혁수가 사각형 선글라스를 통치자에게 건넨다.
통치자 : (선글라스를 쓰고는) 어떤가?
한 모 : (머뭇거리다가) ... 맥아더 장군 같으십니다.
통치자 : 맥아더?
듣기 좋았는지 쓱 웃는 통치자. 선글라스를 벗어 한모에게 건넨다.
통치자 : 써 보게.
한모가 선글라스를 써보지만, 촌스럽기 그지없다.
통치자 : (장혁수에게) 자네도.
장혁수 : (선글라스를 쓴다)
한 모 : 각하께서 제일 잘 어울리십니다.
통치자 : 그래? 임자가 보는 눈이 있구만.
“허허허-” 하며 천진하게 웃는 통치자. 장혁수와 한모도 따라 웃는데...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오간다.
통치자 : 성실장, 나 머리 한 번 바꿔볼까?
한 모 : (유심히 보더니) 각하, 제 생각에는 지금이 제일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가리마를 가리키며) 오른쪽으로 2, 8.
통치자 : 그래? 성실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일어나며) 성실장. 우리 애만한 아들놈이 하나 있다고 했지?
한 모 : 네, 각하.
통치자 : 이번 일요일날 잔디마당에서 점심이나 먹지. 임자 식솔들하고 우리 집 애들하고 말야.
(장혁수에게) 자네도 애들 데리고 오게.
장혁수 : 네, 각하.
통치자 : (일본말로) 오늘 기분 더럽게 좋네.
장혁수 : (일본말로) 장군의 마음은 곧 국가의 마음이십니다.
통치자 : (일본말로) 당신은 아부를 너무 잘 하는 것 같아.
장혁수 : (일본말로) 감사합니다.
호탕하게 웃는 두 사람. 전혀 못 알아듣는 한모도 따라 웃는다.
S# 47 이발관 안채. 아침.
옷 찾아 입고 단장하고 하느라 부산한 한모 가족.
하와이안 셔츠에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바른 진기가 주변에서 얼쩡거리는데...
한 모 : 너는 우리 가족도 아닌데 어딜 따라오려고 그래.
진 기 : 조카라고 그러면 되잖아요.
한 모 : 가게나 보고 있어, 손님들 오시잖아. (경자에게) 빨리 해, 늦겠어!
낙 안 : 아부지, 내 고무신이 없어요.
한 모 : 고무신을 왜 신어. 지난번에 운동화 사줬잖아. 운동화 어딨어?
낙 안 : 장롱에.
한 모 : 운동화를 왜 장롱에 넣어 놔. 빨리 꺼내 신어. 거길 어떻게 고무신 신고 갈 생각을 해. 애나 여편네나 진짜.
경 자 : 와 내보고 신경질이고.
진 기 : 아저씨 제발요, 한번만. 이번 아니면 제 평생에 언제 청와대 구경 해 보겠어요.
한 모 : 글쎄, 안 돼. 가족들만 오라고 그랬다니까.
진 기 : 저 가족이나 다름없잖아요. 안 그래요?
경 자 : 운동화 여 있네.
한 모 : 찾았어?
진 기 : 삼촌, 제발요.
한 모 : 내가 왜 네 삼촌이야? 준비 다 됐어?
경 자 : 점심 먹는다면서 이렇게 일찍 가야 돼요?
한 모 : 초대하는 사람이야 점심이지만, 우린 미리 가서 대기를 해야지. 젠장할, 어딜 가봤어야지.
진 기 : 삼촌, 한번만요.
경 자 : 데려가 줍시다.
한 모 : 어딜 데려가.
경 자 : 안 되면 돌아오면 되는 거구.
진 기 : 삼촌!
S# 48 청와대 잔디마당. 낮.
한모 가족, 장혁수 부부와 낙안 또래의 아들, 그리고 박종만 부부와 몇몇 비서관 부부가 서 있고...
통치자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는다. 영부인, 영애, 영식과 함께...
장혁수 : 이놈이 아들놈입니다. 장래에 경호실장이 되겠답니다.
주위에서 웃음이 터진다. 장혁수의 아들은 장혁수와 똑같은 커플-룩으로 양복을 빼입고 있다.
한모 가족 앞으로 오는 통치자.
한 모 : 이쪽이 집사람이고... 아들놈입니다.
통치자 : (낙안에게) 네가 사사오입에 낙안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진다. 그러자 한모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낙 안 : 저는 성낙안인데요.
웃음소리에 낙안의 대답이 묻힌다.
S# 49 잔디마당 한쪽 구석. 낮.
멀리 만찬 테이블서는 어른들이 한담을 즐기는데...
나무 밑에서는 같은 또래인 낙안과 영식, 장혁수의 아들이 최고급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영 식 : 야. 너네 아빠, 두부 한 모지?
낙 안 : 뭐?
영 식 : 두부 한 모.
낙 안 : 아냐. 우리 아부지 성자, 한자, 모자야.
영 식 : 다 들었어. 두부 한 모잖아.
너네 아빠 이거지? 째까째까- 째까째까- (손가락으로 머리 깎는 시늉을 한다)
낙 안 : (무시해 버리면)
영 식 : 이거잖아. 째까째까- 째까째까- (얄밉게 낙안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이거 아니냐구? 째까째까- 째까째까-
낙 안 : 이씨-!
영식을 팍 밀어버리는 낙안. 영식이 뒤로 자빠진다.
영 식 : 야, 경호원 뭐해!
낙안에게 달려드는 장혁수 아들. 그러나 낙안이 몸싸움을 하다가는 금세 휙 넘어뜨리고... 장혁수 아들이 나무둥치에 머리를 박고는 엉엉 울기 시작한다.
영식도 장혁수 아들이 힘을 쓰지 못하자 과장된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깜짝 놀라서 달려오는 한모. 장혁수 아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영식부터 일으켜 세운다.
한 모 :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더 과장되게 우는 영식.
뒤늦게 달려와 한모를 밀치는 경호원들. 한모는 저만치 떠밀려서 엉덩방아를 찧고...
다친 데가 없나 영식의 머리를 꼼꼼히 살피는 경호원들. 그 사이 통치자와 장혁수, 박종만 등도 다가온다.
통치자 : 무슨 일이야?
영 식 : 얘가 밀어서... 엉엉엉!
경호원 : 다친 데는 없습니다.
박종만 : 경호실은 뭐 하는 거야? 전부 군기가 빠져서 말야.
미간이 찌푸려지는 장혁수, 박종만의 귀에 대고 차갑게 속삭인다.
장혁수 : 이게 군기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박종만 : 이것도 일종의 돌발 상황이야. 돌발 상황 대처가 늘 이런 식인가?
눈빛이 부딪히는 두 사람.
분위기가 냉랭해지는 걸 느낀 한모, 수습이라도 하려는 듯 낙안의 엉덩이를 때린다.
한 모 : 이놈이-. 이놈이 어디서-.
통치자 : 고마, 됐다.
한 모 : 죄송합니다, 각하.
낙 안 : 얘가 아부지보고 두부 한 모라고 그랬단 말이예요.
한 모 : 시끄러.
통치자 : 니가 진짜 그렇게 말했나?
영 식 : 아뇨.
한 모 : (낙안에게) 이놈이 거짓말까지.
낙안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한모.
낙안은 아픈 것보다는 너무 놀라서, 맞으면서도 한모를 멀뚱멀뚱 올려다보는데...
장혁수가 얼른 둘을 옆쪽으로 데리고 간다.
한 모 :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통치자가 그들 뒤에 대고 너그럽게 말한다.
통치자 : 고마 해라. 아들끼리 장난한 거 가꼬.
테이블로 돌아가는 통치자와 사람들.
계속 굽실거리는 한모를 안 보이는 구석으로 데리고 간 장혁수, 다짜고짜 무릎을 걷어찬다.
고꾸라지는 한모.
장혁수 : 야 이 새끼야, 여기가 어딘지 알아?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한모의 이마에 들이대는 장혁수.
장혁수 : 애새끼 교육 어떻게 시켰어? 누구 모가지 날아가는 꼴 보려고 그래?
부들부들 떠는 한모. 경자와 낙안이 천천히 다가오는데...
더 이상 어쩌질 못하는 장혁수, 총구로 한모의 이마를 거칠게 밀어버리고는 휙 돌아서서 간다.
장혁수가 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모.
S# 50 청와대 앞 길. 해질 녘.
후문을 통해 나오는 한모 가족.
한모가 절뚝거리며 앞장 서 걷고, 경자와 낙안이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데...
아무 말 없이 터벅터벅 걷기만 하는 세 사람.
낙안이 한모 옆으로 다가온다.
낙 안 : 아부지, 죄송해요.
한 모 : (말없이 앞만 보고 걷는다)
경 자 : 애가 죄송하대잖아요.
대답 없이 얼마 동안 걷기만 하던 한모, 결국...
한 모 : 괜찮다.
낙 안 : 아부지, 절 때려주세요. 저 때문에 아부지가 맞았잖아요.
한 모 : 괜찮다니까.
낙 안 : (계속 졸졸 따라가며) 아부지.
한 모 : 왜?
낙 안 : 많이 아파요?
한 모 : 괜찮다. 안 아프다.
경 자 : 니 아부지는 맨날 맞고 자라서 아무렇지도 않을 기다.
낙 안 : 아부지, 제가 크면 그 아저씨보다 더 높은 사람 될 게요.
경 자 : 그래, 니는 니 아부지처럼 맞고 살진 마라.
걸음을 멈추고는, 낙안에게로 몸을 낮추는 한모.
한 모 : 낙안아, 아버지는 괜찮다. 그 아저씨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냐.
경 자 : 허이구, 속도 좋아. 내가 뭐랬노? 니 아부지는 맞고 자라서 아무렇지도 않을 기라고-
한모가 쏘아보자 경자는 말끝을 얼버무린다.
낙안의 볼을 어루만져주는 한모. 그러더니 돌아서서 등을 내민다.
한 모 : 자, 업혀라.
낙 안 : 괜찮아요.
한 모 : 아버지가 오랜만에 업어보고 싶어서 그래. 자, 업혀.
낙 안 : 아부지 다리...
한 모 : 괜찮아, 아부지 다리 하나도 안 아퍼. 봐봐.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해 보인다)
경 자 : 그래 낙안아, 오랜만에 아부지한테 한 번 업혀봐라.
한모의 등에 업히는 낙안.
한모가 낙안을 업고 천천히 걸어간다.
노을 빛 아래 멀어지는 한모의 가족.
Narr. : 아버지는 그 날로 청와대와의 인연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셨죠.
S# 51 몽타쥬. 청와대 이발실. 낮.
Narr. : 그런데 때마침 청와대 확장 공사가 있었고, 그 때 청와대 부속실 안에 전문 이발소까지 생기게 됐는데...
아버지가 또 그 곳에서 일하게 되셨습니다.
이발만을 위해 깔끔하게 꾸며진 방 안.
장관이나 비서관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한모.
통치자의 면도를 해주는 한모. 이제는 떨지도 않고 여유만만이다.
그러나 여전히 장혁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고...
S# 52 이발관. 낮.
Narr. : 청와대 일 때문에 효자 이발관은 진기형이 맡을 때가 많아졌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진기가 발로 바닥을 비비며 춤을 추고 있다.
옆에서 구경을 하는 낙안.
진 기 : 낙안아, 이게 뭔지 아냐?
낙 안 : 아니.
진 기 : 이게 바로... 트위스트란 거야.
Narr. : 진기형은 미국에 한 번 가 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도 만나고, 그레이스 켈리도 만나고, 무하마드 알리도 만나보고 싶다고 했죠.
이발관 안으로 들어오는 한모.
한 모 : 뭐 하냐, 먼지 나게.
진 기 : 이게 트위스트에요, 트위스트.
저 월남 가서 베트공하고 싸울 때, 총알 날라오면 이걸로 피할 거에요. 이렇게~ 이렇게~
한 모 : 지랄을 해요, 지랄을.
Narr. : 미국에 갈 방법이 없던 진기형은 월남에 가면 미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S# 53 베트남 평야. 낮. (흑백 필름)
완전무장을 한 진기가 동료대원들과 함께 논바닥을 헤치며 나아간다.
고통과 피로로 일그러진 얼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헬기의 굉음.... 포탄의 폭발과 화염.
S# 54 공항. 낮. (흑백 필름)
Narr. : 그런데 정작 미국에 간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꽃을 든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 일행이 트랩 위에서 손을 흔드는데...
말쑥한 양복 차림의 한모, 수행원 뒤쪽에서 고개를 내밀어 보려고 왔다갔다 안간힘을 쓴다.
S# 55 몽타쥬. 흑백사진들의 연결.
대형 맥도날드 햄버거 매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한모.
매장 안. 수행원들과 한모가 주문을 하다가 시비가 붙었는지 점원과 삿대질을 하고... 한모는 매니저 앞에서 태권도 기마 자세까지 취해 보인다.
햄버거의 속을 펼쳐놓고 빵, 양파, 고기를 차례대로 먹는 한모.
사막을 횡단하는 롤스로이스와 승용차 행렬. 차마다 태극기가 꽂혀 있는데...
장면이 바뀌면, 수행원들과 한모가 고장 난 롤스로이스를 열심히 밀고 있다.
찜찜한 얼굴로 롤스로이스 안에 앉아 있는 통치자.
백악관 앞. 수행원 몇 명과 함께 잔뜩 폼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한 한모.
만찬장. 한모가 존슨 대통령과 악수를 한다.
모두들 환영 연설을 경청하는데, 한모는 신기한 듯 와인만 홀짝거리고...
S# 56 이발관 앞 길. 낮.
커다란 여행 가방을 짊어지고 청와대 후문을 나오는 한모.
Narr. : 그쯤 되자 동네 사람들도 드디어 아버지가 대통령 전용 이발사라는 걸 알게 되었죠.
효자 이발관 앞에 모여 있는 수많은 동네 사람들. 한모가 도착하자 박수를 보낸다.
어리둥절한 한모. 최씨가 제일 친한 척을 하는데...
사람들 속에서 안씨를 발견하는 한모.
안씨는 아무 생각 없는 얼굴인데, 한모는 괜히 허둥대며 이발관 안으로 들어간다.
S# 57 몽타쥬. 이발관. 낮.
이발관에 와서 한모에게 머리를 맡긴 채 이런저런 청탁을 하는 동네 사람들.
동네사람1 : 우리 회사 사장님한테 선물하려고 그러는데... 양주 좀 좋은 거 구할 데 없을까요?
최 씨 : 아주 친한 선배인데 말야... 춘천에서 출마를 하고 싶다는데 말야... 공천을 받아야 되는데... 그거 좀 어떻게...
동네사람2 : 거 참, 결제가 안 떨어져서 말야!
파출소장 : 다음 달에 진급 심사가 있거든?
동네사람3 : 이종사촌동생인데, 2대 독자야. 우리 이모님이 절대 군대는 안 된다고 그래서... 손가락을 자를 수도 없고...
동네사람2 : 허가가 안 나와서 말야!
왕 씨 : 저기... 불나방 김마담 있잖아. 외상술값 빨리 갚으라고 하는데, 내가 돈이 어딨어. 근데 자꾸 깡패들을 쓴다고 겁주잖아. 걱정이네.
동네사람2 : 여권이 안 나와서 말야!
동네아줌마 : 우리 애가 머리가 나빠서... 그래도 경기 고등학교... 어떻게 뒤로 좀 길이 없을까요? (아줌마의 파마머리를 앞에 놓고 난감해하는 한모)
S# 58 몽타쥬. 이발관. 낮.
Narr. : 어찌 됐든, 그 때가 우리 집의 최고 전성기였습니다.
간판의 “효자 이발관” 글자 양쪽에 태극 문양을 그려 넣는 한모.
번쩍거리는 최신형 이발 의자들을 열심히 닦는 경자.
낙안 주위에서 뛰어다니던 강아지 한 마리--낙관이--가 문 밖을 향해 짖으면...
그 곳에 더플-백을 맨 진기가 서 있다. 왼손에 흰 장갑을 끼고...
달려 나와 진기의 품에 안기는 낙안. 경자도 반갑게 반기고...
진기 옆으로 와 어깨를 퍽 치는 한모. 그리고는 씨익 웃어준다.
Narr. : 제대를 한 진기 형도 다시 돌아와 일하게 됐는데...
형은 말도 없고 까불지도 않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 되어 있었죠.
그리고 왼손에는 늘 흰 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왼손에 흰 장갑을 끼고 이발을 하는 진기. 이발 받는 손님은 영 찜찜한 얼굴이다.
Narr. : 손님들은 형의 장갑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죠.
청소를 하는 진기를 말없이 지켜보는 한모.
Narr. : 그래도 가끔은 원래의 진기 형이 되기도 했습니다.
청소를 하던 진기, 라디오에서 트위스트 음악이 나오자 낙안과 눈을 마주친다.
낙안만 알아보게 트위스트를 춰 보이는 진기.
한모가 들어오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청소를 하고...
S# 59 이발관 앞. 밤.
한층 깔끔해진 이발관의 외경. 간판에도 불이 들어와 있다.
카메라가 천천히 crane-up하면...
멀리 청와대 뒤쪽으로는 어둠에 잠긴 북악산이 펼쳐져 있다.
S# 60 북악산. 밤.
산짐승처럼 숲을 헤치며 빠르게 움직이는 뭔가가 있다.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군복을 입고 총기로 무장한 십여 명의 사내들. 북한 특수부대원들이다.
그들 앞에 펼쳐진 서울의 야경.
지휘관 : 고저, 여기가 서울이네?
대원1 : (지도를 보고는, 청와대 쪽을 가리킨다) 원수의 심장이 가까워졌습네다.
지휘관이 수신호를 보내면, 대원들이 일제히 배낭 속에서 평상복을 꺼내 갈아입는데...
대원 하나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괴로워한다.
대원2 : 대장 동지.
저... 잠깐... 일 보고 오겠습네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다녀오라’고 손짓하는 지휘관.
잠시 후, 대원 하나가 또...
대원3 : 대장 동지. 저도 좀... 급합네다.
지휘관 : (인상을 쓰며) 먼저 출발할 테니 뒤따라 오라우.
대원3이 뒤로 처지고, 나머지는 출발하는데...
얼마 못 가 대원들 사이에 동요가 인다.
대원4 : 대장 동지... 저도 좀...
대원5 : (아랫배를 움켜쥐고) 고저, 저도 좀 편치 않습네다.
금방 폭발할 것처럼 인상을 쓰는 지휘관.
S# 61 같은 곳. 시간의 경과.
모든 대원들이 숲 속 여기저기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고... 지휘관 역시 잔뜩 힘을 주고 있다.
어디선가 부스럭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나자, 긴장하는 지휘관.
곧 플래시 불빛과 함께 순찰을 도는 수방사 군인 두 명이 나타나는데...
지휘관 얼굴 위로 떨어지는 플래시 불빛.
군인1 : (놀라서) 뭐... 뭐야?
군인2 : (자세히 보고는 어이가 없는 듯) 아저씨, 여기서 뭐합니까?
지휘관 : 고저 근무중이야요.
그냥 지나쳐 가려다가는, 뭔가 이상해서 다시 돌아보는 군인2.
지휘관의 몸에서 총구가 삐죽 삐져나와 있다.
놀라서 경계 자세를 취할 때... 탕탕! 어느 새 지휘관의 권총이 불을 뿜고... 군인들이 쓰러진다.
잠시 후, 격렬한 총소리가 북악산의 어둠을 뒤덮는다.
S# 62 이발관. 비 오는 밤.
최씨, 왕씨 등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앉아 화투판을 벌이는데...
한모는 관심이 없는 듯 의자에 앉아 “민족의 횃불”이라는 책을 진지하게 읽고 있다. 통치자의 다양한 모습이 화보로 담겨 있는, 통치자의 평전.
아저씨들은 심심풀이로 콩 삶은 것을 집어먹고 있고...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흐른다.
뉴 스 : -- 지난달부터 시작된 마루구스병의 전염이 갈수록 확대되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관계 부처에서는 이 병이 지난달 무모한 남침을 감행했던 북괴 무장공비 집단에 의해 전염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민간인이 마루구스병에 감염되었을 경우 도주에 성공한 북괴 무장공비 잔당과의 접촉이 있었을 것이라 보고, 감염자에게는 보안법을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중앙정보부에서는 감염자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포상금 200만원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
화투에 열심인 아저씨들은 방송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최 씨 : 야, 200만원이면 집 한 채네.
왕 씨 : 다 쓸데없는 개소리야. 설사하면 다 빨갱이라는 소리 아냐 저게.
손 씨 :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겠어.
최 씨 : 나라가 하는 일은 다 옳은 거야. 나중에 보라구.
책 속의 통치자 사진을 보던 한모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하고는, 책을 번쩍 치켜들고 벽에 붙은 통치자 사진과 비교해 본다.
한 모 : 어- 이거 틀렸어! 이게 아냐!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는 아저씨들.
한 모 : 각하 머리는 오른쪽으로 2대 8이예요! 근데 이거는 왼쪽으로 2대 8이잖아! 이게 왜 이러지? 이거 사기야, 사기!
왕 씨 : 그거 인쇄할 때 실수로 필름을 뒤집어 끼워서 그래.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참...
한 모 : 그래... 요? (무안)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 각하를 뒤집고 이러면...
경자가 콩 한 접시를 들고 안채에서 나온다.
왕 씨 : 제수씨, 이렇게 자꾸 갖다 주면 뭘로 메주 담근대?
경 자 : 많이 했으니까 맘 놓고 드세요.
왕 씨 : (기다렸다는 듯 연신 집어먹으며) 콩 먹어서 힘나는지, (패를 내리치며) 자, 났어요!
쓰리고에 십삼 점이니까 자네는 피박이고... 그럼 자넨 32원이네. 자네는 16원씩 해서...
문 씨 : (왕씨에게) 오늘 뭔 날이여?
왕 씨 : 몰라. 화투짝이 손에 척척 붙어버리네.
최 씨 : 속이는 거 아냐?
왕 씨 : 이 인간은 입만 열면 개소리야.
최 씨 : 뭐, 개소리?
왕 씨 : 왜 물려고?
손 씨 : 아, 됐어! 패나 돌려.
패를 섞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왕씨.
최 씨 : 어디 가?
왕 씨 : 속이 왜 이러지 갑자기?
손 씨 : 거 봐. 콩 많이 먹으면 설사한댔잖아.
최 씨 : 돈 세보지 말고 빨리 와. 아직 판 안 끝났어.
다시 패가 돌고...
손 씨 : 에이, 쌌네.
최 씨 : 그 똥은 내가 먹지.
손 씨 : 싸는 놈 따로, 먹는 놈 따로네.
문 씨 : 내가 그 똥 먹을려고 그랬는데.
최 씨 : 그렇게 먹고 싶으면 왕씨 따라 가보지 그래.
문 씨 : 묽은 똥은 싫어요.
키득거리는 사람들.
S# 63 안채의 화장실 앞. 비 오는 밤.
최씨가 와서 노크를 한다. 안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
최 씨 : 아직도 자넨가?
왕씨(E) : 응.
최 씨 : 벌써 몇 번째야?
왕씨(E) : 다섯 번째.
최 씨 : (어이가 없는 듯) 참 나...
이발관 쪽으로 돌아가던 최씨,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멈춰 서더니 화장실을 돌아본다.
S# 64 왕씨네 만두가게. 아침.
왕씨가 가게 정리를 하면서 계속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는데...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가게로 들어온다.
예의바르게 생긴 사내1과 달리 사내2는 더할 나위 없이 험악하다.
사내1 : 왕철구씨.
왕 씨 : 예...?
사내1 : 잠시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왕 씨 : 예? 누구... 신지?
사내2 : 너 계속 설사하지? 너 마루구스병이지? 누구한테 병균 받았어, 이 새끼야?
왕 씨 : (황당) 예? 뭐요?
사내1 :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같이 좀 갑시다.
사내2 : 너 이 새끼, 쫌전에도 설사하고 나왔지?
왕 씨 : 굵직한 거였는데...
사내2 : 내가 너 쌀 때 변소 앞에 서 있었어 새끼야. 아예 줄줄 흐르더만.
왕 씨 : 아닌... 데...
사내1 : 잠깐 손 좀 주시겠습니까?
왕 씨 : 왜요...? (손을 내밀면)
사내1이 곧장 왕씨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사내2가 왕씨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나간다.
가게 앞에 세워져 있던 지프차에 태워지는 왕씨.
S# 65 이발관. 아침.
한모가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진기가 가게로 들어온다.
진 기 : 아저씨. 왕씨 아저씨가 붙잡혀 갔대요.
한 모 : 왜?
진 기 : 설사 한다구요.
한 모 : 그럼 약 먹어야지.
진 기 : 정보부에서 나와서 잡아갔대요.
한 모 : ?
진 기 : 그거 있잖아요 왜, 설사병. 마루구스병인가 뭔가.
한모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안채에서 낙안이 잠이 덜 깬 눈으로 나온다.
낙 안 : 아버지. 아랫배가 쌀쌀 아파요.
놀라서 돌아보는 한모.
S# 66 안채의 화장실 앞. 아침.
한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똥 퍼내는 구멍을 통해 화장실 안을 들여다본다.
마당의 경자에게로 오는 한모.
한 모 :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애 간수 잘 해야겠어.
화장실에서 나오는 낙안. 손에 채변 봉투가 들려 있다.
한 모 : 뭐하는 거야?
낙 안 : 학교에서 대변 검사 해요.
깜짝 놀라서 채변 봉투를 빼앗는 한모.
한 모 : 네 건 안 돼! 왜 애들 변을 검사하는지 알어? 애들 거만 봐도 그 집 상태를 훤히 알 수 있는 거라구.
경 자 : 그라모 이게 마루구수 병을 검사하려는...
(채변 봉투를 뺏으며) 거 주이소. 내가 대신 볼랍니더. 단단한 걸로.
한 모 : 잠깐.
경 자 : 와요?
한 모 : (다시 봉투를 뺏으며) 똥에도 남자 꺼 여자 꺼가 있는 거야.
화장실로 들어가는 한모.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한모가 채변 봉투를 낙안에게 건네준다.
낙 안 : 고맙습니다.
경 자 : 꼭 니꺼라고 그래야 된다. 아부지꺼라 그러면 안 된데이.
낙 안 : 예.
조심스럽게 봉투를 쳐들고 안채로 향하는 낙안.
한 모 : 조심해. 누가 본다.
재빨리 품안에 봉투를 넣는 낙안.
S# 67 중앙정보부 조사실
왕씨가 의자에 앉아 있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S#65의) 사내1, 2.
왕 씨 : (힘들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발관에서 삶은 콩을 먹었어요. 밥을 안 먹어서 배가 고팠어요. 근데 거기 가기 전에 만두 빚느라고 땀을 많이 흘렸어요. 그래서 물을 계속 마셨어요.
사내2 : 야 이 새끼야, 그럼 공비는 언제 만났어?
왕 씨 : 제가 왜 공비를 만나요.
사내2 : 이 새끼가!
사내1 : 잠깐만.
왕씨. 가만히 보니까 좋은 사람 같은데...
내가 방법 하나 가르쳐 줄게.
이 병은 말야, 전염병이거든? 그러니까 누군가 왕씨한테 이 병을 전염시킨 거란 말야.
그게 누군지만 말해. 그거 딱 한 사람만 말해주면 풀어줄게.
귀가 솔깃해지는지 사내1을 뚫어지게 보는 왕씨.
사내1은 지휘봉의 끄트머리에서 머리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짚어가며 설명을 해 준다.
사내1 : 왕씨가 누군지만 말해주면, 우린 그 사람한테 가서 또 물어보는 거야. 누구한테 전염됐느냐. 그럼 그 다음 사람이 또 나올 거 아냐. 그럼 또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 그렇게 다음 사람, 다음 사람... 그러면 결국에는 공비하고 접촉한 놈이 누군지 색출되는 거란 말야.
그러니까 왕씨는 부담 없이 한 사람만 말해 주면 돼. 우린 그 사람한테 가서 그냥 물어보기만 할 거야. 잡아 가두는 게 아냐. 그냥 물어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왕 씨 : ... 예.
사내1 : 자, 그러니까 한 사람만 말해. 누구한테 전염된 거 같애?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마음을 굳히는 왕씨.
왕 씨 : 실은...
S# 68 최씨네 쌀집 앞. 낮.
최씨가 사내1, 2에게 양팔을 잡힌 채 지프차로 끌려간다.
최 씨 : (나름대로 반항) 이거 왜 이래! 나 공화당 당원이야, 공화당 당원! 내가 효자동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 알아?
S# 69 청와대 이발실. 낮.
통치자의 이발을 해주는 한모. 장혁수와 박종만이 서 있고, 박종만은 정세 보고를 한다.
박종만 : 민주정의 의사회에서 어제 양심선언이란 걸 했습니다, 각하.
그 사람들의 주장은, 이번 마루구스병이 단순한 유행성 대장염과 큰 차이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장혁수 : (나지막이) 그런 놈들부터 먼저 잡아넣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박종만 : (무시하며) 일단은 체포된 마루구스병 환자들을 돌려보내는 게 대세의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각하.
장혁수 : 어떻게 부장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마루구스병 사태는 복잡한 현 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모르십니까.
박종만 : 장실장!
통치자 : 그 민주 의사회 말이오.
박종만 : 네, 각하.
통치자 : 소속된 사람이 얼마나 되지?
박종만 : 스무 명 정도 됩니다.
통치자 : (기분이 언짢다) 겨우 스무 명 가지고 겁을 먹는단 말이요?
박종만 :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의사들이 몇 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론의 동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각하.
장혁수 : 만일 조금이라도 여론의 동요가 있었다면 전국에 깔려 있는 제 개인 정보망을 통해 벌써 감지가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매우 조용합니다, 각하.
지금은 여론을 의식하기보단 시국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통치자가 갑자기 일어나려고 하자, 한모가 얼른 흰 천을 치워준다.
통치자 : 전부 잡아넣고 빨리 해결하시오. 문제가 생기면 장실장한테 보고하고.
통치자가 이발실을 나가고, 장혁수가 따라 나간다.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지는 박종만. 이발 의자를 주먹으로 퍽 치는데... 다른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한모, 물건들을 놓치며 와르르 소리를 낸다.
노려보는 박종만.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한모.
S# 70 이발관. 낮.
이발 의자를 젖혀놓고 쉬고 있는 장혁수. 한모가 장혁수를 마사지해 주고 있다.
장혁수의 부관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장혁수 : 그런 약해빠진 놈이 한 나라의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것도 선배라고...
한 모 : (눈치를 살피며) 저...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장혁수 : 뭐?
한 모 : 마루구스병 말입니다.
장혁수 : 그건 왜?
한 모 : 저희 동네에도 한 분 잡혀가서... 어떻게 되나 해서...
장혁수 : 당연히 조사를 받아야지.
한 모 : 그렇겠죠? 당연히 조사를... 네, 맞습니다.
장혁수 : 성씨.
한 모 : 예?
장혁수 : 일이나 잘해.
한 모 : 예.
그 때, 아이들 몇 명이 이발관 창밖에 몰려와 떠들기 시작한다.
아이들(E) : 물똥 싼대요! 물똥 싼대요! 얼레리 꼴레리!
낙안이는 물똥 싼대요! 얼레리 꼴레리!
당황한 한모, 얼른 창가로 가서 아이들을 쫓는다.
한 모 : 저리들 가. 낙안이 엄마랑 시장 갔어.
아이1 : 낙안이 변소 들어가는 거 봤는데요.
아이2 : 저도 봤어요!
아이3 : 저도요!
한 모 : 낙안이 엄마랑 시장 갔다니까.
이놈의 자식들 조용히 못할래? 딴 데 가서 놀아.
때마침 안채에서 나오는 낙안.
낙 안 : 아부지, 저 물똥 쌌어요.
아이들 : 거봐요! 쌌대잖아요!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한모를 돌아보는 장혁수.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슥 일으키는데...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한모.
한 모 : 저... 그게 아니고... 얘가 계속 콩을 먹더니...
아... 아니, 제가... 제가 지금 당장 이놈을 파출소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진짜 마루구스병인지 아닌지 조사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가자 이놈!
한모가 다짜고짜 낙안의 귀를 잡고 끌고 나간다.
S# 71 효자동 거리. 낮.
씩씩거리며 낙안을 끌고 가는 한모. 낙안은 그 위세에 눌려 말도 못 하고 따라간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 돌아보고...
Narr. : 왜 그 때 설사병에 걸렸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제가 설사를 하고 있었다는 거였죠.
S# 72 효자동 파출소. 낮.
낙안을 데리고 들어오는 한모. 낙안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가득한데...
때마침 파출소장이 소장실에서 나온다.
한 모 : 안녕하세요, 소장님.
소 장 : 어이구 성실장. 웬일이야?
한 모 : 이놈이 자꾸 설사를 해서요.
근데 지금 경호실 장실장님이 가게에 와 있거든요.
소 장 : 그래서?
한 모 : 제가 청와대 이발사 아닙니까. 자식놈이 설사를 하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소 장 : (피식 웃는다) 그래서... 모범을 보이겠다...
낙 안 : ... 아부지.
한 모 : 왜?
낙 안 : 저 여기 싫어요.
한 모 : 그러길래 왜 물똥을 싸!
낙 안 : (고개를 떨군다)
한 모 : 학교에서 안 배웠어?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야! 죄 없는 사람은 절대 안 잡아가.
(소장에게)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저 갑니다.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한모.
낙안이 그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S# 73 같은 곳. 해질 녘.
아까와는 다르게, 쭈뼛쭈뼛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모.
순경 하나만 남아서 일을 보고 있다.
한 모 : 저기... 소장님은요?
순 경 : 나가셨는데요.
한 모 : 낙안이는...? 우리 애...
순 경 : 종로경찰서로 보냈는데요.
한 모 : 거긴 왜요?
소 장 : 원래 시국 사범은 서로 인계하게 돼 있어요. 거기 가서 찾아오세요.
한 모 : 그냥... 겁주려고 그랬던 건데... 애를 뭐 하러...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짓는 한모.
S# 74 종로경찰서 유치장. 낮.
사람들로 가득 찬 유치장 안.
변기에서 변을 보고 있는 낙안. 그 다음으로 최씨가 서 있고, 남자들 여러 명이 쭉 줄을 서 있다.
남자1 : 야, 어린놈이 뭘 그렇게 오래 봐?
최 씨 : 조금만 참어. 다 큰 사람이 왜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
남자1 : 애가 어른들보다 더 자주 보잖아. 너 벌써 몇 번째야?
낙 안 : 저 몇 번 안 봤어요. 그리구... 다 끝났어요.
바지를 추슬러 입고는, 줄 맨 뒤로 가서 다시 서는 낙안.
남자2 : 줄을 또 서냐?
낙 안 : 언제 또 급해질지 몰라서요.
남자2 : 애가 영악해가지고.
최 씨 : (힘을 주며) 거... 애라고 너무... 말 함부로들 하지 마...
그 때 전경 하나가 유치장 문을 연다.
전 경 : 모두 밖으로 나와.
S# 75 이송 버스 안. 낮.
낙안과 최씨, 남자들이 어슬렁거리며 자리를 잡는데... 전경이 뒤따라 올라온다.
전 경 : 빨랑 자리에 앉아! 대가리 숙여!
거기 맨 뒤에 대가리 든 새끼 이리 나와.
남자1 : 이놈아, 내가 니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야.
남자1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전경, 다짜고짜 군홧발로 정강이를 차고는 곤봉으로 내리친다. 신음을 토하며 바닥에 뻗는 남자1.
전 경 : 대가리 드는 새끼 있으면 죽을 줄 알아!
버스 안에 공포 분위기가 도는데...
누군가 방구를 뽕- 낀다
전 경 : 어떤 새끼야!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방구를 끼기 시작한다.
전 경 : 드러운 새끼들...
버스가 출발한다.
S# 76 종로경찰서 형사과. 낮.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시큰둥한 형사 앞에 한모가 서 있다.
형 사 : 그거 상부로 이첩됐죠.
한 모 : 그럼 어느 경찰서로 간 겁니까?
형 사 : 경찰서가 아니라, 상부로 넘어갔다니까요.
한 모 : 상부... 라면...
형 사 : 그야 간첩 잡는 데겠죠.
한 모 : 우리 애는 아직 어린앤데...
형 사 : 간첩에 연령 제한 있어요?
한 모 : 그래도...
갑자기 겁이 나는지 눈빛이 흔들리는 한모.
S# 77 이발관 안채 마당. 저녁.
호박 나물을 말리던 경자, 한모가 안채로 들어오자 나물을 던져두고 달려온다.
경 자 : 나가이는요?
한 모 : (대답없이 마루로 올라선다)
경 자 : 나가이는요?
한 모 : 걱정하지 마. 내일 장실장 만나볼게.
경 자 : (울먹울먹) 나가이는요? 봤습니꺼, 몬 봤습니꺼?
한 모 : ... 보진 못했어.
경 자 : 그라모?
한 모 : ...
갑자기 나물을 한모에게 집어던지며 대드는 경자.
경 자 : 나가! 나가, 이 사람아! 나가이 찾아와! 나가이 찾아오란 말이다!
한 모 : 어허, 이 사람이 왜 이래?
경 자 : 나가! 퍼뜩 나가서 나가이 찾아오란 말이다! 어데 빈손으로 돌아오노!
한모를 따라가며 나물을 던지다, 이제는 맨손으로 때리기 시작하는 경자.
한 모 : 말로 해, 말로. 장실장 땜에 어쩔 수 없었어. 쌍심지를 켜고 옆에 서 있는데 낸들 어떡하냐구?
경 자 : 다 필요 없다! 당장 가서 나가이 데리고 온나!
한 모 : 알았어, 내일 가서 데리고 올게.
아- 그만 좀 해! 나 무시하는 거야? 나 청와대 이발사야!
그러다가 경자에게 더 얻어맞고...
S# 78 중앙정보부 분실 지하 복도
복도를 따라 방들이 나 있고, 벽에는 꽃과 나무 등을 그린 액자들이 쭉 붙어 있어 평화로운 느낌을 물씬 풍기는데...
방마다 신음과 비명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 곳은 모두 고문실이다.
S# 79 고문실
전기 고문 의자에 묶여 있는 최씨. 전압이 올라가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
스위치를 내리는 요원1.
최씨가 실없이 웃기 시작하는데... 요원1도 같이 따라 웃는다.
사내1 : 그만 좀 웃어라.
최 씨 : 너무 웃기잖아요...
사내1 : 야, 이건 고문이야. 네가 괴로워해야지.
최 씨 : 죄송해요... 근데 너무 웃긴 걸 어떡해요... 설사했다고 고문 받고...
사내1 :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봐. 너 간첩 만났지?
최 씨 : 안 만났어요.
다시 스위치를 올리는 요원1. 온몸을 떠는 최씨.
사내1 : (스위치를 내리고) 너 설사 했잖아. 설사 했어 안 했어?
최 씨 : 했죠...
사내1 : 그게 간첩 만났다는 얘기 아냐. 너 간첩 만났지?
최 씨 : 아닙니다요...
저 근데... 화장실 좀...
사내1 : 화장실 보내줄 테니까 한 번만 ‘예’ 해 봐.
최 씨 : 헉...
사내1 : 설사는 한 거지?
최 씨 : 예.
사내1 : 그럼 간첩 만난 거지?
최 씨 : 헉...
사내1 : 간첩 만났지?
최 씨 : 헉... 예...
사내1 : 진작 그랬어야지.
최씨를 풀어주는 사내1.
S# 80 옆 고문실
낙안 혼자서 전기 의자 위에 우두커니 앉아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이 방의 전기 의자는 최신식 이발관 의자를 개조한 것이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젊은 요원.
낙안을 한 번 흘끔 보고는, 전기 의자의 높이를 조정하려고 하는데... 방법을 잘 모르는지 헤맨다. 그러자 낙안이 일어나서 별 힘 안 들이고 턱 높여준다.
낙안의 손가락에 전선을 연결하기 시작하는 요원.
요 원 : 처음이니?
낙 안 : 예.
요 원 : 처음에는 좀 힘들 거야. 그래도 쫌 지나면 익숙해지니까, 조금만 참아, 응?
낙 안 : 예.
요원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는 게 마치 정신박약아 같은데, 말은 또 여자처럼 한다.
요 원 : 근데 너같이 어린 애가 왜 이런 데를 왔니?
낙 안 : 설사 한다구요.
요 원 : 어쩌다 그랬어. (서류를 넘기며 의례적으로) 자, 그럼 읽는다.
‘본인이 마루구스병에 걸리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입니다.’ 맞니?
낙 안 : 아뇨.
요 원 : (역시 의례적으로 서류를 내려놓으며) 자, 그럼 고문을 시작한다.
전기 스위치를 올리는 요원. 낙안이 온몸을 떨고... 그 사이 요원은 옆에 놓여 있던 선데이서울을 들척거린다.
잠시 후, 스위치를 내리는 요원. 낙안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물 한 컵을 가져다주는 요원.
요 원 : 참을만 하지?
낙 안 : 예. 근데 입에서 비린내가 나요.
요 원 : 원래 그런 거야. 넌 어린애니까 조금만 올릴게.
낙 안 : 고맙습니다.
요 원 : (그 말에 낙안을 한 번 슬쩍 보고) 자, 그럼 한 번 더 읽는다. ‘본인이 마루구스병에 걸리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니지?
낙 안 : 예.
요 원 : (스위치를 잡고) 준비됐니?
낙 안 : 예.
스위치를 올리는 요원. 그러더니 곧 전압 레벨을 슥 낮춰준다.
Narr. : 전기 고문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저씨들은 그걸 참지 못했고, 결국 자술서라는 데다가 모두 싸인을 하고 말았죠.
S# 81 청와대 이발실. 낮.
장혁수에게 안마를 해 주는 한모.
슬슬 눈치를 보더니, 옆에 준비해 놨던 보자기를 든다.
한 모 : 저... 실장님. 이거...
장혁수 : 뭔가?
한 모 : 인삼입니다. 저희 집사람이 고향에서 가지고 온 건데... 최고 등급 인삼이랍니다. 일반인에겐 안 파는 건데...
장혁수 : 그래서?
한 모 :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주셨는데... 보답 한 번 못 해 드리고...
그냥... 감사의 표시로다가...
장혁수 : 그래서?
그 강한 눈빛에 눌려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한모.
한 모 : 제 아들놈이 말입니다. 상부 기관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제 아들놈 이름이 성낙안입니다. 성, 낙, 안.
실장님께서 어떻게 좀...
안 되면 제가 각하께라도 직접...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권총을 꺼내 한모의 이마에 들이대는 장혁수.
장혁수 : 지금이 어느 땐줄 알고 경호실장인 나한테 청탁을 해?
지금은 국가 위기 상황이야, 위기상황! 정말로 죽고 싶나?
총구에 힘을 주어 한모의 이마를 쭉 밀더니, 손잡이로 한모를 퍽 후려치는 장혁수.
쓰러지는 한모.
돌아서서 방을 나서는 장혁수. 그러나 손에는 인삼 박스가 들려져 있다.
주저앉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한모.
S# 82 옆 고문실
전기 의자에 앉아 있는 낙안.
요원이 백열전구 하나를 낙안의 입에 다정하게 물려준다.
요 원 : (다정하게) 자, 올릴까?
낙안이 끄덕거리자, 요원이 스위치를 올리고... 전구에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요 원 : 와, 되네.
고개를 끄덕거리는 낙안.
생각에 잠기는 요원.
이번에는 낙안의 몸에서 나온 전선을 따라 깜박이 등이 걸려 있고... 낙안은 하모니카를 물고 있다.
준비됐냐고 눈으로 묻는 요원. 낙안이 고개를 끄덕거리면, 다시 스위치가 올라가고... 깜박이 등들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데...
낙안이 하모니카 장치로 동요를 불기 시작한다. 그러자 음악에 맞춰 불빛들이 앙증맞게 깜박깜박거린다.
요원도 음악에 맞춰 깡충깡충 춤을 추는데...
그 때...
문이 벌컥 열린다.
박종만이 부하 직원 서넛과 함께 들이닥친 것.
방 안에 벌어진 꼴을 보고는 눈이 뒤집히는 박종만.
박종만 : 이 새끼, 이게 뭐하는 거야!
샌드백 때리듯이 요원를 두들겨 패는 박종만. 마지막에는 아예 머리로 들이박아 다운시킨다.
박종만 : 이 따위 짓이나 하고 있으니까 결과가 안 나오지!
야, 끝까지 올려!
부하 직원이 전압 레벨을 쭉 올린다. 고통에 떠는 낙안. 주위의 등들이 점점 밝아지더니, 결국 팍 하고 모두 터져 버리고...
스위치를 내리라고 손짓하는 박종만.
박종만 : 니 아버지도 설사했지?
낙 안 : 아... 뇨...
박종만 : 그렇다고 말하면 내보내 주마. 니 아버지 설사했지?
낙 안 : 아뇨...
박종만 : 설사했지?
낙 안 : 아뇨....
Narr. :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를 잡아넣어서, 아버지와 친한 경호실장 아저씨까지 궁지에 몰아넣고 싶었답니다.
박종만 : 설사했지?
낙 안 : 아뇨...
박종만 : 제발 아버지가 설사했다고 말해 줘. 설사했지?
낙 안 : 아뇨...
박종만이 낙안의 멱살을 잡고 몇 번 흔든다.
박종만 : 더 올려.
스위치가 올라간다. 그러자 박종만도 감전이 되어 몸을 덜덜 떠는데...
비명을 지르는 박종만의 얼굴 위로...
Narr. : 저는 끝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았죠.
S# 83 중앙정보부 기자실. 밤.
Narr. : 그래서 결국, 자술서에 도장을 찍었던 다른 아저씨들이 모두 유명해졌을 때도, 저는 조용히 고문만 받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 안으로 박종만이 들어와서 단상에 선다.
박종만 : 발표하겠습니다. 거 뒤에 좀 앉아 주세요. 줄도 좀 맞추고.
좋습니다.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중앙정보부는 지난 10개월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청와대 주변 효자동 일대를 거점으로 하는 고정간첩 조직, 일명 ‘고스톱 간첩단’을 색출하는 데 성공, 이들을 전원 검거, 일망타진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박종만의 옆에는 피라미드처럼 그려진 조직 구성도가 붙어 있는데... 그 안에 최씨의 사진도 있다.
박종만 : 이들 고스톱 간첩단에는 놀랍게도 교수, 의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가 지난번 남침을 감행했던 북괴 무장공비 집단의 잔당들과 접촉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고스톱 간첩단의 구성을 보면... 먼저 효자동 주민이 스무 명, 그리고 기타 외부 세력이--
Narr. : (그 말을 잇듯) 효자동 사람이 스무 명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저를 포함해서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S# 84 최씨네 쌀집. 낮.
Narr. : 그 사람들이 쓴 소설 때문에 졸지에 고스톱 간첩단이 된 분들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난지 3일 만에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빠르게 처리된 사건이었죠.
소복을 입은 최씨의 부인이 유골함을 껴안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울 힘조차 없는 상태로...
한모와 동네 사람들이 문 밖에서 안타깝게 지켜보지만, 안으로 들어오진 못하고... 순찰을 도는 경찰들이 지나가자 우르르 흩어져 버린다.
S# 85 이발관 안채의 방. 밤.
몸져누운 경자.
한모가 간호를 하지만, 경자는 “낙안아... 낙안아...” 신음 소리만 낸다.
S# 86 이발관 앞 길. 낮.
낙안을 기다리는 듯, 길가에 의자를 꺼내놓고 앉아 있는 한모. 시름에 찬 얼굴로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는데...
낙관이가 발밑에서 얼쩡거린다.
한 모 : (힘없이) 낙관아, 넌 네 주인이 집에 안 들어와도 모르지?
낙 관 : ...
연탄 지게를 짊어진 아이 하나가 가게로 걸어오는데...
연탄가게 안씨의 아들 영종이다.
영 종 : 안녕하세요.
한 모 : 어, 그래.
영종이, 아부지 일 돕고 있구나.
영 종 : ... 낙안이 아직 안 왔어요?
한 모 : (끄덕)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한모에게 내미는 영종.
영 종 : 이거... 낙안이가 저한테 맡겨뒀던 건데요...
한모가 받아서 보면... 딱지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있는, 딱지 봉투다.
영종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한모의 눈동자에 살짝 이슬이 맺힌다.
영 종 : 안녕히 계세요!
한모, 멀어지는 영종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영종의 옆으로 공무 수행 중인 고급 승용차 서너 대가 속력을 내서 휙 지나간다. 놀란 영종이 몸을 피하는데... 차가 지나가면 영종이 쓰러진 채 남겨져 있다.
한 모 : (깜짝 놀라 뛰어가며) 영종아-!
S# 87 종합병원 정형외과 병실 복도. 낮.
한모가 기다리고 있을 때, 병실 문을 열고 안씨가 나온다.
심란한 듯 담배를 피워 무는 안씨.
한 모 : (조심스럽게) 입원비 꽤 들 텐데...
목돈 모아놓은 것 좀 있어?
안 씨 : (설레설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지만,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안씨.
한 모 : 그만 가볼게.
안 씨 : 자네...
한 모 : (말을 기다리고 있으면)
안 씨 : (어렵게) 그... 옛날에...
산에다가... 감자 묻어놓은 거 있잖아.
한 모 : ?
안 씨 : 며칠 전에 가보니까... 그거 아직도 그대로 있더구만. (말하기 어려운 듯 코를 자꾸 킁킁거린다)
내가 그 감자 캐서... 사람들 보여주면...
자네... 청와대 일 하는 데... 안 좋을 텐데...
갑작스러운 말에 물끄러미 안씨를 보는 한모.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듯 안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담배만 피워댄다.
S# 88 병원 원무과. 낮.
수납 창구에 돈 뭉치를 내미는 한모.
S# 89 효자동 거리. 낮.
한모가 걸어오는 길 위로 “유신헌법 적극 지지”, “유신헌법 통과시켜 자주적 민주주의 이룩하자” 등의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는 왕씨를 발견하는 한모.
자꾸 땅바닥 여기저기에 귀를 대보는 게, 정신이 온전치가 못한 것 같다.
한 모 : 형님, 여기서 뭐 하세요?
왕 씨 : 어, 한모 왔어!
한 모 : 뭐 하세요?
왕 씨 : 나, 땅굴 찾어.
한 모 : 땅굴요?
왕 씨 : 응. 여기가 청와대 앞이니까 북한놈들이 틀림없이 요 밑으로 땅굴을 파서 쳐들어올 거란 말야.
쌀집 최씨도 떠났으니까 이젠 내가 나라 위해서 일해야지.
착잡한 한모.
한 모 : ... 집에 가십시다, 형님.
왕씨를 일으켜 세워 데리고 가는 한모.
S# 90 청와대 이발실. 해질 녘.
이 곳에도 “밝은 미래 유신시대, 정의 사회 유신헌법”, “유신만이 우리의 살 길” 등의 구호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한모가 방 정리를 하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젊은 경호원 하나가 방문을 연다.
경호원 : 실장님,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오랜만에 약주 한 잔 같이 하시자는데요.
S# 91 청와대 접견실. 저녁.
통치자가 장혁수, 박종만과 함께 시바스-리갈을 마시고 있다. 모두들 만취한 얼굴.
구석에서 뻣뻣하게 앉아 있는 한모.
장혁수 : 유신 출범을 축하하며. 건배!
통치자/박종만 : 건배!
호기롭게 술을 마시는 세 사람.
장혁수 : (넌지시) 부장님, 이번에 전기세를 아주 많이 내셨다면서요.
박종만 : (낌새를 눈치 채고 노려본다)
통치자 : 무슨 얘긴가?
장혁수 : 요즘 남산 분실에 전기뱀장어처럼 전기를 먹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통치자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장혁수 : 남산 분실에 가면-
박종만 : (말을 끊으며) 예, 요즘 조사 중인 사람이 하나 있는데... 아주 끈질기게 입을 안 열고 있습니다.
통치자 : 뭘 조사하고 있소?
박종만 : 그게...
장혁수 : 설사... 라고 들었습니다.
통치자 : 설사?
장혁수 : 예, 각하.
통치자 : 마루구스병 수사는 다 끝난 거 아니오?
박종만 : 그래도 미심쩍은 게 있어서...
장혁수 : 근데 그 사람이 아주 어리다지요, 아마?
갑자기 한모의 귀가 번쩍 뜨인다.
장혁수 : 아무리 미심쩍어도 어린 사람을 그렇게... 전기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박종만 : 장실장. 장실장이 정보부의 고충을 알기나 하시오?
장혁수 : 어린 아이에게 전기를 먹이는 게 정보부의 고충입니까?
박종만 : 장실장!
통치자 : 그만들 해. 왜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나.
박종만 : ... 죄송합니다, 각하.
장혁수 : ... 죄송합니다, 각하.
통치자 : 어린애는 내 보내시오.
박종만 : ... 예.
통치자 : 자, 술 한 잔씩들 받아.
이를 악무는 박종만. 회심의 미소를 짓는 장혁수.
그 때, 한모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훌쩍거리기 시작하는데...
통치자 : 자넨 또 왜 그러나?
한 모 : (얼른 눈물을 닦으며) 죄... 죄송합니다, 각하.
통치자 : 왜 그래? 말해 봐.
한 모 : 갑자기... 저희 애가 생각이 나서...
통치자 : 애가 왜?
한 모 : 잠깐... 어디 먼 데를 가 있거든요.
통치자 : 사람도 참,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애들은 집에서 나가 있어야 크는 법이야. 나도 사범학교 이후로 쭉 나와 살았지. 사범학교를 거쳐서 산골 선생 노릇을 하다가 결국 만주까지 가게 된 거 아니오. 광활한 땅 만주로 갈 때는 꿈도 참 많았지. 이 한 몸 역사 속에 커다란 획 한 번 그어보자. 그래서 내가 일본 군관학교에 입교를 했지. 거기서 내가 훈련을 받는데--
지루해지는 장혁수와 박종만, 듣는 둥 마는 둥 술만 홀짝거린다.
Narr. : 그 날 경호실장 아저씨가 왜 그랬는지... 아버지의 인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정보부장 아저씨가 싫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저는 며칠 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S# 92 이발관 앞 길. 새벽.
인적이 없는 새벽길. 지프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눈에 안대를 한 낙안을 내려놓고는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서지도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지는 낙안. 몸을 뒤척거리며 어디에 왔는지를 가늠해 보는데...
낙 안 : 누구 없어요...? 누구 없어요...?
그러자 어디에선가 낙관이가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낙안 옆에서 짖기 시작한다.
낙 안 : 어, 너 낙관이지? (컹컹) 낙관아...
엄마... (컹컹) 아부지... (컹컹) 엄마... (컹컹) 아부지...
S# 93 이발관 안채의 방. 새벽.
한모와 경자가 아직 잠들어 있을 때... 경자가 먼저 눈을 뜬다.
경 자 : 여보. 여보.
한 모 : ... 왜?
경 자 : 무슨 소리 안 들려요?
한 모 : 개 소리잖아.
그러나 잠시 후... 소리의 주인공을 간파한 두 사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복 차림으로 후다닥 뛰쳐나간다.
S# 94 이발관 앞 길. 새벽.
달려 나와 쓰러져 있는 낙안을 부둥켜안는 한모와 경자.
한 모 : 낙안아! 낙안아! (안대를 풀어준다)
경 자 : 아이고, 나가이 맞구나! 낙안아!
낙 안 : 엄마...
경 자 : 낙안아! 아이고 내 새끼, 어데 갔다 인제 오노!
한 모 : 낙안아, 아버지가 잘못했다. 아버지가 잘못했어.
경 자 : 일단 들어가요.
한 모 : 응.
한모가 낙안을 일으켜 세우는데... 낙안은 그냥 힘없이 쓰러져 버린다.
놀라서 낙안을 안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한모.
Narr. :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저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됐죠.
S# 95 이발관 안채. 아침.
마당에는 낙안을 보러온 동네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방에 누워 있는 낙안, 몸이 펴지지 않아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그 옆에서 경자가 몸을 비비고 주무르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한모는 꼼짝도 못 한 채 일그러진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고...
경 자 : 낙안아, 이기 웬일이고! 이기 웬일이야! 니가 와 이케 됐노! 엉엉엉~!
동네 사람들도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데...
한모가 낙안을 일으켜 세워보지만, 낙안은 다시 풀썩 쓰러지고 만다.
손 씨 : 도대체 얼마나 팼길래 애가 저렇게 된겨.
문 씨 : 애 하나를 잡아버렸구만, 완전히 잡아버렸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모, 갑자기 이발관 쪽으로 뛰쳐나가는데...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우르르 뒤따라 나간다.
S# 96 이발관 앞 길. 아침.
이발관 밖으로 나온 한모의 손에 가위가 들려 있는데...
길 한가운데 서더니,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마구 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한모.
한 모 : 이놈의 자식들아, 감히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 놔! 어린애를 이 따위로 만들어 놓냐, 이 개자식들아!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들! 잡히기만 하면 전부 죽을 줄 알아! 니네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청와대 이발사다, 이 새끼들아!
몰려나온 동네 사람들이 한모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귓속말이 오간다.
동네사람3 : (청와대 쪽을 고개짓하며) 그쪽이 아니라 저쪽에다 대고 해야 될 것 같은데...
동네사람4 : 그걸 모르니 불쌍하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한모, 결국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한 모 : 나쁜 놈의 새끼들... 나쁜 놈들...
하염없이 흐느끼는 한모.
S# 97 몽타쥬. 한의원을 찾아다니는 한모와 낙안.
한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낙안이 침을 맞고 있다. 등과 어깨, 허리, 다리, 손등... 침이 안 들어간 자리가 없다.
Narr. : 좋다는 한의원을 다 찾아다닌 덕분에 다행히 몸은 많이 회복이 되었죠.
그렇지만 다리의 마비는 풀리지가 않았습니다.
한의사가 낙안을 걸어보게 하는데... 잠깐 서 있는 듯 하더니 곧 풀썩 쓰러지는 낙안.
기대에 찼던 한모의 표정이 금세 실망감으로 바뀌고...
Narr. : 아버지는 제 다리를 꼭 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의 소문난 한의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셨죠.
지방 읍내의 터미널. 한모가 낙안을 업고 버스에서 내린다.
한의사가 낙안을 진맥해 보고는 고개를 젓는다. 실망하는 한모.
어느 간이역. 낙안을 업은 한모가 역에서 나온다.
한의사가 낙안의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해보더니, 자기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한다.
낙안을 업고 바닷가 길을 걷는 한모. 바닷바람이 매섭다.
한의사가 낙안의 눈을 뒤집어 보고, 혀를 까보고, 유난을 떨며 여기저기 살피는데...
종이 한 장을 척 내려놓는 한의사. 그 위에 뭔가를 써내려가자 한모가 기대를 하는데... 자세히 보면, 처방전이 아니라 약도를 그리고 있다.
S# 98 산골. 해질 녘.
인적 없는 산길에 흰눈만이 쌓여있고...
고물 버스 한 대가 한모와 낙안을 내려놓고 간다.
낙안을 업고 걷는 한모.
한 모 : 춥냐?
낙 안 : 아뇨.
... 아부지.
한 모 : 왜?
낙 안 : 무겁죠?
한 모 : 안 무겁다.
낙 안 : 이런 산골에 한의원이 있을까요?
한 모 :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도 들었잖니. 이 사람은 침 하나로 병은 물론이고 귀신까지 잡는 사람이야. 아마 전국에서 제일가는 의원일거다.
낙 안 : 그런데 왜 이런 산골에 있어요?
한 모 : 원래 대단한 사람들은 산에 숨는 법이란다.
문득 길이 끊기고 개울이 나오는데...
약도를 꺼내서 이리저리 보는 한모. 별 수 없이 냇물을 건너야 될 상황이다.
냇가에는 살얼음이 얼어 있고...
낙 안 : 아부지, 그냥 돌아가요. 이런 데 무슨 의사가 있겠어요.
한 모 : 여기까지 왔는데 왜 돌아가냐.
낙안을 내려놓더니 바지를 벗는 한모. 바지를 낙안에게 주고는, 다시 낙안을 업는다.
낙 안 : 가다가 아부지 다리 다 얼어버릴 거예요.
한 모 : 괜찮다.
낙 안 : 아버지까지 다리 굳어버리면 어떡해요.
한 모 : 괜찮... 헉...
물에 발을 담그자마자 신음을 토해내는 한모.
한 모 : 괜... 찮... 다.
이를 악물고 비틀비틀 개울을 건너는 한모.
간신히 개울을 다 건넌다.
낙안을 내려놓는 한모,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다리의 물기를 털어낸다.
낙 안 : 아부지...
한 모 : 괜... 찮... 다.
S# 99 산골 초가집 방 안. 밤.
호롱불 아래 산신령 같은 노인이 하나 앉아 있다.
방 안은 여염집과 다를 게 없고, 구석에 약재함과 작은 작두가 있을 뿐이다.
낙안의 진맥을 보는 노인.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간간이 흠- 하는 이상한 소리만 내고...
한 모 : 어떻습니까?
노 인 : 흠-.
한 모 : 어르신, 벌써 한 시간째 이러고 계시지 않습니까.
노 인 : 조용히 좀 해라.
한 모 : ...
한참 후 마침내 눈을 뜨는 노인.
노 인 : 몸의 병은 내가 고칠 테니, 마음의 병은--
노인의 말은 뒤로 갈수록 흐려진다.
한 모 : 저... 어르신. 뭐라고 하셨는지요?
노 인 : 몸의 병은 내가 고칠 테니, 마음의 병은--
한 모 : (또 못 알아듣고) 저... 죄송하지만, 어르신...
노 인 : (빽 소리를 지른다) 마음의 병은 자네가 고치라고!
한 모 :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 인 : 흠-.
괜히 심각한 얼굴로 곰방대를 재떨이에 두드리더니 불을 붙이는 노인.
노 인 : 이 아이는 이상한 업보를 타고 났어.
그러니까... 애 이름이 이상해. 애 이름이 원래 고생하지 않고 살 이름이야. 헌데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은... 흠-. 강 건너편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버렸어. 그래서 애도 업보를 이어받는 것이지.
한 모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노 인 : 그러니까...
앞으로 몇 년 후에, 용 한 마리가 죽으면, 그 용의 눈을 파다가, 국화씨랑 달여서 먹이도록 해.
명심하라구. 몇 년 후에 용이 하나 죽으면, 국화꽃 차를 타고 장례를 치를 것이야. 그 용의 눈을 파다가, 국화씨랑 달여 먹이도록 하라구.
한 모 : 그게...
노 인 : 아무 소리 말고.
애 옷 벗겨서 눕혀 놔. 침 놓게.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벅거리는 한모.
S# 100 초가집 마당. 아침.
낙안을 업은 한모가 집 여기저기를 찾아보는데... 아무도 없다.
낙 안 : 할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한 모 : 모르겠다.
낙 안 : 아버지. 그 할아버지 산신령 같애요.
한 모 : 산신령은 무슨 얼어죽을... 용의 눈을 파라고? 빌어먹을...
그만 가자.
집을 나서면서도 한모는 계속 구시렁거린다.
한 모 : 에이 빌어먹을... 내가 여기 오려고 그 추운 또랑을 건너서... 에이...
낙 안 : 아부지, 이제 집에 가는 거예요?
한 모 : 그래.
낙 안 : 이제 침 안 맞아도 되는 거예요?
한 모 : 그래.
(한참을 걷다가) 엄마한테는 뭐라고 그러지...
낙 안 : 목발 사달라고 그럴 건데요.
걸음을 멈춘 한모, 낙안을 돌아본다.
S# 101 이발관. 낮.
세면대에서 머리를 드는 남자. 능숙한 솜씨로 목발을 짚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스무 살 청년 낙안이다. 혼자서 머리를 감았던 것.
진 기 : 앉아라.
서른 살 아저씨가 된 진기, 낙안을 이발 의자로 부르고...
낙안이 앉으면, 진기가 드라이를 해 준다.
몸은 불구지만, 낙안의 얼굴은 티가 없어 보인다.
S# 102 청와대 이발실. 낮.
통치자를 이발 해주고 있는 한모.
이제 한모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져 있고... 통치자도 많이 늙어 있다.
경호원 한 명만 있는 평화로운 분위기. 정적 속에서 가위질 소리만 맑게 울린다.
통치자 : 성실장.
한 모 : 네, 각하.
통치장 : 오늘 밤에 박부장, 장실장하고 한 잔 하기로 했는데...
오랜만에 같이 하겠소?
한 모 : 아닙니다, 각하. 국가 일 고민하시는데, 저 같은 놈이 끼면 되겠습니까.
통치자 : (미소 지으며) 성실장은 그게 참 좋아. 처음이나 지금이나 참 한결 같단 말야. 겸손하고, 정직하고...
한 모 : 감사합니다, 각하.
통치자 : 우리 몇 년이나 만났지?
한 모 : 십일 년입니다, 각하.
통치자 : 임자도 참 이 일 오래 하는구만.
한 모 : 각하도 참 오래 하셨습니다.
한모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통치자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한모, 당황해서 더 이상 가위질을 못 하는데...
통치자 : ... 성실장.
한 모 : (초긴장) 네, 각하...
통치자 : 면도도 해 주게.
한 모 : (안심) 네, 각하!
(면도 거품을 막 만들고는) 각하, 면도를 하겠습니다!
통치자 : 이젠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한 모 : 입에 버릇이 되서...
S# 103 같은 곳. 낮.
이번에는 장혁수가 통치자가 앉았던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아서 이발을 받는데... 경호원 대여섯 명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조금 전보다도 더 삼엄한 분위기.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박종만이 들어와서 옆 의자에 앉는다.
박종만 : 어이. 나 급해. 머리 좀 빨리 해줘.
한 모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박종만 : (인상을 팍 쓰며) 두 번 말해야 되나.
당황해서 장혁수의 눈치를 보는 한모.
장혁수 : 하던 건 마저 끝내야지.
한 모 : (계속 하려고 하면)
박종만 : 야 이 새끼야, 급하다는 말 못 들었어?
한 모 : (주춤거리며 박종만 쪽으로 가면)
장혁수 : 성실장. 내가 깎다 만 머리로 돌아다녀야겠나.
한 모 : (다시 장혁수 쪽으로 가는데)
박종만 : 야.
장혁수 : 성실장.
박종만 : 이 새끼들이...
벌떡 일어나서 한모의 뺨을 철썩 때리는 박종만.
박종만 : (다시 자리에 앉으며) 빨리 깎아!
한모가 어쩔 수 없이 박종만에게 가면... 장혁수도 피식 웃으며 일어난다. 경호원들이 달려와서, 흰 천을 벗겨준다.
장혁수 : 부장님. 정보부에도 이발소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 와서 머리 깎는다고 청와대 주인 되는 거 아닙니다.
벌떡 일어나더니 장혁수의 멱살을 잡는 박종만.
박종만 : 너 이 새끼, 육사 몇 기야!
어느 새 경호원들이 두 사람 옆에 바싹 붙어 서는데...
장혁수 : (피식 웃으며) 아이고 선배님. 청와대에서 왜 육사를 찾으십니까. 연병장 돌리시려고요?
(경호원들에게) 뭐해 새끼들아.
경호원들이 박종만의 손을 억지로 푸는데...
박종만 : 이 새끼들, 어디서 감히...
그러나 박종만이 수에서 밀린다.
박종만 : 장혁수 너! 각하 바로 옆에 있다고 안하무인으로 까부는데!
국가를 위해서도 내가 너 가만히 안 둔다. 명심해라.
버러지 같은 놈.
휙 돌아서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박종만.
실소를 머금으며 다시 자리에 앉는 장혁수.
장혁수 : 성실장, 마저 끝내게. 국가를 위해서.
몸을 추스르고는, 다시 장혁수의 머리를 깎는 한모.
Narr. : 그렇게 그 날 하루 많은 일이 아버지께 일어났습니다.
또 그 날은...
아버지가 그 사람들을 마지막 본 날이기도 합니다.
S# 104 삼청동 안가 앞. 밤.
으리으리한 안가 앞에 고급 승용차들이 여러 대 주차해 있는데...
술에 취한 박종만이 비틀거리며 집 안에서 나온다.
분노 가득한 얼굴로 어느 승용차의 문을 여는 박종만. 졸고 있던 중년 남자가 퍼뜩 깬다.
박종만 : 권총 가지고 있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품안에서 권총을 꺼내주는 남자. 박종만이 권총을 들고 다시 집 안으로 향하는데...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남자, 차 밖으로 뛰어나간다.
남 자 : 부장님!
박종만 : (돌아보면)
남 자 : 총알 없는데요.
박종만 : 줘, 임마!
주머니에서 총알들을 꺼내 주는 남자.
박종만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카메라는 별들이 총총히 떠 있는 밤하늘로 올라가는데...
잠시 후, 평화로운 밤하늘 위로...
탕탕탕!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경호원들의 다급한 발소리와, 산발적인 총격전 소리.
S# 105 이발관. 새벽.
기지개를 켜며 안채에서 나오는 한모.
느릿느릿 가게 정리를 시작하며,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켜는데...
라디오 : 오늘 새벽 0시 20분, 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오늘 새벽 0시 20분, 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정부는 1979년 10월 26일 새벽 04시를 기해, 도서 지역을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계엄령 선포지역에서는 집회, 시위를 비롯한 모든 단체 모임과 행동을 금지하며--
카메라가 라디오로부터 한모 쪽으로 천천히 옮겨가면...
빗자루를 든 채 입이 쫙 벌어져 있는 한모.
생각난 듯 밖으로 뛰어 나가는데...
S# 106 이발관 앞 길. 새벽.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곳곳에 서 있고, 그 경계 태세가 청와대 쪽까지 쭉 이어져 있다.
자신도 모르게 땅에 쭈그리고 앉는 한모.
S# 107 청와대 내 빈소. 낮.
조문 온 각료들과 정치인들이 줄을 서 있고... 그 안에 짙은 쥐색 양복을 입은 한모도 끼어 있다.
모두들 통치자의 사진 앞에서 엄숙하게 묵념을 하는데... 한모의 차례가 오자, 한모는 향을 피운 뒤 넙죽 큰절을 두 번 한다.
S# 108 빈소 건물 뒤쪽. 낮.
눈물을 훔치며 건물에서 나오는 한모.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바람을 쏘이며 심호흡을 하는데...
청와대 직원들이 영구차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많은 국화꽃으로 장식된 영구차. 앞쪽에 통치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고, 화려한 봉황 문양이 초상화 둘레를 장식하고 있는데...
순간 한모의 눈이 초상화에 고정된다.
한모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S# 109 이발관 앞. 낮.
국민학생들 몇 명이 공놀이를 하는데... 낙안은 가게 앞 의자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다.
그러나 얼굴은 맑고 순박하기만 하고...
멀리 골목길 끝.
한모가 양복을 입은 채로 쭈그리고 앉아서 낙안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S# 110 이발관 안채 마당. 저녁.
짙은 쥐색 양복을 단단히 차려입은 한모가 집을 나서려고 할 때, 부엌에서 나오던 경자와 마주친다.
경 자 : 오밤중에 어데 갑니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려다가는, 뒷걸음질쳐 돌아오는 한모.
한 모 : 낙안 엄마.
경 자 : 왜요?
한 모 : (비장하게)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낙안이 다리는 꼭 책임지고 낫게 해 주시게.
경 자 : (어리둥절) 이 양반이 와 이라노?
한 모 : 때가 왔어.
경 자 : 무슨 때?
한 모 : 사나이 한 목숨 바칠 때.
황당한 경자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서는 한모.
경 자 : 어이, 정신차리라 고마. 어데 가노? 어데 가노?
S# 111 청와대 이발실. 밤.
불이 켜지고, 한모가 들어오는데...
이미 술을 많이 마신 듯 눈이 벌겋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한모.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기괴함과 굳은 의지가 뒤섞여 있다.
품안에서 소주병을 꺼내 마저 쭉 들이키는 한모. 빈병을 서랍 속에 감추고는...
이발 도구 중에서 면도칼을 집어 든다.
한모의 귀를 울리는 산골 노인의 목소리.
노인(E) : 용이 하나 죽으면, 국화꽃 차를 타고 장례를 치를 것이야. 그 용의 눈을 파다가, 국화씨랑 달여 먹이도록 하라구.
S# 112 빈소 주변 복도. 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는 한모.
극도로 긴장된 얼굴. 어둠 속에 간신히 몸을 묻은 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데...
지나가던 젊은 경호원 둘이 벽 뒤에 숨어 있는 한모를 발견한다. 놀라는 한모. 그러나 경호원들은 무슨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가볍게 목인사를 한 뒤 계속 걸어간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한모, 조심스럽게 복도 한가운데로 나와 걷기 시작한다. 익숙한 한모의 얼굴에 아무도 경계심을 보내지 않는다.
빈소 앞에 다다른 한모.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앞을 그냥 지나치는데...
S# 113 빈소 건물 뒤쪽. 밤.
주위를 살피며 밖으로 나온 한모.
안에서보다 더욱 긴장한 얼굴... 사람이 지나가자 얼른 몸을 숨긴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는데...
어느 거대한 물체 앞에 멈춰서는 한모.
한모가 다다른 곳은...
국화꽃으로 뒤덮인 영구차. 그리고...
통치자의 대형 초상화가 영구차 앞쪽에 걸려 있다.
초상화의 두 눈에 고정된 한모의 시선.
다시 인기척이 들리자 얼른 차 옆으로 가서 숨고... 정적이 흐를 때까지 기다린 뒤, 조심스럽게 차 위로 올라간다.
초상화 속의 통치자와 마주한 한모.
회한이 스쳐가는 듯 머리 부분을 한 번 어루만져보고는...
면도칼로 초상화의 눈을 긁기 시작한다.
부들부들 떨리는 한모의 손. 물감 가루가 떨어져 내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인주통을 꺼내더니, 물감 가루를 그 안에 담는 한모.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른 쪽 눈에도 손을 대는데...
건물 안쪽에서 경호원 두 명이 나온다. 재빨리 차 아래로 내려와 숨는 한모.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손이 계속 덜덜 떨려오는데...
경호원들이 영구차 옆을 지나갈 때, 면도칼을 탁 놓치고 만다.
경호원1 : 뭐야!
순간 위험을 느낀 한모, 자신도 모르게 후다닥 도망치는데...
경호원2 : 누구야!
경호원1 : 거기 서!
얼마 가지도 못해 경호원들에게 붙잡히는 한모. 경호원들이 한모를 넘어뜨리고는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맞으면서도 한모는 인주통을 입으로 가져가 삼키는데... 잘 삼켜지지 않지만, 얼굴을 붉히면서 끝내 꿀꺽 삼키는데 성공.
경호원1 : (뒤늦게 얼굴을 알아보고는) 어... 이발관 실장님 아냐.
한 모 : (목구멍이 막혀서 고개만 끄덕끄덕)
경호원2 : 여기서 뭐하세요?
간신히 숨을 쉰 한모, 울음을 터뜨린다.
한 모 : 어어엉... 내가... 내가 각하를 모신 게 몇 년인데... 어어엉...
이렇게 가시니... 어어엉... 한 번이라도 용안을 더 뵙고 싶어서... 어어엉...
각하-!
숙연해지는 경호원들,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S# 114 이발관 앞 길. 아침.
국장(國葬)의 아침.
영구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청와대 쪽으로부터 천천히 움직인다.
대형 초상화의 눈 부분은 매우 어설프게 덧칠이 되어 있다.
노인들은 영구차가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마다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이발관 앞에도 경자와 낙안, 진기가 나와서 지켜보고 있다.
영구 행렬이 이발관 앞을 막 지나려 할 때...
갑자기 영구차가 멈춰 선다.
영구 행렬 전체가 멈춰 서고... 당황한 영구차 운전사가 액셀을 마구 밟아보지만, 엔진은 공회전만 반복한다.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동네 사람들. “이발관 앞에서 멈췄네”, “무슨 일이야”...
그들의 시선을 느낀 경자가 슬그머니 이발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S# 115 안채의 화장실 앞. 아침.
경자가 화장실 앞에 왔을 때, 안에서는 한모의 힘주는 소리가 들린다.
한모(E) : 아... 아... 아...
경 자 : 여보.
한모(E) : 아... 아...
경 자 : 낙안이 아부지.
한모(E) : 왜?
경 자 : 좀 나와 봐요.
한모(E) : 지금 못 나가아... 아... 아...
이발관 앞길과 화장실 앞이 교차 편집되면서, 영구차의 공회전 소리와 한모의 힘주는 소리가 함께 커진다. 붕, 붕... 아, 아... 붕, 붕... 아, 아...
소리가 극도로 고조되고... 붕, 붕! 아, 아! 한모의 비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아-!
붕- 하며 영구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운전사.
화장실 안에서도 하- 하는 길고 긴 한숨이 토해져 나온다.
S# 116 화장실 안. 아침.
나뭇가지로 바닥의 변에서 뭔가를 집어내는 한모.
S# 117 안채 마당. 아침.
그 뭔가를 수돗가에 앉아서 물로 씻어내는 한모. 경자가 옆에서 지켜보는데...
인주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마당 한쪽에서는 국화꽃들을 돗자리 위에 죽 펼쳐놓고 말리고 있다.
S# 118 같은 곳. 낮.
화덕에서 약을 다리는 한모와 경자. 사뭇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다.
S# 119 안채 방 안. 저녁.
약 사발을 앞에 놓고 낙안과 마주앉아 있는 한모, 경자.
한 모 : 낙안아.
네 다리 이렇게 만든 사람들... 이제 다 저 세상으로 갔다.
옛날 일 다 잊어버리고...
맘 편하게 이 약 쭉 들이키거라.
낙 안 :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약 사발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낙안.
그리고는 약을 쭉 들이킨다. 한모와 경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데...
약그릇을 탁 내려놓는 낙안.
경 자 : (기대에 차서) 어떻노?
한 모 : 어떠냐?
Narr. : 맛이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 그 말은 할 수 없었죠.
단지 제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낙 안 : 꺼억-.
시원하게 트림을 하는 낙안.
S# 120 이발관. 낮.
한모가 면도칼을 갈고 있을 때...
경자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친다.
경 자 : 나가이 아부지! 좀 나와보소!
한모,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면...
S# 121 이발관 앞 길. 낮.
경자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낙안.
진기와 동네 사람들이 쭉 둘러서 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낙안이 한모를 향해 힘겹게 발을 옮긴다.
Narr. : 저는 다시 걸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살며시 손을 놓는 경자.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낙안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 발을 옮겨간다.
와- 환성과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하는 동네 사람들. 낙안이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준다.
이제 낙안은 한모 앞에 와서 선다. 한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여 들면서, 마치 동네에 축제가 열린 듯하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왕씨도 다가와서 낙안의 다리를 만지며 활짝 웃는다.
F.O.
S# 122 이발관. 아침.
활짝 열린 가게 문과 창문들을 통해 아침 햇살이 상쾌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라디오에서는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흘러나오고... 낙안과 진기가 “그 언젠가 나를 위해-”를 흥얼거리며 대청소를 하고 있다. 죽은 통치자의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는 진기. 그 자리에 대머리가 벗겨진 남자의 사진을 바꿔 붙이려고 하는데... 안채에서 나오던 한모가 이 모습을 본다. 생각에 잠기는 한모.
그 때, 이발관 앞에 자동차 멈춰 서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장 차림에 군인 머리를 한 남자가 이발관으로 들어온다.
진 기 : 이발하시게요?
남 자 : 여기 청와대에서 일하던 이발사가 누군가?
분위기 파악을 한 낙안이 라디오를 끄고...
한 모 : ... 전데요. 왜 그러시죠?
남 자 : 음...
거만하게 한모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 그러더니는 수건 한 장을 집어 들더니 구두를 닦기 시작한다.
남 자 : 당신, 우리 새 정부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한 모 : ...
남자가 수건을 내려놓자, 한모가 그 수건을 들고는 느릿느릿 빨래통에 옮겨놓는다.
한모의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
남 자 : 이봐, 못 들었어?
한 모 : 생각 없습니다.
남 자 : 뭐?
한 모 : 생각 없다구요.
남 자 : 왜?
갑자기 힘없이 웃기 시작하는 한모. 한숨까지 섞인 웃음이 한동안 계속된다.
어리둥절해서 한모를 바라보는 낙안과 진기. 남자도 화난 얼굴로 한모를 노려보는데...
남 자 :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나랏일을 당신 마음대로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애?
휙 돌아서서 나가는 남자.한모는 관심이 없다는 듯 가게 정리를 하고...
진기가 다시 대머리의 사진을 벽에 붙이는데...
한 모 : 진기야?
진 기 : 예?
한 모 : 그거 떼라.
진 기 : 예?
한 모 : 떼.
진 기 : ...
진기가 사진을 떼어 내면...벽면 위에서 그 자리만이 하얀 백지처럼 깨끗하다.
S# 123 이발관 앞. 낮.
(S#123의)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이발 도구를 손에 든 한모가 몇몇 건장한 청년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차에 태워진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따라 나오는 경자와 낙안, 진기.
S# 124 청와대 이발실. 낮.
새로운 통치자의 빛나는 대머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모.
이발실에 도열해 있던 스무 명 가까운 군인들이 일제히 만세 삼창을 한다.
군인들 : 만세! 만세! 만세!
모두들 박수를 치고 환하게 웃으며, 군복 상의를 벗어젖히는데...
전역 기념으로 한꺼번에 머리를 손보겠다는 것.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헤어스타일들에 대해 속닥이는데... 그들을 보며 미소 짓는 대머리. ‘시작하라’는 뜻으로 한모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그러나...
한모는 대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다.
한 모 : 저... 각하.
머리가 다 자라면 다시 오겠습니다.
모두들 얼어붙는 이발실 안 풍경.
Narr. :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아버지도 잘 모르겠다고 하셨죠.
그래도 마음만큼은 편하셨답니다.
S# 125 영추문 앞. 새벽.
검은 승용차가 달려와 급정거를 하더니, 포대자루 하나를 던져놓고 가버린다.
자루가 꿈틀거리다가는... 한모의 얼굴이 불쑥 삐져나온다.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 온몸에 매를 맞았는지 자루 안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질 못하는데...
그러나 표정 하나는 더없이 해맑아 보인다.
지나가던 행인이 다가오는데...
행 인 : 아저씨. 아저씨, 괜찮아요?
한모를 일으켜주는 행인.
행 인 : 집이 어디예요, 아저씨?
이발관 쪽을 바라보는 한모. 행인이 계속 말을 걸어오지만, 한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데...
Narr. : 그 날 아버지를 업고 온 사람이 말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묻는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하시다가...
딱 한 번 입을 여셨다고 합니다.
행 인 : 아저씨. 아저씨, 뭐하는 분이예요?
한 모 : 내가... 청와대 이...
아니... 나는...
효자동 이발사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한모.
멀리 하늘에서 동이 터온다.
The End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