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1 시편 53편 1-6절 주님 없는 잔치
소비사회를 넘어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주 중부 수도권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폭우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위로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새로운 반년을 시작하는 7월을 힘차게 건강하게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경제 전반에 드리운 물가상승으로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기름값이 치솟아 기름을 주유해도 며칠 지나면 또다시 주유해야 합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현대 문명의 특징입니다. 이런 문명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석유입니다. 일상생활의 90%가 석유산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계발로 잔치상의 음식이 거덜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에너지 사용과 친환경적인 소비패턴으로 전향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미래는 더욱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개인과 집단에 판친다면, 끊임없는 쳇바퀴의 무의미한 공전에서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욕망을 맘껏 충족하는 소비사회를 넘어서 공생과 재순환사회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부재
오늘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거의 유사합니다. 제가 찾아보니 1월 첫 주에 14편을 설교하였습니다. 공교롭게하도 유사한 시편을 반고비의 첫 시작에서 다시 되새김질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시의 표제는 “지휘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마스길”입니다. 마할랏מחלת은 ‘병들다’, ‘슬퍼하다’라는 ‘할라’에서 유래한 말로 ‘고통’, ‘슬픔’의 뜻합니다. 마할랏에 맞춘 노래는 ‘슬픈 운율에 맞춘 노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슬픔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부재를 외치며 악행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인생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53:1).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시인의 고뇌와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신 죽음,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상은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를 모두 미신적으로 취급하고 몰아내었습니다. 자아는 이미 초인의 심리로 팽창되어 스스로 신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융의 말대로, “신들의 황혼의 시대”입니다. 니체는 다가올 현대의 인간을 앞선 시대의 전조를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하여 말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동굴에서 나와 노인과 사나이를 만났다 헤어지면서 속으로 말합니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옮김(2006)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서울, p15]
집단적 의식 속에는 이미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인간의 개체와 집단 속에서 하나님은 죽었고,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않고 있음을 외쳤습니다. 니체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20세기는 초인의 파괴적인 힘을 분출하며 전쟁으로 온 세계가 불타올랐습니다. 의식의 증대로 인한 초인과 같은 심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부과되는 특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초인과 같은 존재 혹은 시대정신이 부패한 마음과 사악함을 가지고 집단을 선동하고, 개인과 자연을 탐욕의 수단으로 만든다면 거기에는 파괴적인 현상이 가중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중세시대나 과거 시대가 추동했던 정신적 가치로 단순하게 회귀해서는 안됩니다. 니체의 말처럼 “수도원을 세우고 그 문에다가 성인에 이르는 길을 써 놓는다면, ... 교도소와 피난처를 만들 것이다. 성자들의 둘레에는 악마만이 아니라 돼지도 어슬렁거렸다”는 이 구절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인간은 본능적 충동을 동화하면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정신적으로 신성을 향한 지향점을 잃지 않으면서 균형점으로 지니며 살 수 있느냐를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자아를 중심점으로 두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냥 살고 있지만, 불안함과 멀미는 가시지 않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중심점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빗나간 길
시인은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3)” 노래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빗나간 길에 서 있는 인간들은 부패의 냄새가 나고, 영혼의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이어서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무지하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었다(4)”고 노래합니다. 빗나간 길을 가는 행악자들이 다 무지한 자냐?라는 질문은 행악자들은 배웠지만, 그 배움으로부터 진정한 인식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대학교 입시 전형을 살피면서, 많은 질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 인력이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교육인가? 기술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배움을 넘어서 바른 마음의 태도가 먼저 요청되어야 합니다. 기본 마음의 바탕이 형성되지 않으면 개인과 집단도 성숙할 수 없습니다. 공경하는 태도, 공감 능력이 없는 자는 어려움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타자를 도구화하여 집어 삼키는 야수가 됩니다. 그런 자가 권력을 쥐고 있으면 사회는 위험에 처합니다. 심리치료 현장에서도 수많은 기술적인 기법교육이 난무합니다. 물론 그런 기법을 배워야 하지만, C.G. 융은 심리치료는 정신 치료자의 세계관과 태도가 내담자를 치료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소학에서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 였습니다. 마당에 물뿌리고, 빗자루질하고, 손님을 응대하고 물러나고 나가는 일을 배웠습니다(논어의 19편 자장에 자유와 자하의 대화를 보라). 여기에는 공경의 마음을 담아 지저분한 마당을 쓸기 전에 먼지가 날리니 물을 뿌려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빗자루질을 하고, 손님을 정성스럽게 응대하는 것이야말로 필요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세속적인 성공에만 집착하여 우리 사회는 중대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공경은 사라지고 오직 물질과 권력에만 추동된다면 그것이 타락입니다.
나무는 느리게 자율적으로 보이지 않게 신비하게 강력하게 자라갑니다. 급하게 자라고 빨리 자란 것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는 법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비한 방식으로 자라남을 아는 자는 자신의 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경이로운 신비에 자신을 조금씩 내어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느리고 뒤처지는 듯하면 안절부절합니다.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신비스러우면 의심으로 신비를 내던지고,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으면 이내 포기합니다. 자연의 리듬처럼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리듬 속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여러분, 빗나간 마음의 길에서 돌이켜 기본기로 돌아가 공경과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없는 잔치
시인은 하나님이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뼈를 흩으시고, 그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수치를 당하셨음(5)을 노래합니다. 이는 주님 없는 잔치를 벌인 자들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뼈를 흩으신다는 것은 시신이 짐승과 맹금의 먹이가 되어 매장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잔치를 벌인 자들은 본능적 충동의 먹이가 되어 탐욕과 쾌락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해체됩니다. 주님 없는 잔치를 벌인 자들은 순간의 만족을 누리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불안으로 오히려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호기롭게 진수성찬을 차리고 잔치를 벌여도, 주님 없는 잔치상은 결정적인 하나, 생명수가 빠진 잔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2절에서 하나님은 지혜 있는 사람(지각이 있는 자)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살펴보신다고 노래합니다. 무분별함이 아닌 분별함으로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민함이 아닌 민감함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를 찾고 계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우리 인생의 잔치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시기를 간청할 수 있는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 인생의 잔치에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모셔들일 수 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시인은 마지막 6절에서 노래합니다.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훨씬 더 생생하게 저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우리를 구원하여 줄 자가 누구인가요?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 무엇인가요? 정말 돈일까? 정말 명예나 권력일까요? 인생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주님 없는 잔치로 인간 사회는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며, 여전히 타자와 자연을 도구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 계신 잔치가 우리의 인생의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과 사랑, 평화가 깃든 주님이 계신 잔치가 우리의 삶과 정신에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