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탕평책
9반 전명수
숙종은 인경왕후 외 2명의 왕비에게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희빈 장씨가 윤을,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는 금을 낳았다. 숙종의 뒤를 이은 윤은 제20대 경종이고 그 뒤를 이은 왕이 금(영조)이다. 금은 적자의 소생이 아니라는 점과 경종인 이복형과는 여섯 살 차이로 세제책봉과 숙종과 경종의 재위 시 대리청정 문제와 관련하여 소론과 노론 사이에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가 하면 이와 관련하여 대신들의 탄핵 등으로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겪기도 하였고 세제 책봉 과정에서도 반복하여 세제거부 상소를 올리며 불안한 생활을 이어오는 등 우여곡절과 위협을 느껴가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는 1694년에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해 연잉군에 봉해지고 1717년에는 숙종의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721년(경종1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고 1724년8월 경종이 죽자 조선 제21대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영조이다.
영조는 등극하자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하였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였다. 김일경이 주도한 신임옥사의 경위를 조사한 후 김일경을 국문하였으나 불복하므로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고변으로 신임옥사를 유발하여 공신이 된 목호룡을 국문하고 처형하였다. 또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를 동조하였던 이진유 등 6명을 귀양 보냈다. 노론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하여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 노론인사를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이 을사처분으로 신임옥사 때 처단된 4대신을 비롯한 관련 인사들의 신원을 복원하였다. 노론측은 신임옥사에 보복하려하였지만 영조는 이를 거부하고 송임명, 조문명 등의 건의에 따라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하였다. 정호, 민진원 등 노론을 파면하고 초년에 파직 되었던 이광좌, 조태억을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것이 정미환국이다. 다시 정권을 잡은 소론들은 임인사건의 4대신 처분에 잘못되었음을 논핵하여 영조는 그들의 죄명만 씻어주고 관직을 삭탈하는 선에서 타협하였다.
1724년 경종이 갑자기 죽자 이인좌, 이유익, 심유현 등 소론은 정치적인 위협을 느껴 남인들을 포섭하여 1728년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모반을 계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이인좌의 난’이라 한다. 이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동조자가 줄어들고 결국 최규서 등의 고변으로 탄로 나고 말았다. 1729년에는 노론 소론 내의 탕평세력들을 고르게 기용하여 탕평정국 기초를 다졌다. 이때 영조가 취한 정책은 쌍거호대였다. 즉 영의정에는 노론의 홍차증, 좌의정에 소론의 이태좌, 이조판서에 노론 김재로, 이조참판에 소론 송인명, 이조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량에 노론 신만으로 각각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惟才是用), 즉 인재 중심의 인사정책을 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탕평책은 초기에는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그런데 탕평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에서는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하였는데 그 사건이 ‘사도세자사건’이었다. 정빈 이씨가 낳은 효창세자가 있었으나 세자책봉 후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영빈 이씨가 낳은 선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다. 그러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은 그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려 놓고자 이간질을 하게 되었다. 이에 영조는 세자를 자주 불러 질책하게 되었고 세자는 정신적 압박이 심하여 고통을 받게 되었다. 궁녀를 함부로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빼앗기도 하고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다. 1761년에는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이에 노론 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 어긋난다며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수행원을 파직시키고 세자에 대한 불신이 격화되어 있었다. 계비 김씨의 아버지인 김한구와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신하도록 명하였지만 이에 응하지 아니하여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영조는 이 사건 후에 후회하는 마음으로 세자의 죽음에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조는 탕평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하여 과거시험의 탕평과를 실시하였고 같은 당파간의 혼인을 금지시켰으며 죄수의 인권을 강화하고자 압술형을 금지하고 사형수에게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도록 하여 사형의 신중을 기하였으며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켰다. 균역법 시행과 궁궐의 전답에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문화적으로는 수많은 서적을 간행, 보급하였으며 영조 자신이 쓴 악학궤범, 어제경세문답, 백행원, 어제자성편, 위장필람 등 10여권이 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하였다. 영조는 1776년 3월 8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재위기간이 51년 7개월로 조선의 27왕 중에 가장 오랫동안 재위하였으며 가장 장수한 임금이다. 정성왕후 서씨를 비롯한 6명의 부인과 2남7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첫댓글 영조의 탕평책 정말 좋은 시책이네요.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나중에는 인재 중심으로 정책을 펴 나가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네요. 현대의 정치인들이 본받았으면 정말 좋겠네요. 사도세자 사건은 너무 가슴 아프네요. 잘 읽고 갑니다. 송하님 행복하세요.
당파싸움에 신물이 날 만큼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기를 쓰고 탕평책을 펼쳤던 것 같습니다. 권력의 욕심 때문에 자식을 죽이기 까지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고맙습니다.
영조가 이씨조서누왕중에선 그래도 정치를 잘한편이죠 사도세자 사건은 후일에 두고두고 후회하셨다죠
세자자신도 처신에 신중하지 못한점도 있었는가봐요 역사공부하고 갑니다
가정 오래 기간 재위하였고 장수한 왕이지요. 바른 정치를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였고요. 감사 합니다.
영조는 탕평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하여 과거시험의 탕평과를 실시하였고 사색 당파을 잘기용한점이 돗보이네요 또한 사형수애게도 지금과갓은 삼심제도을 실시하여 백성들이 억울하게 피해을
입는일이 업겟금한 올바른 정치을 펴셧네요 당시 제위기간 51년7개울이란 업적도 눈여겨 볼만하며
그시절애도 보기드믄 대단한 장수을 한 왕이시네요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늘 찾아주시어 고맙습니다. 김선셍님 항상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