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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뜬 진도 출신 누산네가 ‘진도서 삼별초 삼별초 해 쌓는데 도대체 삼별초가 뭔 야깅가라?’ 하고 묻걸래 관련 자료덜 잔 찾아봄시로 나름 생각하고 공부 잔 해 봤어람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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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 있어서 삼별초란 어떤 존재인가?
학교에서 배왔든 대로 삼별초(三別抄)란 고려 시대에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최우(崔瑀)가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한 야별초(夜別抄)가 커짐시로 특수부대로 발전시켜가꼬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어졌는데 여그다가 신의군(神義軍)을 합친 세 개의 군대 조직체를 뜻하는 말이지람짜.
그랑께 그 삼별초(三別抄)라 하넌 군대가 몽골(蒙古, 元나라)에 항복한 기존의 고려 정권에 반발해서 진도로 둘옴시로 태조 왕건(王建)의 고려국(高麗國)에 정통을 잇는 황제를 세우고 진도를 수도(首都)로 삼어가꼬 왕궁(王宮)을 짓고 왕국(王國)을 개설했던 옛일이 진도에서 있었잉께 그 당시 진도로 본다므는 천지개벽할 일이 되넌 일이었고 역사적이로도 진도엔 찰로 크나큰 대 사건(大 事件)이었지람짜.
물론 승자에 기록인 역사서들은 삼별초반란(三別抄 叛亂), 삼별초의 난(三別抄의 亂)이라 함시로 ‘기득권 세력이었던 무신정권의 잔재세력들이 그들에 입지(立地)가 좁아지는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오랑국(五狼國)을 세워 진도와 제주에서 항거(抗拒)하다 결국 진압(鎭壓)되었다’라고 했지람짜.
※오랑국(五狼國)의 狼은 '이리 랑'이라는 한자로, 이리는 개과 동물로 늑대 승냥이 등을 뜻하는 데도 쓰이는 한자인데, '낭패(狼狽)를 보다'의 뜻도 갖고 있다. 이점이 승자(勝者)들의 시각에서 표현된 것이라 보겄지라.
그란데 한편이로 보자므는 당시에 그 새로운 왕국 건설을 주도한 사람들은 ‘고려국이 몽골(蒙古)에 무릎 꿇고 항복함은 태조 왕건 이래 350년 고려정권과 멀리는 단군 조선 이래 3,600년 정통성을 잃는 일’이었기에 ‘우리는 정통성을 잇고 외세(몽골)에 항거한다’는 명분이었고 이는 당시 백성들에게서도 많은 호응과 지원을 받았던 것이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헌데 삼별초 반란(三別抄 叛亂), 삼별초의 난(三別抄의 亂)이라 불리다가 그남둥 낭중에사라 삼별초의 항쟁(三別抄의 抗爭), 삼별초 항전(三別抄 抗戰)이로 바까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에 내용덜얼 되새겨보자믄 아래와 같지람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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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三別抄의 抗爭)
1270년 6월 삼별초 해산령에 불만을 가진 기존 무신정권의 삼별초 장병들이 삼별초를 규합해서 원종(元宗)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 국왕으로 옹립해 봉기하였다.
이후 개경환도(開京還都)를 거부하고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에 대항해 펼쳤던 3년간의 항쟁을 말한다.
강화도를 떠나 8월 19일, 두 달여 만에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용장산성(龍藏山城)을 쌓아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이곳에 궁궐과 관청을 지어 항전 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1271년 5월, 김방경과 홍다구가 이끄는 1만여 명을 태운 400여 척의 전함이 진도를 향해 공격해 들어오면서 패전 후 일부가 제주도(항파두리)로 피했다가 1273년 4월 결국은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에 패했다.
◎자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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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께
강화도에서 시작해 제주도에서 끝난 그 3년 항쟁(抗爭) 가운데 진도에서 존재한 기간은 불과 열달 남짓한 기간이여람짜.
일단 요만침만 봐도
요케 사진에 뵈넌 저 용장성(龍蔣城) 궁궐터에 모십을 보자믄 그 1년 여 기간 동안에 저케 크고 널룬 궁궐을 짓고 하니라고 진도에 백성덜은 엄마나 많한 피와 땀과 공을 디렜으까 찰로 눈물이 나지람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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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년 고려의 태자 전(倎, 뒤의 원종)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되었다. 이때 최씨 정권은 타도되어 일단 왕정이 복구된 형세였으나,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이었는데 무인들은 출륙환도(出陸還都), 즉 개경환도(開京還都)를 거부하면서 항몽에 의지를 보였으나 왕실은 몽고에 접근, 무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를 단행함으로써 명실공히 왕정복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일반 민중들도 친몽적인 왕실파의 패배주의적 태도에 비판적이었기에 이에 힘입어 삼별초는 그들의 반란을 반몽고·반정부의 자주·독립 수호운동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1270년 6월 1일 배중손,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원종(元宗)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란 3일 뒤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배를 태워 진도로 보냈다. 이때 선박 1,000여 척이 동원되었다.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것은 몽고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섬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해 전략상 우위를 확보하려는 작전이었다.
◎자료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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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데 이케 진도가 선택된 데는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실세로
최충헌(崔忠獻, 1149~1219년. 시호는 경성(景成))의 대를 이은 최우(崔瑀, ?~1249년, 시호는 광렬(匡烈))의 서자 아들로 최항(崔沆, ? ~ 1257년, 본관 우봉(牛峰). 법명 만전(萬全)이 송광사에서 승려가 되어 쌍봉사에 있다가 진도의 용장사(龍蔣寺)에서도 주지로 있었던 과거가 있었는데 1248년(고종 35년) 아버지 우(瑀)의 명으로 환속했고 아버지가 죽자 최씨 무신정권을 이어받았는데 몽골에서 강화 출륙(出陸)을 요구하자 국왕의 사신 접견을 강력히 반대하는 등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는 강경책을 썼고 이후 무신들도 이 기조를 유지했기에 최항(崔沆)에 지리적 연고가 있었던 진도 용장사(龍藏寺)에 대해 관련이 있다고도 보겄지람짜.
※ .배중손(裵仲孫, ? ~1271) 의 출생지를 진도군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고려사』 충렬왕 2년 조에 “역적들의 고향이었던 상주, 청주, 해양, 진도 등의 고을 명의 격을 낮출 것을 청하였다는 기록”과 고려 때 진도군 임회현의 토착 성씨가 배씨였다는 점에 의거한다. 그래서 최항이 진도 절(龍藏寺)에서 머물던 시절에 발탁해간 인물이라는 설도 있음. -진도 군지(2007년 간행)-
※.최항(崔沆, 萬全)이 환속하기 전에 진도의 한 절에 머물면서 김지대(金之岱, 1190~1266년)를 만난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또 진도는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운로(漕運路)를 장악할 수 있고 국가의 주요한 세입원이던 곡창지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전략상의 잇점에 더해서 멀리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의 남해와 서해의 해안지방을 연결했던 연안
항로의 주요 교통로라는 좋은 조건도 있었지람짜.
그래서 물길에 약한 몽고군과 몽고에 항복한 기존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으로서의 장점도 있음시로 교통의 요지로서 남해와 서해를 통괄할 수 있었던 지리적 이점을 생각했을 것이지라.
훗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1928~2004년) 일본 가나가와대학(神奈川大学) 교수는 1994년 진도를 방문해 삼별초와 민중의 역할을 조사했는데 군내면 용장산성 행궁지, 왕온의 묘, 남도석성 등지를 돌아본 뒤 ‘1271년 일본 정부에 접수된 고려 정부의 두 번째 문서는 삼별초 진도정부에서 보냈던 것’이라고 확증한 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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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진도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전라도 일대를 제압했으며 해안 도서지방은 물론, 내륙지방도 점차로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진도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복속의 뜻을 표하는 자도 있었고 기세가 올라, 전라도 지방의 도서와 해안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거제·합포(合浦)[지금의 경상남도 마산]·동래·김주(金州)[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등지가 삼별초의 군사적 활동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11월 삼별초는 탐라(耽羅)[제주도]를 공략,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라도·경상도의 조운(漕運)이 차단되어 정부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고려·몽고의 연합군은 여러 차례 진도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다가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되면서 김방경·흔도(忻都)·홍다구의 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해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은 전사한 것으로 보이며 진도 함락 당시 남녀의 포로가 1만여 명이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에는 인질로 잡힌 귀족·고관의 가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제주도로 이동해 우선 방어진지의 구축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272년부터는 맹활동을 전개해 자주 본토를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 해 11월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지금의 경기도 부천]를 공격해 부사와 그 처를 납치했고, 또 합포에서 전함 20척을 불태웠다. 남도의 세공(稅貢)을 해상에서 약탈해 조운에 큰 피해도 주었다.
1272년 8월 원나라 세조(世祖)는 일본 정벌의 기지로서 탐라를 중요시해 사신을 보내 탐라 공략에 대한 적극책을 촉구하였다. 이에 홍다구는 김통정에게 선무 공작을 폈으나 성과가 없자, 1273년 2월 김방경·흔도·홍다구의 연합군은 다시 탐라를 공격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병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인(고려군 6,000명, 몽고군 2,000명, 한군 2,000명)이었다. 4월 수령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했다가 죽고, 여당 1,3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반란은 약 3년 만에 진압되었다.
삼별초가 고려·몽고 연합군의 우세한 병력의 공격에도 3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전투병력이기도 했지만 배후에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부와 몽고군에 대해 투쟁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 사회의 내부에 고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경상도 밀성군(密城郡)·청도군(淸道郡)의 농민들은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해 관헌을 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가 1271년 1월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삼별초에 동조해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정부 관료를 죽이고 진도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들은 당시 반정부·반몽적인 민중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반란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조국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의 폭동이었다. 이것이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어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연합군을 상대로 3년간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별초항쟁 (三別抄抗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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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지 현재 남한산성의 둘레가 약 8Km이고 행궁(行宮)이 공터를 포함해서 약 1만 평 규모라 하는데 그와 비교해 볼 때 용장성(龍藏城)은 그 총 지럭지가 약 13km에 이르고 성안의 면적은 258만 평 정도에다가 궁궐은 현재 발굴된 건물 유적지만 약 7천 평에 이르다 봉께 이 공사를 암만 기존 용장사를 중심이로 조성했다제만 1년 동안 성 쌓고 궁궐 짓고 하니라고 진도 백성덜에 노역(勞役)은 고초가 엄마나 심했을 거고 걱다가 패전 뒤에 몽고 군사한테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등가 몽고에 노예로 끌려갔던 진도 사람덜에 실정은 어쨌으까... 생각하므는 그야말로 가심아푼 진도에 역사여람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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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몽골군은 많은 토녀(士女)와 백성 및 珍寶(진보) 남녀 1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 양미(糧米) 4000석과 많은 財寶(재보)·器仗(기장)을 거두어 개경으로 포획했다’ 고 하니...
자료출처 -참고문헌 : 삼별초의 진도 입도 배경과 저항활동【저자명 박종일, 학위논문(석사), 한국교원대학교 |2008년 】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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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튼간에 고 때 끌려갔다가 그남둥 풀려난 인원이 돌아온 것은(물론 전부는 아닌 일부였겄제만) 22년 만인 1293년이었다고 기록이 있습디다.
그라고 아래 내용은
진도에서 조영남외과 의원을 운영했던 둔전리 출신 조영남 씨도 향토사학에 관심이 많아 진도의 향토사에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그는 ‘진도의 고려인 오룡국(五龍國)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삼별초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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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해체되었고 진도에서 새로 개국한 국가인데 왜 아직도 <삼별초>라 하는가?
2. 국명이 왜 고려가 반도(叛徒)들의 다섯 마리 이리 승냥이들이라 하는 그 <오랑 五狼>인가?
3. 엄연한 용장성 <궁성지(宮城址)>를 <행궁지(行宮址)>라 하는가?
4. 엄연한 새 국가 국왕을 평민처럼 <왕온(王溫)>이라 하고, 그 왕릉을 <왕온의 묘>라 하며, 그 더욱 그 엄연한 역사의 자리를 전설로 여기고 그 앞에 <전傳>자를 덧붙이는가?
그리고 <왕온제 (王溫祭)>라 하는가?
아래와 같이 바로 잡아야 할 명칭들
1. <오룡국(五龍國)> <오룡군(五龍軍)> <오룡국민(五龍國民)> <오룡국(五龍國) 도성(都城) 진도(珍島)>
2. <오룡국(五龍國) 궁성지(宮城址)/오룡국(五龍國) 용장성지(龍藏城址)> <오룡국(五龍國) 용장산성(龍藏山城)>
3. <오룡국(五龍國) 국왕(國王) 온왕(溫王)> <오룡국(五龍國) 왕릉(王陵) /온왕(溫王) 왕릉(王陵)> <온왕제(溫王祭)/ 오룡국왕제(五龍國王祭)>
<오룡(五龍)>의 근거
1. 풍수지리상 용장궁성지가 < 오룡장주 (五龍藏珠)>터요 그 준말이 <오룡(五龍)> 또는 <용장(龍藏)>이다.
2. 지명과 마을 : 용장평, 용장리, 용장사, 오류리, 유교리.
3. 사필귀정처럼 오류-유교리와 용장리 사이에 세운 초등학교가 <고성초등학교 오룡분교>이다.
4. 풍수지리에서 <오룡장주(五龍藏珠)>는 <오룡쟁주(五龍爭珠)>와 같다 하고, 천안 독립기념과의 자리가 <오룡쟁주(五龍爭珠)>라 한다.
그러나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는 쟁주(爭珠)라는 것과
함께 하나가 되어 감추고 있는 장주(藏珠)라는 자리가 어찌 같을 수가 있을까?
-이상 자료는 <조영남의 고성한벌>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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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진도서투리사전 저자/ 진도 송현인 조병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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