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가정예배 본문: 살전4:13-17. 제목 “ 죽음 저넘어”
바울은 죽은 자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 아래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자는 자라고 말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죽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죽음은 장막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형벌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재앙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한 후에는 영원한 내세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 1:21에서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라고 하여 죽음을 영혼이 안식하기 위하여 더 좋은 집을 마련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에 대하여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 없이 슬퍼하는 자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앞서가신 이도 바로 이와같은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2. 죽음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잠이 쉼을 의미하듯이 죽음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일생 동안 수고하고 이제 평안히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사랑과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죽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들의 죽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에는 안식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참조, 살후 1:8, 9). 따라서 성도들은 죽음에 대해 슬퍼하거나 애통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함께 정들어 살고 있던 혈족이나 친지가 죽으면 슬픈 것도 사실이고 안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슬픔과 불신자의 슬픔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세의 커다란 소망을 품고 슬퍼하지만 불신자들은 소망이 없이 슬퍼합니다. 소망 중에 가신 이를 우리는 이 시간 기리는 것입니다.
3.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고전 15:55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죄의 형벌인 죽음이 더 이상 성도를 주장하지 못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는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신 이래(참조, 고전 15:20) 죽음은 완전한 패배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으로 소망 없는 자 같았으나 3일 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참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자는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오늘 추석을 맞아 앞서가신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지금 세상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면서 우리와 함께 할 그날을 기다림을 믿고, 오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생전의 노고에 감사하는 우리 모든 가족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