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괴롭히는 심리에 대하여
아이들은 종종 엄마를 괴롭힙니다. 여러 유형이 있는데, 오줌싸기/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기/주변 아이들과 쉽게 시비붙기/맥락 없이 울기/타인 앞에서 무리한 요구하기/물건 집어던지기(파괴나 손괴로 감정 표현하기)/공공장소에서 탈의(바지 내리기 또는 발가벗기)/부모를 경찰에 신고하기/마트나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드러눕기 등 다양합니다.
자신과 엄마 외 지켜보는 눈이 있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 엄마를 괴롭히는 행위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은 엄마에 대한 강력한 저항 메시지입니다. 물론 엄마를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엄마에게 저항하는 것은 엄마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서비스 공급자이면서 어른으로서 권위를 가집니다. 전자가 양육의 결과고 후자가 훈육의 전제입니다. 서비스 제공하지 않는 양육이 있을 수 없고, 권위에 기반하지 않는 훈육도 불가능합니다.
일부 아이들에게는 서비스 제공과 권위를 갖는 사람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바로 엄마가 아닌 사람이 영유아 때 양육 서비스를 제공한 경우입니다.
"서비스는 보모가 줬는데, 생모인 당신이 엄마의 권위를 내세우며 행동을 강제하다니,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이게 엄마가 아닌 분에게 영유아기 보육이 맡겨진 아이들의 속마음입니다.(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따라서 내 경험으로 말한다면, 양육 서비스 제공자와 엄마가 동일할 경우 엄마의 권위에 의한 억압의 상황을 아이가 잘 받아들입니다. 즉 엄마가 행동교정을 위해 언성을 높이거나 매를 든다해도 수용합니다. 반대로 영유아시기 아이를 할머니나 이모, 유료 보모에게 맡긴 경우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가 둘로 분리됩니다. 생모는 아이에게 권위의 화신으로만 인식될 수 있어서 부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아이는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육 서비스를 불가피하게 생모가 하지 못했을 경우에 "엄마"는 아이에게 어른으로서, 낳은 이로서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엄마 자신이 '지시' '교정' '훈육' '훈련'의 개념을 완전 해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계속된다면 당분간은 엄마가 아닌 룸메이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 동거를 원한다면 룸메이트에게는 지시가 아니라(그러면 당장 헤어지지 않겠는가) "너로 인해 내가 불편함을 느낀다"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중하게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것 뿐입니다.
2. 노산(老産)의 문제에 대하여
내게 상담을 오는 경우 대부분은 30대 말 출산이고 종종 40대 출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산이라고 아이 성장에 걱정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오는 아이들은 엄마가 노산한 경우가 확실히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엄마가 출산한 나이가 몇이었냐고 묻게 됩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30대 말이라고 대답합니다. 따라서 노산이 아이 성장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노산이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고 말입니다.
처음엔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의 생리적 건강이 점점 나빠질 테니 노산은 당연히 엄마나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있지 않겠냐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늦은 결혼과 출산은 여성의 사회 활동과 관련이 깊습니다. 전문직이든 단순노동이든 돈벌이를 하기 위해 출산이 늦어졌고, 출산 이후에도 경력단절을 피하기 위해 영유아의 양육을 조부모의 지원으로 해결하고 4~5세 이후에는 어린이집 종일반을 이용하는 경향입니다. 이 과정에서 엄마가 직접 양육하지 못해서 생기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맞벌이 임산부가 과반인 사회에서 말과 행동에 특이점이 있는 아이들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조부모나 보모의 양육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동안 남성인 내가 40 전후의 여성의 삶에 대해 관찰자로만 머문 것이 문제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40세 여성의 정체성을 당사자 여성 주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억지로나마 여성의 입장에서 40세를 겪어본다면 금방 우울해집니다. 강북에 살든 강남에 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남편이 여성주의 입장이든 일베 입장이든 40세의 한국 여성은 무한경쟁과 촘촘한 서열의 그물에서 후회의 과거와 불안의 미래를 딛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불만’입니다.
현재가 불만스러운 40대 엄마를 특히 괴롭히는 건 모성애 담론입니다. 아이는 내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엄연한 독립 개인이고 타인입니다. 출산 이후에도 자녀를 확장된 엄마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은 모성애를 퍼뜨리는 근대의 조작입니다. 내 아이는 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은 아이와 나(엄마)를 하나의 유기체로 묶으려 합니다. 그때 쓰는 접착제가 모성애라는 창조된 개념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일상에서 엄마는 '왜 나는 모성애가 부족한 것인가' 혼자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 스스로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규정합니다. 소위 좋은 엄마 컴플렉스가 그것입니다.(최악의 광고를 보세요 : https://youtu.be/U9Uc4pP8WAU)
한국은 좋은 엄마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우울한 엄마가 되기 마련입니다. 40세 전후한 엄마들의 우울감(또는 우울증)이 아이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이게 제 결론.
노산은 기대 수명 100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트랜드입니다. 문제는 출산의 나이가 아닙니다. 전체 어린이청소년의 20%가 정신과 치료나 심리상담가의 조언이 필요하게 된 것은 엄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편의 문제이며, 시댁의 문제이고, 또한 직장의 문제이며, 재벌위주 한국적 자본주의 뒤틀림 문제이고, 권력의 지향성 문제이며, 현시대 이데올로기의 문제입니다.
결론은,
40대 엄마들이여 당신 혼자 짊어질 책임이란 원래 없다!!!
3. 발달에 대하여
발달은 한자로 發達로 쓰지만 개념이 서양에서 온 것입니다. develop(ment)로 씁니다. 발달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퇴보, 퇴행이 떠오르는데 영어로는 regress(ion)입니다. 영어를 동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온 개념이라 서양말 속에 풀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말에서 발달의 반대로 퇴행을 떠올리지만 영어로 develop이라 일컫는다면 반대말은 envelop(e)이라고 해야 합니다.
velop는 겉포장(cover)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develop은 포장을 거두어주는 걸 말합니다. 포장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모습을 드러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발달은 개발(開發)의 의미가 큽니다. 봉투라고 알고 있는 envelope은 당연히 포장으로 겉을 싸주는 일입니다.(접두사 -en은 make의 뜻을 가지고 동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한편 영어의 regress(ion)은 gress를 다시(re-) 수행하는 것입니다. gress는 가다(go/step)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모습을 다시 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퇴행보다는 반복이 더 적절한 번역일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develop'는 'envelop'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역으로 말해도 성립합니다. 'envelop'은 'develop'을 포함합니다. 포장한다는 것은 포장 이전의 단계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포장을 벗기는 것도 포장된 이전 단계가 있어야 가능한 개념입니다.
포장을 왜 할까요. 그리고 포장을 벗기는 이유가 뭔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에는 인간이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현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씨앗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씨앗은 흙을 만나고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면 "발아"합니다. 씨앗 바깥에서 강낭콩(또는 완두콩)의 단초가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완두콩의 성질이 주입되는 것도 아닙니다. 씨앗은 이미 강낭콩인지 완두콩인지 정해져 있으며 강낭콩을 심었는데 완두콩이 열리는 일은 없습니다. 이미 씨앗에 저장돼있는 것입니다.
망치로도 잘 깨지지 않는 연꽃씨앗은 천 년이 지나서 발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발아할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생명력을 지닌 채 그 긴 세월을 참아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소대나무는 씨앗을 심고 5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5년 만에 떡잎을 올리면 그해 10미터까지 자랍니다.
서양의 근대는 이를 뒤집었습니다. 사람은 백지로 태어나니 외부의 양육환경과 교육환경에 의해 다르게 자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100여 년 전에 "인간발달"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 생겼고, 우리는 서양 심리학에 의한 이론적 프레임에 갇혀있습니다. "생산-발달-발전-개발-증진-플러스"와 "소비-퇴행-후퇴-훼손-감소-마이너스"를 대립시킵니다. 전자는 긍정이고 후자는 부정으로 자리매김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전자를 따라야 하고 후자의 결과는 패배로 인식되는 프레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장은 develop과 envelop 사이를 진동하는 과정입니다. 선천적인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 환경 상황에 따라서 과감하게 포장을 벗기도 하고, 안전하게 포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누구나 포장 속으로 숨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 포장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장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벗는' 것만 가능합니다. 교육은 자기교육만 있다는 주장이 옳다는 걸 증명하는 배경입니다.
이미 시대적 프레임에 갇힌 어른의 눈에 "소비-퇴행-후퇴-훼손-감소-마이너스"로 보이는, 그래서 쓸데없는 짓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실 발달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운 일곱 살의 행동이 자라는 아이의 당연한 모습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강남의 아이들은 사춘기가 없어요. 사춘기는 부모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 소름이 돋습니다. 애 죽일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