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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오늘날 화학 농업이 비판받는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대량 사육은 경제적으로는 효과적이지만, 생태적으로 해로우며 윤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 동물은 기계가 아니다.
*국제 연합의 추정에 따르면 신진 산업 국가의 농업이 전 세계적인 온실 효과에 15%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
*땅은 너무 많은 화학 물질로 인해 손상되고 황폐해지기 일쑤다.
*유해 물질이 땅 속에 스며들어 그곳의 생명을 파괴한다.
*비료와 농약은 물을 오염시켜 강과 호수가 죽게 만든다. 강물은 질산염과 살충제를 바다로 수송한다.
*우리 생명의 가장 귀중한 수단인 지하수가 위태롭다. 현재 11만 6000가지의 화학 약품이 지하수에 유입되고 있다.
*식수 정화에 점점 더 많은 비용이 들고 있다. 독일은 1870년만 해도 물을 한 번 여과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1955년에는 세 번이나 화학 약품으로 정수해야 했다. 오늘날에는 무려 여덟 번이나 정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농민이 무책임하게 환경을 해치는 죄인이란 말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은 이러한 발전에서 이익을 얻지 못했다.
*농민의 종말이 초읽기에 들어간 게 확실하다.
*1950년 이래 독일에서 110만 개 이상의 농장이 문을 닫았다.
*1950년만 해도 독일에서는 400만 명이 농업에 종사했지만 현재는 55만 명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매년 약 1만 5000개의 농장이 문을 닫고 있다.
이익을 얻는 쪽은 다음과 같다.
*점점 더 규모가 커지는 대농들
*화학 산업, 지난 40년 동안 독일의 전답에 뿌려진 화학 약품과 인공 비료는 꾸준히 늘어 이제 다섯 배에 이르렀다.
*농민을 점점 더 하청업자로 전락하게 만드는 식품 산업.
*최근부터는 ‘더 보기 좋게, 더 화려하게, 더 크게, 더 오래 유지될 수 있게’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있는 유전 공학 산업.
14년 전, 독일인들은 수입의 약 40%를 식품에 지출했다. 오늘날에는 그 비율이 11%이다. 매달 식품비보다 자동차에 돈이 더 많이 든다. 그렇지만 ‘양보다 질’이라는 표어에 따라 비록 약간 비싸더라도 바이오 식품을 구입한다면, 우리는 이후 발생할 건강 관련 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식품이 결국은 더 저렴한 셈이다.
생태적, 생물학적 경작의 다섯 가지 계명은 다음과 같다.
*생태적 농민은 인조 비료와 화학적 식물 가공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생산물을 나중에 익게 하기 위한 화학 약품이나 동식물용 호르몬을 사용하지 않는다.
*종에 맞는 동물 사육은 동물들에게 많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도물들은 자기 농장에서 생산되는 사료를 먹으며 아플 때 저절로 치유 가능하게 하는 자연 치료제를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생태적인 농업은 땅, 물, 공기, 식물, 동물, 인간 사이의 자연법적인 순환을 지킨다. 생태적‘ 생물학적 농업은 전체적으로 생각하고 일한다.
*땅의 생물은 세심한 경작을 통해 잘 보존되고 양육된다. 이것은 유기 비료를 주고 가축우리 분뇨를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녹색 똥오줌은 땅의 생물학적 과정을 촉진시킨다. 그리하여 식물들이 건강하고 조화롭게 성장할 수 있게 한다.
*생태적 농민은 덤불과 연못, 과수원 등을 통해 문화 경관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새와 곤충, 다른 유용 생물을 위한 둥우리와 은신처도 생겨나게 된다.
오늘날 독일사람 한 명은 평생 돼지 스물두 마리, 소 일곱 마리, 양 스무 마리, 닭 600마리 외에도 야생 동물을 비롯해 호수와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먹어치운다.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은 만족을 모르며 동물에게 끝없이 무례를 범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동물은 인공적으로 길러지고 기계에 의해 살이 찌워지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도살된다.
‘종에 맞는’ 동물 사육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독일에서도 수백만 마리의 동물이 ‘경제적 사정에 의한 강제’ 때문에 태어나고 고초를 겪고 죽임을 당한다. 대부분의 닭과 돼지는, 일어나고 사료를 먹고 드러 눕고 일어나고..... 죽는 생활 리듬만 알 뿐이다.
그러나 먹는 것을 보면 실제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오늘날 독일에 있는 유기농 농민 중 겨우 4%만이 동물을 종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동물에게 이것은 콘크리트로 된 갈라진 바닥 대신 짚을, 인공조명 대신 태양의 빛을, 평생 격리되거나 새장 같은 우리에서 사육되는 대신 가축우리에서의 운동을 뜻한다. 또한 호르몬과 항생물질 대신 천천히 살찌우는 것을, 동물의 골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수입 사료에 대한 포기를, 단지 보다 싸게 도살할 목적으로 동물을 괴롭히며 유럽의 절반을 끌고 다니거나 북아프리카로 수송하는 대신 가장 가까운 도살장으로 조심해서 옮기는 것을 뜻한다.
병아리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될 때 성 감별에 걸려 쓰레기통으로 보내진다. 우리는 칠면조 수컷을 탈이 날 정도로 살찌게 하고, 수탉에게 30일 동안 사료를 잔뜩 먹여 ‘잡아도 될 정도로 통통해지게’ 만든다. 닭장 속의 수탉들에게는 날갯짓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유럽의 농업에서 나타나는 진짜 불행은 ‘소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적인 광기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종교와 동물의 관계는 항상 일방적인 폭력의 관계였다. ‘동물은 영혼이 없다.’ ‘동물은 물건이다.’ ‘인간이 중심이다.’ 등은 2,000년 된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앙 고백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당연히 확신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교회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적인 신학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동물의 영혼은 영원한 존재를 향유하지 못한다.’
동물에 과연 영혼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대표적 주간 뉴스 잡지 <슈피겔>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행정 연구가들은 생물들이 영혼이 없고 아주 멍청한 기계라는 생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놀랄만한 발견을 했다. 쥐들은 독이 든 미끼를 알아볼 줄 알고, 이러한 지식을 심지어 다음 세대에 전해 준다. 코끼리는 정말로 같은 코끼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갈색 털과 빨간 궁둥이와 긴 꼬리를 가진 레수스 원숭이는 수학 테스트를 통과했다.
동물, 특히 영장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아무도 믿지 못했던 능력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회색 거위는 파트너를 잃으면 수년 간 슬퍼한다. 물개는 새끼를 도둑맞으면 심하게 울부짖는다. 그리고 어미 원숭이는 새끼가 길을 잃으면 종일 새끼를 찾아다닌다. 코끼리는 심지어 울 수 있고, 다친 친척 코끼리를 돌보기까지 한다.
연료 효율이 높은 집의 좋은 점은 절약 효과 외에도, 건축에 사용되는 자재들이 자연적이고 환경 친화적이며 다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무제한적으로 재활용 가능한 건축 재료인 찰흙, 충분히 다시 자라는 단열 소재인 짚과 아마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를 지탱하는 목재 때문이다.
목조 가옥이나 찰흙 가옥의 실내 기후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것은 숨 쉬는 자재와 관련이 있다. 독일에서도 연간 제곱미터당 2리터 내지 3리터의 난방유만 소비하는 주택들이 점점 더 많이 공급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보다 4배율 내지 10배율 정도 더 유리하다.
물은 생명이다. 우리는 먹지 않고 70일까지 생존할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기껏해야 70시간밖에 살 수 없다. 오늘날 물 재앙은 남에서 북으로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다. 날마다 1만 5000명의 인간이 물 부족 때문에 죽는다. 대부분의 기근 재앙은 그 원인을 물 재앙에서 찾을 수 있다. 아직 물이 충분한 중부 유럽도 물 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물은 사용되고 오염되고 허비된다. 물속의 독, 화학 폐기물, 화학 비료, 공기 오염 등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존 수단을 위협한다.
100년 전에는 물을 한 번 여과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늘날에는 오염된 물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 점점 더 엄청난 기술 공학과 화학 물질에 의존한다. 독일에서는 현재 물을 다시 마실 수 있게 될 때까지 여덟 단계의 화학 처리가 필요하다. 물은 염소 처리되고 여과되고 방사선에 투사된다.
워싱턴의 동물학자이자 독극물 전문가 테아 콜번은 물에 스며든 화학 물질이 물고기와 새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번식 장애를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유감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유해 물질 중 일부가 임부의 자궁에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게 되면 이런 물질들은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자라는 동안 자궁에 계속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남자들의 정자 수는 지난 50년 동안 약 절반으로 줄었다. 호수와 강과 바다에 사는 수많은 동물은 이미 더 이상 후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번식하고 번성하라’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머지않아 ‘너희가 할 수 있는 한’이라는 추가 단서를 붙여 실현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물은 인간의 권리다. 1900년 이래 세계 인구는 16억에서 60억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물 저장량은 변함이 없다. 오늘날 독일인들은 각자 하루에 120리터의 물을 소비한다.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물을 말이다. 그러나 음식을 하고 마시는 데는 하루에 단지 3리터의 물이 필요할 뿐이다. 1인당 40리터의 식수를 날마다 변기를 닦느라 흘려보내고 52리터의 식수는 목욕이나 샤워를 하는 데 쓰고, 빨래와 설거지에 또 25리터의 식수를 쓴다. 미국인들은 하루에 평균 400리터의 물을 소비한다. 그 물 대부분도 변기를 닦거나 자동차를 세척하는 데 쓰인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인간이 에너지를 대하는 태도에 책임이 있다. 온실 가스의 원인에 대한 토론은 전문 업계에서 해명되었다. 우리가 그 원인이다. 오늘날의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삶의 토대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이전에 7만 세대가 살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살고 있는 인간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이 마지막 세대에 속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첫 번째 세대이다. 모든 물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잃어버린 균형을 어떻게 다시 찾을 것인가?
육식 공룡 디노사우루스는 6500만 년, 운석의 폭발 뒤 생긴 약간의 기후 변화 때문에 멸종한 것으로 보인다. 인류에게 있어서도 디노사우루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행성을 온실처럼 덥게 만들고 있다. 하필이면 지금, 멸종된 디노사우루스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르네상스를 경험하듯 높아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화석 연료를 불태움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내뿜는다. 이 양은 지구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적어도 다섯 배나 된다. 우리의 고향인 이 지구가 파멸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에게는 이 행성 하나만 있을 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칠레 남부, 아르헨티나 남부에서는 부모들에게 자녀들이 하루에 13분 이상 야외에 있게 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남반구의 오존층이 얇아짐으로써 이미 암, 눈 질환, 피부 질환, 기도 질환 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존 구멍’이 약 20년 후 북반구에도 무슨 일을 일으킬지 상상 가능하다. 매년 수백만 명의 사람이 피부암에 걸릴 것이다. 얼만 전 나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돌아다니는 강연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서만 해도 매년 14만 명이 새로 피부암 진단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생 에너지법을 관철시킬 때 인습적인 에너지 경제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종래의 에너지 경제는 에너지 공급의 구조 변화를 가능한 오래 지연시키려 하고, 원자력 및 화력 대형 발전소들은 전력 생산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이다. 수 년 전부터 에너지 경제계와 정치계, 일부 경제 언론계 인사들로 이루어진 개혁 거부 세력이 재생 에너지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캠페인은 일반 시민에게 재생 에너지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려 한다. 이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은 재생 에너지의 지속적인 확대를 막으려 한다. 4만 메가와트의 출력을 갖는 새로운 대형 화력 발전소를 세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바람이 항상 부는 게 아니고 태양도 항상 비추지 않기 때문에, 풍력 및 태양 에너지 전류가 대형 화력 발전소를 대체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 따르면, 바람이 불지 않는 시간이나 해가 비추지 않는 시간에 화력 발전소가 대신 채우기 위해 계속 가동 상태로 대기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화력 발전소의 가동으로 인한 유해 물질의 오염이 심지어 더 심해진다고 한다. 또 재생 에너지용 전력공급 요금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전력 소비자들이 내야 하는 초과 비용은 가구당 매달 6유로에 달하고, 그 비용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 한다. 게다가 재생 에너지에 대한 국가 보조금은 이미 석탄 보조금을 넘어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풍력 발전 시설은 경관을 해치고, 새들의 떼죽음을 유발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다음과 같다.
*연방 의회 대규모 조사 위원회의 2002년 보고서가 보여 주었듯, 재생 에너지로 완벽하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2050년까지 달성될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독일에서는 재생 에너지를 위해 각각 2,500메가와트의 설비가 새로 설치되었다. 이런 추세가 앞으로 40년 동안 계속 된다면, 이미 전체적으로 설치된 15,000메가와트에 10만 메가와트가 추가될 것이다. 새로운 전력 절약 기술이 전력 및 열의 분산적 연결의 확대와 결합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대형 발전소는 필요 없게 된다.
*현재 가동되는 대형 발전소들은 그렇지 않아도 전력 수요의 동요나 원자력 발전소의 생산 중단에 대응할 수 있기 위해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전력 경제가 단지 풍력 때문에 별도의 비상 전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게다가 화력 발전소의 비상 전력은 전력 생산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퇴보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비상 전력은 효율이 높은 분산적인 발동기와 연료 전지, 새로운 저장 기술을 통해 대체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현대적인 에너지의 미래는 분산적인 전력 생산의 유동적 구조와 재생 에너지들의 혼합에 있다.
*원자력 및 화석 에너지원에서 나오는 전력을 생산하는 것이 보다 저렴하게 보이는 것은, 순전히 환경 악화로 인한 손해가 가격으로 책정되지 않고 오늘날의 대형 발전소들이 경쟁이 없는 독점 구조로서 1000억 대의 보조금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형 발전소들의 종래 에너지들은 점점 더 비싸지고, 모든 전력 및 석유 소비자들은 그것을 다달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생 에너지들은 광범위하게 도입될수록 값이 점점 더 싸진다.
*전력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유해 물질이 없는 전력의 현실성 있는 초과 비용은 매달 가구당 약 1유로에 불과하고, 이러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국가 보조금은 없다.
*화석 에너지의 유해 물질 방출로 인한 경관 및 수역 파괴와 원자력 및 화력 대형 발전소들의 엄청난 물 소비 외에도, 대형 발전소들은 물론이고 대형 발전소와 연결되는 20만 개의 고압선 전주로 인한 경관 침해가 18,000개의 풍력 발전 시설로 인한 것보다 훨씬 심하다. 갈탄 수송을 위해 지금까지 이미 300곳에, 즉 2,300제곱킬로미터에 굴삭기를 동원해 길을 만들었다. 이 정도의 면적이라면 전략 생산에 풍력과 에너지 식물들을 이용하는 것이 갈탄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10만 명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풍력 발전 시설로 인한 대량의 새 죽음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종래의 에너지 시스템으로 인해 새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중대한 침해가 있었음은 명백히 확인되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들은 지역의 에너지들이어서 수입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8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구 에너지들을 사용하는 것보다 공급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현재 독일인 한 사람이 미디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열 시간이다.
*독일인들은 날마다 3시간 41분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라디오를 듣는 시간은 3시간 42분이다.
*하루에 28분 동안 신문을 읽고 35분간 책을 본다.
*2000년 이래 인터넷 이용 시간은 세 배 이상 늘었고, 지금은 하루에 48분에 이른다.
우리가 미디어를 이용하기 위해 쓰는 시간은 점점 늘어난다. 점점 더 많은 정보를 통해 우리가 과연 더 똑똑해지고 행복해질까, 아니면 온갖 터무니없는 정보들 때문에 점점 더 바보가 될까? 자연 역시 항상 정보의 과잉 및 복잡성과 관련을 맺는다. 자연은 부분적으로 수십 억 걔의 세포로 이루어지는 생물들에 있는 엄청난 자료의 흐름을 알고 있다. 세포들은 똑똑하고 소통적이다. 여기에서는 정보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 정보의 물결을 똑똑하게 관리하는 것은, 정보 시대에 성공할 수 있는 전제이다.
정치인들이 연설에서 즐겨 사용하는 ‘경제와 생태학의 화해’라는 슬로건은 모순적이다. 생태학은 ‘근대적 경제’보다 수십만 년 더 오래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행동의 틀을 경제가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경제가 생태에 종속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령 우리가 이러한 위계 구조를 지각하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생태학은 관계들을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기적으로는 생태적 농업문화만이 경제적으로도 생산적일 수 있다. 경제에서는 경쟁의 권리나 가격이 중요하지만, 생태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 삶의 토대가 중요하다.
따라서 생태가 없으면 경제도 없다! 농업에서의 경제란, 내일도 모레도 여전히 경영될 수 있도록 경영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현실적인 농업 문화는 생태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계에는 생태적 경제에 대한 사상적 단초가 아직 없다. 농업 생태학도 이제는 여건이 주어진 좁은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체 생태학계는 그 지적이고 윤리적인 전지를 새로 충전해야 한다. 중요한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전 세계적인 생물학적‘생태적 대학살을 막는 게 중요하다. 근대적인 공업 경제와 공업적인 농업은 이미 창조물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자살 시스템으로 영락했다. 우리는 농업에 공업적인 생산 방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은 공업을 ’농업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녹색당의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경영과 정치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서가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중심에 있다’
이 말은 합리적이고 인간적이고 진보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오늘날 실행되고 있는 자살 프로그램의 토대가 된다.
‘인간이 중심에 있다’ 라는 것은, 진화에서 우선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학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자기기만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으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우리의 생존 모토가 오직 ‘생명이 중심에 있다’라는 것일 수밖에 없음을 배워야 한다.
이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즉 모든 생명이 속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따라서 인간이 윤리적으로 나아가여 하는 근본적인 방향으로서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요구한다.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으로 있고, 살고자 하는 생명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윤리적인 인간에게는 모든 생명이 신성하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의 윤리는 우주적인 것에까지 확대된 사랑의 윤리이고, 논리적으로 인식된 예수의 윤리이다.”
자연의 지혜는 우리에게 항상 모든 생명의 전체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인간의 건강은 아주 당연히 식물과 동물의 건강에 좌우되고, 또 물과 공기, 땅의 건강에도 달려 있다.
건강한 땅에서만 건강한 생명의 수단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었기 때문에, 오늘날 수백만 명의 사람이 아프고 뚱뚱해진다. 그리고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는 비옥한 땅을 위한 전제이다.
자연의 순환에 가장 잔인하게 개입하는 것을,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우리의 파국적인 에너지 정책을 통해 허용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이 약 20억 년에 걸쳐 축적한 석탄과 가스, 석유를 부로가 수십 년 만에 소비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원자력 전기의 생산으로 인한 원자력 폐기물은 단 한 세대 뒤에 벌써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폐기물은 독성 있는 방사능 때문에 앞으로 수십만 년 후에도 미래 세대에 짐이 되고 엄청난 비용으로 부담이 될 것이다. 우리 다음에 올 것은 대홍수이다!
게다가 이제는 유전 공학자들의 영향이 여기에 더해진다.
그러나 유전 공학을 통해 세계의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 소박하게 만족하는 유전 공학에 대해서는 자연법칙이 적용된다. 오히려 그 반대도, 우리는 영원히 자연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또 그럼으로써 자연이 보다 나은 세계를 조직하도록 도울 수 있다.
유전학자들은 창조와 창조자의 놀이를 한다. 유전학자들은 자연을 개선하려고 든다. 그들은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몇 가지를 잘못한 신보다 위대해지고 싶어 한다. 노자는 이미 2,500년 전에 이 점을 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주는 완전하다. 우주는 개선될 수 없다. 우주를 변화시키려는 자은 우주를 망칠 것이다. 우주를 소유하려는 자는 우주를 잃을 것이다.”
유전 공학 배후에는 또 다시 인간, 주로 남성의 과대망상과 돈에 대한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그 결과 발생하는 후속 비용은 이미 원자력 에너지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간단히 배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인류의 주된 식량인 옥수수와 쌀을 이제는 유전 공학적으로 바꿀 수 있다. 제초제의 내성이 있는 옥수수는 물론 겉으로는 이익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옥수수 명충 나방과 같은 곤충들이 멸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충들이 정말 멸종한다면 다른 나미 종류들도 멸종할 테고, 그 다음에는 특정한 새 종류도 사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종의 사멸은 어디에서 끝이 날까?
생명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곳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하나의 종이 죽으면 다른 많은 종들도 죽는다. 오늘날 생물 종의 사멸 속도는 200년 전보다 1,000배나 빠르다.
유전자 조작을 통한 농업의 경영 이익은, 오늘날 인간이 생명의 배 발생에 개입함으로써 생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결과나 더욱 아직은 알지 못하는 결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은 어떻게 섭씨 37도에서 코끼리 이빨, 인간의 이빨, 계란 껍데기, 나비의 비단, 거북이의 갑옷과 같은 것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히 재생 가능하게, 그리고 원료 및 에너지를 최소한만 사용하면서 환경에 맞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 인간들은 간단한 철을 생산하기 위해 1,000도의 열을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은가?
21세기에 생물 과학은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20세기에 커다란 발견을 해 내며 주목받았던 화학 및 물리학보다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목재에서 종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발명이 아니다. 말벌과 다른 곤충들에게 있어 이러한 공학은 수천 년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유전 공학과 무성 생식의 경우에도 우리가 사전에 자연을 보고 확인한다면 돈과 분노를 상당히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기업이다. 최고의 자원 경영, 최고의 조직, 탁월한 적응력, 작동하는 자연 치유력 등을 갖추고 있다. 개똥벌레에 손가락은 데어 본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런데 인간들은 여전히 전구를 만들어 내면서, 에너지의 약 4/5 정도를 쓸데없이 열에 투자한다. 이것은 자연이 더 잘할 수 있다. 자연은 물론 시간을 더 많이 쓴다. 자연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보다 참을성이 많다. 자연의 지혜를 계속 간과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이상 바보 같은 인간으로 머물러서는 안 될 일이다. 유감이지만 수많은 인가, 특히 학자들은 영감 및 혁신의 원천인 자연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미 종족이나 물고기 떼의 소통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연은 유전자 조작자들이 추측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조력자가 아니라, 생체 공학자들이 서서히 발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스승이이다.
예수는 붓다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이고 생태적인 스승이다. 생태적 예수를 깊이 이해하면 혁명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 책은 창조의 신성함, 즉 자연의 온전함과 다시 온전해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신성한, 즉 손상되지 않은 창조물이란 돼지 페스트 없는 돼지, 광우병 없는 소, 환경으로 인한 알레르기가 없고 오존 구멍에 의한 피부암이 없는 인간을 말한다. 신성한 창조물은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 건강한 고래와 진짜 숲, 조류 독감 없는 새를 가리킨다.
예수와 붓다의 가르침은 마음이 평화와 정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해방시키라고 한다. 내적, 외적인 평화, 우리 자신과의 평화, 우리와 같은 피조물과의 평화, 자연과의 평화로 나아가도록 말이다. 정신적으로 비슷한 위대한 두 사람 붓다와 예수는 자연의 법칙을 신뢰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자연법칙에서 삶의 법칙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인들에 의한 ‘티베트의 문화적 민족 말살’뿐 아니라 중국의 점령군에 의한 고향 티베트의 생태계 파괴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한다.
“티베트에서 몇 년 전까지 있었던 숲의 개간은 대대적인 벌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의 여러 곳에서 지나친 지하자원의 채굴이 이루어졌죠. 게다가 이제는 티베트에 화학 공장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이 공장들에서 나오는 물을 중국 노동자들이 마시는 것은 금지랍니다. 그런데 이 물이 강에 도달하기 때문에, 티베트의 주민들이 이 물을 마시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티베트의 여러 지역에 핵폐기물이 묻히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또한 티베트의 몇몇 곳에 핵무기가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원자력 시설들이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입니다. 내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독일 정부도 1990년대 초에 핵폐기물을 티베트에 보관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태적인 문제들은 티베트가 고원 지대이기 때문에 대단히 심각합니다. 티베트에서 피해가 발생하면, 그 폐해를 나중에 다시 바로잡는다는 게 무척 어려우니까요. 아시아의 큰 강들은 티베트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티베트에서 오염이 발생하면 수많은 이웃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