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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컵 물 속에 잠긴 젓가락은 屈折되어 보인다. 錯視현상이다. 소풍 길에 앞서가던 선생님이 뒤에 오는 학생들에게 차례로 전하라는 메시지가 맨 나중 학생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되어 나온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다람쥐의 호들갑에 토끼․여우 심지어 호랑이도 놀라 달아났다는 寓話도 있다. 세상만사 그처럼 歪曲되어 전해지는 것이 많다. 내가 하는 이야기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과실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나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信憑性이 있다고 믿어지는 聖經도 학자들간에 異見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 본질성 때문에 그 이견들은 덮어진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그의 老人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치면서 자기 뜻을 정확히 전하려 했고, 蘇東坡(1036~1101)도 자신의 대표작 赤壁賦를 600번이나 수정했다던가. 事實(fact-truth)에 대한 直視와 眞覺이 幻覺으로 비쳐지지 않기를 바래서 그랬으리라.
1949년 8월이던가. 仁中입학 체육시험장에서 내가 裸體로 吉瑛羲(1900~1984) 교장을 처음 뵈온 후(상급생들도 그런 신체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6․25 전쟁에 폐허가 된 신흥초등학교에서 조회시간에 들은 교장님의 훈화 한 토막이 요즘 교장님서거 24주기를 맞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너네들은 한 겨울에 알프스山을 넘은 한니발처럼 용감하라!”는 말씀이었다. 한니발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단편적 기록뿐이다. 마침 로마에 살면서 30여 년 간이나 로마제국의 역사현장을 찾아다니며 로마인 이야기 집필에 집착해 온 시오노 나나미의 한니발 전쟁(한길사, 2005)편을 찾아 읽어 한니발(Hannibal, 247~183? B.C.)의 일생을 가늠해 보았다.
한니발은 아프리카 북단 해안 가에 자리한 카르타고(Carthago)의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이 끊임없이 조국을 괴롭히는 것에 분개하여 28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정복의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너 프랑스 평원을 달려 알프스의 가장 낮은 고갯길(2,188m)을 넘기 시작했다. 9월말이었다. 벌써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과 피로와 낙석사고에 5만의 장병과 코끼리 37마리는 15일 행군에 3분의 1이 희생되었다. 이 지옥길 같은 장정에도 굴함이 없이 오히려 意氣衝天한 장군 한니발은 눈보라 속에 우뚝 서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카르타고의 용사들이여! 보라 저 곳이 이탈리아다. 저 곳에 가면 로마城 앞에 선 것이다. 앞으로 한 두 번만 싸워 이기면 우리는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한니발의 웅변에 카르타고軍은 용기를 내어 마침내 역사상 최초로 유럽의 지붕 알프스山을 넘어가 무려(無慮) 16년 간이나 로마軍과 싸웠다. 그 용기는 알렉산더(Alexander, 356~323 B.C.) 大王에게 배운 것이었다.
소규모의 군대로 페르시아(Persia) 大軍을 무찔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뛰어넘는 지역까지 정복했던 알렉산더大王의 업적을 평소 부러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40세가 넘은 獨不將軍 한니발은 智略에 능한 로마의 젊은 장수 스키피오(?~183 B.C.)를 당해내지 못했다. 마침내 한니발은 전쟁에 패해 흑해연안으로 도피했다가 스스로 毒藥을 마시고 그의 기나긴 노숙자생활을 마감했다.
吉교장은 당시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불타는 野望과 自信感, 실천의 勇氣라고 생각해서 한니발 이야기를 들려준 듯하다. 사실 한니발의 그 같은 용감한 발자취를 본받아 그 후 시저(Julius Caeser, 100~44 B.C.)와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도 알프스山을 넘을 수 있었다. 사람의 용기가 역사를 변화시킨다는 증거이다.
吉교장의 친구 咸錫憲과 張起呂
仁川 전동 웃터골을 넘나들던 仁中학생인 나는 運좋게도 당시 명사였던 郭尙勳 국회의장, 卞榮泰 외무장관, 咸錫憲 선생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그분들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에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吉교장이 그같이 당대의 최고명사들을 초청해 우리학생들과 만나게 해 준 일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위대한 사람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The best way toward greatness is to mix with the great.)라는 교육의 제1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프랑스의 전기작가 모루아(Andre Maurios, 1885~1967)는 “어쩌면 인간은 우리가 겉으로 아는 그가 아니라 그에게 감추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이 생각나서 吉교장과 그의 친구 咸선생 그리고 張박사의 전기를 읽으며, 또 한편 떠도는 소문의 실상도 생각해 보았다. 그 일은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외람된 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일이 그분들의 진실을 더 알 수 있는 길이 될 듯 해서이다.
人生 혹은 人格이란 인간의 動物的 실체를 숨기기 위해 假面(mask)을 쓰고 舞蹈會에서 춤추는 배우와 같다는 그리스․로마의 故談도 있다. 또 어떤 동물학자의 진실 찾기 臨床實驗 결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들어 또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어떤 동물학자가 동물의 본성을 알아보려고 수컷 쥐 한 마리를 죽지 않을 만큼 굶긴 다음 한쪽에 갓 구워 낸 빵을 놓고, 반대편에는 發情期의 암컷 쥐를 놓아 그 굶어죽기 직전의 수컷 쥐가 어디에 먼저 관심을 보이는가 관찰했다. 그때 다 죽어가던 서생원이 氣를 쓰고 암컷 쪽으로 기어갔다는 것이다. 生殖본능이 食慾본능보다 더 강했다는 실험결과였다. 인간은 동물에게 없는 理性이 있으나 五慾(食慾, 色慾, 財物慾, 名譽慾, 睡眠慾)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본능에 초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聖者가 아니면 天痴 바보일 것이다.
張起呂(1911~1995)박사는 ‘바보 의사', ‘살아있는 성자’, ‘작은 예수’라는 평을 들은 만큼 慾心에 자유스러웠다(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고 생각한다. 대중인기에 영합되어 자신이 神仙이 됐다고 착각한 것일까. 咸錫憲(1901~1989) 선생은 그의 스승 五山學校 多夕 柳永模(1890~1981) 교장으로부터 철저히 外面당했다 한다. 철석같이 믿던 제자가 부적절한 이성관계를 가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란다. 咸선생의 조카가 쓴 고발책자를 필자도 설마 하면서 읽어 본 적이 있다.
또 그의 절친한 친구 張起呂박사의 叱責을 받고 눈물로 회개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吉瑛羲 교장은 그의 愛弟子 延世大 碩座敎授 柳永益 박사가 지적한 대로 ‘실천적 크리스천’답게 기독교 十誡命의 종교적 부분은 접고, 후반부 윤리적 부분을 적절히 지킨 듯하다. 자신이 땀흘려 일하지 않고 얻게 된 財物이나 남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貪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말하게 된다. 그래서 校訓도 ‘良心은 민족의 소금’이라 짓고 전국에서 최초로 無監督考査制를 실시했으니 말이다.
세분 선각자들의 비전은 民族과 信仰, 敎育과 農村發展에 있었다. 그러나 咸선생은 民族과 歷史 그리고 大衆啓蒙에 역점을 두었고, 張박사는 信仰과 醫療奉使에, 그리고 吉교장은 謙受益을 좌우명으로 삼아 교육과 良心, 그리고 농촌개발에 더 무게를 두었다고 보겠다.
吉교장의 사모 全采五여사와 그의 친구들
吉교장은 16세 때 李燦二 여사와 결혼하여 3남을 낳았다. 두 번째 결혼은 全采五 여사와 했다. 그분이 타계한 3년 후에 金姬廷 여사와 결혼을 했다. 崔元植 교수가 쓴 吉교장 전기나 제자들의 추모 글의 어디에서도 吉교장의 家族史를 상세히 읽을 수 없다. 다만 세분 부인들의 이름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구미사상의 잣대(cannon, code of law)가 되는 聖經은 사실 그 내용이 개인들의 正․邪, 善․惡과 罪와 罰 등에 관한 인간사의 정직한 기록이라 읽을 맛이 난다. 그래서 읽는 이들에게 감명을 주고 龜鑑이 됨으로 영혼구원의 책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전기의 대부분은 그 점에서 다르다는 아쉬움이 있다.
내가 대학으로 가기 전 培材高校 교사일 때 담 하나 사이에 있는 梨花女高를 방문한 적이 있다. 仁中 다닐 때 뵈온 李仁銖 선생과 선배인 吳주경 선생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李선생은 그때 나에게 당신이 엮은 金言集 한 권을 주셨다. 吳선생은 내가 仁中졸업생인 것을 알고 吉교장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 영감 내 친구 전채오가 교회 전도사로 있는데 7년간이나 따라다녀 결혼하더니 교회도 못 다니게 했어!” 그 말에서 吉교장 사모님이 감신 선배인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에서야 監神同窓會 명부를 구해 보았다. 全采五여사는 1933년 졸업생이었다. 監理敎神學校는 1887년에 培材學堂 神學部로 출발해 1907년 協成神學校가 되었다가 교명을 감리교신학교로 변경해 1933년 제1회 졸업생 13명을 배출했다. 그 중의 한 분이 吉교장의 사모님이셨다. 그 학교는 日帝의 혹독한 탄압을 수없이 받아 폐교되고 교명이 바뀌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러던 중 3․1 독립선언서 서명자 33명의 애국지사 가운데 7명의 지사를 배출하는 등 신앙과 민족정신의 요람이었다.
소설 沈薰이 지은 常綠樹의 모델이 된 崔용신(1909~1935) 여사도 全采五, 吳주경 여사와 함께 그 학교에서 同門修學한 사이였다. 불행히도 崔여사는 휴학하고 농촌계몽에 헌신하다 졸업을 못하고 全여사가 졸업하던 1935년에 2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세분 여성선각자의 初心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崔여사는 농촌계몽에 헌신하다 타계했고, 吳여사는 白凡 金九 선생의 구혼을 뿌리치고 독신으로 梨花人의 영원한 어머니로 살다 갔으며, 全여사는 결혼하여 자신의 꿈을 접었으니 말이다.
宇宙와 人間․英雄의 矛盾性
淺學菲才한 내가 보기에도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인 것 같다. 錯視 때문일까? 착각의 환상일까? 세상에 햇빛이 비치면 왜 그늘이 생기는 것일까? 왜 사람들의 얼굴과 마음이 각기 다를까? 福의 그늘에 왜 근심이 스며들까? 왜 그대가 옆에 있는데도 외로울까? 천국과 지옥의 관념이 왜 내 마음에 둥지를 틀고 있을까? 정치의 여야는 또 무엇인가? 理性과 知慧만 있으면 족할 것인데 왜 感性과 靈性이 내게 있어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까?
이 같은 세상의 수많은 모순에 파묻혀 괴로워하는 나에게 직․간접으로 희망과 용기를 준 세분 스승님들의 또 다른 인간적 모순을 보는 것도 우주의 모순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inspite of…) 그분들이 나의 영원한 스승인 것은 그분들의 일생이 利己的인 Eros보다 利他心인 Agape사랑의 意志로 우리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그 진가를 알 수 있고, 스승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 그의 진정한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진정으로 뛰어난 제자라면 스승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어진 여건을 반드시 정직하게 독창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吉교장의 애제자 중의 한 사람인 金聖鎭 박사의 吉교장에 대한 회상은 특이하고 솔직하다.
그는 吉교장님의 慾心이라는 글(길영희선생 추모문집, 법문사, 2005.)에서 吉교장을 ‘헤아리기 무척 힘든 人物’, ‘모순이 많은 분’, ‘사람 慾心이 많은 교육자’라고 회상했다. 金박사, 아니 金장군은 세상에 잘 알려진 것처럼 4년제 陸軍士官學校 제1기 수석 졸업 生徒로서 미국유학중 2개의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과학기술부장관, 체신부장관, 한국전산원 원장 등을 지냈다.
仁中재학시 지방까지 파급된 좌경학생들의 國立大學통합 反對데모에서와 5․16 군사쿠데타지지 陸士生徒들의 서울시가 행진을 당시 육사교수로서 홀로 반대하는 등 所信과 良心을 지켜 참된 勇氣를 보여 준 보기 드문 軍人이며 學者였다. 아쉽게도 2005년 그가 평생 믿고 따른 분의 곁으로 돌아간 듯하다. 金聖鎭박사가 지적한 대로 吉교장의 모순된 삶은 그 분만이 지닌 특성이 아닌 듯 하다.
지나간 역사를 보면 모순된 삶을 산 영웅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메리칸 시저의 저자 맨체스터(William Manchester, 1922~2004)는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의 영웅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의 人格的 矛盾을 그의 책(박광호역, 미래사, 2007.)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위대하지만 역설적인 인간 맥아더는 고상하면서도 비열하고, 영감이 가득하나 황당하고, 오만하면서 수줍어하며, 가장 좋은 인간인 동시에 가장 나쁜 인간이며, 매우 多才多能하고 매우 우스꽝스러우며, 매우 숭고한 인물이었다.” 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에 찬 인물이 미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영웅이라니 人間이란 누구도 그 참된 存在性을 알 수 없는 ‘eternal question mark’가 아닐 수 없다. 정치철학과 도덕교육사상가로서 그의 저서를 통해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준 루소(Rousseau Jean-Jacques, 1712~1778)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자신이 낳은 5명의 아이들을 비정하게도 모두 고아원으로 보냈다. 그의 명저 Emile, 1762은 참회록인가 아니면 교육명저인가? 정도의 차이가 있겠으나 교육자 吉교장의 수수께끼 같은 인격적 모순을 발견하고 정직하게 글로 남기고 가신 金聖鎭 선배님의 혜안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어느 외국인 神父가 신도들의 모임에 매번 늦어 신도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때 그 神父는 만면에 미소를 띄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빨리 가나 늦게 가나 가는 곳은 한 곳인데 왜 서둘러야 합니까?”
人生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의 능력 밖의 영역이다. 吉교장 역시 그 한계상황을 의식하신 듯 그 준비를 조용히 하시는 흔적을 본 적이 있다. 그의 가루실농원 집 책상머리에 華嚴經이 놓인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聖俗不二, 萬法一如, 一卽多 多卽一’과 輪回說을 吉교장이 믿은 것이 아닐까? 慾心이 누구보다도 많으셨던 吉교장에게 永生慾이 있으셨을까? 없으셨을까? 선생님이 임종하시던 날 밤 곁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왜 그때 교장님께 당신이 늘 화두로 삼으시던 ‘희망’을 빌어“믿음과 절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래도 믿음을 갖는 것이 더 희망적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말씀을 못 드렸던고!
연못 속의 장구벌레가 부화해 모기가 된다. 땅속의 굼벵이도 부화해 매미가 되어 노래한다. 불타는 나무는 다른 要素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靈長인 우리 인간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 空과 無가 된다는 자학은 無知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輪回說이든 復活信仰이든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 하루 하루를 安心立命하면서 건강하게 살았으면 해서 스승이 가신 이날에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妄言多謝.
내가 主와 또는 先生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行한 것 같이 너희도 行하게 하려하여 本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