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당 최남선 선생의 단군이야기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檀君’이라는 이름의 책자를 읽었습니다. 740쪽 분량의 단군관계 사료를 모아놓은 연구서였는데, 책 중에서 특히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선생이 동아일보에 기고하신 단군론이 마음에 와 닿기로 여기에 옮겨 봅니다.
먼저 동아일보 1926년 2월 11일, 12일 이틀에 걸쳐 기고하신 ‘檀君 否認의 妄’이라는 제목과 ‘文敎의 朝鮮의 狂論’이라는 부제가 달린 육당선생의 기고문 중 서문을 소개하겠습니다.
朝鮮의 敎員團體인 朝鮮敎育會라는 것이 그네의 總督府內에 있고, 學務課長이라는 이의 名義로 ‘文敎의 朝鮮’이란 機關雜誌가 每月 刊行되니, 물을 것 없이 敎員 社會의 知識的 源泉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日本人의 立場에서 그네의 이른바 朝鮮 敎育, 朝鮮人 敎育에 관하여 지껄이는 소리가 우리네 感情과 理念에 背馳되는 경우가 많음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하려니와, 그런 중에도 너무 背理乖義的 言論으로써 朝鮮을 誣하는 者가 있음은, 저네들로 으레 그럴 일이라 하여 黙過만 할 수 없다.
더욱 白地의 거짓말이지만 그럴싸한 허울을 쓰고, 近理한 듯하지만 몹시 亂眞하는 것인 言語 文字로써 비교적 단순한 頭腦의 임자인 敎育者들을 愚弄 汚染하려 함은, 그것이 學政이요 敎育思潮인 만큼 蟬鳴蛙噪로만 돌리고 말 수 없는 점이 있다. 이번 二月號에 실린 京城帝國大學 豫科部長이라는 小田 某의 ‘所謂 檀君 傳說에 對하여’라는 論文과 같은 것은 그중에서도 용서하기 어려운 妄論 悖說임을 辨破치 아니치 못할 者라 할 것이다.
당시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의 소위 문화정치시대, 3.1만세운동으로 조선민중의 의기에 놀란 일제는 기존의 한반도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겠다고 선언하고 신문 창간을 허용하는 등으로 독아를 감춘 유화책을 쓰던 시기였습니다. 허나 통치방법을 바꾼다고 침략자의 근성이 변한 것은 아니어서 다방면으로 조선혼을 훼손하려 들었고, 육당선생이 위의 글에서 말씀하신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 소전(小田) 같은 자는 우리 민족의 성조 단군을 전설 속의 한 인물로 치부하고 그나마 작위적 위인이었다고 격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나가(那珂)·백조(白鳥)·금서(今西)·삼포(三浦) 등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삼국유사의 기사를 들어 단군승조론(檀君僧造論)을 주장하여 고려 중기 어느 승려가 민족적 의기를 기본으로 지어낸 위저에 기인한다고 억지를 부렸는데, 경성제대의 예과부장이라는 현직에 있던 소전(小田)은 그 아류로 ‘文敎의 朝鮮’이라는 총독부 기관지에 ‘所謂 檀君 傳說에 對하여’라는 제목으로 망론(妄論) 패설(悖說)을 지껄여 댔던 것입니다.
‘문교의 조선’이라는 총독부 기관지는 초·중등 교육자들을 독자로 하는 소위 교양지였습니다. 즉, 문화정치의 허울을 쓴 세뇌로 ‘비교적 단순한 두뇌의 임자인 교육자들을 우롱(愚弄) 오염(汚染)’시키려 든 것인데, 글을 쓴 자가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의 직책을 가진 소위 문교정책의 최고 입안자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민족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셨던 육당선생은 ‘그것이 학정(學政)이요 교육사조(敎育思潮)인 만큼 선명와조(蟬鳴蛙噪)로만 돌리고 말 수 없는 점이 있다’라고 발끈 노하셨던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육당선생은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셨고, ‘소년’, ‘아이들 보기’ 등의 잡지의 발간으로 계몽운동의 선구자가 되셨으며, 그때까지 한문 투의 문장이 주류였던 언어 기사를 구어체로 개혁한 최대 공로자이셨지만 후일의 친일행각으로 공과에 대한 논란이 있는 분입니다.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린 대석학이셨지만, 다른 두 분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일제 말기의 처신에는 의문이 있으나 위의 기사를 쓰신 1920대만 해도 문학과 문화·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조선혼을 지키기 위해 갖은 신고를 겪으셨습니다. ‘단군론’의 주창으로 민족의 고대사를 정립하신 일도 대표적인 공적 중 하나인데 민족의 역사마저 짓밟으려 드는 일제의 주구들을 ‘선명와조(蟬鳴蛙噪) = 매미와 개구리의 울음’ 따위의 헛소리로 꾸짖으시는 육당선생의 용자가 눈앞에 보이는 듯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小田 某는 一俗吏로 創見 薦論이 있을 리 없고 ‘文敎의 朝鮮’의 기사도 上記한 諸人(나가(那珂)·백조(白鳥)·금서(今西)·삼포(三浦) 등의 일본 역사학자)의 糟粕을 따다가 愚妄을 顯露한 것에 지나지 못하나, 그가 한참 동안 朝鮮 敎科書의 책임을 맡았고, 現在 京城大學 豫科部長의 소임을 보는 者인 만큼, 혹시나 그 所論에 蠱惑되는 者가 없지 아니할까 함은…
육당선생은 관권에 의한 삿된 역사교육과 교과서 왜곡을 걱정하셨습니다. 당시는 소위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전국에 ‘초·중등학교’가 세워지고 교육용 교과서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는데, 초등교육과정인 ‘소학교, 혹은 보통학교’의 경우 교원으로 현재의 고등교육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범학교 2년 과정을 마치게 한 이들이 임용되었기 때문에 일제의 ‘소론(所論)에 고혹(蠱惑)되는 자(者)’가 있을 여지가 충분했고, 총독부에 의해 일인 학자 일색의 조선사편찬위원회가 만들어져 역사 왜곡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어 이를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三國遺事가 僧의 撰述이요 檀君朝鮮의 文에 佛敎的 名句가 섞였음을 難하나, 이는 당시의 文敎 狀態에 말미암은 自然의 勢일 따름이요, 더욱 檀君朝鮮의 條 에는 그 痕跡이 微薄하여 桓國의 割註에 ‘謂帝釋也’라 한 것이 있을 뿐이나, 이는 帝釋이 天竺의 天帝임으로써 暫時 融攝하려 한 佛者의 例習일 뿐이며…
…伽倻의 字로써 駕洛의 實을 疑하고, 琉璃의 名으로써 類利의 事를 削한다 하면 그 愚를 어찌 及한다 하랴. 檀君이 또한 此의 類일 따름이다.
일인들은 삼국유사의 ‘謂帝釋也’와 桓因의 어원인 ‘釋迦堤桓因陀羅’를 들어 고려 후기 불교인의 위작 운운하여 국조 단군을 폄훼하려 듭니다. 육당선생은 불교인의 언어 습관을 빌미로 트집을 잡는 일인들의 졸렬함을 꾸짖고 조선의 학문하는 이로써 응징을 위한 경고를 하십니다.
진실로 一國 國祖의 聖蹟이요, 一民族 崇仰의 最高 對象일진대, 매우 신중한 考察과 면밀한 査討를 經하여 十分 疑端이 없는 뒤가 아니면 감히 輕妄을 방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이 學的 審愼과 正當을 缺함이 太甚한 言議를 肆然히 宣布하여, 敎育者의 良知를 混濛에 陷케 함은 그 責이 실로 輕小타 할 수 없다.
…最近의 學的 특히 民族學的 硏究에 의해 檀君의 正體 實證이 確然 無疑한 것을 모르고, 陳腐한 方法과 隘陋한 觀念으로써 이 중대한 方面에 대하여 盲杖 毒舌을 나불거린 것이기 때문에 그 狂悖를 彈正치 못하는 것이라, 적당한 機會에 저네의 愚蒙을 헤쳐 주기도 하려니와, 이 雜誌(文敎의 朝鮮 : 총독부 기관지)가 널리 朝鮮人敎育者의 눈에도 걸려 이 변변치도 못한 擬論을 혹 學的 根據나 있는 줄로 생각하고 謬信 盲從하는 이가 一人이라도 있을까하여 위선 몇 마디 破邪의 부리를 딴다.
이상 ‘문교의 조선’이라는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소전(小田)이라는 자의 국조 단군 폄훼에 분개한 육당선생의 동아일보 1926년 2월 11일, 12일의 기고문의 발췌입니다. 저는 이 짧은 기사를 읽으며 나라를 빼앗긴데다가 민족의 조상까지 비방을 받고 분노의 일격을 가하시는 선생의 의기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육당선생은 왜인들의 망언에 접하시고‘진부(陳腐)한 방법과 애루(隘陋 : 옹졸하고 천하다)한 관념으로써 이 중대한 방면에 대하여 맹장(盲杖) 독설(毒舌)을 나불거린 것이기 때문에 그 광패(狂悖)를 탄정(彈正)치 못하는 것’이라하시고, ‘조선인 교육자의 눈에 이 변변치도 못한 의론(擬論 : 옳지 못한 논리)이 걸려 혹 학적 근거나 있는 줄로 생각하고 류신(謬信 : 그릇 믿음) 맹종하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하여 위선 몇 마디 파사(破邪)의 부리를 딴다’ 하셨는데, 한 마디마다 피를 토하는 듯한 울분의 말씀이셔서 감히 혼자 느낄 수 없어 여기에 옮겨보았습니다.
이후 육당선생은 동년 12월 9일부터 12일까지 다시 동아일보의 지면을 빌려 ‘壇君께의 表誠’이라는 제목으로 단군성조의 바른 이해를 돕는 글을 쓰시는데 다음 글에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경황이 없어 답글이 늦었는데 양해 바랍니다. 자주 들려서 좋은 말씀 주세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