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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여진정벌은 왜 실패했을까?
1107년 윤관이 지휘하는 고려 17만 대군이 여진 정벌에 나섰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정벌 전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천리장성을 나선 고려군은 함흥평양 이북으로 진격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수많은 여진 촌락을 점령하고 곳곳에서 대승을 거두며 많은 포로를 얻었다. 고려군은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통태진, 숭녕진, 진양진 등 9곳에 성을 건설했다. 두만강 북쪽 7백리에 위치한 공험진까지 함경도와 연변자치주 일대의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다. 고려의 국시였던 북진정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는 애써 획득한 9성을 2년도 못되어 여진에게 되돌려 주었다. 예종의 전송을 받으며 출정했던 윤관은 돌아올 때는 임금을 만나지도 못하고 파직되었다. 승승장구하며 거대한 영토를 개척한 윤관이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시킨 자’라는 누명을 쓰고 불명예 퇴진했다. 왜 윤관은 실패하고 말았을까? 무엇이 고려의 북진정책을 좌절시켰던 것일까?
윤관 표준영정 – 우리역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윤관의 표준영정
고려의 북진 정책과 여진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할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나라로, 북진정책은 건국 후 줄곧 내세운 국가적 시책이었다. 비록 강력한 거란(요)제국이 등장한 탓에 서북방면으로는 압록강 이북을 넘지는 못했지만, 동북방면은 여진은 부락별로 소규모로 흩어져 사는 탓에 고려가 진출하기에 용이했다. 여진은 함경도 일대와 두만강, 수분하, 흑룡강, 송화강 유역까지 광대한 지역에 걸쳐 살았다. 고려의 북진정책은 여진의 침략을 막으면서도, 그들을 회유시키고자 했다. 고려는 변경을 효과적으로 방위하기 위해 1033~1044년에 걸쳐 천리장성 축조했다. 하지만 천리장성이 북쪽 경계는 아니었다. 고려는 장성 밖 원근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촌락이 자진하여 신하라고 칭하고 고려의 주군(州郡)으로 편입해 달라며 귀부의사를 해오면, 간접통치를 위한 기미주(羈靡州)를 설치했다. 고려에 복속해 귀화한 여진의 땅을 화내(化內)라고 하는데, 화내 기미주에 사는 여진족은 30종이나 되었다. 이들은 발해시대부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고려는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했고, 여진인의 자치를 허용했다. 여진 사람들은 고려 기미주에 사는 것이 여러 부족 간 싸움을 막고, 훨씬 안전하면서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 투항했던 것이다.
발해 멸망 후, 고려와 거란이 대립한 것은 여진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다툼이 주요 원인이었다. 10~11세기 내내 고려는 여진을 회유하고 복속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고려는 궁극적으로 여진을 동화해 고려 백성으로 만들고, 그들의 땅을 고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키고자 했다. 1073년 동북면의 15주 여진 추장들이 종래의 기미주가 아닌 고려의 주군으로 아주 정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투항해온 여진족 3,208호를 받아들인 고려는 11주(州)를 설치해 귀순주(歸順州)로 삼아버렸다. 고려가 귀순주가 아닌, 일반 주군으로 삼았다면 또 다른 역사가 벌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려는 이들을 완전히 포용할 만큼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고려와 여진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여졌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이 사건을 계기로 화내기미주 거주 여진 내부에 부족간 투쟁과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하얼빈 부근에서 성장한 완안부여진이 강성해지며 남하하여 기미주내 여진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104년 완안부여진의 군대가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촌락을 완전히 점령하고 천리장성 인근까지 출몰했다. 그러자 고려는 완안부여진을 축출하기 위해 지금까지 추진했던 온건정책을 버리고 무력에 의한 강경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17만 별무반의 창설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과 맞서게 했으나, 그는 공을 세울 욕심에 너무 멀리 쳐들어가는 오판을 한 탓에 대패하고 말았다. 고려는 추밀원사 윤관을 다시 보내 출동시켰으나, 또 다시 패해하고 말았다. 고려 숙종이 2번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그 대책을 묻자, 윤관은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 막을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고하고, 기병을 비롯한 군사를 양성하고 군량 비축을 건의했다. 숙종을 이 건의를 받아들여 1104년 12월에 정규군 외에 별무반을 새로 창설했다.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 발화군을 비롯한 특수병으로 구성된 별무반은 귀족의 자제부터 아전, 농민, 상인, 노비, 승려까지 20세 이상 남자들이 모두 참여했다. 백성들을 총동원해 별무반을 창설할 만큼 고려의 북벌의지는 대단히 컸다. 숙종이 죽고, 즉위한 예종은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이행해 별무반을 조련했다. 1107년 여진이 변방을 노략질하자, 예종은 그해 윤10월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별무반의 여진정벌을 명했다.
윤관은 “제가 진작 선왕의 밀지를 받았고, 이제 어명을 받들었으니 삼군을 통솔해 적의 성을 쳐부수고 우리의 강토를 넓혀서 반드시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총사령관 윤관은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으로, 그는 문과 과거에 급제한 후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했다. 그는 숙종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인 윤관은 정2품 중서시랑 평장사로 재상의 지위에 있었지만, 평소 신라의 명장 김유신을 흠모할 정도로 용맹함과 지략, 충성심과 책임감을 갖춘 장군이기도 했다. 예종은 문무를 겸비한 그에게 여진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정벌군 사령관 윤관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부 변방으로 진군한 후, 먼저 병마판관 최홍정과 황군상으로 하여금 완안부여진과 내통했던 여진 추장들을 초대하게 했다. 여진 추장 등 4백여 명이 오자,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복병을 동원해 모조리 죽였고, 의심하고 관문까지 와서 들어오지 않은 오륙십 명의 추장들도 복병과 정예기병을 동원해 섬멸했다. 여진 추장들을 먼저 제거한 후, 윤관이 5만 3천명을 거느리고 정주 대화문을 나서는 것을 시작으로 수군 2,600명을 비롯한 나머지 군사들도 모두 출병했다. 윤관은 동음성을 격파하고, 여진족이 집결한 석성을 공격했다. 그들이 굳게 저항을 하자, 윤관은 이름난 척준경을 불러 선봉장을 맡겼다.
척준경은 윤관에게 “제가 일찍이 과오로 죄를 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공께서 저를 장사라고 말씀하시면서 조정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청하셨으니, 오늘은 제가 몸을 던져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적진으로 돌격해 여진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서 윤관이 휘하군사를 인솔해 적을 공격해 크게 격파할 수 있었다. 척준경은 여진 정벌전쟁에서 윤관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한, 고려 최고의 맹장이었다. 윤관이 인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없었더라면, 척준경의 활약은 없었을 것이다.
윤관은 여진의 성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포로 5천을 잡고, 적군 5천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영토를 넓힌 윤관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4개주를 설치했다. 전쟁은 1108년에도 계속되었다. 여진은 숲 속에 매복하고 있다고 기습하거나, 무리를 지어 고려가 새로 축성한 성을 공격해왔다. 윤관은 이들을 격퇴하면서 함주, 공험진 등에 추가로 성을 쌓았다. 1109년 3월에는 의주와 통태, 평융 3곳에 더 성을 쌓아 마침내 9성 축조를 완성시켰다. 윤관은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항복해온 여진 사람이 5만이 넘었다.
윤관이 이때 예종에게 올린 표문에 따르면 “새로 개척한 곳은 들판과 밭이 기름지고 수량도 풍부한 곳이라, 예로부터 사람들이 눈독을 들였으나 차지하지 못했지만, 이제 하늘의 덕택으로 그 땅을 취했으니, 하늘에 계신 선조 임금님께 감사하고, 조정의 해묵은 수치를 씻었으니, 빛나는 업적이라고 할 만합니다.”고 했다. 예종은 윤관을 최고관직인 문하시중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가 개선하자 크게 축하잔치를 베풀어주었다. 9성 개척은 성공적이었다.
한때 일본인 연구자들은 윤관이 개척한 9성이 함흥평야 일대의 좁은 지역이라고 주장했지만, 17만 대군이 겨우 오늘날 2~3개 군 지역에 불과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 출동할 이유는 없다. 1388년 고려가 요동정벌을 시도한 것은, 명나라가 고려의 공험진 남쪽 지배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요동정벌은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지만, 이후 조선이 두만강까지 영토로 삼고, 명나라가 인정하게 된 것은 윤관의 9성 개척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척경입비도 – 윤관이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 4글자를 새긴 비를 세워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척경입비도>
윤관의 9성을 지키지 못한 고려
성공적으로 보였던 9성 개척은 잘못된 정책 탓에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고려는 새로 개척한 땅에 남쪽 지역(양광, 전라, 경상) 주민 6만 9천호를 이주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 농민 모두가 이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새로 개척한 땅으로 이주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고려는 농사를 짓던 여진 농민들을 내몰고 그 땅을 완전한 고려 땅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 정부는 여진이 배신한 것에 크게 분노했었다. 기존의 기미주 정책을 포기하고, 정벌이란 강경책을 선택하여 여진을 몰아내려고만 했다. 고려는 그들 삶의 터전을 빼앗고, 너무 성급히 영토로 만들려는 과욕을 부렸다. 이러한 정책은 당연히 여진의 반발을 샀다.
윤관이 9성 축조를 시작하자, 여진은 곧장 고려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고려가 광대한 땅을 개척한 만큼 각 성의 거리는 멀었다. 계곡과 골짜기가 험한 지역에 숨은 여진족이 수시로 복병으로 나타나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했다. 비록 고려의 성은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고려군도 많이 희생되었다. 더구나 농민들은 수시로 노략질해오는 여진족 때문에, 농사지으며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땅을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농민들도 늘어났다. 넓은 영토를 개척했지만, 들어가는 비용과 희생은 커지는 반면, 당장의 이익은 크지 않았다.
여진도 고려와 계속 싸워봤자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절박함에 차이가 있었다. 여진은 여러 차례 9성을 되돌려주면, 예전처럼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겠노라고 간청했다. 고려는 여진의 요청을 거듭 거절했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훼손되자 점점 전쟁 회의론이 커져갔다. 1109년 6월 예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9성 반환을 논의했다. 9성 반환에 찬성한 자가 무려 28명인데 비해, 반대하는 사람은 2명에 불과했다. 결국 예종은 그해 7월에 종전과 같은 군신관계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9성을 반환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때 고려에 와 있던 여진 사신단은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해 눈물을 쏟아냈다. 고려는 함주 성문 밖에 제단을 차려놓고, 여진 추장들에게 고려에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는 9성 회부로 인해 모든 기미주를 잃게 되었고, 국가적 위신을 실추되어, 고구려 고토회복의 과업이 좌절되고 말았다. 반면 완안부 여진은 전 여진족을 단합시킬 힘을 얻었고, 고려의 위협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완안부는 송나라와 더불어 거란(요)를 정벌하여 마침내 금제국을 세우고, 고려와의 관계를 역전시킬 수가 있었다.
고려는 왜 9성을 되돌려주어야만 했는가?
9성 반환이 결정되자, 정벌 반대파들은 윤관과 오연총을 겨냥해 무리한 정벌을 일삼아 국력을 소모하게 했다며 그들을 비난했다. 그들의 진정한 속내는 여진 정벌의 공을 세운 윤관이 조정에 돌아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에 있었다. 문책론에 밀린 예종은 윤관의 원수직을 거두는 것으로 일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반대파는 강력하게 윤관의 파직을 주장했고, 결국 예종은 윤관을 파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1년 후 예종은 윤관과 오연총을 다시 복직시켰다. 하지만 윤관은 복직 제의를 정중히 사양했다. 예종은 여론에 떠밀려 파직한 것이니 다시 관직에 나오라고 달랬지만, 윤관은 국가의 미래 보다 정권 다툼에 이골이 난 조정에 다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윤관은 1111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관은 뛰어난 장군의 자질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를 뒷받침해주어야 할 고려 내부에서 그를 질투하는 자들이 늘어갔다. 9성을 돌려준 것은 고려의 미래를 포기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 조정 대신들은 당장의 권력을 먼저 생각했다. 적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었다. 뛰어난 인물을 질투하고, 책임을 남에게 전가만 하는 조직은 큰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무엇보다 윤관이 좌절한 것은 고려가 여진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정군이 성공하려면, 새로 개척한 곳의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고려는 고구려와 발해의 백성이었던 여진족을 적극 동화시키려는 노력보다 복수를 앞세웠다. 고려에 대항하는 완완부 세력만을 선별적으로 격퇴했다면, 9성을 돌려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여진정책에서 고구려, 발해에 비해 포용적이지 못했다. 12세기 초 거란이 약화되고 아직 여진이 통합되지 못한 시점에서, 고려는 큰 나라로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다. 남북통일과 한민족 통합이란 과제를 앞둔 우리는 고려의 여진정벌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윤관의 묘 – 경기도 파주시 관탄면 분수리에 있는 윤관의 묘소. 사적 323호. - 문화재청 사진
첫댓글 여진족 축출에 집중한 나머지 이에 대한 회유책을 쓰지 않아 고려의 여진정벌이 실패한 이유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