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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허균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146 14.04.27 21: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 전(傳)]


<들어가는 말>

 

1618년 8월 24일.
허균이 능지처참(陵遲處斬)1)을 당했다. 그의 죄는 천지에 더러운 것이었다.

 

“역적 우두머리 허균은 행실이 개, 돼지와 같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 도리가 전혀 없다.”2)

 

조선은 허균이 세상의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하게 굴어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 됐다.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사형집행. 적법한 재판과정도 없었다.

 

“할말이 있다” (欲有소言) - 허균의 말

 

그가 하지 못한 말은 그에 죽음과 함께 쓰러졌다. 용서받지 못한 자, 결국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허균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자유주의자, 혁명을 꿈꾸다. 허균>

 

허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입니다. 문학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죠. 그러나 그 개인에 대한 역사의 평은 혹독합니다. 어디한번 볼까요.

 

“그는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3)

 

어떻습니까? 입에 담기조차 힘들만큼 혹독한 악평이죠.

허균의 사형집행은 상식 밖으로 너무나 서둘러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허균의 사형과 관련된 사건은 사후 3개월까지 진상조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었죠. 왜냐하면 그는 조선을 위협하는 대역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장의 천재로 평가받는 허균. 그는 조선이 증오하는 자였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허균의 가족묘가 있는 곳이다. 한지 바른 한켠에 허균의 묘도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시신이 없는 가묘다. 허균은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에 그 시신을 수습할 수조차 할 수 없었다. 허균에 대한 질문은 그에게서만 멈추지 않는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묘비를 두 동강 났던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시대에 역적으로 몰리게 되면 그 화가 이미 죽은 가족들에게까지 미쳤다. 묘에 있는 비석을 파손하거나 또는 파묘를 하고 심지어는 무덤 속에 있는 시신을 꺼내 목을 치는 그런 부관참시까지 있었다.”

울산시 북구 동산마을.


허균에 처형 이후 그의 가문은 역적의 집안이라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야했다. 허균의 제12대 후손이라는 허성엽씨. 그는 30여 년 전 우연히 가첩을 발견하기 전까지 자신이 허균의 후손인지도 모른 체 살아왔다고 한다. 양천 허씨의 가승(家乘)4)에 따르면 허균의 아들 은 아버지가 처형당한 무오년 그해에 문경세제를 넘어 영천으로 숨었고, 후에 울산에 정착해 간신히 목숨을 보존했다고 한다. 이후 허균의 후손들은 남의 가문에 이름을 올려 삼백년 넘도록 숨어 살았던 것이다. 허성엽(70세, 양천허씨 교산공파 회장)씨의 말

 

“그냥 봉례공 후손으로 살았죠. 왜 그러냐하면 밝힐 수가 없으니까 혹시라도 역적 후곤이라고 하면 구족이 멸할 것 같아서 살기 위해서는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정이 있었죠.”

 

허균이 얼마나 조선에 증오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는지 사형집행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인명을 소중히 해 삼복계5)를 시행했다. 지금의 삼심제와 같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선 반드시 죄인의 자백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허균은 이 과정이 생략됐다. 얼마나 급박하게 사건을 처리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허균의 죄목은 바로 광해군을 시해하려 했다는 역모였다. 사건의 발단은 1618년 여름 새벽6) 남대문에 흉방이 붙은 사건이다. 흉방은 불쌍한 백성을 위해 광해군을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로 허균이 지목됐다. 허균을 사형시키라는 대신들의 요구는 거칠었다. 허균은 역적의 우두머리로 금수이자 괴물이며 그의 요망한 짓은 임금을 위태롭게 한다 했다. 허균은 결국 정식 재판 절차도 없이 서쪽 저작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허균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5년 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광해군을 유배 보낸 인종은 역모 죄로 처형됐던 사람들을 복권시켰다. 그러나 한 사람 예외인자가 있었다. 그가 허균이었다.

 

허균은 조선이 끝나는 날까지 역적이었습니다. 허균이라는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었지요. 조선시대 내내 복권이 되지 않을 만큼 조선은 그를 뼈 속 깊이 증오했습니다. 허균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당대 최고의 천재였고 또한 국제 감각을 가진 엘리트였습니다.

 

중국 북경. 중국 국가 도서관에는 1600년대 명나라에서 출판한 특별한 책이 보관돼 있다. 朝鮮詩選이다. 명나라 시인 오명재가 편찬한 시집인 조선시선에는 신라시대부터 16C까지의 우리나라의 한시 332편이 실려 있다. 신라시대 문인인 최치원, 백결로부터 고려시대 이규보, 정몽주 등을 비롯해 조선시대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 108명의 시가 실려 있다. 황유복 교수(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의 말.

 

“옛날에는 중국문화가 한국으로 전래되는 것으로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도리어 역으로 한국의 문학작품들이 중국에 전해지는 것들은 이것이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중요한 문화교류사적 의의도 갖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겠죠.”

 

조선시선이 전해지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일곱 글자가 책 끝부분에 적혀 있다. ‘조선장원 허균서’
이는 허균이 중국에 조선의 시를 전파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있을 무렵, 조선은 문장이 뛰어난 허균에게 명나라 사신들을 맞게 했다. 이때 명나라 시인 오명재가 원군과 함께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다. 허균은 자신의 집에 오명재를 초대했다. 오명재는 전쟁 통에도 조선의 시를 모으고 있었다. 허균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수백 편의 조선시를 외워 그에게 소개한다.7) 오명재는 허균의 암송을 바탕으로 명나라에 돌아가 조선시선을 간행했다. 그런데 조선시선엔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허균이 쓴 시에 흥미롭게도 한글로 음이 달려 있는 것이다. 조선시인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황유복 교수(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의 말.

 

“한시지만은 우리 훈민정음으로 음을 다 달았습니다. 이것이 훈민정음 문자가 중국에 소개되는 최초의 것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허균은 바로 우리도 이러한 문자를 갖고 있다는 것을 중국에 알려주기 위한 생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강릉시 초당마을.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의 호를 따 마을의 이름이 붙여졌다. 허균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이름난 문벌이었다. 특히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로 추대될 만큼 당대 가장 치성한 가문으로 손꼽혔다.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 허엽과 형 허성과 허봉 그리고 누이 허난설헌은 허균과 더불어 5문장가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 가문이었다. 허균은 20초반에 이미 세상에 표절시가 돌아다닐 만큼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문장은 허균을 혐오하는 조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8)이었다.

 

화답시를 즐겼던 중국의 사신들을 맞아서는 유교와 불교, 도교에 까지 두루 걸쳐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옛 책을 막히지도 않고 줄줄이 외는 허균의 지력은 다른 이들이 능히 당할 수가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신흥은 허균이 사람일 수가 없다며 그 천재성을 놀라워했다.9) 허균의 뛰어난 문장과 말재주는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조선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파병했고 조선은 중국의 사신들을 잘 접대해야 했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조선의 운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이후 허균은 사신의 일원으로 중국에 여섯 차례 이상 다녀온다. 뛰어난 문장을 바탕으로 한 허균의 외교 수환 덕분이었다. 이이화 역사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것을 수창외교10)라고 한다. 시를 서로 주고받는 그러면서 서로의 뜻을 통하고 외교적인 성과를 얻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수창외교라고 부르는데 허균이 자주 발탁된 것은 ‘그만큼 시도 잘 짓고 학문도 넓었다’는 뜻입니다”

 

선조는 문장에 뛰어나고 국제정세에 밝은 허균을 아꼈다. 사신들을 훌륭히 접대한 허균에게 형조정랑, 삼척부사 등 계속해서 벼슬이 하사된다. 허균은 당대 조선 최고의 천재 지성인이었다.

 

허균의 천재성은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위기상황 속에서 그 빛을 발했습니다. 덕분에 조정에 주목을 받게 됐죠. 그러나 허균은 50평생 무려 여섯 번이나 벼슬자리에서 쫓겨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마 조선시대의 허균 만큼 잦은 파직과 복직을 경험했던 인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허균은 왜 그렇게 조선에 기피 대상이 되어야 했을까요, 그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31살이 되던 1599년. 허균은 지방 관리의 부정을 감찰하는 황해도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이때 허균은 서울에서 황해도까지 평소 알고 지내던 기생들을 데려갔다. 허균은 그로 인해 첫 탄핵 파직을 받는다. 이일로 부임 6개월 만에 해임된 허균. 그의 품행은 일생동안 비난을 불러왔다. 세상은 그를 輕妄(경망)한 인물이라고 멸시했다.11)

 

성리학 지배 질서의 유교사회. 조선은 그의 자유분방함을 용납지 못했다.12)  그러나 허균은 세간의 비난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성인에 가르침이다/나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 수는 없다. (男女情欲天也 倫紀分別 聖人之敎也 我則從天而不敢從聖人)

 

허균은 오히려 언제 어떤 기생을 만났으며 잠자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13) 해윤판관을 지낼 때의 일기인 조관기행을 보면 몇 월 며칠에 어떤 기생을 만났는지 빼곡하게 기록돼 있다. 그런데 허균은 조관기행에 주변사람들의 얘기까지 적어 놨다. 기생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관리들의 일화까지 있다. 체통과 체면이 중시됐던 양반지배 사회에서 허균의 솔직함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허경진 교수의 말.

 

“중앙의 관료가 출장을 갈 때마다 자동적으로 기생들이 수청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수청을 거부한 사대부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수청을 들었는데 차이점이라면 허균은 기행문에다가 차이점이라면 허균은 기행문에다가 그날 그날 수청 했던 기생의 이름을 썼고 또 어떤 날은 십년 전에 보았던 기생인데 늙었다, 이런 개인적인 감정을 썼는데 대부분은 그런 것을 감춰다는 차이점입니다. 어쩌면 허균의 정직한 행동을 조선시대가 용납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리학이 아니면 이단으로 취급받던 시기. 허균은 승려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렸다. 특히 사명당과는 형제와 같이 지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의 위계를 받은 인물이다. 허균은 18살 때 사명당을 만나 그가 열반할 때까지 깊게 교류했다. 사명당이 열반하자, 그의 제자들이 허균에게 비문을 부탁했을 정도다. 해인사 교무국장의 재경스님의 말.

 

“비록 허균이 유교 집안의 사람이지만 제형지교, 즉 허균과 사명스님이 형제 동생같이 가까지 지낸 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사최심이라 되어 있다. 사명스님에 대해서는 허균만큼 깊이 아는 이가 없다고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명스님의 제자들이  허균 선생에게 사명스님의 비분을 부탁한 것 같습니다.”

 

유교사회 조선에서 유학자가 불교에 심취한다는 것은 받아드려지기 힘든 일이었다.14) 결국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수안군수에서 파직됐고, 삼척부사에서도 임명 십삼일만에 쫓겨났다. 하지만 허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세상을 살고자 했다.15) 관직생활 20여년 동안 그는 세 번의 유배와 여섯 번의 파직을 당한다. 허균은 스스로를 ‘不如世合’한다 고 여겼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성격이 제멋대로어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를 지어 배척하므로 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없고 밖에 나가도 찾아갈만한 곳이 없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허균의 행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북경의 남당.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세운 성당이다.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 허균은 사신으로 북경에 머물렀고 이곳에서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허균은 서양지도와 천주교 찬송가인 십이궤장을 가져간다. 그는 조선의 성리학 체제에 안주하지 않았다. 북경의 유리창은 조선이 세계를 만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드나들던 허균은 이곳에서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들을 사 모은다.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의 사행길에서 무려 은 일만 냥이 넘는 돈을 주고 4천여 권의 책을 사온 것이다. 허경진 교수의 말.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들에게는 정부에서 공식적인 출장비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인삼을 가져가서 팔 수 있는 권리를 줬습니다. 보따리로 이제 몇 보따리의 숫자를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대부분의 골동품을 사오기 마련입니다. 허균은 그만한 금액을 자기가 보고 싶었던 책,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는 책들을 샀습니다. 그 책들이 허균은 4, 5천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골동품 대신에 책을 사올 정도로 허균은 새로운 세상에 목말라 있었던 그런 지식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해온 책 중엔 명나라 양명학자 이탁오의 것도 있다. 이탁오는 허균과 공통점이 많은 인물이다. 불교를 믿었고, 마테오리치를 만나 천주교를 접했다. 그리고 그 역시 유교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이탁오는 중국의 유가적인 역사관을 비판하며 당시의 지배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주자학의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주체적인 자각을 강조했다. 푸샤오판 교수(하문대학 철학과)의 말.

 

“성리학과 비교해서 이탁오의 학문은 주체성과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고 전통에 부정이 강한 학문이었다. 그의 새로운 사상은 매우 급진적이었고, 당시 많은 시민계층의 의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이탁오를 괴물이라 비난했고, 박해를 받던 그는 결국 자결했다. 이탁오의 책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금서로 남았다. 허균은 그런 이탁오의 책까지 서슴지 않고 구해 읽었다. 이탁오의 책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위태로운 행동이었다. 허균의 말

 

“이탁오의 글을 불태웠으나 그의 도는 여전히 다 태우지 못했다. 세상에는 그릇된 논의가 분분한 법이요”  傳 : 을병조천록中 이씨분서를 읽고

 

 

허균은 스스로 조선의 이단아가 되어갔다.
허균은 세상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 만남 속에서 허균은 피부로 세상의 모순을 느꼈던 것이죠. 그의 저서 홍길동傳에 그가 본 세상의 불합리와 그의 개혁적인 사상이 잘 들어나 있습니다.

 

전북 부안군 우반동.
부임 9개월 만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고 그 뒤 나주목사에 임명마저도 취소된 허균은 부안으로 내려갔다. 마침 부안 현감이 허균을 위해 글을 쓸 만한 거처를 제공했다. 당시 그가 머물렀던 정사암. 소설 홍길동전은 바로 이곳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부안 문화원 사무국장 김경성씨의 말.

 

“원래 정사암이라는 양반가의 암자가 있었던 별장이었던 곳인데 그 후에 이것을 수리를 해서 허균선생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고 또 여기를 중수할 때는 현감의 많은 지원이 있어서 정사암을 중수할 수 있었습니다.”

 

서자인 홍길동이 부패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실제로 허균은 서자들의 후견인이었다. 삼척부사에서 13일 만에 파직 당한지 7개월 뒤, 허균은 공주 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서얼 친구들을 관아로 불러드리는 것이었다.

 

“내 마땅히 녹봉의 절반을 덜어서 자네를 부양하겠네. 재주는 나의 10배는 뛰어나지만 세상에서 버림받음이 나보다 심하네. 빨리 와주게. 자네가 왔다고 해서 비록 비방을 받는다 해도 내 걱정하지 않겠네”  傳 : 서얼 친구 이재영에게 보낸 편지.

 

허균의 청으로 서얼 친구들과 역시 서얼이었던 처외삼촌이 찾아왔다. 허균은 그들의 식솔들까지 모두 돌봤다. 하지만 세상은 허균이 공주관아에 삼영을 설치했다며 헐뜯었다.16) 삼영이란 그와 절친하게 지내던 서얼 이재영과 윤재영 또 심우영의 이름을 따 비아냥된 말이다. 명문가의 자손이었던 허균. 그는 어떻게 서얼들과 절친해졌을까? 그것은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섬기며 비롯됐다. 이달은 조선의 이태백으로 비유될 만큼 뛰어난 시인이다. 하지만 이달은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을 포기하고 한평생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허균은 스승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모순을 일찍부터 실감했다.

 

연세대 학술정보원. 허균이 전남 함열에 유배 갔을 때 쓴 시문집. 성소부부고.17)
장독대를 덮을 만한 하찮은 글이라는 뜻의 성소부부고에는 시, 수필, 편지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이 책에 마지막에 있는 논설엔 허균의 개혁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인재를 버린다는 의미의 遺在論(유재론)18)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비판과 조선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재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아서 인재가 드물다. 그런데도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이 아니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 한 사람의 재주와 능력은 하늘이 준 것이므로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능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며 처한 집 자식이라 해서 인색하게 주는 것도 아니다.”

爲國家者 所與共理天職 非才莫可也 我國地褊 人才罕出 用人之途尤狹 非世 華望  不得通顯仕大之賦才爾均也 不以貴望而豊其賦 不以側陋而嗇其稟.

 

이이화 역사학자의 말.

 

“후기에 오면 다산 정약용이 이런 관계의 글을 많이 썼다. 허균이 당시에 벌써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인재를 고르게 써야 된다는 것, 그래야만 국가나 사회에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런 얘기를 쓴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재론은 어떤 면에서는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하나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허균은 새로운 사회를 갈망했다. 그 목마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서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은 전남 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존인물이다. 실록은 홍길동을 연산군 시절 조정을 괴롭힌 유명한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19) 허균은 그러한 홍길동을 백여 년이 지난 조선 중엽 그의 한글 소설에서 부활시켰다. 서얼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홍길동전. 여기엔 조선의 모순을 안타까워하며 비판하는 허균의 개혁사상이 그대로 살아있다.

 

재능엔 천함이 없다는 유재론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민중에 있다는 호민론이 바로 그것이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임금이 아닌 백성이라고 했다. 그는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관리가 시키는 데로만 하는 항민(恒民), 세상을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 그리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호민(豪民)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려운 자는 호민이다. 호민은 잠자는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다.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면 호민이 앞장서서 원민과 항민을 선동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초래할 것이라고 허균은 경고하고 있다.

 

“지금 백성에 원망은 고려 말 보다 훨씬 심하다. 견훤, 궁예 같은 호민이 나온다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장정룡 교수(강릉대 국어국문학)의 말.

“‘임금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자는 물, 불, 호랑이, 표범도 아니고 오로지 백성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 그 민주주의 중심을 400여 년 전에 제시를 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교산 허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있어서  교산 허균 선생이 제시했던 그런 민중적 세계관, 진보적 세계관, 열린 세계관은 바로 교산 선생의 호민론으로부터 시작 된다고 볼 수 있다.”

 

허균은 홍길동이라는 호민을 통해 신분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꿨던 것이다.

허균은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모두 임금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위하지 않고 자기 욕심이나 채운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하다.” 傳 : 호민론
“나라를 훌륭히 다스리는 것은 임금의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 나올 뿐이다.” 傳 : 정론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백성을 두려운 존재로 여기면서 조정과 임금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허균. 그런데 이런 그가 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경기도 여주 남한강. 이곳에서 395년 전 조선을 뒤 흔드는 사건의 전초가 시작된다. 스스로를 ‘강변칠옥’ 혹은 ‘죽림칠현’이라 부르던 일곱 명의 서자가 있었다. 이들은 윤리가 없는 집이라는 뜻에 무륜당을 짓고 시대를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일곱 명의 서자들은 모두 고관의 자제들인데다 재능도 있었지만 첩의 자식이란 이유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조선으로부터의 소외, 그것은 서얼들을 행동하게 했다. 바로 칠서의 난이다.

 

 

문경세제. 홍길동전에 나오는 주요무대이기도 한 이곳에서 이들은 서울과 동래를 오가는 은 상인을 공격, 은 칠백 냥을 강탈한다. 거사 자금을 모으려 했던 사건이었다.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서얼금고법20)이란 제도를 통해 서얼에겐 벼슬길을 제한했다. 선조제위 원년. 천육백 명의 서얼들이 서얼금고 철폐를 요구했지만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력이 부족하자, 나라에선 서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시켰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난리가 끝나자 다시 이들의 벼슬을 빼앗았다. 서얼금고법의 폐지는 조선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신병주교수(건국대 사학과)의 말.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16C 이후부터 성리학 이념이 강하게 사회에 정착되면서 신분질서에 있어서도 기존의 양인, 천인의 신분 구조에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사신분제도로 고착화 되어 갑니다. 이때 중인의 중요한 축이 되는 것이 기술직 중인하고 더불어 바로 서얼들이 중인의 중요 구성요소가 됩니다. 결국 서얼이라는 것은 양반지배질서 사회가 강화되어가는 과정에서의 하나의 희생양이 되었던 바로 그런 신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칠서의 난은 곧 계축옥사라는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이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광해군을 없애려는 역모를 꽤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선조에 이어 등극한 광해군. 그는 서자였다.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은 대북파의 지지를 얻고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영창대군의 세력21)은 줄곧 광해군의 왕통에 걸림돌이 된다. 대북파는 역모 사건의 빌미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곧 영창대군은 뜨겁게 불 뗀 방안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대북파는 독주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계축옥사의 시발점이 된 칠서의 난의 배후로 바로 허균이 지목을 받게 된다. 처외삼촌 시무영을 비롯한 일곱 명의 서자들이 모두 허균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신분이 위험해진 허균은 조정의 최고 실세인 대북파 이이첨과 손을 잡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를 모색한다. 광해군과 집권파의 신임이 필요했던 허균은 이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인목대비는 정통성이 취약했던 광해군에게 가장 큰 정치적 걸림돌이었다. 폐모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허균은 자신의 집에서 유생을 먹이고 재우면서 까지 상소를 작성케 했다.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허균은 이일로 왕권강화를 꿈꾸던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허균을 위기에 처하게 만든 칠서의 난은 오히려 허균을 권력의 중심에 서게 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정이품인 좌참찬에 오르게 되는데 갑작스런 그의 변모, 그것은 권력을 위한 변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이유 있는 위장이었을까요.

 

광해군 10년 8월 이른 새벽. 남대문에 흉방이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계축옥사 5년 뒤의 일이다. 흉방은 백성들을 위해 광해군이 제거될 것이라는 거사를 천명한 글이었다.22) 흉방이 허균의 조카이자 심복인 하인 중에 소행으로 밝혀지자 허균은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돼 투옥된다.

 

“그는 천지간의 괴물이옵니다. 그의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을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허균이 투옥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균관 유생들은 죄 없는 사람을 가두었다며 상소 했고, 거리로 떼 지어 몰려다니며 백성들을 선동했다. 허균을 탈옥시키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하급아전들과 노비 무사 등 조선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던 자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의금부 감옥 앞으로 모여 들어 옥문을 부수고 허균을 데려 가자고 소리 쳤다. 군중들은 나졸과 옥문을 향해 돌을 던졌고 겁에 질린 나졸들은 달아나기까지 했다.

 

“신분사회를 깨고 어떤 양반의 특권 같은 것도 배제하고 또 학문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그런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갖추려는 그런 의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광해군한테 신임을 받았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을 위해서 충성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서 그가 무슨 일을 할까, 그럴 때에는 새로운 왕조를 만들려는 꿈이 전혀 없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고  또 그가 추종하는 세력들은 바로 그런 것을 희구하는 것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런 추진과정에서 충분하게 동조세력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허균의 주변인을 대상으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문 끝에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자백이 나온다.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했다는 것이다.23) 대신들은 대질신문을 할 필요도 없이 허균을 당장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정확한 진상조사를 명했다. 그러나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을 하루빨리 정형하라는 대신들의 상소만 더욱 쌓일 뿐이었다. 신병주 교수의 말.

 

“기본적으로 조선의 사회를 바꾸는 주체에 대해서는 광해군은 당연히 조선에 왕이니까 기존의 왕과 양반 관료들 특히 이 양반 관료 중에서도 좀 더 진보적인 북인들을 중심으로 이런 개혁을 하고자 했다면 허균의 생각은 달랐죠. 이제 양반이 아닌 서얼이라든가 또는 무사계급이라든가 심지어 승려계급까지 동원해서 뭔가 조선사회에서 좀 더 마이너로 전락한 이런 사회 세력들이 연합을 해서 근본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허균의 무리인 김윤환과 우경방의 자백이 나온 3일 만에 허균에겐 사형이 선고된다. 허균에겐 변론의 기회조차 없었다. 허균의 사형집행. 그것은 심문도중에 본인의 자백도 판결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선은 쫓기듯 황급히 최극형인 능지처참을 집행했다. 허균은 비록 대역 죄인으로 죽었지만 그를 따르는 민중들은 여전히 많았다. 잘려진 허균의 머리를 가져가려다 붙잡혀 심문을 당한 자도 있었다. 그 뒤로도 3개월 간 허균을 따르던 자들은 계속해서 잡혀 들어갔고 귀향을 가거나 고문 끝에 죽었다.

 

의금부에 투옥되기 전날 밤, 허균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그의 장서를 외손자의 집에 급히 보냈다. 허균이 남긴 책은 바로 유재론과 호민론이 담긴 성소부부고였다. 백성을 두렵게 여기며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고 올바른 나라를 세워야 한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거침없는 기록은 지금 이 시대에도 해당되는 물음이다. 신병주 교수의 말.

 

“허균과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의 출현은 결국 허균 당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뭔가 이런 수용되지는 못했지만 결국 허균과 같은 사상을 이어가는 지식인들, 대표적으로 이수광이라든가 훗날에 성호 이익과 같은 이런 실학자적인 개혁성향을 지닌 그런 인물에 의해서 상당히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죠. 그래서 결국 그런 점에서 본다면 허균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산 허균이 태어난 강릉 사천 앞 바닷가, 이곳에는 이무기가 떠나며 두 동강이 됐다는 전설의 교문암이 있다. 바위 밑에 엎드려 때를 기다렸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했다는 이무기. 허균은 시대를 앞서다가 좌절당한 이무기가 아닐까.

 

허균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낮은 곳으로부터의 평등이었습니다. 허균은 낮은 곳을 인정하므로 모두가 사람다워지는 차별 없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꿨습니다. 조선사회의 절대 권위에 도전했던 허균, 결국 조선을 변혁시키겠다는 그의 꿈은 실패했지만, 백성을 으뜸으로 삼는 그의 개혁사상은 지금 이 순간 까지도 유효합니다. 한국사전 호민을 꿈꿨던 조선의 자유주의자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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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호민론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때에 어떤 큰 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이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 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함께 소리를 지르고, 항민들도 또한 제 살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때문이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 때문이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났는데,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살려고 한 죄의 대가이며, 호민 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였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국과는 다르다.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때문에 나라에 여분의 저축이 있어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商事)가 있어도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삼공할 정도였다.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은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조정으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키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기주. 양주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시위와 바퀴를 고친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소부부고》5) 권 11

 

[원문] 호민론

 

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民之可畏 有甚於水火虎豹 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 抑獨何哉
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 循循然奉法役於上者 恒民也 恒民不足畏也
厲?喜쁘肱깝扱? 竭其廬入地出 以供无窮之求 愁嘆咄? 咎其上者 怨民也 怨民不必畏也
潛蹤忠劃希? 陰蓄異心 僻倪天地間 幸時之有故 欲售佚췰? 豪民也 夫豪民者 大可畏也
豪民 伺國之釁 覘읾?輝╉? 奮臂一呼於壟畝之上 則彼怨民者聞聲而集 不謀而同唱 彼恒民者
亦求其所以生 不得不鋤耰압僚繆涕? 以誅无道也
秦之亡也 以勝廣 而漢氏之亂 亦因黃巾 唐之衰而王仙芝黃巢乘之 卒以此亡人國而後已 是皆厲톼삣潾畦? 而豪民得以乘其隙也
夫天之立司牧 爲養民也 非欲使一人恣睢雹? 以逞溪壑之慾矣 彼秦漢以下之禍 宜矣 非不幸也

今我國不然 地陿uc0阨살裸? 民且呰uc0寙虔? 无奇節俠氣 故平居雖无鉅人雋才出爲世 而臨亂亦无有豪民悍卒倡亂首爲國患者 其亦幸也
雖然 今之時與王氏 前朝賦於民有限 而山澤之利 與民共之 通商而惠工 又能量入爲出 使國有餘儲 卒有大兵大表 不加其賦 及其季也 猶患其三空焉
我則不然 以區區之民 其事神奉上之節 與中國等 而民之出賦五分 則利歸公家者纔盂? 其餘狼戾於姦私焉 且府無餘儲 有事則一年或再賦 而守宰之憑以箕斂 亦罔有紀極 故民之愁怨 有甚王氏之季
上之人恬不知畏 以我國無豪民也 不幸而如甄萱弓裔者出 奮其白挺 則愁怨之民 安保其不往從而祈梁六合之 可跼淫巧? 爲民牧者 灼知可畏之形 與更其弦轍 則猶可及已

 

주)

1) 허균(許筠) 역적(逆賊), 능지처사(陵遲處死)

2) 광해군 일기 10년 9월 6일.

3) 광해군 일기 10년 9월 6일.

4)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간단한 혈통을 기록한 책.

5) 사형은 초심· 재심· 삼심으로 반복하여 심리를 한 뒤 결정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형사 절차상의 제도.

6) 1618년 8월 10일 새벽, 남대문

7) “허균이 영민해서 시를 한번 보면 잊지 않아 동방의 시를 수백편이나 외워주었다. - 조선시선 서문”

8) “오직 문장의 재주로 세상에 용납되었다.” 선조실록 32년 5월 25일

   “허균은 문재가 극히 높아 붓만 들면 수천 마디를 써냈다.” 광해군 일기 6년 10월 10일

 

9)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여우나 삵쾡이, 쥐 같은 짐승의 정령일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

10) 酬唱外交 :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뜻을 통하는 조선시대의 외교 방식. 학식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짓는 문사들이 담당.

11) “허균은 행실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다.”  : 선조실록 32년 5월 25일

12)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 선조실록 37년 9월 6일

13) “기생 내기가 잠자리에서 내게 물었다.”  : 조관기행

    “기생들이 인사를 해 바라보니 내방에 왔던 자가 12명 이었다.”  : 기유서행

14) “허균은 밥을 먹을 때면 식경을 외고 항상 작은 부처를 모시고 절하면서 스스로 불제자라고 자청하니 승려가 아니고 무엇인가”  : 선조실록 40년 5월 5일.

15)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야 할 것이오.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  : 삼척부사 부임 13일만에 파직 소식을 접하고서.

16)  : 광해군 일기 9년 12일.

 

17) 8권 1책. 필사본. 지은이가 가장 불우했던 시기에 칩거하면서 쓴 시와 산문들을 모아 지은이가 직접 시부(詩部)·부부(賦部)·문부(文部)·설부(說部) 등 4부로 나누어 실었다. 지은이가 역적으로 몰려 죽어 공간(公刊)될 수 없었으며, 몰래 필사하여 전해져 틀린 글자와 빠진 장이 많다. 

 

저본은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성들여 쓴 필사본이며, 책의 첫 장마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의 장서인(藏書印)인 '관물헌'(觀物軒)과 '이극지장'(貳極之章)이라는 어인(御印)이 찍혀 있다. 부부와 문부의 내용은 일반 문집의 체재와 거의 비슷하나 시부는 〈정유조천록 丁酉朝天錄〉·〈남궁고 南宮藁〉·〈궁사 宮詞〉 등과 같이 시기나 주제별로 묶여 있어 특이하다. 이러한 체재는 그뒤 많은 문집에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설부는 보통 잡저라 하여 문부에 넣거나 패설류(稗說類)를 섞어 실었으나 이 책에서는 '지소록'(識小錄)·'시화'(詩話)·'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나누어 실었다. 시부에서는 대(大)시인인 이달(李達)과 권필(權韠)의 평어(評語)를 세주(細註)로 달아놓아 그의 시가 당대에 높이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설부에 있는 〈성수시화 惺叟詩話〉는 따로 전하는 그의 저작 〈학산초담 鶴山樵談〉과 함께 우리나라 역대 시화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다. 196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영인했으며, 그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여 출간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8) [全文]


     유재론(遺才論)


     나라를 경영하는 자와 임금의 직무를 다스릴 자는 인재(人才)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원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하여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옛날의 어진 임금은 이런 것을 알고 인재를 더러 초야에서 구했으며, 낮은 병졸 가운데서도 뽑았다. 더러는 싸움에 패하여 항복해 온 적장 가운데서도 뽑았으며, 도둑 무리를 들어올리고, 혹은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쓴 것이 다 알맞았고, 쓰임을 받은 자도 또한 자기의 재주를 각기 펼쳤다.


     나라가 복을 받고 치적이 날로 융성케 된 것은 이러한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같이 큰 나라도 인재를 혹 빠뜨릴까 오히려 염려하였다. 근심되어 옆으로 앉아 생각하고, 밥 먹을 때에도 탄식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산림(山林)과 연못가에 살면서 보배를 품고도 팔지 못하는 자가 그토록 많고, 영걸한 인재로서 낮은 벼슬아치 속에 파묻혀서 그 포부를 펴지 못하는 자가 또한 그토록 많은가. 참으로 인재를 모두 얻기도 어렵거니와, 그들을 다 쓰기도 또한 어렵다.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좁고 인재가 드물게 나서, 예로부터 그것을 걱정하였다. 그리고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인재 등용의 길이 더욱 좁아졌다. 대대로 명망 있는 집 자식이 아니면 높은 벼슬자리에는 통할 수 없었고, 바위 구멍이나 초가집에 사는 선비는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억울하게 등용되지 못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비록 덕이 훌륭한 자라도 끝내 재상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하늘이 재주를 고르게 주었는데 이것을 문벌과 과거로써 제한하니, 인재가 모자라 늘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넓은 세상에서, 첩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그 어진 이를 버리고, 개가했다고 해서 그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어미가 천하거나 개가했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에 끼지 못했다. 변변치 않은 나라인데다 양쪽 오랑캐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인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할까 두려워해도 오히려 나라 일이 제대로 될지 점칠 수 없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길을 막고는,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어."라고 탄식만 한다. 이것은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면서 남쪽을 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웃 나라가 알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아낙네가 원한을 품어도 하늘이 슬퍼해 주는데 하물며 원망을 품은 사내와 홀어미가 나라의 반을 차지했으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늘이 낳아 준 것을 사람이 버리니, 이는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늘을 거스르면서 하늘에 기도하여 명을 길게 누린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하늘의 순리를 받들어 행한다면, 크나큰 명을 또한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허 균(許筠)


   [원문]


   爲國家者 所與共理 天職 非才莫可也. 天之生才 原爲一代之用.  而其生之也 不以貴望而豊其賦 不以側陋而嗇其稟. 故古先哲知其然也 或求之於草野之中 或拔之於行伍 或擢於降虜敗亡之將. 或擧賊 或用莞庫士. 用之者咸通其宜 而見用者 亦各展其才 國以蒙福 而治之日隆 用此道也.


   以天下之大 猶慮其才之或遺 兢兢然 側席而思 據饋而歎.


   柰何山林草澤 懷寶不售者比比 而英俊沈於下僚 卒不得試其於負者 亦多有之. 信乎才之難悉得 而用之亦難盡也.


   我國地褊人才罕出 蓋自昔而患之矣. 入我國用人之途尤狹 非世冑華望 不得通顯仕 而巖穴草苑之士 則雖有奇才 抑鬱而不之用. 非科目進身 不得蹋高位而雖德業茂著者 終不躋卿相.


   天之賦才爾均也 而以世冑科目限之 宜乎常病其乏才. 古今之遠且久 天下之廣 未聞有孼出而棄其賢 母改適而不用其才者 我國則不然 母賤與改適者之子孫 俱不齒仕路.


   以邊邊之國 介於兩虜之間 猶恐才之不爲我用 或不卜其濟事. 乃反自塞其路 而自歎曰 「無才無才」 何異適越北轅 而不可使聞於隣國矣.


   匹夫匹婦含寃 而天爲之感傷 矧怨夫曠女半其國 而欲致和氣者亦難矣.


   古之賢才 多出於側微 使當世用我之法 是范文正無相業 而陳瓘潘良貴不得爲直臣. 司馬穰苴 衛靑之將 王符之文 卒不見用於世否. 天之生也而人棄之 是逆天也 逆天而能祈天永命者 未之有也.


   爲國者其奉天而行之 則景命亦可以迓續也. 

 

 

19) “강도 홍길동이 옥정사와 홍대 차림으로 첨지라 지칭하여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 연산군 일기 6년 12월 29일

20) “서얼의 자손에게는 문과, 생원 진사시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傳 : 경국대전 예전

21) 소북파.

22) “백성들을 구하고 죄를 벌하러 장차 하남대장군이 이를 것이다.”  傳 : 광해군 일기 10년 8월 10일.

 

23) “허균이 애초에는 의창군을 추대하는 것으로 계획을 삼았으나 나중에는 허균이 스스로 하려 했다.”  傳 : 광해군 일기 10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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