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싸꼰나콘은 이번 여행 계획에 들어있지 않은 곳이었다. 왓탐파댄이라는 볼 만한 절이 있고 어딘가에 개고기 마을이 있다는 정도의 정보밖에 없었고 동선도 마땅치 않아 그냥 지나치려고 했던 곳이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정말 급작스럽게 싸꼰나콘을 가게 된 계기는 어젯밤에 네이버 태사랑 카페에 실시간으로 올라온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사진들이었다. 여행광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여행자가 올린 사진들이었는데, 어떤 기독교 국가에서도 보기 어려운 화려한 크리스마스축제가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매년 열리는데, 3년을 벼르다가 드디어 구경을 했다는 것이다. 신기한 마음에 아쉬움을 섞어서 '저희도 마침 근처에 와 있는데 좋은 구경을 놓쳤네요'라는 댓글을 쓰고 잊었는데......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강을 따라 북쪽에 있는 븡깐으로 이동하려고 택시를 불러 타고 터미널로 갔는데, 예상과는 달리 나콘파놈에서 븡깐으로 가는 직통 버스가 없다. 바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짱왓의 중심 도시끼리 버스로 연결되지 않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만큼 이쪽이 오지라는 얘기겠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니 중간에 반퐁이란 곳까지 가면 븡깐행 버스가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럼 반퐁 가는 버스는? 그때 마침 아이폰에 네이버 알림이 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열어 보니 어젯밤에 올린 댓글에 대한 대댓글이다. '퍼레이드가 3일 동안 이어진다니 구경하러 오세요.'
그래서 즉석에서 싸꼰나콘으로 행선지가 바뀌었다. 이런 게 자유 여행의 묘미 아니겠나? 싸꼰나콘행 버스도 자주 있는 건 아니어서 한 시간쯤 기다려서 12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비는 60밧, 싸꼰나콘에 도착하니 1시 40분이다.
싸꼰나콘 터미널에서는 시내로 가는 노선 썽태우가 있다. 요금은 10밧. 작지만 나름대로 대중교통망을 갖춘 도시네. 썽태우를 타고 가다가 보니 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가 있다. 아, 저기가 그 성당이구나! 이따가 와야지. 대충 시내 입구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오면서 검색해 둔 홉인까지 걸어갔는데 지도를 보며 짐작한 것과는 달리 홉인은 시내가 아니라 벌판에 있다. 많이 멀지는 않고 건물이 깔끔해 보이기에 숙박비를 물으니 600밧이란다. 아고다에선 500밧인데? 그럼 아고다로 하세요. 친절하기까지 하다. 프런트에 선 채로 아고다를 통해 예약을 하고 체크인을 했다. 워크인이 아고다보다 비싼 것은 여기가 처음이다. (물론 더 비싼 호텔들은 항상 워크인이 더 비싸지만, 우리가 묵은 저렴한 숙소들은 보통 워크인이 더 싸다.)
근처에 식당이고 가게고 하나도 안 보여 숙소 안에서 컵라면과 컵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퍼레이드 시작할 시간을 .어림짐작해서 5시쯤 숙소를 나섰다. 시내 방향으로 걸어가 보니 퍼레이드 비슷한 분위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시청(?) 앞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이는 게 전부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퍼레이드는 보이지 않고 아까 보았던 성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빠진다. 퍼레이드는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시 지나간 것은 아닐까? 여행광님은 육교 위에서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고 했는데, 그러고보니 저기 성당 입구에 육교가 하나 보인다.
드디어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은 낮에 본 것 이상으로 화려한 모습이고 예배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그러나 퍼레이드 차량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다. 수위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말은 잘 안 통하고 대강 오늘은 행사가 없으니 내일 보러 오라는 말 같다. 행사가 없다는 건지 끝났다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성당 구경이라고 해야지.
(저기 국왕 사진이 있는 차량이 퍼레이드 차량인가? )
예배당 입구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가까이 가 보니 이름을 적고 뭔가를 받아 간다. 뭔지 모르지만 우리완 관계가 없다 생각하고 슬그머니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구경을 하고 나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씩 받아가는 선물을 우리에게도 내민다. 아이고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면서 보니 비행기에서 주는 것보다 조금 커 보이는 담요다. 다른 사람 주라고 (갖고 다니기도 부담될테고) 사양했는데 나중에 여행광님 왈, 특별한 기념품인데 받아 두시지 그랬어요? 그럴 걸 그랬나?
사진을 찍다가 우연히 폰을 들여다보니 여행광님에게서 보낸 쪽지가 있다. 아뿔싸, 우리가 숙소에서 나오고 바로 보낸 거네? '차량이 없으시면 제 차로 가시지요.' 나는 당연히 응답을 못했고, 30분 후에 '저는 이제 출발합니다.' - 에고 이제 봤어요. 쪽지 놓치고 성당까지 걸어왔네요.- '성당이 시내에서 30분 거리인데요?' 아, 이 산이 아닌가벼! 알고보니 이 성당은 그 성당이 아니다. 그 성당은 호수 북쪽에 있고 이 성당은 호수 남쪽에 있다. 아이고, 어제 썽태우 타고 가다 이 성당을 본 게 문제였다. 차라리 못 봤다면 어디서 행사를 하냐고 물어보았을텐데 이 성당을 보는 바람에 당연히 여기라고 단정을 했던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그 쪽에서 (어제는 차량으로 오늘은 도보로) 퍼레이드가 벌어졌다고 한다. 내일은 학교에서 한다면서 구글지도와 사진을 보내왔는데 사진 속의 건물이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예배당이다. 여기가 거기네요. 내일은 만나서 같이 구경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가다가 테스코 안에 있는 KFC에서 저녁을 먹었다. 닭다리를 뜯으며 카톡을 확인하니 여행광님도 숙소로 돌아와서 식사 중이라고 한다. 그럼 만나서 차 한잔 합시다. 어디서 할까요? 우리가 그쪽으로 갈게요. 두싯호텔로 찾아가니 여행광님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큰 재미 중 하나인데 우리는 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스리랑카에서 만난 여행작가 김남희씨 이후 처음인가? 그 사람은 여행작가, 이 사람은 '여행광'. 그러고보니 두 사람 모두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났다.
12월 25일
오늘은 크리스마스인데 낮에는 부처님을 만나고 와서 밤에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정이다. 시내에서 20킬로 정도 떨어진 산 속에 왓탐파댄이란 절이 있는데 볼 만하게 꾸며 놓았다는 얘기도 있고 부처님 발자국이 있는 곳이라는 얘기도 있는 나름 유명 관광지다. 호텔에 부탁해서 택시를 불렀는데 800 정도에 대절할 수 있다는 소문과는 달리 꼭 1000밧을 받아야 한다고 우긴다. (나중에 보니 왕복 요금과 대기 요금을 합치면 800 정도가 맞는데,)
왓탐파댄은 높은 바위 절벽에 있는 절인데, 미얀마의 짜익띠요를 연상케 하는 바위 위 금불탑과 바위를 깎아 새긴 부처님들이 먼저 눈에 띈다. 절 위쪽에는 오래전부터 부처님 발자국이란 이름이 붙은 바위가 있는데 지금은 금불탑 아래에 인공으로 파 놓은 거대한 발자국이 관람객들의 관심을 가로챈 것 같다. 발자국 안에 놓인 항아리에 동전을 던져 넣느라고들 바쁘다.
(동전 교환소)
(이것이 진짜? 부처님 발자국인데 절 위쪽으로 아래 사진과 같은 바위틈을 지나 올라가야 볼 수 있다. )
부처님 발자국 말고 이 절을 특징짓는 것은 수많은 고사목들이다. 곳곳에 늙은 나무를 캐다가 심어 놓고 물을 주어 가며 살리고 있는가 하면, 죽은 나무를 손질하여 만든 장식들도 엄청나다. 이미 고사목들이 넘쳐나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나무를 모으고 가공하고 꾸미고 있는 게 보인다.
(이것도 돈벌이 수단)
(화장실 기둥을 잘 살펴보시라. toilet 표지판이 없더라도 나무 모양만으로 남녀 화장실이 확실히 구별된다.)
시내로 돌아와서 싸반응아라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중국 분위기가 나는 큰 식당에 손님이 많은 걸 보고 들어갔는데 외양과는 달리 태국 음식을 판다. 돔양꿍과 얌야이를 시켜서 맛있게 냠냠.
저녁에는 여행광님의 차를 타고 어제의 그 성당(신학교)으로 가서 크리스마스 축제를 구경했다. 학교 옆에 있는 큰 운동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무슨 시상도 하고 공연도 하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연설과 시상에 이어 춤과 노래 그리고 신학교 학생들의 어설픈 영어 연극 등이 이어지는데 문득 여행광님이 올린 사진으로 보았던 퍼레이드 차량들이 큰길에서 성당으로 들어오는 게 보인다. 오늘은 퍼레이드가 없는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서 출발해서 오는 것일까? 사전 정보가 부족해서 시내에서 행진하는 것은 놓쳤지만 결국은 다 봤다네. 화려하게 장식한 수십대의 차량들을 보면서 일정을 바꿔 싸꼰나콘으로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광님이 23일에 실시간으로 사진을 올려준 덕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