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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래 – 유일한 사람
늘 보던 얼굴이 다정하다. 항상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다정하다.
성경 참 복잡한 책이다. 단순한 책이 아니라 아주 복잡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책은 아주 단순하다. 독생자를 주었다고 하면 끝이다. 모든 인간의 복잡한 문제를 놔두면 답은 간단하다.
내가 독생자를 주었다 Only begotten son. “내가 ‘유일한 나’, ‘사람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나’를 너희에게 주지 않았는가. 무엇이 복잡한가?” 이 말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 다 기록을 하면 온 세상이라도 부족하다. 요한은 그렇게 결론을 맺었다.
그러니까 예수에 대해서 말하자면, 온 세상이라도 다 부족하다는 것이다. 간략하게 몇 가지를 골라서 아주 간략하게 써 놓은 것이 요한복음이다. 예수는 이런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전하려고 글을 썼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그렇게 알지를 못했다.
준 대로 본 것이 아니고, 우리 나름대로 보기 때문에 그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다 줬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다 알 수 있는가? 많이 배운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아니, 그렇게 단순할 수 있냐? 그러면 우리가 뭐하러 그렇게 많이 배우냐?” 이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 그럴 만하다.
“나는 세상에 빛이다.” 왜 빛인지를 사실 모르지 않은가? 각자 자기 경험대로 “예수는 빛이다.”라고 해서 갈라졌다. 2000년 동안 유명한 사람들이 나왔는데 그들은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예수를 보고 말한 사람들인데 다 똑같지 않다.
그러니까 한 가지 사실을 봤다고 하는데 모두 다르다. 이렇게 복잡해졌으니까 사람이 많아지면 더 복잡해질 것이다. 또 유명한 사람이 나오면 더 복잡해질 것이다.
몰트만이 나왔는데 더 복잡해졌다. 답이 없는 바르트를 대치한 사람이 몰트만인데 더 복잡해졌다. 킬빈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칼빈보다 더 크게 복잡해졌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예1:5)” 이것은 예정설이라고 해서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다고 퍼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렇다, 아니다 또 이러면 끝이 없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기회가 있어서 그런 곳에 빠졌다면 내 인생은 망칠뻔했다. 얻지도 못하고 OOOOO 봤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다 아시고 내 길을 막았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 마지막에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중하게 여기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반대돼서 비수를 나에게 꽂고 말았다. 나는 참 이해할 수 없다.
그때도 그렇지만은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마지막 제자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이어갈 마지막 제자라고 생각한 것 같다. 눈치,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 중요한 사람들을 일일이 개인적으로 만나게 해주고, 데리고 가서 우리 교단의 제일 중요한 물주인 그분을 일부러 가서 만나게 해서 점심 식사도 같이 했다.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을 먹어보았다. 생전 처음 먹어본 음식을 먹어보았다.
무엇인가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분인데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말이 없이 저를 위험인물이라고 제명 처분을 해버렸다. 나는 어찌하면 저분의 사상을 계승해 나갈까 하는 생각밖에 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와 반대로 위험인물이라고 제명 처분 해버렸다.
제가 있던 교단에서 그분이 곧 법이다. 말로만 해도 될 수 있는 일인데, 완전히 아주 정식으로 그렇게 결정해서 내려보냈다. 나는 단지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했을 뿐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혹시 무엇을 잘못 나가면 단 한마디라도 충고를 하면 고치면 될 거 아닙니까?” 사실 나는 그랬다. 그분을 존경했으니까, 만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길로 간다고 말해주면 나는 그냥 고칠 사람이다.
그런 사이인 것만큼, 우리 교단 역사 처음 공식으로 저를 제명 처분했다. 이름 없는 교단이지만 해방 전부터 있던 굉장히 오래된 교단이다. 평양에 있을 때부터 설립된 교단이다. 그 역사상 정식 서면으로 제명 처분을 받은 사람은 내가 최초고 마지막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
그런데 그 뒤에 생각해보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모 대학원에 한번 시험을 보려고 아무도 모르게 응시를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합격할지 모르니까 일단 탐색하려고 간 것이니까 미리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되면 이야기해야 하지만 안 되면 무엇이 되겠는가? 그냥 될지 안될지 모르니까 미리 말하고 다닐 수 없다. 해보고 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그해 여름방학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쥐도 새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아는가? 참 신기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대학원에 갔더라면,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대가들의 이론 앞에 나라고 그냥 나오겠는가? 무엇인가 묻어서 나올 것이 아닌가?
이번에 그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하, 내가 이렇게 있는 것은 내가 무시해서 이렇구나. 내가 OOOO라면 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구나. 그래서 2000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구나. 이분이 절실히 알아졌다. “야,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분을 통해서 나를 그렇게 해놓고 나서 완전히 OO를 잃었어요. 자기 일생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신학교를 버리고 미국에 있는 아들 집으로 갔다. 자신이 아주 완전히 망하고 거기서 임종하셨다.
나는 거기서 밀려나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나는 그렇게 됐고 그분은 완전히 아주 정말 그 이상 더 망할 수 없도록 망해버렸다. 둘이 다 파멸에 이르렀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잘 됐고 그분은 그 일로 인해서 망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분이 만약에 그것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거기서 그럭저럭 내 인생을 바칠 뿐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아는 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알면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수로 엄청난 사람들의 이론을 내가 OO하겠는가? 지금 같으면 모르지만 그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들어가면 물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한 사람을 주었다. 이 한 사람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수없는 문제가 생긴다. 말 한마디가 OOO란 사람 여러분 알 것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나오는 마가의 어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가복음만이 아니고 그런 자료가 많다고 한다. 김윤동 교수 강의하는 것을 들으니까, 두루마기가 발견되고 여러 가지 자료가 많다. 그러니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분이 그것을 근거로 자신 있게 세상에 어록을 발표한 것이다. 마가복음에 있는 어록이 얼마나 되는가? 그것은 별거 아니다. 그 외에 자료들이 엄청나게 나온다. 그러니까 그런 분이 말할 때 근거 없는 말을 하겠는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이다.
그러니까 행동을 보고는 모르지만 어록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냐 이런 이야기다. 어록이 확실하지 않는가? 석가모니에 대해서도 그가 직접 발설한 설법이 아함경(阿含經)에 들어있다 한다. 그래서 불경을 다 읽어도 아함경을 읽지 않으면 그분이 직접 한 말을 모르는 것이다. 거기에도 있다한다. ”하나가 전부고 전부가 하나다.“ 이런 얘기를 했다 한다. 무엇을 보고 한 말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 말했다 한다.
바울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다. 한 사람이다. 한 사람. 그러면 너무 간단하다. 죄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오고 의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왔다. 그냥 아담이냐 예수냐 딱 이렇게 해버리니까 너무 간단하다. 바울에게도 그 말이 나왔다. 한 사람.
우리 충주 형제들이 나 떠난 후에 자기들끼리 한 말 가운데 한 새 사람이란 말을 했다. 새 사람이 그냥 새 사람이 아니고 한 새 사람, 듣기에 좀 어색했다. 한 새 사람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은 무엇을 봤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 새 사람, 저 한 인류, 한 나, 한 너, 하나라 부른다. 그러니까 하나를 놓고 생각하면 그만큼 쉽다. 여럿을 놓고 생각하면 어렵고, 일일이 다 놓고 생각하면 더 어렵다. 그런데 한 사람만 알면 모든 사람을 안다고 하면 쉽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믿기만 하면 되니까 너무 간단하다. 그런데 사람은 알아야 된다. 무조건 믿는다고 되는 일이 또 아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다. 성경에 써 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정이 있기 때문에, 할 말을 다 하자면 세상이라도 부족하다. 이렇게 요한복음을 쓰여져 있다. 말해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아주 간단하게 제일 집약적으로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그 자리다. 그것은 바로 예수다. 그 복잡한 예수다. 2000년을 찾고 믿어도 안 되는 그 예수다. 단순하지 않은가?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까 못 내려리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님에게 호소했지만 대답 없는 것은 사실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인데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살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나님이 지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죽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달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지어놓고 심히 좋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늘 항상 부족하다. 왜 우리는 천사 같지 못한가? 항상 우리는 그 속에서 부족한 것이다. 무엇을 해도 부족한 이유는 죽으니까, 어찌해도 죽으니까, 잘하나 못하나 끝없이 해도 죽으니까, 예수만큼 해도 죽으니까 근본적인 불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감사하고 아무리 찬양해도 근본적으로는 불만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만이다. 그런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또 자기를 지으신 이에 대한 불만이다.
이 사람은 딜레마다. 지으신 이가 있으니까 내가 있다. 하지만 기왕 지으려면 나도 만족하게 짓지, 어째서 만족하지 못하도록 지어놓았는가? 창조자에 대해서 반항 못 하지만, 사실상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문제다. 문제가 다른 것이 아니다.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만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돈이 아무것도 없을 때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다. 돈이 없어 가난할 때, 국민소득이 85불일 때, 빈부는 있어도 빈부 문제가 없었다. 빈부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국가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풍요로운 사회가 됐는데 빈부 문제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것도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빈부 문제 말한 것도 여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아주 가난한 사람은 말을 못한다. 누가 좀 안 주나 하는 생각이지 사회 문제화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사회 문제화 시키는 사람들은 그래도 잘난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남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서 이 사람들을 고시해 줘야 된다는 말이다. 참 좋은 말 같지만 역시 또 지배자가 되고 싶다는 그 말이다. 만일에 그 사람들의 사회가 된다면 어떤 위치에 있겠는가? 다 지도 계급에, 다스리는 계급에 있지 않겠는가.
인민위원장과 인민은 같은가? 인민위원장은 3권을 다 가지고 있다. 재판 없이 자기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다. 인민 재판이란 것을 하면 그 권세가 어떤가? 대단하다.
6.25 때 봤다. 인민 재판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냥 쏘아버린다. 뱃머리에 세워놓고 그냥 쏘아버려 물에 빠뜨려 버린다. 마지막에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기어나와서 뱃전을 잡으려고 하면 확인 사살 해버린다. 그러면 못 나온다. 그것이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일이 서울 시내 한복판 시청 앞 광장에서 단을 만들어 놓고 시행한다면, 어떤 광경이 벌어지겠는가? 6.25 때 그런 광경이 실제로 있었다.
김팔봉씨라고 소설가이기도 하고 서울대 교수이기도 한 사람이 제자들에게 끌려 나와서 결국 타살형을 받았다. 때려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타살형으로 죽었는데, 어느 정도 죽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은 집에 8일간 있었다 한다. 숨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있다가 살아났다.
살아 깨어 보니까 자신은 8일 동안 아무것도 본 일이 없다. 천당에 가본 일이 없다. 그 당시의 말로 하자면 천당에 가본 일이 없다. 문학을 한 사람이 8일 동안 죽었는데 천당을 보지 못했다고 그렇게 써 놓았다.
마찬가지로 나도 세 번 크게 죽었다 깨어났다. 아무것도 본 일 없다. 그래서 나는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말을 절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 예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생의 답이 거기 있으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답이 거기 있다. 우리는 천사가 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짓을 해도 천사는 못 된다. 예수 같은 사람도 안 되었는데 누가 되겠는가? 죽은 사람을 살린 사람이 자신은 못 살아났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인생 문제 해결이다. 그것은 완전 역설이다. 작은 것이 세계를 지배한다. 사자나 호랑이가 지배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작은 것이 지배를 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들은 곤충입니다. 인간은 제일 먼저 없어지고, 강한 짐승들도 다 없어지고 마지막 살아남는 것은 바퀴벌레라 한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난 자리에도 바퀴벌레는 살아 있다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지 않는 곳에 생명력은 살아 있다. 예수는 분명히 죽었다. 확실하게 죽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는 사는 사람을 본다.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사람을 본다는 말이다.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 왜, 우리를 통해서 살고 있다. 죽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확실하게 죽었는데 죽은 사람이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대로 됐다.
그래서 요한복음 한마디로 그냥 하나님께서 예수를 줬다. 더 이상의 답이 없다. 내가 너에게 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말로 기록하자면 온 세상이라도 다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형제 만났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사람이 만나졌다는 것은 너무 기상천외한 일이고, 이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을 보고 믿는 사람이, 이걸 보고 나를 본 사람이, 자기도 나보다 무식함을 알고 받아들이지만, 엄청난 공부를 한 사람이 아는 것이 있는데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김윤동 교수의 강의를 듣다 보니까 저렇게 많이 안다. 우리 교회 연구실을 가지고 있다. 방 하나 줘서 있는데, 하루 종일 책만 본다. 눈도 안 좋은데 가끔씩 밤에 나에게 와서 간병을 한다. 잠자기 바쁘다. 잠들면 깨우기 어렵다. 그러니까 와도 잠자는 것을 보면 내가 조심스럽다.
하루 종일 책 보고 여기에 와서 시도 때도 없이 부름만 받아 간병하려니 어떻게 견디겠는가? 어떤 사람은 옆 방에 자는데 내가 기침 소리만 나면 일어난다. 그 사람이 오면 별로 안 깨운다. 쿨쿨 잠을 자는 사람을 깨우려니 민망하다. 어쩔 수 없이 깨서 오면 나는 민망하다.
어떤 사람은 그냥 기침만 하면 내가 부르지 않아도 벌써 나온다. 잠을 안 잤냐고 하면 잤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럴 땐 또 잠이 많이 안 깬다. 어젯밤에도 처음으로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을 잤다. 그때는 새벽에 와서 한참 잠이 올 때인데, 나도 그렇게 자고 나니까 오후인가 했다. 오후인가 했더니 새벽이다. 깨보니까 6시 반이어서 저녁 6시 반인 줄 알았다. 보니까 저녁 6시 반이 아닌 것이다.
참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묘하다. 생각할수록 묘하다. 어떻게 이렇게 거꾸로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그 답을 알고 살면 인생은 쉽다. 목적지도 알고 가면 쉽다. 모르고 가면 어렵다. 길을 찾아갈 때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올 때는 간단히 온다. 아주 쉽게 그냥 와 버린다.
내가 충주에 있을 때 단양을 갔는데 도로가 없다. 논길을 걸어가야 된다. 차는 왕래는 해도 차 하나가 오면 그 앞에 차는 못 온다. 그래서 차는 뒤로 가 조금 넓은 자리에 쉬어야 다른 차가 지나가는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서 들어갔다. 하루 종일 들어가니까 영천, 건너가는 곳까지 갔다.
강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길이 약 200 미터 되는데, 강은 깊어 그냥 걸어갈 수 없다. 나룻배는 있는데 노를 저어 다니지 않는다. 매어놓은 줄을 잡아당겨 왕래하는 곳이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나가는 사람이 몇 명, 들어오는 사람이 몇 명 그렇게 하루에 200명씩 왔다 갔다 한다.
부산지방에서 보살님들이 보살 옷을 입고 밤차를 타고 올라온다. 나는 그 차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 나도 영천에서 차를 꼭 타고 집을 가야 되는데 어떻게 많이 탔는지 앉을 자리가 없다.
그런데 밤 중이 되면 잠이 와서 서서 가려니 정말 힘들다. 그래서 신문지 깔고 그냥 아무 곳에나 앉는다. 그것도 그럴 자리마저도 없다. 마지막에는 낚시할 때 쓰는 의자 있는데, 그것을 가방 속에 딱 감춰 있으면 다행이다. 틈만 있으면 그것을 딱 깔아놓고 앉는다. 사람들이 보고 웃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앉아서 가야 한다. 단양 오면 다 내린다. 우리 집은 그 다음 제천역이다. 이제 살만하면 내려서 가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해가 지니까 물을 건너지 못하고 왔다. 하루에 갔다 그냥 돌아왔다. 단양 무인사 좀 보려고 했다가 못 보고 왔고, 단종 애사가 있는 자리를 좀 보려고 올라갔다가 보지 못하고, 교회 하나 보려고 갔다 그랬다.
그러니까 어려우면 한이 없이 어렵고, 쉬우면 또 한이 없이 쉬운 것이다. 그래서 중들은 문을 감으면 가는데 무엇 하러 가냐고 한다. 나와 같이 있던 스님이 그런다. 눈을 감으면 가는데 미국을 무엇 하러 비행기 타고 가냐고 한다. 그 사람에게 쉽게 가는 것은 그것이다. 눈만 감으면 쉽게 가는 것이다. 눈만 감으면 그냥 온 세상이 잘 될 것이라 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산속에서 하니까 그렇지, 나와서 배고픈데 눈만 딱 감으면 배고프지 않은가? 한 끼 두 끼는 되겠지만, 계속 그러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예수를 보면 너무 안 됐다. 너무 안 됐는데 그것이 나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니까, 그 사람 지금도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니까 내가 죽어도 나는 또 있다.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또 있다.
우리 교회에 어떤 사람이 저 영감만 죽으면 교회에 오지 않아도 될 텐데, 그 영감 때문에 하나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없는 것이 아니다. 요즘 모임이 여러 개 있는데 들어보면 할 말이 없으니까 거의 통일되어 간다. 거의 말이 비슷해져 간다. 나만 빠질 뿐이지만 비슷해져 간다. 그러니까 ”아이고, 영감 때문에 그가 없으면 우리가 하나 될 텐데.“ 이러고 있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내가 없어도 나는 영원히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독생자를 주었으니, 주었다는 것이다. 유일한 아들을 주었다는 것이다. 자기로부터 유일하게 나온 아들, 자기와 같은 아들을 주었다는 것이다. 독생자, Only begotten son.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하려면 온 세상이라도 다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로 요한복음을 마치면 되겠는데 마쳐도 요한복음은 그대로 있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히브리서를 보자고 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것을 좀 우리가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보자는 것이 히브리서다. 사람들이 별로 읽지 않는 책이다. 저도 그것을 몰랐다.
워치만 내가 쓴 “신약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그 내용이 아주 명백하게 실려 있다. “신약이란 무엇인가?” 그 책을 보고 비로소 “아하, 신약은 이런 거구나!” 그렇게 저도 알았다. 우리나라에 워치만 니 계통의 교회가 들어올 때, 왕중생이라는 사람이 맨 처음에 들어왔다. 그 사람이 맨 처음에 번역한 책이 바로 그 책이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전통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본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보기도 했고 설교도 들어보았다. 아주 정확하다. 그런데 성격이 아주 강팍하다. 그래서 그분이 있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구에서 약 10명 정도 있었다.
그런데 반대자들에 대해서 가혹하다. 완전히 누구는 멸망이라는 식이 된다. 그래서 그분은 일찍 죽었다. 원래는 왕중생이 아니고 권익우라는 사람이다. 안동 권씨, 자기 이름을 중국말로 왕중생이라고 바꾸었다. 그런 사람이 일찍 죽었는데, 지금은 이희득이라는 사람이 총,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왕중생은 일찍 죽기 잘했다고 한다. 그 사람 죽은 후에 지방 교회가 제일 커졌다. 그 사람 죽은 후에 이희득 씨가 시작해서 커졌다.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이 참 일찍 죽길 다행이라고 했다. 원래 씨는 그 사람이 뿌렸는데, 그 사람이 있을 때는 안 됐으니까 죽길 잘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 열매를 먹기에는 달다. 하지만 씨를 먹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씨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씨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씨를 뿌리러 가는 것이지, 홍시를 나눠주러 간 사람들이 아니다. 씨를 뿌리러 다나는 사람들이다.
이번에 원선형제가 중국에 가서 씨 뿌린다는 각오를 가지고 뿌리고 온 모양이다. 씨가 잘 뿌려졌으면 날 것이고 씨 뿌리지 않고 다른 목소리였으면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다. 빤하다. 우리도 어떻게든지 무엇을 해보려고, 예수를 전해보려고 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수도 있다.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안 나올 것이다. 대부분 다 그렇다. 일생 동안 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온다면 그 교회를 떠나 목회하거 가면 그만이다. 다시 그 교회로 갈 수도 없다. 가면 신자들이 부담스러워한다. 목회 한 사람이 그런 관계가 된다. 살아 있을 때는 막 하지만 한 번 딱 교회를 떠나고 난 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오면 오히려 귀찮게 생각한다. 부담스럽게 응한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가 영원히 봐도 좋은 사람들, 이런 세계로 우리가 옮겨져 왔다. 영원히 바도 좋은 사람들, 있으나 없으나 좋은 사람들, 우리는 천사를 사모하다가 망했다. 천사를 사모하다 망한 사람들, 아담은 천사를 사모하다가 망했다.
우리는 천사와 인연을 완전히 끊어야 된다. 완전히 끊어야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아니면 완전히 끊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도로 천사를 흠모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로 천사를 흠모하게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지식이든지, 또 무엇이든지 간에 유명해지려고 하면 천사를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를 전할 수 없다.
그래서 천사와 인연을 완전히 끊어져야 하는데, 그 기회가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밖에 없다. 그 예수와 바꾸지 않으면은 우리는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히브리서를 한번 읽어보자. 엎었다 뒤집었다. 알고 보면 아주 재미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는 말이 믿음으로 한다. 억지로 붙인 것이 많다. 믿음 믿음 해놓고, 13장에 가면 딱 바꿔져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 믿음도 바꿔지는데 이 사람은 안 바꿔진다는 말이 아닌가? 믿음 믿음하다 믿음도 바꿔진다.
시대에 따라서 환경 따라서 바꿔지니까, 옛날 방식으로 믿고 있는 사람 보고 꼰대들이라고 하잖아요. 칼빈주의 식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 바르트주의자들은 꼰대들이라고 한다. 맹목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만일 어떤 정말로 탁월한 믿음을 가지고 싸웠다면, 어느 때 가면 역시 꼰대가 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분을 우리가 만났다는 것이 너무 은혜고, 축복이고, 은혜 위에 은혜다. 알고 보면 늘 들은 말씀이지만 내가 늘 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늘 해도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어제 저녁에는 왔다 갔다 하는 형제가 와서 간병하러 왔다. 이번에 한 가지가 분명해진 것은 이 복음 외에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졌다. 그래서 왔는데 당장에 자기 집안이 바꿔졌다고 한다. 마누라와 관계가 바꿔졌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는 좋은데, 한 번도 같이 마주 앉아본 적이 없고 마주 앉으면 서로 어색했다고 한다. 부부가 아닌데 했는데, 요즘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손잡고 한 시간씩 산책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좋아서 저러는가? 지금 그렇게 말할 처지가 못 되는데, 그냥 그렇게 말하게 됐다 한다. 자기가 이 복음 안에서 사니까 마누라가 당장 태도가 달라지더라고 한다. 어제 밤에 내 이야기보다 자기 이야기가 더 많다. 어디 가든지 이 말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다 좋아한다. 마누라가 하나였다니까 안 좋은 사람 누가 있겠는가? 다 좋아한다.
나는 그렇게 못하고 말았다. 나는 그것을 못하고 만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도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그걸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고백을 했다. 나는 나고 또 자기는 자기 아닌가? 내가 생각해도 나도 꼭 잘한 건 아니고 온전치 못했구나. 모두 온전했더라면 둘 다 같이 사는 건데, 나는 살고 마누라 죽고 이렇게 되고 말았다. 결과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아주 아쉽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누라 없으니 참 좋았겠다. 예수님에게 못 본 것이 하나 있는데, 마누라와 어떤 관계였을까? 이것을 본 일이 없다. 그래서 제가 자꾸 얘기했다. 그분에게 한 가지 모자란 것이 있는데 마누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분이 그것을 보여줬더라면 나도 그렇게는 안 했을 것인데 그것을 본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신부가 되는 것이 참 좋겠다. 마누라 문제가 없으니까 자기 속에 무슨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서 신부 제도를 폐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공회 때마다 등장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신부 지망생이 없다 한다. 이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국 사람이 추기경되는 경우 없다. 동양에서 김수환이 처음이다. 처음에는 이태리 사람만 하다가, 그다음에 유럽 사람까지 하다가, 지금은 동양 사람도 등장을 했고, 사람이 없으니까 흑인도 등장할 차례다. 그러면서 꽃동네 신부가 하는 말이, 결국 될 건데 기왕이면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한다.
신부들은 자유롭다. 청중들 앞에서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결국 될 것인데 그럴 바에 기왕이면 좀 빨리 됐으면 좋겠다. 자기가 젊었을 때 됐으면 좋겠다. 목사들과 다르다. 아주 자유롭다. 우리 생각에는 신부는 꽉 묶여 살 거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제도에 복종하면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카톨릭이라는 제도 앞에 복종하기만 하면, 그 주교 앞에서 납작이 엎드려 가지고 서원으로 받는다. 나는 주교에게 절대 복종하겠다. 주교에게만 복종하면 무엇이든지 다 봐준다. 그러니까 한 가지에 메이면 모든 것에 자유롭다. 그 사람들은 아주 편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거 어떻게 살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한 가지만 없이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물며 우리가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가 거기서 나오는데 무엇이 불만 있겠는가? 모든 것을 보면 다 그렇게 보인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게 보인다. 지금 내 옆에 키가 조그마한 자매가 있다. 작은 것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오늘 내가 그랬다. 작은 것이 지배한다고...
내 눈에 약을 넣으려면 꼭 드러누워야 된다. 이 자매는 키가 비슷하니까 서서 넣는다. 안약 넣기에는 내 키에 맞는 사람이 없다. 그냥 딱 아주 안성맞춤이다. 내가 침대에 앉은 키나 이 자매가 선 키나 똑같다. 하나님에게도 이렇게 맞추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에게 맞으면 된다.
그분이 쓰자 할 때 쓸 수 있는 사람만 되면 된다. 그분이 필요할 때 여기 있습니다 하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 이런 사람 없냐 하면 나 여기 있습니다. 키 작은 사람이 없냐 하면 나 있습니다 하면 된다. 키 큰 사람은 안 된다. 구부려서 앉은 내 눈에 안약을 넣으려면 잘 안된다. 허리 아프지, 자세가 딱 굳어있어 못하지, 그래서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맞춤도 있다. 우리 집에 오면 작은 것이 필요하다고 맨날 내가 놀린다. 하나님은 안 그러겠는가? 하나님은 키 큰 것을 찾겠는가? 키 작은 것을 찾겠는가? 자기 필요한 것을 찾을 것이다. 우리도 여러 가지 다 잘 알 것도 없고 다 잘할 것도 없다. 한 가지만 필요하면 된다.
우리 집에 왔다 간 사람은 이제 선포 한번 하고 가라고 한다. 되든지 안 되든지 한번 하고 가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 올 때는 그냥 와도, 나갈 때도 한번 씩 하고 가야 된다. 그래서 한번도 교회에서 못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 와서 한다. 내가 하라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딱 외통수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하고 갔는데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래도 말 못하는데 하니까...
어떤 사람은 말로만 하면 뭐하냐? 또 이래요. 말로만 하면 뭐하냐고 이러고 있다. 또 말로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안 한 것보다 낫지 않은가? 그것은 염려하는 것이다. 염려라도 안 한 것보다 낫지 않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고 나면 무엇인가 좀 달라진다. 자기소개도 있었는데 말을 못 했다. 그 사람에게 하라고 하지 내가 아무에게 보고 하겠는가? 재미는 있고 나이는 늙어가고 참 안타깝다. 세상에 너무 재미가 있는데, 나이는 점점 먹어간다. 아쉽다.
떡은 안 없어지는데 다 먹어가고, 반달로 먹다가 원달로 먹다가 다 먹어버린다든지 그런 식이 되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하나님께서 계속 떡 하나를 불려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 좀 좋아진다. 차근차근 좋아진다. 이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마지막에 한마디로 운동하라 한다. 운동해서 이것을 극복해야 된다 한다. 데드 포인트(Dead Point)를 넘어야 된다. 내가 데드 포인트를 넘을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렵다. 이체로 보면 그럴 것 같다. 운동하는 사람은 다 그렇다 한다. 어떤 한계를 극복해서 올라가고 한 단계 올라가면 그렇다 한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를 만지기 위해서 오신 분도 마지막도 그 얘기다. 해도 해도 안 되니까 운동을 해보라고 한다. 소위 명현 반응이다. 명현 반응을 내가 견뎌 넘어가야 된다. 견뎌 넘어갈 힘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
이가 없어서 지금 먹는 것이 아주 제한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갈아서 먹는다. 그런데 이것을 계속해서 갈아 먹을 것인가? 어차피 임플란트 해야 된다. 임플란트를 하면 괜찮겠는가? 고관절 수술하고도 이러는데, 임플란트도 수술이다. 괜히 여러 군데 물어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부어서 다니고 있다. 그래서 선뜻 나서기가 너무 조심스럽고 어렵다.
그래도 하여간 그러면서도 복음은 전한다. 그렇다고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다 좋아진다고 할 수는 없다. 좋아진 것은 좋아진 것이고, 안 좋아져도 해야 한다. 거기에 대해서 하는 거니까 사활을 보는 전쟁이다. 인생은 전쟁이다.
이 전쟁통에는 중간에 어물쩡거린 사람은 다 없어진다. 제가 봤다. 역사 해방 후에 우리나라의 사정도 중간 노선을 지킨 사람들은 다 없어졌다. 어디든지 그렇다. 어디든지 어정쩡한 사람들은 다 죽는다. 다 없어진다.
아주 마귀 편을 들든지 예수 편을 들던지 둘 중에 하나여야 된다. 중간에 서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하는 것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려면 사람 가려할 것은 아니지만, 씨는 분명하게 뿌려야 된다. 씨는 뿌리고 그것도 날름도 있고 안 날름도 있지만 하여간 뿌리고 봐야 한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구나. 분명히 나는 실수를 했지만 하나님은 손해 보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이 든다. 내가 잘못한다고 하나님이 손해 보시겠는가? 손해 보지 않는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후회함이 없다고 한다. 후회함이 없다. 우리는 내 생명대로 해볼 일입이다. 하나님이 손해 보지 않으려면 무슨 기회를 취할 것이다. 나는 안 될지라도 하나님 일이 되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쪼개졌지만 하나님 일은 됐다. 그러니 된 것이다. 이것을 말하다가는 끝이 없다. 그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