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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숙공 이상길 묘역 : 노원구 하계동 산 16-1(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70호)
-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침입한 외적을 맞아 싸운 공조판서를 지낸 충신 묘역
< 충숙공 이상길 묘역 >
이제까지 ‘충숙 이공 신도비’라고 부르던 이 문화재는 2008년에 충숙공 이상길 묘역(忠肅公 李尙吉 墓域)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묘역에는 충숙공 이상길의 부친 찬성공 이희선과 충숙공 이상길의 형 평사공 이상철, 충숙공 이상길과 부인 경주이씨의 무덤 외에 10여 기의 무덤이 있다.
< 충숙공 이상길 신도비 >
충숙공 이상길(李尙吉 : 1556∼1637)의 신도비는 1661년(현종 2)에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 선조∼인조 임금의 여러 사건에서 올곧은 행동을 보였던 충숙공 이상길의 성품, 공적을 기록하였는데 충숙공 이상길 무덤 남동쪽의 비각(碑閣) 안에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조선 중기의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신도비의 글은 성균관 좨주(祭酒)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宋浚吉), 머리 전서[두전(頭篆)]는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 충숙공 이상길 > 충숙공 이상길의 자는 사우(士祐), 호는 만사(晩沙)·동천(東川)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조선 초 명종 11년(1556)에 태어나 20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30세 때 선조 18년(1585)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충숙공 이상길은 남원에서 싸웠다. 1618년(광해군 10) 여진족의 후금이 요동 지역을 점령하자 명나라 모문룡(毛文龍)이 요동 사람들을 이끌고 평안도 가도(椵島)에 들어왔다. 이때 평안감사로 있던 충숙공 이상길은 광해군의 명을 받들어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을 구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공조판서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에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령으로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81세의 나이로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1월에 청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상륙하여 왕비, 왕자, 왕족들 200여 명을 체포하자 충숙공 이상길은 1월 26일에 아들 이경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얼마 후에 청나라군이 충숙공 이상길이 살아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등에 활을 쏘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인조는 문서로서 세상을 떠난 충숙공 이상길을 널리 표창하고, 그의 충절을 기려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죽은 뒤의 벼슬을 좌의정으로 높였다.
충숙공 이상길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충렬사에 모셔져 제사를 지내고 있고, 그의 글을 모아 펴낸 책으로는 『동천집(東川集)』이 있다.
그리고 충숙공 이상길이 80세 때 도화서의 화가 김명국(金命國)이 그린 영정 두 장이 현재 남아 있다.
충숙 이공 영정 중의 하나는 국립전주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는데 보물 제792호로 지정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이곳 충영각(忠影閣)에 모셔져 있는데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영정은 가로 93㎝, 세로 185㎝의 크기이고, 충숙공 이상길이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렸다.
머리에는 관리들이 쓰는 사모(紗帽)에 붉은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은 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옷의 옆트임 안쪽으로 보이는 속옷과 양쪽 어깨의 기울기를 달리해 안정되어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조선 중기 영정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얼굴에 있어 윤곽선의 농도를 다르게 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솜씨로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린 솜씨가 섬세하고 보관 상태도 아주 좋다.
충숙공 이상길 묘역 안에는 홍살문, 제사를 준비하는 집[재실(齋室)]으로 동천재(東川齋)가 세워져 있다.
이 묘역 안에는 충숙공 이상길(尙吉)의 아들 자헌대부 지충추부사 이경(李坰 : 1580년∼1670년)의 묘도 이곳에 있다. 이경의 자는 동야(東野), 호는 오수(聱叟)이다. 인조 1년(1623), 진사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1626년에 정언·지평, 1629년에 강진 현감·장령 등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로 청나라군이 건너오자, 충숙공 이상길은 아들 이경을 불러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책임을 다해 달라고 부탁하고 자결하였다. 그러나 이경은 강화도의 포구를 지키던 그의 임무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서울 시립 과학관 : 노원구 하계동 21 번지
- 강북권역에 과학문화시설을 확충해 지역별 과학문화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청소년 과학관
서울 시립 과학관은 서울시에서 노원구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청소년 과학관이다.
강북권역에 과학문화시설을 확충해 지역별 과학문화 격차를 해소하고, 서울의 권역별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노원구 하계동에 서울시립과학관을 건설하였다. 서울시립과학관은 2014년에 착공하여 2016년에 공사 및 전시 제작 설치를 완료하고, 2017년 5월 19일에 전체 면적 12,330㎡,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개관하였다.
이 과학관은 수학,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등 기초과학의 원리를 실생활과 연계한 체험을 바탕으로 과학 결과물뿐만 아니라 과학탐구의 전 과정을 볼 수 있는 과학관이다. 입지 및 접근성의 한계를 고려하여, 지역주민을 핵심 대상으로 선정, 인접한 과학문화자원을 연계한 과학 특구로 발전을 모색하였다.
이 과학관의 주 이용 목적은 전시관 관람, 실험 수업, 대중 강연으로 나뉘는데, 청소년 과학관임에도 전시관을 둘러보러 오는 일반시민들이 더 많다. 대부분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다. 방문하는 학생들은 학교 단체 견학을 오거나, 실험 수업이 있는 학생들이다.
수업 대상은 청소년 과학관이니만큼 중학생, 고등학생이 대부분이나 부모가 먼저 배우는 과학, 가족이 함께하는 드론 등 성인이 참가할 수 있는 수업도 있고, 주말에만 있는 목공 교실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과학관은 매주 목요일마다 사이언스 홀에서 대중 강연을 하고 있다. 토요일에는 과학에 관련된 저서를 쓴 작가들이 저자 무료 강연을 하기도 한다.
◇ 서울 이윤탁(李允濯) 한글영비(靈碑) : 노원구 하계동 12번지(보물 제1524호)
- 서울 이윤탁 한글 영비는 한글이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묘비
이제까지 ‘한글 고비(古碑)’로 불리던 이 문화재는 2007년에 보물 제1524호로 되면서 ‘서울 이윤탁(李允濯) 한글 영비(靈碑)’로 바뀌었다.
이 영비는 이윤탁의 셋째 아들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 : 1494∼1547)이 1536년(중종 31)에 어머니 고령(高靈) 신씨(申氏)가 돌아가자, 태릉 부근에 묻혀 있던 아버지 이윤탁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하여 그의 어머니와 합장하면서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 무덤의 비석 앞면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고비묘갈음지(考妣墓碣陰誌)」라는 제목 아래 무덤의 주인공이 살아온 과정이 적혀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쓴 경고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靈碑(신령한 비이다. 건드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풀이)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것은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 비석의 가치는 왼쪽 면에 쓰인 한글 경고문이다. 실제로 이 비석은 주민들에 의해 신비한 물체[神物)]로 여겨져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이 비석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렸다고 전한다.
조선말 이전의 비석 가운데 한글이 새겨진 것으로는 지금까지 산불됴심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 · 인흥군 이영 묘역 내 묘표(비지정) · 이윤탁 한글 영비 등 모두 3건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이윤탁 한글 영비는 한글이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묘비라는 점에서 특히 역사적 가치가 높고, 국어 역사를 연구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의 가치를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종 31년(1536) 당시에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둘째,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글씨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글씨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체와 <용비어천가> 글씨체의 중간 형태에 해당한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쓴 것이 아닌 순한글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한글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는 한문 원문을 번역한 글[언해문(諺解文)]이 아닌 원래의 한글 문장이다. 15세기 이후에는 언해문이 한글 자료의 주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의 번역 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한다.
다섯째,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現象)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나타내어 당시 국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를 세운 이문건(1494~1547)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이다. 조광조(趙光祖)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하고, 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에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체포되어 사약을 받고 돌아가자, 조광조(趙光祖)를 따르는 사람들이 화를 당할 것을 염려하여 문상(問喪)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나 이충건, 이문건의 형제는 조광조의 장례를 모시는 데에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이에 이문건은 훈구파의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安處謙)이 감옥에 갇히는 사건에 연관되어 그의 형 이충건은 귀양 가다가 청파역(靑坡驛)에서 사약을 받았고, 이문건은 낙안(樂安)으로 귀양을 갔다. 1527년(중종 23)에 귀양에서 풀려나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를 거쳐 정언ㆍ이조좌랑 ․ 장령을 지냈다.
1546년에 명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문건은 성주에 귀양 갔다가 명종 2년(1547)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문건의 성품은 조심스럽고 중후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문건은 2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책을 읽고, 시와 문장 짓기에 힘썼다.
뒤에 이황(李滉)ㆍ조식(曺植)ㆍ성수침(成守琛)ㆍ이이(李珥) 등이 그의 시와 문장을 즐겨 읊었다고 전한다. 이문건은 광해군 때부터 괴산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서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첫댓글 애국 충정의 선인들,길이
본 받아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